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윤호스님(輪浩, 1907生, 비구니)

bigu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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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윤호(輪浩)스님은 신해행증(信解行證)의 실천적 구도행을 했으며 오늘날 청룡사의 위용을 세운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907 경기도 광주 출생
1911 청룡사에서 상근스님(祥根)을 은사로 출가, 금강산 관음암에서 안거 성만
1918 금강산 장안사에서 대련(大蓮)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1931~1941 청룡사에서 수행정진
1936 선학원에서 일봉(一鳳)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1943 오대산에서 한암스님으로부터 법호“묘각”이라는 호를 받음
1951 청룡사 주지
1956 청룡사 극락전, 시왕전 중창, 산신각, 우화루, 심검당 중창
단일구족계단 비구니 증사(별소계단 2・3회 존증아사리)
1996 청룡사에서 (세납 90세, 법랍 86세)입적
문중 법기문중(法起)
수행지침 부처님께 신심껏 지혜와 복덕을 겸비한 삶이었으면 한다.
상훈 문교부장관 감사장 수상(1956년)
수계제자(『한국비구니명감』) 진우(眞愚)・진홍(眞弘)・진문・진경(眞鏡)・경선(鏡先)・진적(眞寂)・진공(眞空)
문중계보(『한국의 비구니문중』) 등확(登彉, 4)→계흔(桂昕, 5)→창수(昌守, 6)상근(祥根, 7)윤호(輪浩, 8)진우(眞愚, 9), 진홍(眞弘, 9), 진문(眞門, 9), 진경(眞鏡, 9), 진적(眞寂, 9), 진공(眞空, 9)

활동 및 공헌

출가

[윤호스님] 출처: 문명대, 『청룡사-청룡사의 역사와 문화』, 2010, (사)한국미술사연구소 p 15
[좌측으로부터 本空스님, 만공 큰스님, 인홍스님 뒤줄 선경스님, 청룡사 윤호스님, 회룡사 도준스님, 상근스님 (월정사 지장암에서..계미년 하안거)]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p. 135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p. 138
[윤호스님 부도]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p. 139

백련(白蓮) 윤호(輪浩)스님은 1907년 11월 7일,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신원리 (현 서울시 서초구 신원동) 안골에서 아버지 김춘식과 어머니 수성 최씨의 맏딸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이며, 이름은 김선인(金善仁)이다.

1911년 3월 2일 불심이 지극하셨던 어머님은 다섯 살 된 딸을 부처님의 제자로 만들기 위해 청룡사 상근(祥根)스님을 은사로 출가시켰다. 출가한 해 8월 스님은 은사스님을 따라 금강산 장안사 관음암에 들어가 불문에 대한 법도를 익혔다. 자애롭기 그지없는 은사스님을 지극 정성으로 시봉하며 내금강산의 장안사에서 인간 본연의 도에 이르기 위한 피나는 정진에 몰두하며 성장하였다. 어느덧 7년의 세월이 흘러 윤호스님은 강대련 화상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한 후, 12세 되던 1918년에 다시 은사스님을 따라 청룡사로 돌아왔다.

금강산에서의 수행

어린 시절 금강산에서의 7년 수행은 스님에게 많은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태어날 때부터 허약했던 몸은 청정한 산사의 기운과 은사스님의 지극한 보살핌에 힘입어 건강한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무위자연의 가르침을 내면 깊숙이 간직한 것도 일생동안의 구도의 여정을 더욱 빛나게 해주는 바탕이 되었다.

스님은 그 후 10년 동안 청룡사에서 납자[1]로서의 기본 습의를 익히고 1927년 세수 21세에 이르러 어린 시절의 추억이 깃든 금강산을 다시 찾았다. 스님의 구도심을 엿볼 수 있는 용맹정진 화두 타파를 위한 수행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해 여름, 스님은 신계사 법기암에서 안거수선에 들었다. 당시 선방의 화주는 당대의 선승 임석두 스님이었고, 주지는 김탄월스님이었다.

법기암에서 2년 동안 두 철의 하안거와 두 철의 동안거를 성만한 스님은 1929년 여름부터 내금강 마하연유점사 반야암을 찾아 다시 세 철에 걸쳐 안거정진에 몰입하였다. 자성을 찾기 위한 스님의 구도 열정은 눈꼽만치의 게으름도 용납하지 않았다. 그 결과 만공선사로부터 인가를 받기에 이르니, 1930년 10월 4일 스님의 나이 24세였다. 만공 큰스님은 스님에게 ‘백련’이라는 법호와 함께 다음과 같이 법을 전하는 게문을 지어주셨다.


