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법희스님(法喜, 1887生, 비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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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묘리(妙理) 법희(法喜)스님은 수덕사 견성암, 대승사 윤필암, 보덕사, 내원사, 승가사 선원 등에서 선방 대중을 지도하여 한국 불교사에서 최초로 비구니 선풍을 진작 시킨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887 충남 공주 출생
1890 동학사 미타암에서 귀완스님(貴完)을 은사로 출가
1901 동운(東雲)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1901~1909 동학사 강원에서 사집과, 사교과 수료
1910 해인사에서 해광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동학사에서 만우스님에게 경전, 어록 등 수료
1916 견성암에서 안거 중 깨침
만공스님에게 법인가
전법게(傳法偈)와 법호 ‘묘리’를 받음
1966 견성암 비구니 총림 원장
1975 견성암에서 입적(세수89세,법랍86세)
문중 삼현문중(三賢)
수행지침 구시화문(口是禍門)이니 신호신호(愼乎愼乎)하고 부단정진(不斷精進)하라.
생활신조 정진과 소임 운력 등의 일이 불이(不二)이다.
수계제자 춘일(春一)⋅영명(靈明)⋅수옥(守玉)⋅영호(永浩)⋅도원(道圓)⋅장용(䊋湧)⋅혜능(慧能)⋅정화(貞和)⋅수찬(守贊)⋅원성(圓成)⋅도일(道一)⋅상륜(相侖)⋅도전(道全)⋅정운(淨雲)⋅무생(無生)⋅금목(金目)⋅현성(賢性)⋅월덕(月德)

활동 및 공헌

출가

[만공큰스님을 모시고 (첫 줄 왼쪽부터 자윤・제석・법희스님, 만공 큰스님, 선목・지명・법형・현행・덕운・수업・덕수・보인스님)]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 67
[법희(法喜)스님]
사진출처: 카카오스토리 https://story.kakao.com/_GWwQH7/i5GfkTvXEFA
[법희스님의 부도와 탑비(예산 보덕사)]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 69

묘리(妙理) 법희(法喜)스님은 1887년 2월 9일 충청남도 공주군 탄천면 신기리에서 유창주씨의 둘째 딸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유손순이다. 스님은 1890년 나이 4세 되던 해에 외할머니 등에 업혀 계룡산 동학사 미타암에 들어가 귀완스님을 은사로 불문에 출가하였다.

수행

14세 때에 동운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받았다. 24세 때 가야산 해인사에서 구족계를 받고 동학사에 돌아와 만우 강백 회상에서 부처님 경전과 조사스님의 어록 등을 수료하였으며 경북 청암사에서 박고봉스님께 법화경을 배웠다. 이 때 고봉스님은 사교입선을 강조하셨으며, 수덕사 만공 큰스님을 찾아 수행하도록 권유했다.

만공스님과의 만남

법희스님은 25세에 덕숭산 정혜사에 큰 스님이 계시다는 소문을 듣고 타오르는 초발심의 구법자가 되어 주저없이 길을 떠났다. 정혜사에 도착하니 미리 관(觀)해서 아시고 산문 밖까지 마중 나와 기다렸다는 듯이 말씀하셨다.
“수좌는 어디서 오느냐?”
“덕숭산에 큰 스님이 계시다기에 공부하러 왔습니다.”
“그래 잘 왔다.”
이때부터 만공스님 문하에서 인가받기까지의 사자(師資)의 인연이 맺어졌다.
그 후 법희스님은 젊은 날의 초발심 속에 피나는 수행정진을 통하여 심안(心眼)이 홀연히 열리니 만공 큰스님이“장하다. 장하다. 묘리(妙理) 수좌여!”라고 칭찬하였다. 그리고 만공스님으로부터 ‘묘리당법희(妙理堂法喜)’라는 법호와 함께 전법게(傳法偈)를 받았다. 스님의 세수 30세 되던 해인 1916년의 일이었다.

만공스님의 전법게(傳法偈)

    일만상 적멸함이 석불의 면목이요
    적멸함도 멸하여 다한 곳이 진귀조사 면목이로다.
    불조가 천화한 지 이삼천 년에
    묘한 이치 참된 광명길이 어둡지 않도다.
    (세존응화이구사삼년 충남 예산군 덕산면 정혜사 금선대 법사 만공)

    만상적멸석가면(萬象寂滅釋迦面) 적멸멸이진귀면(寂滅滅已眞歸面)
    불조천화이삼천(佛祖遷化二三千) 묘리진광영불매(妙理眞光永不昧)
    (世尊應化二九四三年 忠南 禮山郡 德山面 定慧寺 金仙臺 法師 滿空)
    

하루는 만공스님이 ‘가섭찰간화(迦葉刹竿話)’를 들어 대중에게 한 마디씩 말해보라 하였다. 대중들이 침묵하는 가운데 법희스님만이 단정히 일어나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물고기가 물속에 헤엄치니 물빛이 흐려지고 새가 창공에 나니 깃털이 떨어집니다.”

