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법농스님(法農, 1962生, 비구니)

bigu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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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법농(法農)스님은 희원(喜圓)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포교와 복지활동에 전념하고 서울 한성포교원을 창건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962 경북 문경 출생
1985 음성 미타사에서 희원(喜圓)스님을 은사로 출가
1985 범어사에서 자운(慈雲)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1987~1991 동학사 강원 졸업
1990 범어사에서 자운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1993 서울 한성포교원 창립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 불교학과 졸업
2002 원광대학교 동양대학원 기공학과 졸업
2003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 사회복지학과 석사과정
2022 한성포교원 주지
문중 실상문중(實相)
수행지침 일심청정(一心淸淨)
상훈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 동림인상 포교부분
중랑구청 표창장(복지분야)
수계제자(『한국비구니명감』) 도우(道雨)·도광(道光)
문중계보(『한국의 비구니문중』) 만성(萬性, 4)현행(賢行, 5)명안(明岸, 6)희원(喜圓, 7)법농(法農, 8)→도우(道雨, 9), 도광(道光, 9)

활동 및 공헌

출가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624
[장애인 나들이]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626
[한성포교원 어른 모시기 잔치 및 체육대회]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627
[어린이 불교학교 자연 체험]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628
[어린이 포교]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629
[하계 한성포교원 수련회]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629
[노인 잔치]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630
[한성포교원도서관]
사진출처:네이버블로그 https://blog.naver.com/mc355/50037911283
[한성포교원코끼리]
사진출처:네이버블로그 https://blog.naver.com/mc355/50037911283

법농(法農)스님은 1962년 음력 1월 24일 경북 문경에서 아버지 고재영과 어머니 권혁순 사이의 1남 3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개성이며, 이름은 고영희이다.

대성사 조실로 계셨던 임봉 큰스님의 유발(재가지) 상좌였던 어머니의 지극한 불심 속에서 스님은 고귀한 불연을 지닌 채 어린 시절을 보냈다.

스님은 학교를 졸업한 뒤 미술학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런데 학부모들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주변 사람들이 기독교인이었고, 불교를 믿는 사람은 소수인데다가 불교를 접할 기회도 그다지 많지 않은 실정이라서 답답하고 안타깝기만 했다.

기독교에서 운영하는 선교원은 여기저기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반면 어린이를 위한 유치원을 운영하는 사찰은 좀처럼 눈에 띄지 않았다. 모든 것이 그러하듯이 종교 역시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접촉하고 생활화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잘 알고 있던 스님으로서는 어린이 포교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그러던 차에 법농스님은 가끔씩 집에 들러서 법문을 해주시던 한 스님과의 인연으로 1985년 여름에 음성 미타사에서 희원(喜圓)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누구나가 행자 시절은 힘들기 마련이라지만 몸이 약하고 일도 제대로 할 줄 몰랐던 스님은 곤혹스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루는 49재에 올릴 송편을 찔 때였다. 스님은 송편 익는 냄새가 나면 곧 오겠다는 원주스님의 말만 믿고 계속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그러다가 송편을 다 태워버리는 바람에 원주스님[1]이 야단이었다. 그러자 억울한 마음에 스님은 원주스님에게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인데 왜 야단을 치느냐며 따지고 들었다.

그 일이 떠오르면 지금도 자신의 당돌한 태도에 얼굴이 화끈거린다는 스님은 그때 너그럽게 봐주신 원주스님께 마냥 죄송하고 고마운 마음과 아울러 존경심이 든다고 한다.

강원생활

스님은 수월치 않은 행자 생활을 마친 다음 동학사 강원으로 들어갔다. 강원 생활은 더없이 좋았지만 여러 가지 장애를 만나 고생도 많았다. 처음 2년 동안은 병치레가 잦은 탓에 대중 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곤경에 빠질 때마다 도반들과 대중스님들은 자신의 일인양 흔쾌히 도와주곤 하였다. 그 모든 분들에 대한 고마움을 스님은 늘 잊지 못한다고 한다.

장애인의 상황을 공감하다

어느 해 겨울, 스님은 다리를 다쳐 깁스를 하고 목발을 짚고 다녀야만 했다. 불편하고 익숙지 못해 걷다가 넘어지는 일이 잦았는데, 그때부터 스님은 날마다 이런 고통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장애인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그런 와중에 난간에서 떨어져 허리를 다쳤다. 하지만 스님은 사고를 당했으면서도 눈을 다치지 않음을 다행으로 여겼다. 눈은 멀쩡하기에 사물을 제대로 볼 수 있다는 자신의 처지가 새삼 고마웠던 것이다. 그리고 단지 앞을 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행복을 누리며 사는가를 깨달은 뒤부터 더욱더 경전 공부에 매달리게 되었다. 늘 고마운 마음을 갖고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한다는 생활 다짐으로 신심을 키웠던 스님은 타고난 성격이 밝고 명랑해서 주위에 언제나 사람들이 많았다.

