비구니 인명사전

인홍스님(仁弘, 1908生, 비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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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인홍(仁弘)스님은 한국불교 근현대 역사의 중심에 있던 수행자로서 불교정화운동에 참여해서 한국불교 청정승가 확립에 헌신했으며, 봉암사 결사정신을 철저히 실천하여 수많은 제자와 후학을 양성했다.

생애

연도 내용
1908 경북 영일 출생
1941 평창 오대산 상원사에서 정자(淨慈)스님을 은사로 출가
1942 상원사에서 한암(漢岩)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1945 서울 안국동 선학원에서 동산(東山)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1947~1953 월정사, 묘관음사, 대승사, 성주사 등 제방 선원에서 안거 성만
1951 경남 창원 성주사 선원 선원장 취임 및 사임
1952 양산 내원사 조계암 하안거 성만. 부산 범어사 원효암 동안거 성만
1953 강원도 정선 정암사 동안거 성만
1954 경북 봉화 홍제사 주지 취임 한국불교 승단 정화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제2회임시 종회시 종회의원
1955 대구 동화사에서 초대 비구니총림 설립준비위원회 총무
1956 대한불교조계종 종회의원 역임
1957~1977 울주 석남사 주지 역임 (20년간)
1962 선림회(禪林會)를 조직하여 사답(寺畓) 8,942평 매입
1968 대한불교 비구니 우담바라회 재단이사장
1973 삼층 석가사리탑 건립
1976 대웅전, 극락전 중창. 정수선원 심검당 및 요사 9동 신축 불사
1986 대한불교 조계종 단일구족계단 비구니 증사 (별소계단 2회, 존증아사리 6회 니화상(尼和尙))
1987 전국비구니회 총재 추대
1990~1993 울주 석남사 심검당에서 3년 결사
1997.4.18. 울주 석남사에서 입적(세수 90세, 법랍 57세)
문 중 법기문중(法起)
수행지침 부처님 정법대로 살자. 규율을 철저히 지키자.
상 훈 조계종 종정 효봉화상으로부터 사찰수호 공로상 수상(1964) 외 다수
수계제자

묘경(妙慶)· 진관(眞觀)· 철마(鐵馬)· 묘영(妙英)· 정화(正華)· 법희(法希)· 백졸(百拙)· 법용(法通)· 불필(不必)· 도문(道門)· 원광(圓光)· 혜주(慧珠)· 법상(法常)·법운(法雲)· 삼인(三印)· 도연(道淵)· 현욱(玄旭)· 정심(正心)· 명훈(明薰)· 도욱(道旭)· 정각(正覺)· 현학(玄學)· 현지(玄智)· 정기(正機)· 무진(無盡)· 대법(大法)· 수덕(修德)

활동과 공헌

출생

[왼쪽부터 지월, 영암, 운허, 서홍 큰스님을 모시고(관촉사에서, 1964.6.22)]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499
[오대산에서 만공 큰스님을 모시고(1943)]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498)
[자운율사를 모시고]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505
[성철스님과 함께, 맨앞 성철스님, 뒷줄 좌측 인홍스님, 가운데 묘엄스님, 우측 불필스님]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500
[도반 혜춘스님과 행각 중에]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509
[병중에도 수행에만 전념하는 인홍스님에게 병원에 가기를 권하는 일타스님의 서신]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511
[인홍스님의 발우]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511

원허당(圓虛堂) 인홍(仁弘)스님은 1908년 경북 영일군 대송면 동촌리에서 아버지 이종순과 어머니 하수이 사이의 3남 3녀 중 2녀로 태어났다. 본관은 월성이며, 이름은 이동이(李同伊), 또는 이귀동(李貴同)으로 불렸다. 어머니가 투구와 갑옷을 갖춘 늠름한 장군이 백마를 타고 방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었는데, 일생을 출가 장부로 살았던 선사의 행적을 예견한 태몽이었다.

