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관주스님(觀柱, 1922生, 비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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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관주(觀柱)스님은 정읍 비룡사와 무주 북고사의 각종 불사로 사찰의 면모를 일신한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922 전북 정읍 출생
1937 백양사 천진암에서 도명스님(道明)[1]을 은사로 출가
1941 부안 내소사에서 정호(鼎鎬)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1942 은사스님(도명스님(道明))이 백양사 부안포교당에서 입적
정심스님(定心, 1918生, 비구니)[2]을 삭발은사스님으로 모심
1953 해인사 삼선암에서 법화경 수학
전북 무주 북고사 주지 취임
1954 용봉스님을 강사로 2년간 능엄경, 금강경 수학
1955 조계사에서 동산(東山)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1961 정읍 비룡사에서 20년간 법당 및 요사채 중수, 부처님 탱화 및 하단 불사
1975 북고사 주지, 북고사 법당, 요사채, 종 불사 및 가사 불사
문중 삼현(三賢)문중
수계제자(『한국비구니명감』) 상옥·명경
문중계보(『한국의 비구니문중』) 원열(元悅, 5)→경전(敬典, 6)→성일(聖一, 7)→도명(道明, 삼현(三賢)문중, 8)/정심(定心, 백양사(白羊寺)문중)→관주(觀柱)→도상(道常, 상옥 또는 성욱), 명경

활동 및 공헌

출가의 계기

관주(觀柱)스님은 1922년 5월 27일 전북 정읍군 입암면에서 아버지 정동일과 어머니 김서운 사이의 3남 3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본관은 동래이며, 이름은 정순덕이다. 어린 시절 집에서 일하느라 학교도 다니지 못했던 스님은 공부가 너무나도 하고 싶어 찾아간 곳이 전남 백양사 천진암이다. 스님은 1937년 백양사 천진암에서 도명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관주스님] 출처: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p396

수학

출가 후 백양사에서 살던 중 은사스님께서 부안 포교당으로 옮겨가시는 바람에 스님도 17세까지 2년여를 포교당에 머물며 은사스님을 시봉하게 되었다. 20세 되던 해인 1941년 부안 내소사에서 한영화상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계했고 그 해에 백양사에서 『초발심자경문』을 배웠다. 이듬해 은사스님이 부안 포교당에서 입적하신 뒤 25세까지 포교당과 백양사를 왕래하며 살림을 살았다. 이렇게 정신없이 양쪽을 오가며 사는 가운데 삭발 은사스님이신 정심스님의 경을 배우라는 권유에 따라 비로소 해인사 삼선암에서 봉선 강사스님께 『법화경』을 배웠다.

행적

1953년 스님의 나이 31세 되던 해에 무주에 있는 북고사 주지 소임을 맡아서 들어갔다. 북고사에 가서 보니 공부는 하고 싶은데 돈이 없어 못하는 학인들이 많아서 이들을 돕고 싶은 간절한 마음에 스님은 북고사에 강원을 개설하고 용봉 강사스님을 모셔와 2년 정도 『능엄경』과 『금강경』을 배우게 하는 자비행을 펼쳤다. 1955년 스님의 나이 34세 때에 조계사에서 동산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받았다. 속가 어머니와 보살님들의 청에 의해 스님의 나이 41세 되던 해인 1962년, 초라하기만 했던 정읍 비룡사에 들어가 살면서 도량불사에 일념을 세우고 부처님 탱화를 비롯하여 칠성각, 산신각, 후불탱화 등 중수 불사에 이르는 장대한 원력을 세웠다. 스님은 이후 정읍 비룡사에서 20여 년을 더 머물다 1982년 스님의 세수 61세에 무주 북고사에 다시 와서 법당을 비롯한 요사채와 종 불사 및 가사 불사를 거듭 이룩했다. 스님의 노고에 감사하는 뜻으로 1996년 금산사에서 지역포교 표창패를 받기도 했다. 관주스님의 수계제자로는 상옥·명경스님이 있다.