동학사 강원에서 ‘동학’지 발행

동학사는 사철 내내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는 곳이다. 그리고 강원이 있는 만큼 동학사는 부처님 법을 전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조건을 갖춘 사찰이다.

스님의 강원 시절, 그때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많았던 터라 자판기를 운영하여 얻은 수익금을 이리저리 아껴가며 ‘동학’지를 발행하였다. 그렇기에 동학지에 대한 스님의 애정은 각별할 수밖에 없었다. 크고 작고를 떠나서 한 권의 책을 만들어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법문을 한 자라도 더 전하겠다는 일념으로 땀과 정성을 쏟으며 만들었던 작은 책자가 이제는 번듯한 포교지로 발전한 모습을 대할 때면 보람과 긍지를 느낀다고 한다.

스님은 동학사 편집실에서 일하며 숱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포교를 하는 동안 배우고 느낀 많은 것들을 생활 불교 실천의 밑거름으로 삼았다.

1991년 1월 강원을 졸업하고 본사로 돌아온 스님은 그때의 경험을 토대로 2년 동안 포교사 소임을 맡아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그러다가 좀 더 넓은 곳, 불법이 거의 미치지 못하다시피 한 곳에서 부처님 법을 펴야겠다는 원력을 세우고 서울로 상경하였다.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 불교학과에 입학

1991년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 불교학과에 입학하여 공부를 하면서 스님이 염두에 둔 곳이 바로 중랑구 면목동이었다. 이 지역은 교회가 많기로 유명할 뿐만 아니라 사찰이 몇 곳 있지만 포교의 황무지나 다름없었다.

한성포교원 개원

법농스님의 한결같은 원력은 마침내 1993년 4월 2일 한성포교원 개원으로 결실을 보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천막이라도 치고 포교를 하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했는데, 개원한 지 1년 만에 노보살님들이 노후 적금을 보시금으로 선뜻 내주신 덕분에 63평의 포교당을 지을 수 있었다.

한성포교원은 어린이 법회를 비롯하여 청소년 법회, 일반신도 법회, 통신원 법회, 가족 법회, 아버지 법회, 신행대학 법회 등 각 계층별로 법회를 열고 있다. 그러다 보니 매월 법회가 무려 28회 이상이나 열린다. 스님의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포교 활동으로 이뤄낸 결과였다. 점차적으로 신심어린 불자들이 늘어난 한성포교원은 1998년 1월 좀 더 넓은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신도들이 정성껏 모은 보시금으로 104평의 대지를 마련한 것이다.

포교를 해나가면서 스님은 산중 불교에만 익숙해져 있을 줄로만 알았던 노보살님들의 무상 보시행에 크나큰 감동을 받곤 하였다. 그리고 지극한 마음으로 노력하다 보면 부처님께서 반드시 도와주신다는 사실을 가슴 벅차게 느낄 수 있었다.

스님은 포교의 대상을 한정 짓지는 않지만 어린이 포교에는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다. 출가 동기도 그러했듯이 불교를 자연스럽게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어린이 포교가 무엇보다도 시급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린이 법회와 문경 수련원

그동안 어린이 법회를 맡아 오면서 스님은 아이들이 보내온 엽서며 그림, 편지들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고스란히 보관해왔다. 좀 더 많은 작품들이 모아지면 꾸밈없는 아이들의 생각이 그대로 담긴 글과 그림들을 책으로 엮어내기 위해서다. 그래서 어린이 법회 때는 동시나 편지 쓰기, 그림엽서 만들기 등을 적극적으로 장려하고 있다. 정서가 메마른 요즘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꼭 필요한 일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 불교계에는 안타깝게도 청소년 수련장이라고 딱히 내세울 만한 공간이 없는 실정이다. 그것은 비단 청소년층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어린이나 성인들도 그렇고, 스님들의 수련장도 변변한 곳이 거의 없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까 수련회를 가고 싶어도 마땅한 장소가 없어 곤란할 때가 참 많았다. 이에 법농스님은 또 하나의 거대한 원력을 세웠는데, ‘뜻이 있는 곳에는 길이 있다’는 속담처럼 경북 문경의 산 중턱에 만평의 땅을 시주받게 되었다.

스님은 앞으로 이곳을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도록 아름답게 꾸며 가족 단위로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 예정이다. 또한 기도는 물론 심신 단련을 위해 운동도 할 수 있고, 일상에서는 좀처럼 접하기 힘든 다(茶)문화와 사찰 음식 문화도 접할 수 있는 시스템을 두루 갖춘 수련장으로 만들 원대한 원(願)을 가지고 있다.

물론 이를 이루기 위해서는 진입로를 비롯한 도로 정비부터 시설비 등의 재정 문제를 포함하여 숱한 난제들이 산재해 있지만 스님은 한 걸음 한 걸음 헤쳐 나가겠다고 말한다. 거주 지역 내에서의 스님의 활동 또한 매우 역동적이다. 한성포교원을 통해 부처님의 자비를 실천하느라 하루가 바쁘기만 하다.

