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산혜일(東山慧日)
- 법호·법명 : 동산혜일(東山慧日,1890~1965)
- 생애·업적 : 해방 이후 대한불교조계종 종정, 정화종단 종정 등을 역임한 승려.
속명은 하봉규(河鳳奎)·하동규(河東奎). 법호는 동산(東山). 법명은 혜일(慧日). 충청북도 단양 출신. 아버지는 성창(性昌)이며, 어머니는 정씨(鄭氏)이다. 일제강점기를 통해 문란해진 불교계의 정화운동에 투신하였다.
7세부터 13세까지 한학(漢學)을 익혔고, 19세에 고향의 익명학원(益明學院)을 졸업한 다음, 서울의 중동학교(中東學校)에 입학하였다. 1913년 의학전문학교 본과에 진학할 무렵, 동래 범어사(梵魚寺)의 용성(龍城)에게 출가하였다.
그 뒤 맹산(孟山)의 우두암(牛頭庵)에서 한암(漢巖)에게 사교(四敎)를, 범어사로 돌아와 대교(大敎)를 배웠으며, 1923년장성 운문암(雲門庵)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그 뒤, 오대산 상원사(上院寺), 금강산 마하연사(摩訶衍寺), 속리산 복천암(福泉庵), 마천 백운암(白雲庵), 김천 직지사(直指寺)천불선원(千佛禪院) 등 전국의 선실(禪室)을 찾아 수행하였다.
41세에 석왕사(釋王寺)에서 후학들을 지도하였고, 1934년 범어사금어선원(金魚禪院)에서 대오(大悟)하고 용성에게 인가 받은 후, 전국 각지를 순례하면서 후학들의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1936년 은사 용성의 법인(法印)을 부촉 받고, 금어선원에서 수좌로 안거하다가, 1941년 서울의 선학원(禪學院)에서 열렸던 은사의 유교법회(遺敎法會)에 참석하여 선지(禪旨)를 현양하였으며, 1942년에 일본으로 가서 그곳의 선객(禪客)들과 양국 불교의 관심사를 논의하였다.
범어사의 금강계단(金剛戒壇)은 그에 의하여 전통이 세워졌는데, 여러 해 동안의 교수아사리(敎授阿闍梨)를 거쳐 1943년 전계대화상(傳戒大和尙)이 된 뒤, 수많은 불제자를 배출하였다. 범어사 금강계단의 계맥(戒脈) 외에도, 지리산칠불선원(七佛禪院)의 대은(大隱)율사(律師)에서 시작되어 금담(錦潭)―초의(草衣)―범해(梵海)―선곡(禪谷)―용성의 여러 율사로 전수되어 온 계맥도 전수받았다.
1954년 전국 비구의 선두에 서서 불교정화(佛敎淨化)를 주도하였으며, 1955년 네팔에서 열린 제4차 세계불교도대회에 한국종단의 대표로 효봉(曉峰)·청담(靑潭)과 함께 참석하였다. 1956년대한불교조계종 종정(宗正)으로 추대되었고, 그 해 11월 방콕에서 열렸던 세계불교도대회에 참석하여 한국 불교의 참모습을 널리 알렸다.
불교정화운동의 일환으로, 1941년 3월 13일 비구승대회에서 등단설법(登壇說法)을 하였다. 1954년 9월 28일 제2차 전국비구승대회가 열려 새 종헌(宗憲)이 채택되고 부종정에 선출되었으나, 종정 만암이 정화 방법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이탈함에 따라, 전국비구승대회는 그를 종정으로 추대하였다.
그를 주축으로 한 비구승들은 대처승에 의하여 강점되었던 태고사(太古寺)를 다시 찾기 위하여 소송을 제기하여 1954년 11월 5일 정식으로 접수하고 조계사(曹溪寺)라 개칭하였다. 1958년 정화종단(淨化宗團)의 종정으로 추대되었고, 1962년 일부의 반종단 인물들에게 관용과 구제의 문을 열어 다시 종단에 복귀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1962년 4월 10일 통일종단(統一宗團)이 성립되었다.
이후, 모든 직책을 사임하고 범어사로 돌아와 후학들을 지도하다가, 1965년 4월 30일(3월23일(음력)) 입적하였다.
입적에 들기전 마지막으로 남긴 휘호가 있었다. “佛說一切法(불설일체법) 爲度一切心(위도일체심) 若無一切心(약무일체심) 何用一切法(하용일체법)” “부처님이 일체법을 설하신 것은, 일체심을 건지려고 한 것이니, 네가 만약에 일체심이 없다면, 일체법을 갖고 무엇에 쓰겠는가”
※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