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혜돈스님(慧頓, 1949生, 비구니)

bigu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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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혜돈(慧頓) 스님은 수행과 불사에 매진해 온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949 경북 상주 출생
1967 화운사에서 지명(智明)스님을 은사로 출가
1969 대은(大隱)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1973~1976 해인사 약수암, 삼선암, 내원암, 대성암 등 안거 성만
1974 화운사 사교 수료
범어사에서 고암(古庵)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수지.
1987 중앙승가대학교 졸업
1989~1997 전북 남원사 주지
1999~2000 화운사 주지
2022 현재 화운사 주석
문중 실상문중(實相)
수행지침 주한 바 없는 데서 마음 작용은 현실이 그대로 해인삼매로다.
생활신조 승려로서 자존심을 가지자
상훈 대한불교 조계종 금산사 주지 표창패 수여 (1995)
수계제자(『한국비구니명감』) 묘향(妙香)·지정(智晶)
문중계보(『한국의 비구니문중』) 순동(順同, 2)→의선(義善, 3)→도덕(道德, 4)→지명(智明, 5)혜돈(慧頓, 6)→묘향(妙香, 7)

활동 및 공헌

출가

[은사스님 회갑기념.사형,사제스님들과 함께 (1986. 7. 9)]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397
[왼쪽에서 두번째 혜돈스님(1972)]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398
[중앙승가대학시절(1983)]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401
[인도성지순례 칠엽굴 방문]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402

혜돈(慧頓)스님은 1949년 5월 15일 경북 상주의 불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연일이며, 이름은 정민오이다. 세 살 때부터 할머니 손을 잡고 고향에 있는 작은 암자 극락암을 다녔는데 고즈넉하고 정갈한 분위기가 왠지 좋았다. 스님이 살던 곳은 심심산골이어서 중학교에 진학하려면 상주 읍내까지 나가야만 했다. 당시만 해도 남존여비 사상이 팽배했던 시절이라 집안에서는 장녀인 스님을 중학교에 보내지 않고 집에서 살림을 돕게 하였다. 하지만 정작 스님은 외지로 나가서 학업을 계속하고 싶은 마음이 갈수록 간절해졌다. 나중에 스님의 부모님은 스님에게 상주 읍내에 진학한 남동생 뒷바라지를 시키면서 고향집에 바쁜 일이 있으면 집안일을 돕도록 하였다.
결국 이런저런 이유로 집도 싫고 부모도 싫은 나머지 절에 가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된 스님은 열여덟 살 되던 해에 친척 오빠에게 부탁하여 절에 가서 며칠을 지냈다. 그러나 집에 돌아오자 다 큰 처녀가 외박하고 왔다며 호되게 야단을 맞았다. 그 후 스님은 마지막 수단으로 편지를 써놓고 집을 나와 그 길로 어려서 할머니 손을 잡고 다니던 극락암으로 가서 어디라도 좋으니 절에만 보내달라고 주지스님께 부탁하였다. 처음에는 철없는 아이의 푸념으로만 여기고 야단을 치시던 극락암 주지스님은 출가에 대한 진심을 알고 화운사를 추천해 주었다.
다음날 새벽, 스님은 혹시라도 아는 사람을 만나면 집에 다시 붙들려 가게 될까 조심하며 서울행 첫 차인 완행열차를 타고 수원으로 향했는데, 도착할 무렵에는 이미 날이 저물어 있었다. 화운사 입구에 당도했을 때는 밤 8시가 거의 다 된 캄캄한 밤중이었다. 차에서 내려 한참을 두리번거리다가 간신히 길을 찾아 낮은 고개에 오르자 청아한 목탁소리가 들려왔다. 목탁소리를 들으니 안도의 한숨이 나오고 그 동안의 감정이 북받쳐 눈물이 쏟아졌다. 마침내 스님보다 어린 행자가 차려주는 꿀맛 같은 저녁 공양을 하는 것으로 출가 생활이 시작되었다. 이때가 스님의 나이 19세 되던 1967년 10월 21일이었다.