       천당도 꿈이로다. 지옥도 꿈이로다.
       그 꿈을 깨고 나면 꿈 아닌 것 무엇일까?
       어즈버 한 떨기 백련이 빙긋 웃음 짓노라.

       천당시환몽(天堂是幻夢) 지옥시환몽(地獄是幻夢)
       몽각부하물(夢覺復何物) 두두백련소(頭頭白蓮笑)

훗날 스님은 당대의 고승으로 일컫는 경봉 큰스님과 만공 큰스님의 크나큰 가르침이 스님의 삶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술회하였다.

청룡사로 돌아 오다.

그 이듬해인 봄 청룡사로 다시 돌아온 스님에게 사중의 대중이 모두 예를 올렸다. 금강산에서의 지칠 줄 모르는 용맹정진과 덕망을 익히 전해 들었기 때문이었다. 스님은 이때부터 은사 상근스님을 봉양하며 사중의 일을 몸소 챙겼다. 그 와중에도 경을 읽고 널리 불법을 전하며 제자를 가르치는 일에 추호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만행

1936년 3월 15일 스님께서는 서울 안국동 선학원에서 권일봉 율사를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하였다. 이후 5년 동안 청룡사의 안팎을 두루 살피던 스님은 세수 35세가 되던 1941년 여름 전국의 수행처를 찾아 만행의 길에 올랐다. 오대산, 태백산, 지리산, 경주, 부여 등지의 명승고적과 승지 고찰을 두루 참배하고 선지식을 친견하며 도를 이루고 법을 배웠다. 이때, 만공선사와 함께 당대를 풍미한 북방의 거목 방한암 선사를 배알하였는데, 이는 도의 경지를 더욱 깊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오대산 한암선사와 인연

2년 정도 만행을 거듭하던 스님은 1943년 여름 오대산 한암선사 회상에서 안거수선에 들었으니 이때 스님의 세수 37세였다. 스님의 구도력을 살피신 한암선사가 인가를 내리시니, 법호‘묘각(妙覺)’과 다음의 게문이 그 징표였다.


       마음속에 망령되이 과거의 법을 취하지 않고
       또한 미래의 일을 탐하여 집착하지 않으면
       현재의 모든 것도 실상 아무 것도 없도다.
       이렇게 실체를 알면 마음이 비어지리라.

       심불망취고거법(心不忘取過去法) 역불탐착미래사(亦不貪着未來事)
       불어현재유소주(不於現在有所住) 요달삼세실공적(了達三世悉空寂)

청룡사로 다시 돌아오다.

스님이 수행정진의 삼매에 깊이 빠져계시던 1943년은 태평양전쟁이 절정에 달해 있었다. 세상은 뒤숭숭하고 어디를 가나 편안하게 앉아서 공부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스님은 은사스님과 청룡사가 걱정이 되어 도저히 공부를 계속할 수가 없었다. 스님이 청룡사로 돌아오자 은사스님은 무척 반가워하셨다. 그러나 떠날 때보다 많이 노쇠해진 은사스님을 뵙자 스님은 한없이 최송하고 가슴이 아팠다. 이후 스님은 앞으로 은사스님 시봉을 잘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잠시도 은사스님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았으나, 사회는 무질서했고 혼란스럽기만 했다. 그러던 차에 6·25전쟁이 발발하니 서울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그러나 스님은 은사스님의 안위를 위해 청룡사를 지켰다. 스님의 이런 노력에도 은사스님의 기력은 하루가 다르게 쇠진해 지시더니 마침내 1951년 5월 21일 새벽 인시 [2]에 세수 80세, 법랍 68세의 일기를 마지막으로 입적에 드시고 말았다.

