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자광스님(慈光, 1936生, 비구니)

bigu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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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자광(慈光)스님은 수옥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각처에서 강원과 안거를 성만하고 내원사, 보덕사 주지를 역임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936 강원 강릉 출생
1954 풍기고등학교 졸업
1958 내원사에서 수옥(守玉)스님을 은사로 출가
1962 동학사 경봉(鏡峰)스님 문하에서 사집과 수료
1963 자운(慈雲)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1964 직지사 강원 사교과 수료
1966 개심사 강원 졸업
1966~1975 승가사, 석남사, 부도암, 양진암 등에서 10안거 성만
1976 통도사 말사 내원사 주지 취임
1978~1983 내원사 가람수호 및 중창 불사
1985 대한불교 조계종 중앙종회의원
1986 내원사 주지 사임 후 용흥사 선원에서 하안거 성만
1988~2000 예산 보덕사 주지
2004 논산 법계사 주석
2019 명사 법계 품수
문중 삼현문중(三賢)
생활신조 분수만큼 살자.
상훈 종무행정 표창패
수계제자(『한국비구니명감』) 지견(知堅)·지형(知炯)
문중계보(『한국의 비구니문중』) 경전(敬典, 6)→귀완(貴完, 7)→법희(法喜, 8)수옥(守玉, 9)자광(慈光, 10)→지견(智堅, 11), 지동(知烔, 11), 지성(智星, 11), 담연(湛然, 11), 지일(智逸, 11), 지은(知恩, 11), 현우(現祐, 11), 도경(道京, 11), 혜근(惠勤, 11), 보선(普禪, 11), 인성(印城, 11), 무관(無觀, 11), 송묵(松黙, 11), 휘묵(輝黙, 11), 행원(行圓, 11), 하담(夏潭, 11)

활동 및 공헌

출가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권. 뜨란출판사, 2007, p. 587
[내원사 선나원(큰법당)]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권. 뜨란출판사, 2007, p. 58

서조(西照) 자광(慈光)스님은 1936년 10월 21일 강원도 강릉시 중앙동에서 아버지 최범규와 어머니 김복기 사이에서 셋째 딸로 태어났다. 본관은 강릉이며, 이름은 최영문이다.

1954년 2월 28일 경북 풍기군 풍기 고등학교를 졸업한 스님은 상급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무리하게 공부를 하던 중 1958년 가을, 위염에 걸려 소백산 비로사로 요양을 가게 되었다. 중학교 때부터 기독교 신자였던 스님은 산에 가서 늘 찬송가를 흥얼거리고 방에 앉아서는 성경책을 끼고 살다시피 했다. 심지어는 도량석 목탁 소리와 동시에 ‘주여! 아멘.' 하며 열심히 기도를 하였다. 어느 날 스님은 대중스님들과 울력[1]을 하면서 불교와 기독교의 교리에 대해 논쟁을 벌였다. 급기야 근기론(根機論)까지 주제가 확장되면서, 특히 대중 가운데 있던 송암스님과 열띤 논쟁을 벌였다.

송암스님은 따오기와 백로를 비유한 인과(因果)와 선수행(禪修行)의 근기론을 펴면서 하심(下心0) 여리박빙(如履薄水) 같은 정진력이 선수행의 필수 조건이며 아만이 높은 사람은 안 된다고 하셨다.

이에 스님은 원칙적인 입장에서 더욱더 유창한 현학적인 표현으로 송암스님의 의견을 파하려 하였다.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서는 표면적으로 스님이 이긴 것처럼 비춰졌다. 그러나 방에 돌아와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면적으로는 자신이 하근기(下根機)라는 것이 증명된 꼴이었다.

그리하여 스님은 그 즉시 송암스님을 찾아가 “선(禪)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라고 여쭈었다. 그러나 송암스님은 “영문이는 못한다. 절대 못한다.”라고 딱 잘라 말하는 것이었다. 스님은 더욱 적극적으로 “왜 못합니까? 이유를 밝혀주십시오.” 라고 따지듯 물었다.

