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운성우(慈雲盛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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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법호·법명 : 자운성우(慈雲盛祐 : 1911~1992)
  • 생애·업적

자운 스님은 1911년 3월 3일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노동리에서 출생하여, 사서삼경 등 한학을 공부했다. 다생의 인연으로 해인사에 입산하여 17세 때 양혜운(梁慧雲)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수지했다. 그후 스님은 5년간 범어사·선암사·대승사·상원사 등 전국의 선방을 드나들며 선풍을 맛보고 1934년 3월 15일에 금정산 범어사에서 경념(敬念) 율사를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다시 해인사로 발길을 돌린 스님은 율장(律藏) 연구에 몰두했으며 2년간의 뼈를 깎는 공부를 범어사 강원으로 이어 가면서 대교과를 마쳤다. 이후 1938년 여름 안거까지 스님은 상원사 선원, 울산 용성선원, 울진 불영사 선원, 김룡사 선원, 대각사 선원, 통도사 선원을 드나들며 ‘서래밀지(西來密旨)’를 참구했다.
1938년 9월 9일 스님은 현대 한국불교의 큰 산맥을 이룬 용성(龍城) 스님을 법사로 모시고 건당했다. 이듬해 오대산 동대(東台)에서 용맹 정진 끝에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천지가 흔들리는 환희심에 펄펄 끓는 법열을 맛보았다. 스님은 서원을 세운다.
‘계율을 홍포하며 모든 인연에 구족하고 대법당(大法幢)을 건립하여 칠불보계(七佛寶戒)를 선양함으로써 승강(僧綱)을 회복하고 천하 사원이 욕태(欲態)를 벗어나 현재의 승행(僧行)이 고덕(古德)보다 수승하며 불일(佛日)이 장명(長明)토록 법륜상전(法輪常轉)하리라.’
무르익은 수행의 과일을 수확하듯 이같이 서원한 스님은 백일을 하루같이 문수보살 앞에서 불교 중흥을 위한 용맹기도를 봉행하였다. 스님이 가는 곳은 어느 곳이든 수행과 전법의 도량이었다. 제방을 호랑이 같은 걸음으로 넘나들며 다시 만행의 정진을 계속하여 금강산과 백양사에 이르기까지 각 선원에서 정진했다.
1942년 월정사에서 대덕법계를 품수 받고 4년 후에는 조계사에서 종사(宗師)법계를 품수 했다. 다시 두 해를 지나 스님은 처음으로 문경 봉암사에서 보살계 수계법회를 봉행했다.
1949년부터 5년간 스님은 계율 홍포를 위해 서울 봉익동 대각사와 부산 선암사에 주석하며 한문본 《비구계본》 1만 부, 《비구니계본》 1만 부, 《사미율의》의 5천 부, 《사미니계율》 5천 부 등 계본 3만 부를 출간하는 대작불사를 완료했다.
이후 스님은 단일계단이 설립되기 이전인 80년까지 해인사 및 통도사 금강계단의 전계사로서 비구 876명, 비구니 953명, 사미 207명, 사미니 212명 도합 2,248명의 수계자를 배출하였다. 또 단일 계단 확립 후 82년부터 8년간 해인사 및 범어사에서도 전계사로 1,076 명의 수계자를 배출시켰다. 스님으로부터 보살계를 받은 자는 1만7천82명에 이른다. 스님은 1957년에 다시 계본 출간을 시작, 4만5천 부와 《약사경》 등 21종의 번역본을 출간, 홍포하기도 했다. 해인총림 선원 수좌·동당·서당을 지냈다.
1976년 조계종 총무원장을 비롯 종단의 중요 직책을 두루 거치는 등 행정적인 안목도 밝았다. 1992년 2월 27일 해인사에서 다음의 열반송을 남기고 입적하니 세수 82세요. 법랍 65년이었다.

본래 성품 자리 원만하게 밝혀지면
본래 생멸이 없어지는 것을
나무로 만든 말이 밤에 우니
서방에 해가 뜨누나.
眞性圓明 (진성원명)
本無生滅 (본무생멸)
木馬夜鳴 (목마야명)
西方日出 (서방일출)


※ 출처 :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선원총람』, 2000, pp. 133~1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