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법천스님(法泉, 1944生, 비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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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법천(法泉)스님은 무량사에서 인화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평생을 기도로 보냈으며 논산 영주사를 중창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944 강원 평창 출생
1957 무량사에서 인화스님을 은사로 출가
1958 혜암(惠庵)현문(玄門)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1962 석암(昔岩)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1963~1967 동학사 강원 졸업, 전국 선원 15안거 성만, 영주사 창건 30년 기도 정진
2004 영주사 주지
문중 육화(六和)문중
수행지침 오직 불전에 기도 정진
생활신조 기도 염불
상훈 대전 지방 검사상 표창 외 다수
수계제자 연강(蓮江)・진성(眞性)

활동 및 공헌

출가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권. 뜨란출판사, 2007, p. 502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권. 뜨란출판사, 2007, p. 497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권. 뜨란출판사, 2007, p. 498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권. 뜨란출판사, 2007, p. 499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권. 뜨란출판사, 2007, p. 501
[영주사 전경] 사진출처: 다음 블로https://blog.daum.net/nykdarkforest69/15863058
[영주사 나한전 전경] 사진출처: 다음 블로그 https://blog.daum.net/nykdarkforest69/15863058

난곡(蘭谷) 법천(法泉)스님은 1944년 11월 13일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에서 아버지 이종수와 어머니 석금갑 사이의 2남 1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이며, 이름은 이복순이다.

스님의 오빠는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었고, 13세 되던 해에는 아버지마저 여의고 말았다. 어린 나이에 크나큰 상실의 아픔을 겪은 스님은 어느 날 부여 무량사에 들르게 되엇다. 그런데 스님들이 벚꽃나무 아래 거니는 모습이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선인처럼 신성하게 느껴졌다. 스님은 자신도 속세를 떠나 무량사 스님들처럼 신성한 삶을 살고 싶었다.

그리하여 법천스님은 1956년 10월 1일 17세의 나이에 무량사에서 인화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하지만 절에 온지 2년 만에 집안의 반대로 작은아버지에게 붙잡혀 돌아가게 되었다. 어른들은 스님이 잠을 자는 사이에 승복을 벗기고 속복으로 갈아 입혔다. 스님은 작은아버지에게 ‘우리 아버지와 똑같이 해 줄수 있느냐?’고 물었다. 작은아버지는 이 물음에 선뜻 대답하지 못하였고, 마침내 스님은 다시 무량사로 들어갈 수 있었다.

무량사에서 행자 생활을 할 때 일이다. 주지스님이자 스님의 사숙인 우진스님은 대중에게 탁발을 못하도록 하고 농사를 지어 먹게 하였다. 당시 무량사는 강원과 선방이 같이 있어서 기거하는 대중이 많았다. 그런데 어느 해 고추 농사를 못 해서 고추장을 먹을 수 없게 되자 대중들은 주지스님 모르게 탁발을 하기로 뜻을 모았다. 강원 학인들과 선방 수좌들이 하루 동안 나가서 탁발을 해왔고, 모두 모아보니 생고추 20가마가 넘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주지스님은 고추를 모두 태워버리겠다며 벼락같이 화를 냈다. 주지스님의 호통에 법천스님이 고추를 버리겠다며 들고 나갔다. 그리고 동네 이웃집에 고추를 맡겨 말렸고, 결국 그해 김장용 고추로 유용하게 잘 썼다고 한다. 법천스님은 무량사 황태호 스님 밑에서 어산을 공부했다. 여러 스님들이 어산을 배웠는데 그 중 스님은 남다른 소질을 보였다. 소리뿐만 아니라 기도도 열심히 했는데, 한번 시작하면 끝날 때까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조금도 요동하지 않고 오로지 기도에만 매진하였다.

수학

스님은 2년간의 행자 생활 끝에 1958년 마곡사에서 혜암 노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계하였다. 23세 되던 해에는 동학사 강원에 들어갔는데, 당시 강주로는 동학사 조실스님인 경봉 큰스님이었고 강사는 묘엄스님이었다. 스님은 동학사 강원 시절, 노전소임을 살면서도 경전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아픈 도반스님들을 위해 어려운 일들을 마다하지 않았다. 스님은 사집을 마치고 몸이 좋지 않아서 강원을 나오게 되었다.