송암스님은 한참을 묵묵부답으로 계시다가 “선을 하려면 먼저 방하착(放下着)[2]을 해야 한다. 방하착 하기 위해 우선 네가 생활하는 소지품을 깨끗이 정리해 보아라. 그것이 망상이 떨어지는 방하착의 시작이다. 그러면 네가 선을 할 수 있는 근기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라고 말씀하셨다.

송암스님의 말씀에 커다란 충격을 받은 스님은 그 다음날 집으로 돌아가 짐을 정리하기 시작하였다. 큰 가방 안에 새로 맞춘 겨울 코트와 평소 입을 만한 것을 모두 넣고 무작정 서울 동대문 시장으로 가 그것들을 펼쳐놓고 팔기 시작하였다. 새로 맞춘 옷 2벌을 차비 정도만 받고 헐값에 모두 팔았다. 그리고 여러 친분 있는 사람들과의 교우를 의미하는 편지와 꼼꼼히 일상사를 기록한 일기장 등을 모두 불사르고, 광목 한 필과 무명 한 필만 가지고 밤에 몰래 집을 나와 송암스님을 찾아갔다.

스님이 불쑥 다시 찾아와 출가를 하겠다는 뜻을 밝히자 송암스님을 비롯한 다른 스님들은 자기 주장이 분명한 이 말괄량이를 어떤 분에게 보내야 적당한지 잠시 의논이 분분하였다. 결국 당시 비구니계에서 최고로 선지(禪智)가 밝은 법희노사, 만성노사, 수옥스님 이렇게 세 분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스님과 논쟁을 경험해본 스님들은 그 세 분 가운데 선교(禪敎)를 겸비한 수옥스님께로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자광스님은 무착스님을 따라 천성산 물줄기를 타고 수옥스님이 주석하고 계시는 내원사에 들어가 수옥스님을 은사로 자운화상을 계사로 1958년 12월 8일 출가하기에 이른다.

출가 후 스님이 송암스님을 뵙고 인사를 하니 송암스님은 평소와 다르게 맞절을 하셨다. 이에 놀란 스님이 그 이유를 물으니 “싯다르타 태자의 유성출가(踰城出家)나 영문이의 출가나 모두 같은 것이다. 나는 발심의 소중함을 깨달은 발심자에게 절한 것이지 너에게 한 것이 아니다.” 라고 하셨다.

출가 후 수옥스님의 문하에서 자광이란 법명을 받고 가르침을 받은 지 1년 뒤 내원사가 비로소 낙성식을 하게 되었다. 스님은 그간의 피로로 인해 다시 위염이 재발하였다.

수학과 수행

수옥스님은 동화사 염불암으로 스님을 보내 기도와 요양을 하도록 배려를 하셨다. 그곳에서 혼자 기도를 하던 중 스님은 불교 교리를 묻는 세 분의 할아버지를 만나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들이 말씀하시는 불교 용어를 승려인 자신이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스님은 그때 느낀 당혹감을 은사스님께 편지로 알리고 강원에 들어가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스님은 1960년 10월 13일 동학사 강원에 입학하여 1962년 경봉 강주스님 문하에서 사집과를 수료하고, 1964년 직지사 전문 강원에서 관응 강백으로부터 사교과를 수료하였다.

1963년 28세가 된 스님은 자운스님께 구족계와 보살계를 수지하였다. 그러나 출가할 당시 송암스님이 글을 배우지 말라고 당부하셔서 금강경까지만 보기로 서원했던 터라 부득이 경 공부를 접고 말았다. 스님은 이듬해 여름 범어사 대성암 선원의 만성스님 문하에서 '이뭣꼬?' 공안을 참구하며 하안거를 성만하였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수옥스님은 '대교를 보면 어떻겠는가?'라는 권유가 담긴 편지를 보내셨다. 편지를 받고 며칠 고민을 하던 스님은 공부를 계속하기로 마음을 정하고 도반인 자민스님과 함께 화엄경을 배울 강사를 찾아 탄허스님, 대은스님 등 제방의 여러 큰스님을 찾아다닌 끝에 드디어 1966년 1월 15일 충남 서산군에 있는 개심사 전문 강원에서 성능 대강백으로부터 대교를 졸업하기에 이른다.

