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영운스님(靈雲, 1946生, 비구니)

bigu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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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법림(法林) 영운(靈雲)스님은 석남사 주지와 전국비구니선원을 선문회를 결성해 초대회장을 지냈으며 영천 백흥암 선원장을 맡고 있는 대한민국 명사 법계를 받은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946 경남 창녕 출생
1964 창녕고등학교 졸업
현묵스님을 은사로 출가
1966 종수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1968~1971 천일기도
1969 월하(月下)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1972~1988 해인사 약수암, 내원사, 김룡사, 대성암, 보현암, 지리산 대원사, 은해사 백흥암, 석남사, 지장암, 세등선원, 양진암 등에서 하·동안거 성만
1973~1974 석남사 교무
1998 석남사 주지
전국비구니선원 선문회 결성
2000 전국비구니선원 선문회 회장
2004 영천 백흥암 선원장 맡음
2021 명사 법계[1] 품수
2022 현재 영천 백흥암 선원장
문중 법기문중(法起)
수계제자 정호(精晧)·석고(石鼓)·천조(千照)·서태(瑞太)·명찬(明燦)·호선(浩仙)·자우·지안·무현·효종

활동 및 공헌

출가의 계기

[법일노스님을 모시고]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p.223.
[제8차 세계여성불자대회에서 렉시쏘모스님과 함]께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p.224.

법림(法林) 영운(靈雲)스님은 1946년 11월 2일 아버지 하용암(河龍岩)과 어머니 홍종순(洪終順) 사이의 4남 2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진양이며, 이름은 하영희이다. 스님의 불교와의 인연은 어머니로부터 시작되었다. 어머니는 저녁시간 이후면 마을 사람들을 모아 놓고 경전을 읽어주실 만큼 불심이 아주 돈독한 분이셨다. 이러한 어머니의 영향으로 스님은 어려서부터 절에 참배를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불교를 접하게 되었다. 창녕고등학교를 졸업한 1964년, 스님은 19세의 나이로 석남사에 입산하여 그 다음해인 1965년 음력 1월 15일 현묵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수학

그리고 21세 되던 1966년 3월 17일 일우스님과 종수스님을 모시고 사미니계와 보살계를 수지하였고, 1969년 4월 8일 통도사에서 노천(老天) 월하(月下)스님으로부터 비구니계를 수지하였다.

당시 인홍(仁弘)스님을 중심으로 한 석남사의 가풍은 초심자들을 강원에 보내지 않고 큰스님들의 법문과 수행에 꼭 필요한 경전만을 배우게 한 뒤 선방으로 보내는 것이 관례였다.

스님이 이러한 기초 과정을 마치고 다른 스님들처럼 선방에 가려고 할 즈음, 운문사에서 묘엄(妙嚴)스님을 강주로 모시고 강원을 개원하였다. 그때는 운문사 소임을 석남사에서 짜는 등 인홍스님께서 석남사의 젊은 스님들을 운문사로 많이 보내어 내전을 공부하게 하셨다.

성철스님에게 화두를 받다.

그러나 참선에 뜻을 두었던 영운스님은 강원에 가지 않고 성철 큰스님으로부터 화두를 받은 뒤 1967년 겨울에 해인사 홍제암에서 성철 큰스님의 백일 법문을 들으면서 첫 안거를 시작하였다.

안거를 끝낸 스님은 큰스님을 찾아뵙고 다음과 같이 여쭈었다.

“스님, 공부를 하는데 복(福)이 먼저입니까? 혜(慧)가 먼저입니까?"

큰스님께서는 복과 혜는 쌍수(雙修)이기에 같이 닦아야 하며 복 짓는 데는 공양주[2] 가 으뜸이라고 말씀하셨다. 덧붙여 부처님께 마지도 지어 올리고 공부하는 스님들 공양도 지어드리며 3년간 공양주를 살면서 하루에 천배씩 하라고 일러주셨다.

큰스님의 말씀대로 하루 일과로 절을 천배씩 하면서 스님은 석남사 선원에서 공양주를 살았다.

비구니스님들의 삼년결사 회향

이때 석남사 상선원인 심검당(尋劍堂)에서는 비구니스님들의 첫 삼년결사가 시작되었으며, 결사대중으로는 인홍·성우·혜춘·혜관·장일·법희·법용·혜주·불필·백졸스님 등 10여 분이 참여하였다.