또 하루는 한용운 스님의 “흰 눈 속에 복사꽃이 흩날린다.”라는 구절을 들어서 대중에게 묻기를 “흩날린 꽃송이 어느 곳에 있는고?”라고 물으셨다.
법희스님이 말씀드리기를 “흰 눈이 녹아지니 한 조각 땅입니다.”라고 말씀드리자 만공스님께서 “법희는 다못 일편지를 얻음이로다.”라고 하였다. 스님은 평소 늘 말씀이 없었다. 수좌들이 와서 법을 물으면“조실(만공)스님께 물어, 난 몰라”라고만 하였다. 수좌들이 조실스님께 이런 말씀을 드리면 “그러기에 내가 희수좌 희수좌 하지 않은가?”라고 하셨다.
왜 스님은 스님께서 얻은 일편지를 단 한 마디도 문자로 표현하지 않았을까? 왜 그것을 꺼리고 조실스님께 물으라고 했을까? 하지만 이런 법희스님의 모습을 보고 만공스님은 “희수좌야말로 참 수좌지”라고 말씀하였다.
법희스님이 자신을 숨긴 이유는 스승인 만공 큰스님이 “자네는 이번 생애에는 어느 자리에서나 법을 설(設)할 생각 말게나. 시기하는 사람이 많으니 시절 인연이 그런 줄 알고 내 말을 잊지 말도록 하게.”라고 당부하셨기 때문이다.

깨우침 속에 승속이 따로 있고 비구, 비구니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본래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인데다가 비구니가 깨달음을 얻어 인가를 받는 일은 더더욱 희귀한 일이었기 때문에, 비구니가 법을 얻었다고 하여 법상에 올라가서 법을 설하는 일은 시비를 자초하는 것과도 같았다.

진정한 수행자의 삶

스님은 평생동안 큰스님의 당부를 지키며 살았다. 혹여 법에 대해 묻는 이가 있으면 “예전에 조실스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였지.”하면서 만공선사의 가르침을 전해주는 것으로 대신하였다. 법희스님은 젊은 시절부터 ‘사내아이로 태었났더라면 훌륭한 재목이 되었을 텐데.’라는 평을 자주 들었고, 춘성, 금오, 전강, 경봉, 혜암 큰스님 등 일류 선지식들이 그 법력을 칭송했으나 말과 글을 남기지 않고 오직 선(禪)에 몰입하였다.
스님은 개울의 물 흐르듯 쉼 없이 수행하는 진정한 수행자로서 생활하였다. 단 한 방울의 기름이라도 사중 것과 개인 것을 가리고 수십 섬의 택미 운력을 하면서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는 모습 하나하나가 행선 그대로였다.
"공부하기 싫으니까 일하기 싫은 거다. 생사와 열반은 둘이 아니다. 육신은 가도 법신은 오고 갈 것이 없다."
평소 입버릇처럼 이렇게 말하면서 대중을 지도하는 데 소홀하지 않았던 스님은 평생 손에서 일을 놓지 않고 대중을 보살피는 일로 일생을 보냈다. 그래서 스님의 손가락은 흙에 닿아 무뎌지고 뒤틀려져 있었다.

만성(萬性)스님과의 인연

법희스님이 대중외호에 얼마나 진력하였는지 알 수 있는 일화가 있다. 1933년 견성암에 늦깎이 출가자가 들어왔다. 나이 서른일곱 살에 수행의 길을 걷기 시작한 이는 만성스님이있다. 입산 후 만성스님은 늦게 출가한 것이 안타까워서 더욱 분발심을 일으켰는데, '상근(上根)은 7일이요, 중근(中根)은 3・7이요. 하근(下根)은 100일‘이라는 가르침에 따라 100일을 정해놓고 참선 정진하였다. 또 사방 1평의 땅을 벗어나지 않는 치열한 정진을 하였다. 그러던 중 3・7일이 되는 날 만성스님은 법희를 느끼게 되었다. 그런데 정진에만 몰입한 나머지 대중 울력 등을 소홀히 하게 되자 "만성스님은 왜 울력을 하지 않는 거야?" "대중 공사를 붙여야 돼." 등 여 여기저기서 원성이 빗발쳤다.