청룡사 주지에 취임

누구보다 따뜻했고 자애로우신 은사스님을 잃은 스님의 슬픔은 너무나도 컸다. 그렇지만 언제까지나 슬픔에 잠겨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은사스님의 유훈과 대중의 간청에 따라 1951년 윤호스님은 청룡사 주지에 취임하게 되었고, 청룡사가 도심 속의 유서 깊은 전통 사찰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도 바로 이때부터이다. 스님이 주지로 취임할 당시 청룡사는 그 많던 사찰 토지는 이미 남의 손에 넘어가고 223평만 남아 있었다. 이에 스님은 사찰의 기본 재산을 확충하고 도량 중건에 착수하는 한편 지금의 대지와 임야·전답 2,400여 평의 소유권을 확보해 나갔다. 이 모든 일은 스님의 드높은 원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윤호스님 부도(오른쪽)]
사진촬영: 김은희(2024.4.28)

청룡사 중, 개축 역사

청룡사 중, 개축 역사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1954년, 3칸에 불과하였던 극락전을 6칸으로 증축하고, 화제로 전소되어 흔적만 남아 있었던 시왕전을 1957년에 새로 짓고, 상·하 21칸의 강당인 우화루를 중창하였다. 이때 시왕전에 봉안한 시왕존상은 대구 보현사에서 이운해 온 것으로 1660년에 조성된 불상이다.

다시 1959년에는 금어 김일섭스님을 초빙해 시왕각부 탱화를 조성・봉안하였으며, 요사 4칸을 신축하고 낡은 전각을 중수하였다. 이밖에도 산신각, 칠성각, 독성각을 신축하고 10여 칸에 이르던 심검당인 승당(현재의 선방)을 1960년에 이르러 22칸으로 증축하였다.

1972년 11월 29일에는 극락전과 칠성각을 청룡사의 전통에 따라 해체한 뒤에 그 자리에 43평 9합에 이르는 대웅전 상량식을 갖고 다음 해에 완공을 하였다.

현재 청룡사 정전인 이 대웅전은 중요무형문화제 제 74호인 대목장 고(故) 이광규씨가 고려시대 양식으로 세운 것이며, 후불탱화와 신중탱화는 중요무형문화재 제48호인 단청장 임석정스님이 조성하신 것이다.

1977년 설상가상 도시 건설 계획으로 12m의 도로가 절 한복판을 가로지르게 되자 스님이 청와대에 무려 여덟 번이나 진정서를 내며 당국의 전통 사찰 보전의 당위성을 촉구해 도시계획을 전면 수정하도록 하였다. 청룡사 대중은 물론 후학인들에게 스님의 가람수호 의지를 보여준 일화이다.

스님은 20여 년 간 여러 가지 불사와 선원을 운영하였으며, 강원을 10년 동안 운영하였다. 당시 강사스님은 명성(眀星)스님(운문사 회주)이었는데, 윤호스님은 명성스님에 대한 고마움을 마음에 늘 간직하였다.

기도 가피력을 경험하다.

스님은 학인들에게 ‘글공부나 선(禪)공부나 신심이 있어야 하며, 어두운 밤에 컴컴한 길을 가다보면 어느새 새벽이 밝아오듯 부처님께 신심을 다하다보면 저절로 지혜(智慧)와 복덕(福德)을 겸비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윤호스님은 기도 가피력을 입은 경험이 있다. 스님이 금강산 마하연에 주석할 적에 은사스님과 함께 보덕굴에서 관음기도를 하였다. 그러던 중 꿈속에 하얀 노장님이 나타나 약 세 첩을 주셔서 그것을 받았는데, 보덕굴에서 3일 기도를 마친 뒤 20년 동안 고생했던 손가락의 병과 두통이 말끔히 나은 것이다. 이 때부터 이듬해까지 일주일씩 정기적으로 기도를 하였다고 한다.

입적

평소 ‘승려는 모든 사람의 모범이 되어야 하고, 또한 공부를 할 때 마구니가 생기는 것은 결코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된다.’ 말하던 윤호스님은 입적하던 날도 새벽 2시에는 일어나 예불 드리고 법화경 독송을 한 후 홀로 죽비를 잡고 공부하였는데, 젊은 납자 못지않게 열심히 정진을 하였다고 제자 진우(眞愚)스님은 전한다. 그렇게 평생을 계율 속에서 신해행증(信解行證)의 실천적 구도행을 몸소 보였던 스님은 그 선업을 만 중생에게 회향하고 홀연히 입적에 들고 말았다. 1996년 2월 1일, 스님의 세수90세, 법랍 85세였다.