성능 강사스님께 인과불이(因果不二) 비지원만(悲智圓滿)한 보현의 일승보살도의 지취를 파악한 스님은 드디어 선재동자가 선지식을 역참(歷參)하는 것과 같이 여러 선방을 다니며 수행 정진을 계속 하였다.

1966년 법희선사께서 주석하고 계시는 승가사 선방의 하안거부터 석남사, 동화사 부도암, 양진암, 해인사 삼선암, 상주 용흥사, 수덕사 견성암 등에서 10안거를 성만하였다.

내원사 주지를 역임

1976년 3월 28일, 스님이 마흔한 살이 되었을 때 견성암에서 정진하던 도중 문중의 추천에 의해 은사이신 수옥스님이 중창한 경남 양산군 내원사에 주지로 임명되었다. 수옥스님이 입적하신 지 10년 만의 일이었다. 그러나 스님은 당치않다며 두 달을 버티다 종내는 인연을 따르기로 하고 소임을 시작하였다.

교구 본사인 통도사에서는 말사인 내원사의 임명장 수령이 지체되자 차제에 비구 도량으로 바뀔 수도 있다고 겁을 주었다. 스님은 자신 때문에 그런 상황이 벌어지게 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주지 소임을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내원사는 원래 비구 선방이었으나 은사인 수옥스님이 6·25전쟁 때 잿더미가 된 그곳을 중창한 뒤로 비구니 수행 도량이 된 사찰이다. 자광스님은 내원사를 본사로 삼은 첫 번째 비구니였다. 이런 이유로 스님은 주지직을 물리칠 수 없었던 것이다.

내원사 중창

여기에서 스님은 문중을 이끌고 가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끼게 되었다. 특히 수옥스님이 입적하신 지 10년이 되는 내원사가 그 당시 대원사석남사에 비해 상대적으로 쇠락한 것에 막중한 책임 의식을 가졌다. 그러면서 앞으로 10년 동안 은사스님의 뜻을 계승하여 도량 완비와 선방의 대중 외호 등 절집의 면모를 갖춘 대중처소로 만들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1978년 농막창고 상가(100평)준공을 시작으로 1979년에는 전기 및 전화를 준설하고, 다시 1981년에는 도로를 확장하고, 그 다음해인 1982년에는 도로 확장 및 포장 공사를 하였다. 또한 1983년에는 원화당(元華堂)과 정랑을 준공하고, 이듬해에 죽림원(80평)을 준공하는 등 내원사를 여법한 도량으로 완비해나갔다.

그러나 스님이 불사보다 더욱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대중 외호였다. 그리하여 내원사가 생긴 이래, 처음으로 그 당시 다른 결사가 한 번도 회향하지 못한 3년 결사를 회향하기에 이른다.

이것은 '결사 대중을 위해 인연을 소중하게 가꾸는 것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다른 인연도 특별 대접을 하지 않는다.'라는 스님만의 독특한 신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스님은 수행 시간의 소중함을 일깨우기 위해 잦은 울력을 삼가하고 결사 대중의 순조로운 정진을 위해 각자 하루 한 짐의 나무를 하라고 권유하였다. 그 결과 14명의 결사 대중이 3년 만에 회향을 하는 성과를 거둠과 동시에 지금까지 내원사에서 결사를 지속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다.

또한 스님은 매년 사월 초파일에는 내원사를 찾는 모든 사람에게 선방 '선혜일륜(禪慧一輪)'을 개방한다.

이와 같은 스님의 노고에 종단에서는 1985년 3월 29일 종무행정 표창패, 같은 해 7월 31일 부처님 오신 날 봉축행사에서 최대노력 표창장을 수여했다.

그리고 1985년부터 중앙종회의원에 피선되는 등 적극적으로 종무에 힘쓴 결과, 1986년 2월 28일에 종단 종무지도 감사에 대한 행정 표창패를 수여받았다.

다시 운수행각을 시작

그러나 자광스님은 불사와 대중 외호에 진력하는 동안 늘 자신의 수행을 소홀히 하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마침내 스님은 천성산의 추운 겨울을 낙엽 속에서 꿋꿋하게 견디는 춘란과 같은 삶을 살겠다는 마음으로 스스로 ’설란(雪蘭)' 이라는 예명을 지었다. 그리고 1986년 내원사 주지를 사임하고, 같은 해 상주 용흥사 선원에서 하안거를 성만하였다. 그 다음해에는 해인사 삼선암 선원에서 하안거를 성만하는 등 다시 운수 행각을 시작하였다.