이때 법희스님은 아무 말 없이 무진법문을 펴서 대중의 비난을 잠재웠고, 남모르게 만성스님 몫의 일까지 대신 해주었다. 법희스님의 그림자 같은 외호를 받은 만성스님은 1941년 세수 45세에 만공선사로부터 법을 인가받았고, 그 뒤 제방을 유력한 뒤 부산 범어사 대성암에 비구니 선원을 여는 중추적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이렇듯 스님은 대중생활에서 어려운 소임을 맡아 누구보다 철저히 해냈으며, 울력을 할 때는 다른 사람의 몫까지 드러나지 않게 거들어 주었다. 후배를 키우는 데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전국 각지에서 수행과 교화

법희스님은 수덕사 견성암, 사불산 윤필암, 지리산 화엄사 구층암, 덕산 보덕사, 삼각산 승가사, 천성산 내원사 등에 주석하는 동안 수행과 교화의 인연 따라 마음과 생각을 가다듬어 수행하기를 즐겨하였다.

입적

80세 즈음에는 다시 수덕사 견성암 비구니 총림에 들어가 원장으로 지내면서 선풍을 떨치다가 을묘년 3월 9일에 홀연히 입적에 드니 세수 89세요 법랍 86세였다.

월산(月山)스님의 조사

불국사 조실을 지낸 월산(月山)스님은 대중이 덕숭산 수덕사를 가득 메운 가운데 봉행된 법희스님의 영결식에서 조사(弔辭)를 통해 그의 일생을 다음과 같이 찬탄하고 있다.

 
    법희 노스님이 열반에 드니
    건곤이 빛을 잃은 듯 대중이 다 슬퍼하고
    해가 서산에 떨어지고 달이 동산에 떠오르듯이
    이 덕숭산에 봄이 와서 잎이 피고 꽃이 피었도다.
     
    法喜老鶴西天飛, 乾坤失色日與光. (법희노학서천비, 건곤실색일여광.)
    日落西山月出東, 此日崇山春色滿. (일락서산월출동, 차일숭산춘색만.)

  • 출처: 하춘생. 『깨달음의 꽃1(한국불교를 빛낸 근세 비구니)』. 여래, 1998, p 37

1975년 4월 24일이었다. 한국불교 비구니계의 표상으로 추앙받던 법희스님의 영결식장은 당대의 고승 벽초(碧超)·탄허·경산스님 등을 비롯한 수 천의 대중이 모인 가운데 산천이 동요하는 애통함으로 메아리치고 있었다.

보덕사에 있는 부도와 탑비의 비문

법희스님을 가까이서 모셨던 상좌 상륜(삼각산 승가사 주지) 스님은 은사를 기리고자 1979년 11월 14일 충남 덕산 보덕사에 부도와 탑비를 세웠다. 비문에서 탄허스님은 법희스님의 일생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妙理 比丘尼 法喜禪師 塔碑消印

檀紀 四二二〇年 丁亥 二月 九日에 師生於 忠南 公州郡 灘川面 新基里하니 兪氏昌周之 二女也라. 四歲에 其外祖母 負背하고 入鷄龍山 東鶴寺 彌陀庵하야 出家하니 時는 庚寅 三月九日也러라. 十四歲時에 從貴完尼師削髮하고 依東雲和尙하야 受沙彌尼戒하다. 二十三歲에 入海印寺하야 受具足戒하고 再入 東鶴寺 萬愚會下야 修了 經典語錄等하다. 至二十五歲에 往德崇山 見性庵 入榜하야 修禪中에 心眼이 忽開하니 滿空和尙이 贊之하고 以法喜之號로 贈之하시다.
一日에 和尙이 擧迦葉刹竿話하야 告衆曰汝等은 試道看하라. 尼師 出衆告和尙云호대 魚行水濁이요 鳥飛毛落이니다. 又一日에 擧龍雲法師의 雪裏桃花片片飛之句하야 告衆曰飛在甚麽處오, 尼師口衆曰雪消하니 一片地로소이다. 和尙이 云只得一片地라 하시다.
自此以後로 住錫于四佛山潤筆菴과 智異山 九層菴 漢城 貞陵洞 仁修薺와 德山 報德寺와 千聖山 內院寺와 三角山 僧伽寺等地하야 自行化他에 隨緣渡日하야 攝心慮以恬愉하고 憩閒林而自適하다. 末後七十餘世에 再入修德寺 比丘尼叢林하야 任院長之職而大振禪風하야 逍遙渡日이라가 丁巳三月 九日에 奄然入寂하니 世壽는 八十九요 法臘은 八十五也러라.
考其一生컨대 幽磵으로도 未足比其淸이요 飛雪로도 無以方其素라 前乎百載之旣往과 後乎百載之方來에 未有如此之盛事者也로다. 其門徒相輪宗玄靑空等이 囑余爲文하야 以圖不어늘 余不敢以不文而牢讓故로 略敍顚末 如右하노리. 如上所說은 盖在 實而已요 枝葉華藻는 無所務焉이로라.