정진 중에 대중들은 어려운 일을 겪기도 했지만 결사 중이라 산문 밖을 나가지 못하고 있다가 때마침 법문하러 오신 일타 큰스님의 오선지(五禪支) 오개장(五箇章) 법문에 힘입어 문제를 해결한 후로는 장애 없이 정진하여 결사를 마칠 수 있었다. 3년 결사를 마친 1971년 7월 15일 회향 때는 인홍스님께서 법당에 대중들을 모이게 하고 회향 기념 시상식을 하셨는데 상장과 함께 부상으로 당시로는 매우 귀한 파커 만년필까지 주며 격려해주셨다.

3년 결사를 회향하고 스님은 운수납자[3] 로 해인사 약수암, 내원사, 김룡사, 대성암, 보현암, 지리산 대원사, 은해사 백흥암 등 제방으로 다니며 정진에 힘썼다. 그 때 현재 백흥암에 계시는 육문스님을 만나 수행에 전념할 수 있는 좋은 회상을 만들자는 데 뜻을 모으고 함께 백흥암을 비구니 선원으로 가꾸기로 했다. 그 불사는 1981년부터 1998년까지 약 20여 년간 한결같이 계속되었다.

석남사 주지 부임

스님은 1998년 어른스님들의 부름을 받고 석남사 주지로 부임한 후 수행도량 석남사와 석남사가 위치한 가지산을 보호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경남 울산시 울주군 상북면 덕현리 가지산에 있는 석남사는 신라 헌덕왕 16년 도의국사가 창건하여 최초로 중국의 남종선을 우리나라에 전한 곳으로 종립비구니선원으로 지정된 유서 깊은 수행도량이며, 울산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관광객이 많이 찾는 전통사찰이다. 또한 석남사가 위치한 가지산은 노송과 계곡이 어우러져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울산 시민의 휴식처이기도 하다.

그런 가지산에 호텔, 수영장, 경마장, 골프연습장 건립이 계획되었고 일명 부처바위로 불리는 쌀 바위에는 번지 점프대가 설치될 지경에 처하였다. 만약 이러한 시설물들이 들어선다면 유서 깊은 수행도량 석남사는 말할 것도 없고 울산 시민의 휴식처인 가지산이 무분별한 개발로 크게 훼손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이러한 심각한 문제에 당면하여 스님은 종단차원의 지원과 교구본사인 통도사를 비롯한 전국 본말사와 전불교도, 그리고 자연과 민족의 문화유산을 사랑하는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고 제방 선원에 계신 스님들의 후원과 화합된 석남사 대중스님들의 힘과 슬기를 한데 모아 어려움을 잘 극복하였다.

또한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 주변의 땅을 매입하고자 ‘부처님 땅 한 평 사기 천일불사’를 펼쳐 도량을 지켜냈다.

성불의지의 결집, 선문회 초대회장 선임

2000년 5월 13일 스님은 1998년 결성된 전국비구니 선원 선문회의 초대회장에 선임되었다. 선문회 초대회장 선임 인사말을 보면, 스님이 선문회를 어떻게 운영해나갈지 그 각오와 방향이 잘 드러나 있다.

“30여 년간 선방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어른스님들이 적극적으로 맡기신 것 같습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 수행에 전념하는 비구니스님들을 뒷바라지하라는 말씀으로 알고 각 선원과의 유대 강화와 수행풍토 조성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백흥암에서 열린 창립 모임에는 21개 비구니 선원에서 27명의 대표가 참석하여 선원 기강을 확립하고 올바른 참선수행인을 위한 도량을 만들기 위하여 몇몇 조항을 결의하였다. 이때 결의된 다음 사항은 현재 제방의 선원에서 시행 중이다.

1. 대리 방부를 금지한다. 2. 사전예고 없이 방부를 취소하면 3년 동안 전국 어느 선원에도 방부를 들일 수 없다. 3. 대중의 동의 없이 결제 중 외출을 해서는 안 된다.

수행 정진에는 한 치의 물러섬도 없어야 한다는 스님은 이렇게 단호한 의지를 밝히고 있다.

“옛 어른들은 송장을 탁자 밑에 넣어 놓고라도 수행을 계속해야 한다고 말씀할 정도로 엄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지혜의 칼로써 무명을 잘라내야 기강이 다시 살아납니다.”

2004년부터 백흥암 선원장을 맡고 있다

스님은 2013년 이창재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길 위에서’에서 “밥 한 발우(스님이 쓰는 밥그릇)가 피 한 발우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이에 대해 영운 스님은 “스님들은 시은(시주의 은혜)로 사는데, 그만큼 밥값을 하고 있는지 항상 돌아봐야 한다는 의미”라며 “밥 한 그릇이 있기까지 농사짓는 사람 등 많은 이들의 수고로움이 있는데, 각자가 모든 것을 아낄 때에 복이 온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출처: 한국일보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1902181708097634)

영운스님은 2021년 10월 명사 법계 스님들을 대표해 영운스님이 법계증을 받았다

2022년 현재 영천 백흥암 선원장으로 재직 중이며, 수계제자로는 정호(精晧)·석고(石鼓)·천조(千照)·서태(瑞太)·명찬(明燦)·호선(浩仙)·자우·지안·무현·효종스님을 두고 있다.