행자생활

다음날 아침 스님이 일어나보니 훗날 은사스님이 되신 지명스님은 볼일이 있어 서울에 가시고 총무스님만 계셨다. 총무스님은 얼굴이 까맣고 남자 같이 우락부락하게 생기신 분이었다. 며칠 뒤 서울에서 돌아오신 지명스님을 보고 스님은 깜짝 놀랐다. 평소에 스님은 부자로 잘사는 사람보다는 고귀하고 지적인 사람을 좋아했는데, 지명스님이 바로 자신이 그리던 이상형이었던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스님은 불교를 잘 알아서 발심 출가를 결심한 것은 아니었다. 고요하고 엄숙한 절 분위기가 좋았고 학교에 보내주지 않는 부모님이 싫어서 집을 도망쳐 나왔다는 것이 좀 더 솔직한 심정이었다. 다음 날 은사 지명스님은 뵙자마자 너무나 좋았다. 지명스님 같은 분과 함께 살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행복했다. 하루하루 지명스님을 뵙는 기쁨으로 살던 혜돈스님은 어느 날 『선가귀감』을 읽게 되었다. 그 뜻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너무나 색다른 세계가 그 속에 있었다. 스님은 미지의 세계에 단숨에 매료되었다. 그때부터 공부를 낙으로 삼고, ‘나의 괴로운 마음을 없애는 방법은 없을까?’ 하고 궁리하였다.
혜돈스님이 출가한 당시 화운사에는 학인 30여 명이 있었으며 선원에도 몇 분의 스님이 있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삭발하지 않으면 큰 방에 못 들어가게 하는 규칙이 없었기에 혜돈스님은 머리를 깎지 않고 행자로서 큰방에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스님은 1969년 대은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하였는데, 당시에는 계를 받는 문제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스님은 화운사에 들어간 지 3개월쯤 지나서 해를 넘기고 정월 대보름이 지난 뒤 삭발하였다. 그 이유는 아무리 조심한다고 해도 스님의 머리카락이 빠져 대중들의 걱정을 들었기 때문이다.
행자 시절은 몹시도 힘이 들었다. 때가 아니면 음식을 금지하고 매 끼니를 보리밥으로 때우기 일쑤여서 수저를 내려놓고 돌아서기가 무섭게 배가 고팠다. 옷도 다 떨어 진 것만 주는 바람에 누덕누덕 기워 입고 생활하였다. 어른 스님의 시봉을 맡았다가 얼만 지나지 않아 은사스님의 시자로 들어가 은사스님과 함께 생활하였는데 취침 시간을 불문하고 다음날 새벽 3시에 반드시 일어나야 했기에 힘이 많이 들었다. 더군다나 행자 때의 일이란 해도 해도 끝이 없는 법이었다.

늘 잠이 모자랐던 스님은 새벽에 예불을 하면서도 ‘몰래 숨어 잠잘 데가 없을까?’ 하고 궁리를 하다가 마침내 기막힌 장소 한 곳을 떠올렸다. 바로 이불을 넣어 두는 벽장이었다. 그래서 그 곳에 들어가 잠자기에 적당하다 싶은 데를 손으로 더듬거리는데 이미 누군가가 스님보다 먼저 와서 자고 있었다. 한창 젊은 나이의 행자스님들은 꼭두새벽부터 소임을 살면서 어른 스님들 시중을 들다 보면 하루에 잠자는 시간이 많아야 서너 시간에 불과했기 때문에 행자스님들에게 가장 큰 고통은 시도 때도 없이 쏟아지는 잠이었던 것이다.

선수행의 길을 나서다

화운사 강원에서 사집과를 마친 혜돈스님은 세수 24세에 선 수행을 위해 해인사 국일암으로 향했다. 스님은 해인사 국일암을 시작으로 약수암, 삼선암에서 안거를 보냈고, 범어사 대성암과 양산 내원사 등에서에서 안거를 성만하였다. 스님이 대성암에서 철을 날 때에는 지유 큰스님이 오후 불식을 하면서 원효암에서 정진하고 계셨는데, 당시 혜돈스님은 항상 화두를 들면 의심은 가지 않고 그냥 매일 줄줄 외다시피 해온 터였다. 마침내 지유 스님께 화두 수행 지도를 받고자 찾아가는 도중에 스님은 마침 고갯길에서 지유스님을 만나게 되어 자초지종을 말씀드렸다. 그러자 지유스님께서는 이렇게 일러주셨다. “무엇이 괴로웠는가를 돌이켜봐라. 찾아서 돌이켜봐라. 계속 찾아봐라.” 스님은 다시 여쭈었다. “찾아보라고 해서 찾아보면 없는데요.” “없는 데서 공부를 해라. 찾아보고 괴로웠던 것을 돌이켜봐라.” 돌이키라는 큰스님의 말씀을 듣고 스님은 그대로 해보았다. 괴롭고 서러운 것을 끝까지 뒤집고, 다시 밑바닥까지 돌이키면서 마침내 공부하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다.