무주 북고사

[무주 북고사] 사진출처: 다음카페 ‘상구보리 하화중생’

북고사(北固寺)는 전북 무주군 무주읍 읍내리 향로산(香爐山) 동남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7교구 말사이다. 절은 고려 공민왕 때 창건되었다고 전하기도 하고, 또 조선 태조 때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창건했다는 구전도 있다. 무학 스님이 무주를 방문하여 지세를 살피고는 복지(福地)라고 감탄하면서, 남쪽에는 명산 적상산(赤裳山)이 있어서 튼튼하지만 북쪽의 향로산은 산세가 너무 허약하다 하여 이 곳에 절을 짓고 탑을 세우게 했다는 것이다.
창건 이후 조선 전기까지의 사실은 전하는 바가 없어 알기 어렵다. 15세기 후반에 간행된 『동국여지승람』의 「불우(佛宇)」조에도 향로산의 절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18세기에 나온 『여지도서』ㆍ『가람고』ㆍ『범우고』에는 향로산의 북고사가 나오고 있으며, ‘부(俯)로부터 북쪽으로 5리의 거리에 있다.’고 했으니, 이 시기에 와서야 비로소 문헌에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1898년(고종 35) 간행된 『적성지(赤誠誌)』 사찰조에는 ‘북고사는 향로산에 있는데 무주부로부터 북쪽으로 5리 떨어진 곳에 있으며, 옛 이름은 경월사(慶月寺)로서 당시로부터 약 700년 된 고찰이다.’라고 하고 있어 주목된다. 『적성지』는 조병유(趙秉瑜)가 편찬한 무주군의 읍지인데, 이 책을 통해 절의 창건을 고려시대로 올려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한편 산왕당 앞에 있는 삼층석탑이 고려 말 조선초까지 거슬러 올라가므로 창건 무렵의 유물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절의 연혁을 정리해보면, 고려 말 또는 조선초에 경월사로 창건된 이후 조선 후기까지 면면히 법등이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1831년(순조 31) 신중탱화를 봉안했고, 1899년 칠성탱화를 봉안했다. 그리고 1928년 극락전 후불탱화와 산신도를 봉안했다. 일제 강점기의 30본사 체제에서는 보석사(寶石寺)의 말사가 되기도 했다.
근래에 와서는 1968년부터 1976년까지 도상(道常)스님이 주석했으며, 그 뒤를 이어 관주(觀住) 스님이 주지를 맡아 극락전을 새로 짓고 산왕당과 칠성각을 중건하는 등 중창 불사를 추진해 절의 면모를 일신시켰다. 처음 관주 스님이 왔을 때는 인법당 형태의 극락전과 방앗간이 있었고, 그 밖에 칠성각ㆍ산신각과 양철 지붕의 요사가 있었다고 한다. 이후 도상ㆍ관주 스님이 함께 1978년 법당을 세웠다가 해체하고 1993년 다시 지었으며, 1994년 극락전 오른쪽에 극락전을 해체하면서 남은 목재를 이용해서 요사를 지었고, 현재의 진입로도 만들었다. 또한 1996년 미륵불을 봉안하고 1997년 칠성각을 지었다.

[출처] 108번가 INFO(http://108st.net/detail.php?number=1747)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 뜨란출판사, 2007, pp. 394~397.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46.
  •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 399.
  • 108번가 INFO(http://108st.net/detail.php?number=1747)
  • [사진] 상구보리 하화중생(다음 카페, https://cafe.daum.net/jungmanroom)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관주(觀柱)스님 본항목 관주스님(觀柱, 1922~ ) 觀柱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관주스님(觀柱,_1922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속성
관주스님(觀柱) 삼현문중(三賢) ~의 일원이다
관주스님(觀柱) 도명스님(道明) ~의 수계제자이다
관주스님(觀柱) 정심스님(定心) ~의 삭발제자이다
관주스님(觀柱) 백양사 천진암 ~에서 출가하다
관주스님(觀柱) 정호스님(鼎鎬) ~(으)로부터 계를 받다 사미니계
관주스님(觀柱) 동산스님(東山) ~(으)로부터 계를 받다 비구니계
관주스님(觀柱) 무주 북고사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주지(감원)
관주스님(觀柱) 무주 북고사 ~을(를) 중창하다
관주스님(觀柱) 정읍 비룡사 ~을(를) 중창하다

지도

  • 북고사 : 전라북도 무주군 무주읍 읍내리 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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