출가

스님은 1941년 9월 출가 입산의 서원을 세우고 해인사에 참배했으나 참다운 법연을 얻지 못해 강원도 오대산 적멸보궁을 참배하고 상원사에서 한암 큰스님을 친견하고 나서야 비로소 막혔던 가슴이 확 트였다고 한다. 스님은 선지식을 만난 그때의 감회를 이렇게 표현했다.


       세간에 영화롭고 욕(辱)되는 일들 알고 보니 거품이요, 몽환(夢幻)이로다.
       오늘날 법문 듣고 모두 잊으니 천지가 내 것이요, 광명뿐일세.

인홍스님은 세상사를 몽환으로 보는 무상을 철두철미하게 깨닫고 그 몽환으로부터 벗어나는 생사 해탈의길을 찾았다. 스님은 곧 월정사 지장암에 주석하셨던 대비구니 정자(淨慈) 노스님께 은사의 예를 올리고 출가하였으며, 이듬해 한암 큰스님을 모시고 사미니계를 수지했다. 1943년에는 강릉포교당에서 금강산 유점사의 일운(一雲)율사로부터 보살대계(菩薩大戒)를 수지하고, 1945년에는 서울 안국동 선학원에서 동산율사께 비구니계를 수지했다. 그 후 수덕사 만공(滿空)회상에서 3하안거를 마치고, 1947년 오대산 한암(漢岩)회상에서 2하안거를 성만했다. 어느 날 큰 구두를 얻어 신고 천지를 활보하는 꿈을 꾼 다음에 꿈에서와 같이 사불산 대승사, 희양산 봉암사, 창원 성주사 등지에서 자운(慈雲), 성철(性徹), 향곡(香谷), 보문 스님 등의 선지식을 친견했다.

성철스님과의 법연

1949년에는 월내 묘관음사(기장군 월내)에서 동안거 중, 성철 큰스님과 법연을 얻게 된다. 인홍스님은 수행 중의 경계에 대하여 인가를 얻고자 했다. 그러나 성철 큰스님은 몽중일여와 숙면일여를 얻어서 오매일여가 되어야 비로소 수행의 경지를 얻었다고 말할 수 있다는 3분단의 법문을 설했다. 인홍스님은 이 때의 인연으로 선지식에 대한 믿음이 일생의 스승으로서 성철 큰스님을 모시는 기연이 되었다. 성철 큰스님은 다시 '공부인은 실제로 오매일여를 넘어서서 내외가 명철한 구경의 묘각을 얻어야 비로소 견성이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목숨을 돌보지 않고 노력정진 해야 한다.'고 간곡히 당부하셨다.
인홍스님은 '출가자는 부처님 정법대로 살아야 하고, 부처님이 제정하신 계율은 수행자의 생명이다.'라는 성철 큰스님의 숭고한 구도자의 정신 앞에 참스승을 만났다는 환희심을 느끼고 도를 구하는 길에 생명을 바치겠다는 각오로 새롭게 태어났다고 한다. 인홍스님은 그때의 심경을 다시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해동(海東)에 천고(千古)의 밝은 달은
        강남(江南)의 만리천(萬里天)을 비추고 있네
        저 맑은 달빛은 본래 피차(彼此)가 없는 것을
        참선자(參禪者)는 분별망상(分別妄想) 떠나는 길 뿐
        강풍(江風)은 만고(萬古)에 불고 있고
        명월(明月)은 천추(千秋)에 변함이 없네
        만고천추에 주인공이여
        명월과 강풍 너밖에 누고?