석남사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인 통도사의 말사이다. 이 절은 824년(헌덕왕 16) 우리 나라에 최초로 선(禪)을 도입한 도의(道義)가 호국기도도량으로 창건한 선찰(禪刹)이다.

창건 당시 화관보탑(華觀寶塔)의 빼어남과 각로자탑(覺路慈塔)의 아름다움이 영남 제일이라고 하여 석남사(碩南寺)라 하였다고 하며, 일설에는 가지산의 별명이 석안산(碩眼山)이기 때문에 석안사라고 하였다고도 한다.

임진왜란으로 전소된 뒤 1674년(현종 15)에 언양현감 강옹(姜甕)의 시주로 탁령(卓靈)·자운(慈雲)·의철(義哲)·태주(泰珠)가 중창하였고, 진혜(振慧)·쌍원(雙遠)·익의(益儀)·성진(性眞)이 단청을 하였으며, 동시에 종과 북 등의 불구(佛具)를 마련하였다. 이어 정우(淨佑)·각일(覺日)·석맹(碩孟) 등이 극락전·청풍당·청운당·청화당·향각(香閣)을 증축하였고, 희철(熙哲)이 명부전을 세웠다.

1803년(순조 3)에는 침허(枕虛)와 수일(守一)이 중수하였고, 1912년에는 우운(友雲)이 중수하였다. 그러나 6·25전쟁 이후에 크게 폐허가 되었던 것을 1957년 비구니 인홍(仁弘)이 주지로 부임하면서 크게 증축하였다. 이 때부터 비구니 수도처로서 각광을 받은 이 절에는 항상 100명이 넘는 비구니들이 엄격한 계율을 준수하면서 수도에 정진하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하여 극락전·설선당(說禪堂)·조사전(祖師殿)·심검당(尋劍堂)·침계루(枕溪樓)·정애루(正愛樓)·종루(鐘樓)·무진료(無盡寮)·대방(大房) 등 30여 동이 있다.

이들 가운데 극락전은 1791년(정조 15)에 세운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문화재로는 도의국사의 사리탑으로 전해지는 보물 제369호의 석남사 팔각원당형부도(石南寺八角圓堂形浮屠)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2호인 삼층석탑, 조선 초기에 제작된 엄나무구유와 돌구유 등이 있다.

삼층석탑은 824년에 도의가 호국의 염원 아래 15층으로 세운 것이라 하나,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방치되어 오다가 1973년 스리랑카의 승려가 사리 1과를 봉안하면서 3층으로 개축한 것이다. 이 밖에도 절 입구에 4기의 부도가 있다.

참고자료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영운(靈雲)스님 본항목 영운스님(靈雲, 1946~) 靈雲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영운스님(靈雲,_1946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속성
영운스님(靈雲) 법기문중(法起) ~의 일원이다
영운스님(靈雲) 현묵스님(炫默) ~의 수계제자이다
영운스님(靈雲) 울산울주 석남사 ~에서 출가하다
영운스님(靈雲) 일우스님(一愚) ~(으)로부터 계를 받다 사미니계
영운스님(靈雲) 월하스님(月下) ~(으)로부터 계를 받다 비구니계
영운스님(靈雲) 명사(明師) ~을(를) 품수하다
영운스님(靈雲) 천일기도 ~을(를) 성만하다
영운스님(靈雲) 울산울주 석남사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교무
영운스님(靈雲) 은해사 백흥암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선원장
영운스님(靈雲) 전국비구니선원선문회 ~을(를) 건립하다
영운스님(靈雲) 전국비구니선원선문회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회장
영운스님(靈雲) 안거 ~을(를) 성만하다 합천 해인사 약수암, 양산 내원사, 문경 김룡사, 부산 범어사 대성암(청룡동), 합천 해인사 보현암, 산청 대원사(지리산), 영천 은해사 백흥암, 울주 석남사, 평창 월정사 지장암, 대전 세등선원(탄방동), 대구 동화사 양진암(도학동)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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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석남사 : 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면 덕현리 1064



주석

  1. 비구니 스님에 대한 최고 지위
  2. 후원(부엌)에서 밥을 짓는 소임
  3. 구름처럼 물처럼 어디에도 머무름이 없이 떠도는 수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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