스님의 법제자는 진우(眞愚)·진홍(眞弘)·진문(眞門)·진경(眞鏡)·경선(鏡先)·진적(眞寂)·진공(眞空)스님 등이 스님의 유지를 받들고 있으며, 스님의 조카상좌이던 경선스님은 스님이 입적한 후에 위패상좌가 되었다. 손상좌로는 혜묵·일여·성도·현종스님 등이 있다. ※ 운문회보 발취 (1986년 12월 30일 제 19호)

청룡사

[청룡사 대웅전]
사진출처:티스토리 https://gotemplestay.tistory.com/171
[청룡사 일주문]
사진출처:티스토리 https://gotemplestay.tistory.com/171

[청룡사 소개 1}


청룡사(靑龍寺)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동망산길(현재 숭인동)에 위치한 절로, 고려 태조 5년(불기 1466년, 서기 922년, 단기 3255년) 도선국사의 유언에 의해 창건되었다. 이 사찰은 한양의 외청룡 산등성이에 지어져서 ‘청룡사’라 하였다.고려 태조 17년(불기 1478년, 서기 934년) 제1세 주지로 혜원(慧圓) 비구니스님이 절을 맡은 이래로, 줄곧 비구니스님들만이 주석(住錫)하고 있다.

그 예로 고려 말기 이제현(李齊賢)의 딸이자 공민왕비인 혜비(惠妃)가 망국의 슬픔을 안고 이곳 청룡사에서 스님이 되어 수도(修道)하였으며, 태조 이성계의 제2왕비 강씨 소생이며 세자 이방석(李芳碩)의 누나인 경순공주(慶順公主)도 이곳에서 아버지 태조의 지시를 받아 스님이 되어 정진(精進)하였다고 전해진다.세조 때에는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를 떠난 후,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宋氏)가 이곳에서 법호를 허경(虛鏡)이라고 하고, 17세에서 82세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65년간을 일념으로 정진하며, 날마다 동망봉(東望峰)에 올라 영월 쪽을 바라보았다고도 한다. 그 후 세상을 떠난 지 178년이 되는 숙종 24년에 비로소 정순왕후(定順王后)로 추복(追復)되고, 또 251년이 되는 영조 47년(불기 2315년, 서기 1771년) 영조대왕은 어명을 내려, 청룡사에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라는 비문과 ‘전봉후암어천만년(前峯後巖於千萬年)’이라는 비각 현판의 어필(御筆)을 내려 비석과 비각을 세우고, 정순왕후가 매일 오르던 청룡사 앞 높은 산봉을 동망봉(東望峯)이라는 표석(標石)을 세웠다. 청룡사에는 17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밝혀진 석지장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보물 제1821호)이 있으며, 이 보물 외에도 1868년(고종 5년)에 제작된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 칠성도(七星圖), 현왕도(現王圖)가 있으며, 1898년(광무 2년)에 제작된 감로도(甘露圖), 1902년에 제작된 신중도(神衆圖), 가사도(袈裟圖), 석조삼불상(石造三佛像) 등이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숭인동 언덕에 자리하고 있는 청룡사는 대부분의 전각 배치는 조선 중기 사찰의 전형적인 구성인 산지중정형(山地中庭形)의 배치이다. 산지중정형은 가운데 마당을 중심으로 후면에 중심 불전을, 좌우에 승려들이 기거하거나 대중을 받는 요사(寮舍)를, 전면에 사찰로 진입하는 입구가 되면서 법회 등을 여는 우화루(雨花樓)를 배치하는 형식이다. 청룡사는 우화루 우측에 다포형식의 일주문(一柱門)을 두어 사찰 안으로 진입하도록 했지만, 대웅전을 중심으로 마주보는 곳에 우화루를 두고, 좌우에 심검당과 명부전을 배치하여 조선 중기 산지사찰의 구성을 따르고 있다. 대웅전 뒤쪽 약간 높은 곳에 산신을 모신 산령각을 둔 것은 다른 사찰들과도 비슷한 모습이다.

※ 내용출처: 본 청룡사 소개 자료는 『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74132)의 "청룡사" 내용 중 일부 오류를 수정하여 현 청룡사 주지 진홍 스님이 2023년 10월 16일에 한국비구니승가연구소에 제공한 자료입니다.