그런데 한참을 그렇게 하며 괴로운 것들을 뒤집으니까 마음은 한결 편안해졌지만 대체 화두는 어떻게 잡아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스님은 그해 가을 진주 대원사 가람전에서 몇몇 도반과 함께 백일기도를 하면서 퇴전하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여 성불하자고 단단히 약속하였다. 스님이 백일기도를 거의 마쳐갈 무렵 화운사에서 연락이 왔다. 대웅전 불사를 하는데 와서 일을 도우라는 것이다. 이에 스님은 그해 겨울 결제를 못하고 대웅전 불사의 서기를 보면서 한 철을 지냈다. 그 후 스님은 선원에서 마음을 다스리는 법은 어느 정도 터득했으므로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기초적인 지식을 갖춰야겠다는 생각을 하였고 은사스님께 학원에 가고 싶다는 뜻을 비쳤다. 은사스님은 가타부타 말씀이 없었다. 전에는 학교 공부 이야기만 나와도 펄쩍 뛰며 반대하던 분이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으시는 모습을 보고, 스님은 공부를 시작하면 은사스님께서 지원해 주실 것을 무언중에 읽을 수 있었다.

중앙승가대학에 진학하다

스님은 곧바로 서울로 올라와 고려학원에 입학하고 검정고시로 중학교 과정을 마쳤다. 이어서 충남으로 내려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중앙승가대학교에 진학하였다. 중앙승가대학교에 다니면서는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피아노와 꽃꽂이를 배우고 포교와 역학도 배우면서 유익하게 시간을 보냈다. 아쉬운 점은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였으나 사군자와 붓글씨를 조금 배웠을 뿐 제대로 배울 기회를 갖지 못했다는 것이다. 속가에 있을 때는 너무 어려서 사회에 대해 무지했고, 출가 후 뒤늦게 사회와 접해 보니 어려운 점이 많았지만 항상 스스로를 관조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갖추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였다고 한다.

스님은 이렇듯 항상 스스로를 관조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갖추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였다. 1987년 승가대학교를 졸업한 스님은 그해 여름 본사 화운사 원주로 자원을 하여 신심 있게 열심히 살았다. 같은 해 가을에는 복부에 물혹이 있어 수술을 하고 한 달 남짓 선원에 있다가 결제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냥 뒷방만 지키고 앉아 있는 것이 내키지 않아 채 완쾌되지 않은 허리를 동여매고 큰방 일을 도왔다. 1988년 스님의 나이 40세 때였다. 본방이니 입방을 해보라는 어른스님의 말씀에 스님은 허리를 동여매고 앉았다. 수술 직후였지만 그래도 기운을 내었다. 모처럼 큰방에 앉아 재발심(再發心) 하는 마음으로 용맹정진을 하였다. 그 때 지유 큰스님의 ‘돌이켜봐라!’는 말씀을 떠올리고 생각을 돌이키는데, 그 순간 맑은 경계가 나타나는 것이다. ‘아! 바로 이거였구나. 이렇게 망상 없는 경계가 있구나!’

남원사 주지를 맡아 불사에 전념하다

혜돈스님은 1989년 금산사 말사인 남원사를 맡게 되었다. 금산사 말사인 남원사는 역사가 1,300년이나 된 고찰이었지만 스님이 부임할 당시에는 지방문화재 미륵불상 외에는 제대로 된 건물이 없는 퇴락한 사찰이었다. 스님은 대웅전과 요사채를 증축하고 일주문을 세웠다. 또한 담장을 전통 방식으로 새로 쌓았고 반야교(般若橋)를 놓고 길을 확장하여 도량을 일신하였다.