예산 보덕사 주지

그러나 스님은 삼현문중의 뿌리이기도 한 보덕사가 토지소유 문제로 속인에게 넘어갈 위급한 상황에 처하자 다시 문도들의 추천에 의해 1988년 6월 18일 수덕사에서 보덕사 주지 임명을 받아 문제를 수습하기 위해 뛰어들게 되었다.

보덕사는 1845년 대원군이 2대에 걸쳐 천자를 낸다는 가야산 동쪽의 명당을 탐하여 그곳에 자리 잡고 있던 가야사를 불태우고 금탑을 부순 뒤에 선친인 남연군의 묘를 이장하였다는데, 고종 이 임금의 자리에 오른 뒤 그 은덕에 보답하기 위해 가야골 아래에 보덕사를 짓고 왕실의 원찰로 삼았다. 보덕사는 근세에 이르러 만공 큰스님과 그 제자들이 수행처로 삼았던 곳이며, 만공 큰스님의 전법 제자인 법희 노스님의 부도탑과 부도비가 있는 사찰이다.

자광스님은 보덕사에서 제2의 법희 큰스님을 기다리며 대중 외호를 계속했다. 한 가지 조그마한 바람은 기도, 울력 등의 대중 생활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겸비한 백장청규와 같은 철저한 수행의 가풍이 깃든 선원을 가꾸어 나가는 것뿐이다. 그리고 매년 갓 출가한 사미니들에게 치문을 강의하는 일에 정성을 쏟으며 미래의 선지식을 배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2000년 보덕사 주지직에서 물러난 스님은 법계사에서 주석하며 수행 정진 중이다. 스님은 2019년 명사법계를 품수했다. 자광스님의 수계제자로는 지견(知堅)·지형(知炯)스님이 있다.

양산 내원사

[내원사 전경] 사진출처: 네이버지식백과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533383&cid=46648&categoryId=46648

내원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통도사의 말사로써 수려한 산수와 6Km에 달하는 아름다운 계곡으로 제2의 금강산이라 일컬어지는 천성산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1,300여 년 전 신라 선덕여왕 때 원효성사께서 창건하신 절이다.

1898년 석담유성(石潭有性) 선사가 설우(雪牛), 퇴운(退雲), 완해(玩海) 등과 더불어 수선사(修禪社)를 창설하여 절 이름을 내원사로 개칭하고 동국제일선원이라 명명한 후 선찰로써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경허선사의 법제자인 혜월선사께서 조실로 주석하시면서 운봉, 향곡선사 등 한국 선종사의 선맥을 잇는 명안종사를 배출한 도량이다.

6ㆍ25사변으로 사원이 전소되자, 비구니 수옥스님의 원력으로 10년 만에 독립된 비구니 선원으로써 새롭게 중창되었다. 그 후 만공스님의 법제자인 법희, 선경스님등 납자들의 정진처가 되었다. 1979년 도용스님을 입승으로 모시고 18명의 스님들이 모여 삼년결사를 시작한 이후 1999년 여섯 번째 회향을 하였고 지금도 비구니 선객의 정진도량으로 선불장이 되고 있다.

  • 원효대사와 비구니 수옥 스님의 이야기 * 1,300여 년 전 원효대사는 중국 태화사(太和寺)에서 건너온 1천 명의 대중들을 이끌고 이 산으로 들어와 대둔사(大屯寺)와 89개의 암자를 창건했다고 한다. 당시의 암자 가운데 상ㆍ중ㆍ하 내원암이 있었는데 조선후기에 발생한 큰 수해로 대둔사와 89암자 대부분이 유실되고 하내원암만 남아, 여러 차례 중건을 거듭하여 오늘날의 내원사로 법등을 잇게 된 것이다. 한말에는 수선사(修禪社)를 창설하고 ‘동국제일선원’이라는 선찰(禪刹)로서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으나 6.25로 소실되고 말았는데, 오늘날의 내원사를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이 시기에 이룩한 비구니 수옥(守玉) 스님의 업적이다. 스님은 어려운 시절에 전쟁으로 폐허화된 내원사를 중건하고 단절된 선원을 복원하여, 오늘날 명실공히 내원사를 비구니 수선도량(修禪道場)으로 일구어낸 분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선원으로서 내원사는 근대 경허(鏡虛) 스님의 법제자인 혜월(慧月) 선사가 조실로 주석하며 운봉(雲峰)ㆍ향곡(香谷)ㆍ명안(明眼) 선사 등 한국 선종사의 선맥(禪脈)을 잇는 고승들을 배출하였다.