{청룡사 소개 2}

청룡사는 예로부터 왕실과 인연이 깊은 사찰이다. 인목대비(영창대군의 어머니)가 기도처로 삼기도 하였으며, 특히 상근(祥根) 노스님을 통해 민 중전(민비)과 후궁에 대한 일화도 전해져오고 있다. 당시 광화당 항아님이 잉태를 하여 법륜사 뒷채에 몰래 숨어 지냈는데, 나한전에서 기도를 하던 중에 꿈에 초립동을 만났다고 한다. 기도 덕분인지 하루는 궁에서 가마를 보내 항아님을 데려 오게 하였다. 항아님은 민비의 해(害)를 입을까봐 두려웠지만 나한님의 가피로 결국 왕자를 생산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사적기'에 의하면 청룡사는 922년(고려 태조 5년)에 도선(道詵)국사의 유언에 따라 왕명으로 지어졌으며, 풍수지리적으로 한양의 외청룡(外靑龍)에 해당되는 산등에 지어져서 청룡사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제1대 주지로 비구니 혜원(慧圓)스님이 주석한 이래 줄곧 비구니스님의 수행 도량이었다. 1036년(고려 정종 2년)에 만선(萬善)스님이 처음으로 중창하였고, 1158년(고려 의종 12년)에 회정(懷正) 스님이 두 번째로 중창하였다. 이때 부근에서는 청룡사 동북쪽 고개 너머에 있는 보문사(普門時) 창건 이후 처음 세워진 절이라 하여 '새절 승방'[3]을 은사로 출가 이라고도 불렀다.

1299년(고려 충렬왕 25년)에 중국 원나라의 침입으로 절이 황폐화되자 지환스님이 중창하였고, 그 뒤 조선시대에 와서는 1405년(태종 5년)에 무학(無學)대사를 위하여 왕명으로 중창했다. 또 1512년(중종 7년)과 1624년(인조 2년)에도 법공(法空)스님과 예순(禮順)스님이 각각 중창하였다.

1771년(영조 47년)에는 단종의 왕비 정순(定順)왕후가 머물렀다고 하여 영조가 직접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 라는 글을 내려서 비석과 비각을 세우게 했는데, 이때 절 이름이 잠시 ‘정업원(淨業院)’으로 바뀌었다. 1813년(순조 13년)에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이듬해 묘담(妙潭)스님과 수인(守仁)스님이 다시 중창하였고, 1923년(순조 23년)에 왕명으로 다시 옛 이름인 청룡사로 고쳐 부르게 하였다.

1902년(고종 6년)에 정기(正基)스님과 창수(昌洙)스님이 중창하였고, 1918년과 1932년에 상근(祥根)스님이 중창하였다. 1954년에서 1960년 사이에 윤호(輪浩)스님이 대대적인 중창 불사를 이룩하였고, 1972년에 대웅전을 다시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고려말의 명신(名臣)인 익재 이제현(李齊賢)의 딸이자 공민왕비인 혜비(惠妃)가 청룡사에 거주하였고, 조선 초 태조의 딸 경순공주(慶順公主)가 머물기도 하였다. [4]


세조에 의해서 폐위된 후 강원도 영월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은 단종은 유배를 갈 때 단종비(端宗妃) 정순왕후 송씨와 청룡사 우화루(雨花樓)와 영리교(永離橋)에서 마지막 이별을 하였고, 왕비는 스님이 되어 영월 방향의 동쪽 언덕에 올라서 단종의 무사 귀환과 넋을 달랬다고 한다. 그 장소를 동망봉(東望峰)이라고 한다. 동망봉은 청룡사 동쪽 앞에 우뚝 솟은 바위산을 말하는데, 이곳에는 현재 숭인공원(일명 동망산공원)이 있다. 숭인동과 보문동의 경계가 되는 동망산 서쪽 부분은 일제 때부터 광복 이후까지 채석장으로 쓰여 산의 반쪽이 사라져 절벽이 되었다.

정순왕후 송씨는 단종과 이별을 한 후 희안(希安), 지심(智心), 계지(成智) 세 시녀를 데리고 정업원 암자에서 초근목피로 연명하며 지냈다. 이에 조정에서는 근방에 집을 지어주고, 이곳을 영빈정동(英嬪貞洞)이라 부르게 하였으나 송씨는 끝내 그 집에 들지 않고 정업원에 머물렀다. 송씨는 아침저녁으로 동망봉에 올라 영월 쪽을 바라보며 단종의 평안을 빌었으나 세조 3년(1457년) 10월 4일 헤어진 지 4개월 만에 영월에서 노산군이 사약을 받고 숨을 거두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그 이 후부터 송씨는 동망봉에 올라 단종의 고혼(孤魂)이 헤매는 영월을 바라보며 명복을 빌었다.