다양한 포교와 복지활동

몇 년 전부터 겨울철마다 김장을 담가 장애인과 소년소녀 가장에게 나눠주는가 하면, 여름에는 백중 때 마련한 보시금으로 군에 입대한 신도 자제들을 위한 군 포교에 회향하고 있다. 또한 초파일에는 ‘지혜의 등’으로 마련한 보시금 중 일부를 아이들 장학금으로 지원하고 일부는 불사에 사용하고 있다.

그뿐이 아니다. 해마다 정월에는 생활이 어려운 가정에 제수용품을 지원하고, 또 지역 노인들을 위한 경로잔치와 주민체육대회를 개최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스님은 주민들과 친숙한 사이가 되었다. 비록 작은 선행일지라도 그것이 하나하나 쌓여 나갈 때 더 할 수 없이 큰 사랑으로 중생들의 마음속에 스며듦을 새삼 느낄 수 있다고 한다.

또한 스님의 투명한 살림살이도 신도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포교원의 살림은 신도들에 의해 운영되고 있는데, 어려운 살림 속에서도 인재를 키우는 데에는 인색하지 않다. 해마다 초파일이 되면 스님 1명과 재가 불자 6명 에게 장학금을 지원하고 있다.

법농스님은 크나큰 원력만큼이나 의욕 또한 넘쳐난다. 그동안 이런저런 사정으로 미뤄왔던 어린이들을 위한 관음전을 새로 개설한 것이다. 얼마 후에는 천불의 천진불 동자 관음도가 새롭게 나투게 될 예정이다. 이는 어린이들이 천진스러운 심성 그대로 자라도록 돕고 싶은 마음에서 추진한 일이다. 한성포교원은 불교 서적이나 용품을 판매한 수익금과 사찰 신행대학에서 나온 기금의 일부를 어린이 포교에 투자하고, 일부는 고아원이나 양로원 위문에 쓰고 있다.

사찰 도서관 추진

이 밖에도 스님은 또 하나의 원력을 세우고 있다. 머지않아 지역 내에 사찰 도서관을 건립하여 불자들뿐만 아니라 종교를 가리지 않고 누구라도 이용할 수 있는 문화 공간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 계획과 아울러 신도들에게 한 달에 한 권 이상 책읽기 운동을 펴고 있으며, 가정에도 불교 서적을 갖춰놓고 공부하기를 권장하고 있다. 한편 스님은 타종교에 비해 불교가 길거리 포교에 미약한 점을 느끼고 면목동 지하철역에 한성포교원 도서마당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동안 지역 사회를 위해 봉사해온 공로를 인정받아 1999년 중랑구청에서 지역사회 복지 분야 표창장을 받았다.

원광대학교 동양철학과 대학원에 입학

스님은 2000년 3월 원광대학교 동양철학과 대학원에 입학하여 학업을 다시 시작하였다. 10년 가까이 포교에 전념해온 동안 스님은 타 종교인들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너무나 크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느껴왔다. 그들은 도전적이고 호전적이면서 적극적으로 전도를 할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요구하는 자격증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까 지역사회 에서 운영하는 복지사업은 거의가 타 종교인들이 운영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때문에 스님으로서는 마음이 급할 수밖에 없었고, 또한 불교계의 시급한 인재 양성을 위해 자신이 해야 할 바를 놓고 고민할 때가 많았다. 공부하랴, 포교하랴 쉴 틈이 없는 것이다.

스님은 후학들에게 ‘수행자로서 참선이면 참선, 경전이면 경전, 그리고 포교든지 불사든지 어느 분야에서건 굳건한 의지와 신념으로써 하고자 하는 일에 정진에 정진을 거듭하는 자세를 잃지 말고 각자의 본분에서 최선을 다해 주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자신 또한 ‘내 한 마음이 청정하면 시방이 다 청정하다는 수행 이념으로 포교의 대원 력을 세우고 열심히 노력하겠다.’고 스스로 다짐한다. 꽃꽂이를 비롯하여 아동미술, 양초공예 등에도 조예가 깊은 법농스님은 청소년 캠프와 놀이 문화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이며 앞으로 아이들 눈높이와 정서에 맞는 책을 펴낼 계획을 갖고 있다.

2022년 한성포교원 주지로 수행 정진 중인 법농스님의 수계제자로는 도우(道雨)·도광(道光)스님이 있다.

참고자료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법농(法農)스님 본항목 법농스님(法農, 1962~) 法農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법농스님(法農,_1962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속성
법농스님(法農) 실상문중(實相) ~의 일원이다
법농스님(法農) 희원스님(喜圓) ~의 수계제자이다
법농스님(法農) 음성 미타사 ~에서 출가하다
법농스님(法農) 자운스님(慈雲) ~(으)로부터 계를 받다 사미니계, 비구니계
법농스님(法農) 서울 한성사(한성포교원)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주지(감원)
법농스님(法農) 서울 한성사(한성포교원) ~을(를) 창건하다
법농스님(法農)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 ~을(를) 졸업하다 불교학과, 사회복지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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