정법수호 대중결사

인홍스님이 경남 창원의 성주사에 있을 때 처음으로 정법수호의 회상에 동참했다. 40여 명의 대중스님이 모여서 성철 큰스님의 공주규약(共住規約)을 실천한 대중 결사였다.
이것은 성철 큰스님을 모시고 묘엄(妙嚴)스님, 불필(不必)과 함께하였으며, 1947년 성철 큰스님의 문경 봉암사 결사정신이기도 했다. 승려들의 삶이 세속보다 더 어지러웠던 당시로서는 일대혁신이었고,
‘부처님 가르침대로' 라는 성철 큰스님의 한마디가 현실에 적용되는 과정 그 자체가 인홍스님을 고무시키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인홍스님은 세속화된 일본식 불교를 개혁하는 가운데에서 일생의 수행좌표를 확립했으며 비구니에게도 출가정신의 숭고함을 유감없이 가르쳤다.
결사정신에 근원을 둔 이러한 출가정신의 확립은 1951년 성주사와 1954년 홍제사에서 유감없이 발휘하여 세속화된 승단 정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불교정화 운동과 동화사

인홍스님은 1954년 11월 제2회 임시종회에서 위의 스님들과 함께 비구니 종회의원으로 선출되어 비구스님들과 함께 전국승려대회 준비 등 모든 어려운 일을 도맡았다. 인홍스님은 1955년 불교정화가 끝난 뒤 비구니 중앙간부로서 총무부장을 맡았다.
불교정화운동이 끝난 뒤에 대구 동화사를 전국비구니총림으로 개설하려고 도량을 인수했으며, 초대 동화사 주지는 비구니 성문스님(性文)이셨다. 비구니스님들은 전국비구니총림을 개설하려는 의욕에 불탔으나 비구스님들 중에는 비구니가 동화사를 맡은 것에 불만을 가진 분도 많았다. 결국은 비구니의 힘으로 동화사를 지키기는 어려웠고, 비구니는 비구니들대로 마음을 맞추어 나가기도 힘든 상황에서 '사람 노릇하면 공부 못한다.'는 성철 큰스님의 가르침에 분연히 자리를 털고 나왔다고 회고했다.

석남사 주지역임

인홍스님은 1957년 석남사 주지로 부임하여 삼층 석가사리탑, 대웅전, 극락전 중창. 정수선원 심검당 및 요사 9동 신축 불사등 석남사를 중창하였다.

입적

인홍스님은 처음 출가할 때에 세상을 몽환으로 보고 생사해탈의 길에 올랐고, 일생을 비구니 승가의 출가정신을 확립시키는 데에 열정을 다 바쳤다. 그리고 1997년 4월 18일 석남사에서 자신의 행적을 다음과 같이 한 편의 열반송을 남기고 세수 90세, 법랍 57세로 열반에 드셨다.

      삼세 불조 가신 길을 나도 가야지
      미수생애 사바의 길 환몽이 아님 없도다.
      일엽편주처럼 두둥실 떠가는 곳
      공중에 둥근 달 밝을 뿐이네.

제자 법희스님은 인홍스님의 다음 말씀을 마음에 새겨두고 있다고 한다.
“중은 신발과 같이 살아야 한다 하셨습니다. 발은 신체의 가장 아래에 위치해 있습니다. 신발은 그 발을 보호하지요. 눈에 잘 띄지 않는 일이라도 의미가 있을 터이니 마음을 다하라는 뜻일 수 있겠습니다. 불평하지 말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똥을 밟아도, 언 땅을 걸어도 신발은 아무 말 하지 않습니다. 묵묵히 걷는 발을 조용히 받치고 있을 뿐입니다.”

인홍스님 일대기

인홍스님 일대기를 정리한 『길 찾아 길 떠나다』라는 책이 2007년 출간되었다. 저자 박원자씨는 인홍스님을 '가야산 호랑이'라고 불리는 성철 스님과 비교하여 '가지산 호랑이'로 불릴 정도로 오직 '생사해탈'을 위해 수행한 엄격한 수행자였다고 정리했다.

석남사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인 통도사의 말사이다. 이 절은 824년(헌덕왕 16) 우리 나라에 최초로 선(禪)을 도입한 도의(道義)가 호국기도도량으로 창건한 선찰(禪刹)이다.

창건 당시 화관보탑(華觀寶塔)의 빼어남과 각로자탑(覺路慈塔)의 아름다움이 영남 제일이라고 하여 석남사(碩南寺)라 하였다고 하며, 일설에는 가지산의 별명이 석안산(碩眼山)이기 때문에 석안사라고 하였다고도 한다.