불사는 중앙정부 예산을 확보한 금산사 회주 월주스님께서 아주 낡은 사찰 몇 군데를 선정하여 총 건축비의 절반을 보조하는 계획 아래 진행되었다. 스님이 맡은 남원사가 수혜 사찰에 해당되었던 것이다. 당시 대웅전을 신축하는 데는 1억 5천만 원이 들었는데, 그때 금산사에서 국비 7천 5백만 원을 보조받고 관련 지방 관청에서도 지방비를 받아 무사히 완공할 수 있었다. 요사채를 신축할 때는 총 공사비 7천만 원 중 지방 관청에서 6천만 원을 보조받았고 스님이 1천 5백만 원을 보태었다. 이밖에 담장을 쌓을 때는 2천만 원을 보조받았다. 또한 다리를 놓는 데는 8천 5백만 원 전액을 군에서 지원해주었다. 스님은 다리는 반야교(般若橋), 일주문은 해탈문(解脫門)이라고 명명하였다. 이처럼 순조롭게 불사가 진행되어 10년 이상 계획했던 공사를 5년 만에 마칠 수 있었다. 한편 5년간 불사를 거듭하면서도 화두 탐구는 계속되었다. 스님은 집중을 다해 공부하면서 조사 어록을 두루 섭렵했지만 더 이상 공부에 진전이 없자 다시 범어사 지유 큰스님을 찾아뵈었다. 그러나 지유 큰스님은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오직 ‘더 해봐.’ 한 마디뿐이었다. 화두 탐구에 전념하다 보니 훌쩍 2년이 지나갔지만 여전히 풀리는 게 없었다. 그즈음 지유 큰스님이 서울 화개선원에 한 달에 한 번씩 법문하러 오신다는 소식을 들은 스님은 그곳을 찾아갔다. 지유 큰스님의 법문을 듣자 오랫동안 풀리지 않던 의심이 마침내 그 자리에서 풀어졌다. 그 후 지유 큰스님을 더욱더 존경하게 되었다.

화운사로 돌아오다

1997년 남원사 주지직을 내놓은 스님은 은사스님이 계시는 화운사에 살면서, 일을 해도 화운사에서 해야겠다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화운사가 용인 지방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실로 크다. 용인에서 가장 큰 절이다 보니 은사스님을 모시면서 선방 외호와 농사, 어린이 포교, 사회사업까지 할 일이 많았다. 잠시도 나태할 시간이 없었다. 화운사에서 직접 경작하는 농지도 만만치가 않다. 현재 논이 34마지기, 밭이 약 4천 평이나 된다.

은사이신 지명스님

스님의 은사스님은 삐뚤어진 것 하나도 바르게 가지런히 놓을 만큼 매사에 깔끔하신 분이다. 예불은 절대로 거르면 안 되고, 반드시 일정한 시간 에 일어나신다. 간혹 무슨 일이 있어 다른 곳에서 주무시더라도 일어나는 시간은 철저히 지키신다.

아무리 아프다고 해도 은사스님께서 약 한 첩 지어주지 않을 때는 서운하기도 했는데, 당시는 물질적으로 워낙 어려웠기 때문에 이해를 한다며, 스님은 지난날을 돌이켜보며 웃는다. 그렇지만 은사스님은 뭐든지 각자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도록 자유롭게 해주었으며 스스로 의사 결정을 할 수 있도록 존중해준 너그러운 분이셨다. 스님이 남원사로 갈 때였다. 은사스님은 가란 말도, 가지 마란 말도 하지 않다가 떠나는 날 “독살이는 죄지은 사람만 가는 데다.” 하고 딱 한 말씀만 하셨다. 스님은 그때 은사스님의 말씀을 흘려들었다.

그런데 막상 하고 싶어서 한 불사를 마치고 나자 마음이 너무나 허탈했다. 대중이 그리웠고, 참선 공부에 매진하지 않고 헛된 짓을 한 것만 같았다. 그제서야 은사스님의 말씀이 자꾸 떠올랐다. 학인 시절 공양주를 자원하여 살면서 『금강경』 탐독을 네 번이나 하며 공부한 스님은 1999년 자신이 출가한 화운사 주지에 취임하였다. 그 뒤 곧바로 불사를 시작하여 삼성각과 식당을 신축하였고, 재소자를 위한 법문도 빠지지 않고 다녔다.

화운사 창건주 차재윤

화운사의 창건주는 차재윤 씨인데 수원의 8대 부자 중 한 분이었다.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그 분은 관악산 연주대에서 기도를 열심히 하여 재물을 많이 쌓아 절을 지었다. 은사스님이 오시고 이십여 년이 지난 뒤에는 땅의 소유권 등기를 대한불교 조계종 화운사로 넘겨주었다. 창건주인 차재윤 씨가 돌아가시고 그 아들 대에 이르렀을 때였다. 당시 지명스님은 선농(禪農) 일치라는 기치 아래 선도 하고 농사도 짓고 교리 공부도 하자는 취지에서 능인 선농예학원(禪農藝學院)을 설립하였다. 재단법인의 정식 명칭은 ‘능인학원’이며, 지금은 목적 사업이 서예학원으로 되어 있다. 외부에서 저명한 강사를 초빙하여 신도와 지역 주민들에게 무료로 교육하고 있다.