서울 대원암에 살 때는 규율이 엄격한 대중 생활 속에서 따로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모든 일을 해결해나가는 등 매우 부지런한 생활을 하였다. 일만큼 공부도 열심히 하였는데, 그런 스님이 대견했는지 어른스님들이 살짝 불러 ‘머리도 식혀가며 해야 한다.’ 며 동대문에 극장 구경을 갔다 오라고 용돈을 쥐어주기도 하셨다. 법천스님은 이후 1962년 법주사에서 석암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받았다.

무량사 가람수호

대전 보문 중고등학교를 세울 때의 일이다. 다른 종파인 이재복 스님이 학교를 세울 동안 땅을 빌려달라고 해서 12개의 사찰 스님들이 절 땅을 넘겨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학교를 세우고 나서서 이재복 스님은 땅을 넘겨주지 않았고, 무량사와 마곡사 등 12개 사찰 스님들은 재판을 걸고 나섰다. 재판은 10년이나 계속되어 결국 무량사, 마곡사 등 재판을 신청한 사찰들은 땅을 되찾게 되었다. 재판에 동참하지 않은 사찰의 땅은 안타깝게도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갔다고 한다. 재판이 진행되던 긴 세월 동안 무량사는 절을 운영할 비용이 없어서 수학여행단에게 방을 빌려 주고 밥을 해주며 돈을 모았다. 만약 소송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까지도 여전히 큰절의 땅을 되찾지 못했을 것이다. 스님은 권속이 힘을 모아 어려운 가운데 소송을 하였기에 큰절을 지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한번은 법천스님이 오세암으로 기도를 하러 갔다. 그런데 어느 비구스님이 스님을 보더니 '비구니가 어디서 펄럭이며 기도를 하느냐.'며 얕잡아보는 것이었다. 스님은 가지고 온 양념으로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그 비구스님에게 공양을 대접했다. 비구스님은 음식을 먹고 스님의 염불소리를 듣더니 '저 비구니는 한 경계를 넘었구나.' 하면서 숙연해졌다고 한다. 스님은 목소리가 커서 남자 음성 같고, 체구는 작아도 남자들도 당해내지 못했다고 한다.

후학들에 대한 당부

법천스님은 후학들에게 수행자의 본분사를 잊지않도록 늘 당부한다.

“옛날 스님들은 순전히 몸 수고로움으로 사셨습니다. 하루 사분정근을 하면 한번에 서너 시간이 보통이라 하루에 열여섯 시간씩 기도를 하였지요. 요즘 스님들을 보면 저는 옛날이 그리워집니다. 세상이 너무 많이 변한 것 같습니다. 스님들이 솔선수범하여 대중들의 지도자가 되어야 하는데, 어깨에 힘만 잔뜩 주고 꼭 깁스를 한 듯이 행동을 하는 스님들이 많습니다. 하심 하는 것이 스님들 삶입니다. 스님들이 서로 잘난 체해서 무얼 하려고 합니까? 지금 시대는 '비렁이끼리 자루찢기' 하는 형국입니다.”

또 스님들의 연대감을 고취시키기 위한 조언도 들려준다. "요즘은 가짜 스님들도 많이 있지만, 스님들끼리 서로 따뜻하게 대해주고 감싸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옛날 스님들 말씀에 ‘숯불도 모으면 화력이 세지고 흩어지면 사그라든다.’ 고 하였습니다. 스님들도 힘을 모아야 합니다. 흩어져서 무엇을 하려고 그럽니까? 스님들은 대중에 모여 있어야 사람들이 알아주지, 흩어지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법입니다. 선방 다니면 선방 다닌다고, 강원 나오면 강원 나왔다고 각자 어깨에 힘을 주더군요. 옛날 스님들은 서로 부족한 것을 채워주며 살았습니다. 현대에 출가한 스님들이 옛 어른스님들의 삶을 배웠으면 좋겠습니다.”

법천스님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항상 변함없는 모습이다. 스님은 단 두 차례 해외여행을 다녀왔는데, 일본에서 기도초청이 들어와 기도만 해주고 그대로 돌아왔다고 한다.