임진왜란으로 전소된 뒤 1674년(현종 15)에 언양현감 강옹(姜甕)의 시주로 탁령(卓靈)·자운(慈雲)·의철(義哲)·태주(泰珠)가 중창하였고, 진혜(振慧)·쌍원(雙遠)·익의(益儀)·성진(性眞)이 단청을 하였으며, 동시에 종과 북 등의 불구(佛具)를 마련하였다. 이어 정우(淨佑)·각일(覺日)·석맹(碩孟) 등이 극락전·청풍당·청운당·청화당·향각(香閣)을 증축하였고, 희철(熙哲)이 명부전을 세웠다.

1803년(순조 3)에는 침허(枕虛)와 수일(守一)이 중수하였고, 1912년에는 우운(友雲)이 중수하였다. 그러나 6·25전쟁 이후에 크게 폐허가 되었던 것을 1957년 비구니 인홍(仁弘)스님이 주지로 부임하면서 크게 증축하였다. 이 때부터 비구니 수도처로서 각광을 받은 이 절에는 항상 100명이 넘는 비구니 스님들이 엄격한 계율을 준수하면서 수도에 정진하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하여 극락전·설선당(說禪堂)·조사전(祖師殿)·심검당(尋劍堂)·침계루(枕溪樓)·정애루(正愛樓)·종루(鐘樓)·무진료(無盡寮)·대방(大房) 등 30여 동이 있다.

이들 가운데 극락전은 1791년(정조 15)에 세운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문화재로는 도의국사의 사리탑으로 전해지는 보물 제369호의 석남사 팔각원당형부도(石南寺八角圓堂形浮屠)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2호인 삼층석탑, 조선 초기에 제작된 엄나무구유와 돌구유 등이 있다.

삼층석탑은 824년에 도의가 호국의 염원 아래 15층으로 세운 것이라 하나,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방치되어 오다가 1973년 스리랑카의 승려가 사리 1과를 봉안하면서 3층으로 개축한 것이다. 이 밖에도 절 입구에 4기의 부도가 있다.

석남사의 사진자료

참고문헌

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96002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인홍(仁弘)스님 본항목 인홍스님(仁弘) 1908 ~ 1997 仁弘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인홍스님(仁弘,_1908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속성
인홍스님(仁弘) 법기문중(法起) ~의 일원이다
인홍스님(仁弘) 평창 상원사 ~에서 출가하다
인홍스님(仁弘) 정자스님(淨慈) ~의 수계제자이다
인홍스님(仁弘) 한암스님(漢巖) ~(으)로부터 계를 받다 사미니계
인홍스님(仁弘) 동산스님(東山) ~(으)로부터 계를 받다 비구니계
인홍스님(仁弘) 창원(마산) 성주사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선원장
인홍스님(仁弘) 불교정화운동 ~에 참여하다
인홍스님(仁弘) 울산울주 석남사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주지(감원)
인홍스님(仁弘) 동화사 비구니총림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설립준비위원회 총무
인홍스님(仁弘) 대한불교조계종_중앙종회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중앙종회의원
인홍스님(仁弘) 선림회(禪林會) ~을(를) 건립하다
인홍스님(仁弘) 대한불교 비구니우담바라회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재단이사장
인홍스님(仁弘) 전국비구니회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총재
인홍스님(仁弘) 석남사 심검당 ~에서 수행하다 3년결사
인홍스님(仁弘) 계단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단일계단 비구니 증사(별소계단 2회 존증아사리, 6회 니화상(尼和尙))
인홍스님(仁弘) 안거 ~을(를) 성만하다 평창 월정사, 문경 대승사, 문경 봉암사, 창원 성주사, 기장 묘관음사, 양산 내원사 조계암, 부산 범어사 원효암, 정선 정암사 등
인홍스님(仁弘) 울산울주 석남사 ~에서 입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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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석남사 : 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면 덕현리 10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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