이러한 수행도량으로서의 가풍(家風)을 이어받아 오늘날에도 ‘동국제일선원’으로서 수많은 비구니 스님들이 깨달음을 향해 정진하고 있으며, 눈 푸른 선승들의 수행공간 구실도 아울러 담당하고 있다.

예산 보덕사

[보덕사 극락전] 사진출처: 네이버블로그 https://blog.naver.com/parksb44/222346948181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 본사인 수덕사(修德寺)의 말사이다. 본래 옥양봉 남쪽 기슭에 있던 가야사(伽耶寺)를 승계하여 1871년(고종 8)에 창건하였다.

가야사에는 금탑(金塔)이라 불리는 지극히 빼어난 철첨석탑(鐵尖石塔)이 있었고, 그 탑의 사면에는 석감(石龕)이 있어 각각 석불이 봉안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절의 터가 왕손을 낳게 한다는 풍수설에 의하여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1840년(헌종 6)에 가야사를 불사르고 아버지인 남정군(南廷君) 이구(李球)의 묘를 썼다. 그 뒤 아들 고종이 보위에 오르게 되었으므로 그 보은의 뜻으로 현 위치에 절을 짓고 보덕사라 하고 벽담(碧潭)을 주지로 삼았다.

6·25 때 소실되었으나 1951년 2월에는 비구니 수옥(守玉)이 중창하였고, 1962년에는 비구니 종현(宗顯)이 증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극락전과 칠성각·요사채 등이 있으며, 현대식으로 지은 2층의 강원(講院)이 있다. 극락전 앞에는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83호로 지정된 석등이 있고, 절 옆 70m 지점에는 관음암(觀音庵)이 있으며, 고려시대의 것을 모방하여 최근에 세운 비구니 묘리(妙理)의 법희선사탑(法喜禪師塔)과 비가 있다.

논산 법계사

[법계사 전경] 사진출처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nscity/222405248028
[법계사 전경] 사진출처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nscity/222405248028

1993년 창건한 대둔산 법계사는 대한불교 제7교구 본사 수덕사 말사로서 비구님 스님들의 수행 정진 도량이다. 월성봉 아래 봉황이 내려 앉은 듯한 곳에 삼천불을 모신 108평의 대웅전,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사리탑과 산신각이 있다.

참고자료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자광(慈光)스님 본항목 자광스님(慈光, 1936~) 慈光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자광스님(慈光,_1936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속성
자광스님(慈光) 삼현문중(三賢) ~의 일원이다
자광스님(慈光) 수옥스님(守玉) ~의 수계제자이다
자광스님(慈光) 양산 내원사 ~에서 출가하다
자광스님(慈光) 자운스님(慈雲) ~(으)로부터 계를 받다 비구니계
자광스님(慈光) 명사법계(明師法階) ~을(를) 품수하다
자광스님(慈光) 양산 내원사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주지(감원)
자광스님(慈光) 양산 내원사 ~을(를) 중창하다
자광스님(慈光) 예산 보덕사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주지(감원)
자광스님(慈光) 논산 법계사 ~에서 주석하다
자광스님(慈光) 안거 ~을(를) 성만하다 서울 승가사(구기동), 울주 석남사, 대구 동화사 부도암(도학동), 대구 동화사 양진암(도학동), 상주 용흥사 등

지도

  • 법계사 : 충청남도 논산시 양촌면 오산리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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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관계망




주석

  1. 여러 사람이 힘을 합해 하는 일
  2. ‘내려놓아라’, ‘놓아 버려라’라는 의미로 불교 선종에서 화두로 삼는 용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