신이(神異)한 경험

기도로 힘을 얻은 스님은 병든 사람도 기도만 하면 다 나을 만큼 영험한 기도력을 보여준다. 기도의 힘 때문인지 스님은 기도 중 신이(神異)한 경험을 여러 번 겪었다. 한번은 스님이 금지암에서 7일간 기도 정진하는데, 꿈에 옥색 옷을 입은 신비한 사람이 나타나서 “너에게 열쇠 꾸러미가 필요할 것이다.”라며 열쇠 꾸러미를 주었다. 또 간월도에서 백일기도를 할 때는 관음보살을 친견하였는데, “우리 법천이 착하고 착하도다.” 하시며 머리를 세 번 쓰다듬어 주었다고 한다.

생로병사에 시달리는 중생을 구하고자 대자비심으로 출가하신 부처님의 뜻을 좇아, 법천스님은 평생을 수행하며 뭇 중생의 근본 고(苦)를 해결하기 위해 용맹정진하고 있다. 스님은 통도사에 주석하던 경봉스님이 준 '부모 미생지전(未生之前), 이 뭣고’ 화두를 항상 놓지 않고 행주좌와 어묵동정에 항상 정진하며, 기도나 참선은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것을 강조한다.

삼덕선원을 건립

법천스님은 대전 학하동에 있는 자광사에서 화엄경 출판을 준비하는 탄허스님을 몇 년간 시봉하였다. 1964년에는 대전 흑석동의 600평 대지에 삼덕선원이라는 사찰을 지어 선학원에 등록을 하였다. 속가의 어머니가 전사한 큰아들의 제사를 평생 지내줄 것을 당부하며 남긴 유산과 후손이 없는 어떤 신도가 스님을 양딸로 삼고 죽으면 제사를 지내달라며 남긴 돈으로 삼덕선원을 지었다.

영주사를 중창하다

그 후 스님은 늘 부처님 대도량을 일구는 원을 세우고 기도 정진을 하였다. 그러던 중 시절 인연이 되어 1984년 명산으로 이름난 대둔산 아래에 대지 35,000평을 마련하고 20여 동의 건물이 들어선 영주사를 건립하게 되었다. 불사를 시작하기 전 스님은 가시덤불로 뒤덮인 절터에 앉아 있으면 꼭 안방에 있는 것처럼 편안했다고 한다.

영주사터에는 사찰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연꽃모양의 봉우리처럼 생긴 부도가 그것인데, 속은 비어있고 글씨는 오래되어 알아볼 수가 없었다. 또 감나무 네 그루와 오동나무 한 그루가 있었고, 천명 대중이 콩을 갈아 먹을 수 있는 맷돌도 있었다. 본래 있던 절 이름은 영은사(靈隱寺)였다. 영은사는 삼국시대의 황산벌 전투에서 희생된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창건되었는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던 것을 철종 때 복원하였다. 6·25전쟁 당시 공비가 자주 출몰한다고 하여 아군이 절에 불을 질러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스님은 이곳에 불사를 시작하면서 영(靈)이 은거한다는 의미보다는 영(靈)이 상주(常住)한다는 뜻이 더 낫다고 생각하여 이름을 영주사(靈住寺)로 바꾸었다. 그리고 억울하게 죽은 영혼들과 사연 많은 영혼들의 서러움과 억울함을 풀어주는 넉넉한 도량이 되기를 발원하였다.

스님의 원력 때문인지 영주사 불사를 하던 중에 신이(神異)한 일이 많이 일어났다. 그 가운데 오백나한님을 모시게 된 이야기는 유명하다. 처음에는 나한님을 모실 계획이 없었다. 그런데 하루는 지금의 오백나한전 터에 가보니 숲이 우거지고 절벽의 형상이 아주 절묘하였다. 그러자 이곳에 나한님을 모셔야겠다는 원력이 생겼다.

나한상을 모실 터를 정해놓고 보니 옆쪽에 조그마한 옹달샘이 눈에 띄었다. 스님은 그날 밤 영주사 뜰에 관 두 개가 놓여있는 기이한 꿈을 꾸었다. 다음날 일꾼들을 시켜 옹달샘을 파기 시작했다. 스님은 그날 또 꿈을 꾸었는데, 방안에 묘 두 개가 있는 것을 보고 송장이 타지 않을까 염려했다고 한다.

법천스님은 이튿날 샘에서 핏물이 두 줄기로 흘러내리는 것을 목격하였다. 그리고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겼다. ‘샘을 발견하고 두 번이나 이상한 꿈을 꾸었다. 이것은 필시 손을 대서는 안 되는 것이리라.' 스님은 샘을 파던 작업을 즉시 멈추고 다시 원래대로 복구하도록 했다.