영조 47년(1711년), 영조는 창덕궁에 갔다가 현재 동대문구 숭인동인 연미정동(燕尾汀洞)의 정업원을 들러 단종비 송씨의 옛일을 물어보았다. 이때 전 참판(參判) 정운유(鄭運維)가 불려 와서 말하기를 세조가 송씨의 의지할 곳이 없음을 측은히 여겨 성안에 집을 마련하여 주고자 하였으나 송 씨가 동대문 밖에서 동쪽을 바라다 볼 수 있는 곳에 거처할 것을 원하였으므로 재목을 내려 집을 꾸민 것이 정업원이라고 하였다. 영조는 지난날의 일을 듣고 나서 친히 청룡사 자리에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 라는 글을 써서 비석을 세우게 하고, 또한 '동망봉(東望峰)' 이란 석 자를 써서 정순왕후 송씨가 올랐던 바위에 새기게 하였다. 그러나 일제 때 채석장이 되면서 바위가 깨어져나가 글씨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현재는 동망봉 정상 주변까지 주택이 밀집하여 바위산 봉우리의 옛 모습은 찾을 수 없는데, 정순왕후가 단종의 무사귀환을 기원하던 곳에는 동망산신각이 세워져 있다. 이 산신각은 언제 누가 세웠는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15세기경에 호랑이가 출몰하여 인명과 가축의 피해가 심하므로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사당을 짓고 산제(山祭)를 지내기 위해 건립하였다고 전한다. 주민들은 매년 음력 10월 초하룻날이면 이 산신각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다.

  • 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권. 뜨란출판사, 2007, pp.46-49
  • 이 밖에 청룡사의 역사와 문화재에 관한 다양한 사진자료는 청룡사에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p. 133~142.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351.
  • 전국비구니회, 『한국의 비구니의 수행과 삶 2』, 예문서원, 2009년, pp 191~211
  •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p. 154~157, 355, 363.
  • 하춘생. 『깨달음의 꽃2(한국불교를 빛낸 근세 비구니)』. 여래, 2001, pp. 105~119
  • 법보신문, 1. 목련회 https://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211303
  • 인터넷 블로그, 일생을 호국과 사원불사에 몸바친 상근, 윤호 두 스님 http://w3devlabs.net/hb/archives/58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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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호(輪浩)스님 본항목 윤호스님(輪浩, 1907~1996) 輪浩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윤호스님(輪浩,_1907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속성
윤호스님(輪浩) 법기문중(法起) ~의 일원이다
윤호스님(輪浩) 상근스님(祥根) ~의 수계제자이다
윤호스님(輪浩) 서울 청룡사 ~에서 출가하다
윤호스님(輪浩) 금허스님(錦虛) ~(으)로부터 계를 받다 사미니계
윤호스님(輪浩) 일봉스님(一鳳) ~(으)로부터 계를 받다 비구니계
윤호스님(輪浩) 서울 청룡사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주지(감원)
윤호스님(輪浩) 서울 청룡사 ~을(를) 중창하다
윤호스님(輪浩) 계단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단일계단 비구니 증사(별소계단 2-3회 존증아사리)
윤호스님(輪浩) 안거 ~을(를) 성만하다 고성(고산) 장안사 관음암(금강산) 등

지도

  • 청룡사 : 서울특별시 종로구 숭인동 17-1



다른 비구니 스님

지식관계망




주석

  1. 검은 옷을 입은 스님
  2. 십이시(十二時)의 셋째 시로, 오전 3시에서 5시까지이다.
  3. 2023년 10월 16일 한국비구니승가연구소에서 진행한 인터뷰에서 현 청룡사 주지 진홍스님은 '새절 승방'이라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고 지적함
  4. 2023년 10월 16일 한국비구니승가연구소에서 진행한 인터뷰에서 현 청룡사 주지 진홍스님은 이 문장을 "혜비가 청룡사에서 출가하였고, 조선태조 딸 경순공주가 출가하였다."로 보아야 적절하다고 지적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