스님은 최소한 스님들이 스님으로서의 자긍심을 세우고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다. 그리고 지명스님이 이룩해 놓은 불교 유산 화운사를 후세 사람들이 잘 유지해 나가게끔 초석을 더욱 단단히 다져놓는 것을 스님의 몫이라고 여기고 있다. 스님은 훗날 후학들이 자신을 ‘꾸준히 정진하고 당당하게 살아간 사람’으로 기억해주기를 바란다. 그러면서 후학들에게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불법을 찾는 간절한 마음이 우리를 죽지 않는 곳으로 인도할 것’이라고 강조하며 ‘각자가 처한 곳에서 주어진 어떤 일을 하더라도 이 간절한 마음을 여의지 말고 열심히 일할 것’을 당부한다. 2004년 화운사에서 수행 정진 중인 스님의 수계제자로는 묘향(妙香)·지정(智晶)스님이 있다.

용인 화운사

[화운사 전경]사진출처:용인관광블로그https://blog.naver.com/touryongin/222744479632

화운사는 용주사의 말사로 멱조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으며, 1938년 우암 차재윤재거사가 창건하고 이화응스님이 주지를 맡았다.

1957년 3월, 비구니 지명(당시 개심사 주지)스님이 주지로 취임하여 48평 규모의 강원을 마련하고 개심사에서 지도하던 학인 15명과 성능스님을 강사로 개강하였다. 1962년 대은(大隱)스님이 강사로 취임하였고 그해 10월에 조계종단에 사찰등록을 하였다.

1974년 10월 강원 명칭을 능인승가학원으로 개칭한 이후 1985년 9월 대교과 17명이 졸업하고 그해 10월에 화운승가학원의 문을 닫았다.

화사 능인선원은 1987년 3월에 선원 104평을 중창하여 1988년 4월 원담스님을 조실로 모시고 개원하였다. 1975년 지명스님이 주지로 취임한 뒤 법당 옆에 건평 22평의 선방을 지어 납자들의 참선 공간을 마련하였다. 1967년 1백 50평 규모의 강원과 선원을 지었으나 이때 선원이 정식으로 문을 연 것은 아니었다. 1972년에는 일하면서 공부하는 '용인선농예(龍仁禪農藝)학원'이 세워졌다.

본격적으로 선원을 개원한 것은 1987년 3월 선원 104평 중창하여 이듬해 1988년 4월 원담스님을 조실로 모시고 대중들이 정진한 이후부터라고 할 수 있다. 1989년에는 건평 112평 (1층88평, 지하24평)의 선원체를 증축하였다. 수용 인원이 20명 정도 되는 화사 능인선원은 대웅전을 향하여 좌측에 들어서 있으며, 정면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25평 규모의 큰방과 지대방, 그리고 다각실로 구성되어 있다.

참고문헌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 뜨란출판사, 2007, pp. 395~404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 2007, p. 541.
  •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 432.
  • 법보신문, 화운사 송전탑 설치 반대 불교대책위 위원장 혜돈 스님 (2004년) 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6089
  • 미디어붓다, 용인 화운사 『놀아봐! 꿈꿔봐! 겨울방학 어린이 템플스테이』 운영 (2018년) http://www.mediabuddha.net/m/news/view.php?number=24246&page=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혜돈(慧頓)스님 본항목 혜돈스님(慧頓,1549~) 慧頓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혜돈스님(慧頓,_1949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속성
혜돈스님(慧頓) 실상문중(實相) ~의 일원이다
혜돈스님(慧頓) 지명스님(智明) ~의 수계제자이다
혜돈스님(慧頓) 용인 화운사 ~에서 출가하다
혜돈스님(慧頓) 대은스님(大隱) ~(으)로부터 계를 받다 사미니계
혜돈스님(慧頓) 고암스님(古庵) ~(으)로부터 계를 받다 비구니계
혜돈스님(慧頓) 익산 남원사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주지(감원)
혜돈스님(慧頓) 용인 화운사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주지(감원)
혜돈스님(慧頓) 안거 ~을(를) 성만하다 합천 해인사 약수암, 합천 해인사 삼선암, 대구 동화사 내원암(도학동), 부산 범어사 대성암(청룡동) 등

지도

  • 화운사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삼가동 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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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