그 후 은사스님께서 눈이 침침하다고 하셔서 부처님께 눈을 낮게 해달라고 기도한 다음 그 샘물에 눈을 씻었다. 그러나 얼굴만 붓고 눈이 낫지는 않았다. 그래서 옹달샘에 여러 가지 진수와 과일 등을 올리고 기도를 했다. 그러자 희한하게도 노스님의 눈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 이후 옹달샘은 영험이 있는 샘으로 불려졌다. 법천스님은 옹달샘 바로 위의 절벽 아래에 오백나한님을 모셨는데, 그곳에서 열심히 기도하면 기도 성취를 이룰 수 있다고 전해진다.

경내에 우뚝 서있는 금강 사리 석탑이 건립된 이야기는 더 신기하다. 스님이 신도들과 함께 지장기도를 드리는데 공중에서 “수득이 가 탑을 세웠노라.” 하는 음성과 함께 서광이 비치는 이적이 일어났다. 그 자리에 참석했던 많은 신도들은 모두들 환희심을 내었고, 덕분에 불사도 원만히 이룰 수 있었다.

한 가람의 향기는 주변 경관도, 절의 연륜도, 건물의 웅장함도 아닌 그 절에 주석하면서 부처님을 닮아가는 스님네의 향기와 같다. 영주사를 찾는 사람들은 어머니의 품처럼 마음이 평온해진다는 말을 자주 한다. 법천스님의 넉넉한 마음이 사람들에게 전해진 것이리라. 작은 돈으로 시작하였던 불사가 지금의 대가람으로 변모한 것은 오직 기도정진하며 원력으로 평생을 살아온 법천스님의 힘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스님은 항상 백장청규인 일일부작 일일불식을 한시도 잊지 않고 생활 속에서 실천하고 있다. 불교는 이론이 아니고 실천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노인복지사업에도 관심이 많은 스님은 영주사 조실 스님인 풍운보안(風雲普雁) 스님의 아낌없는 지지와 후원으로 노인요양시설인 영은원(靈隱院)을 2007년 4월에 착공하여 2008년 4월 15일에 개원했다.
법천스님은 항상 부처님 시봉하느라 새벽에 일어나서 하루 종일 일하고 저녁 늦게야 방에 들어간다. 법천스님이 평소 좋아하는 다음의 글에는 스님의 수행관이 담겨 있다.


         삼일수심(三日修心)은 천재보(千載寶)요
         백년탐물(百年貪物)은 일조진(一朝塵)이라.
         삼 일 닦은 마음은 천년의 보배요
         백년 동안 탐한 재물은 하루아침 티끌이라.

         송하문동자(松下問童子)하니
         언사채약거(言師採藥去)라
         지재차산중(只在此山中)하니
         운심부지처(雲深不知處)라
         소나무 아래에서 동자에게 물으니
         스승님은 약초를 캐러 가셨다고 하네.
         다만 이 산속에는 계시나
         구름이 깊어 계신 곳은 알지 못하겠습니다 라고 하더라.


2004년 법천스님은 영주사에서 여러 명의 노인들과 아이들을 돌보며 열심히 기도 정진 중이다. 수계제자로는 연강(蓮江)·진성(眞性)스님이 있다.

참고자료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법천(法泉)스님 본항목 법천스님((法泉, 1944~) 法泉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법천스님(法泉,_1944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속성
법천스님(法泉) 육화문중(六和) ~의 일원이다
법천스님(法泉) 인화스님(忍和) ~의 수계제자이다
법천스님(法泉) 부여 무량사 ~에서 출가하다
법천스님(法泉) 혜암스님(慧庵) ~(으)로부터 계를 받다 사미니계
법천스님(法泉) 석암스님(昔巖) ~(으)로부터 계를 받다 비구니계
법천스님(法泉) 논산 영주사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주지(감원)
법천스님(法泉) 논산 영주사 ~을(를) 중창하다
법천스님(法泉) 대전 삼덕사(삼덕선원) ~을(를) 창건하다
법천스님(法泉) 안거 ~을(를) 성만하다 전국 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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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영주사 : 충청남도 논산시 벌곡면 덕곡리 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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