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허대련(錦虛大蓮)

bigu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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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법호·법명 : 금허대련(錦虛大蓮,1875~1942)
  • 생애·업적

금허대련(강대련)스님은 용주사 뿐 아니라 한국 근세 불교사에서도 큰 오점을 남긴 인물로 평가되었다.
호는 금허(錦虛), 대련(大蓮)이고 첫 법명은 보영(寶英), 속성은 강(姜)씨로 경남 진주 출신으로 14세때 부친이 죽자 금강산 장안사에서 부친을 천도하고 진허(震虛)스님에게 출가했다. 1901년 순헌비(淳獻妃, 고종의 계비)로부터 만금(萬金)을 받아 해은암(海恩庵) 자리에 해광전(海光殿) 등을 신축했다.
1906년에도 다시 순헌비에게서 6천원을 하사받아 해인사 대장경판 정장(釘裝)을 보수하고 불경 1,400권을 간행하여 금강산 정양사(正陽寺)에 봉안하면서 빠진 책을 보충하게 했으며, 1911년 용주사의 주지로 부임했으며, 1914년 11월25일에는 각황사(覺皇寺)에서 <불교진흥회>를 설립하였고, 이 모임은 해인사 주지 회광(晦光)·법주사 주지 진하(震河)등 수십 인이 발기인으로 참석했는데, 회광이 그 대표자였고 대련은 부회주를 맡았고, 또한 용주사 주지를 계속 맡고 있던 그는 1915년 조선사찰 30본산 연합사무소를 각황사에 두고 그 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그가 참여했던 이들 두 단체는 대표적 친일불교 단체로 평가됩니다. 1919년 10월 사이토 총독에게 제출한 <조선불교기관 확장 의견서>라는 일종의 건의서는 그의 불교관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자료이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이며, 그는 이른 바 명고축출사건(鳴鼓逐出事件)으로 잘 알려진 대표적 친일파 인물이다.
1922년 3월 각황사에서 열린 「불교유신회」모임에서 김상호(金尙昊)등 청년스님 100여명이 대련의 친일 행각을 성토한 후, 그의 등에 북을 지우고 '불교계대악마강대련 명고축출(佛敎界大惡魔姜大蓮 鳴鼓逐出)'이라고 쓴 장대를 들고 북을 두드리며 종로거리를 행진한 이른바 '명고사건'이 발생했다.
그는 이 사건이후로도 총독부의 웅호를 계속 받으면서 입적할 때까지 일정한 형태의 권한을 계속 지닐 수 있었다.
※ 출처 : 용주사 주요인물, 위키백과사전(강대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