應化 三千六年 己未仲秋節
五臺山人 呑虛 宅成 撰幷書

    맑은 시냇물로도 그 깨끗함을 견줄 수 없으며,
    날으는 백설(白雪)로도 그 소박하고 청결함을 어찌 비교하랴.
    수백 년 전과 수백 년 후라도,
    이처럼 진실되고 성스러운 일은 없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비문에서 예시한 것처럼 스님의 고매한 인격, 견고한 신심, 고요하고 온유한 성품, 등불처럼 밝은 얼굴, 온 천지를 포용할 듯한 덕화는 한국불교 비구니계의 표징으로 남아 오늘도 후학들에게 더 없는 전범(典範)이 되고 있다.

  • 출처: 하춘생. 『깨달음의 꽃1(한국불교를 빛낸 근세 비구니)』. 여래, 1998, p 38

수계제자

수계제자로는 춘일(春一)⋅영명(靈明)⋅수옥(守玉)⋅영호(永浩)⋅도원(道圓)⋅장용(䊋湧)⋅혜능(慧能)⋅정화(貞和)⋅수찬(守贊)⋅원성(圓成)⋅도일(道一)⋅상륜(相侖)⋅도전(道全)⋅정운(淨雲)⋅무생(無生)⋅금목(金目)⋅현성(賢性)⋅월덕(月德) 스님 등 상좌와 1백여 명이 넘는 법손들이 문도를 형성하며 비구니 세계(世系)를 이어가고 있다.

수덕사 견성암

[견성암]
사진출처 : 고우어깨동무 (인터넷 카페 https://cafe.daum.net/goudongmoo/QjKW/582?q=%EA%B2%AC%EC%84%B1%EC%95%94&re=1)

견성암은 사천리 덕숭산에 있는 수덕사의 부속 암자이다. 이 암자는 창건 시부터 선원으로 출발한 까닭에 선원 연혁이 곧 사찰 연혁이다. 수덕사 덕숭총림(德崇叢林) 내에서는 비구 참선도량인 정혜사의 능인선원과 함께 비구니 참선도량으로서 그 이름이 높을 뿐 아니라 전국비구니 참선도량 중 가장 대표적인 수도처이다.
과거 정혜사 동북쪽 방향에 자리 잡았던 견성암이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법희스님이 1913년 견성암으로 와서 정진했으며, 1916년 견성암에서 만공스님으로부터 인가를 받았으므로 최소한 1913년 이전에 견성암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법희스님이 수선할 당시 견성암은 두어 칸 남짓의 토굴에 지나지 않았지만, 결제 때만 되면 만공스님을 뵈려고 40~50명의 납자가 북적거렸다고 한다.
견성암 창건의 공덕주는 비구니 도흡(道洽)스님이다. 스님이 큰 시주와 대중의 동참으로 초가집을 지어 산문을 열었던 것이다. 1928년 만공스님은 '견성암방함록서(見性庵芳銜錄序)를 써서 견성암 선원이 명실상부한 비구니 선원으로서 확고히 자리 잡는 기틀을 마련하여 여법하게 제1회 안거자를 배출하였다. 초가집으로 시작한 견성암은 그 후 함석집, 기와집으로 증,개축을 거듭하다가 1940년경 기와집을 이었다.
근현대 비구니스님의 법맥은 만공스님 문하의 견성암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수많은 비구니스님들이 견성암으로 와서 만공스님을 참례하고 가르침을 받았다.
견성암 선원은 1965년 벽초스님이 지금의 수덕사 서쪽 덕숭산 기슭에 석조 2층 건물로 선방을 세워 새로운 중흥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때 벽초스님 이하 전 대중이 서해안의 돌을 직접 나르는 등 합심하여 선원 건물을 완성하였다. 당시 도감은 수인스님, 재무는 정관스님이었다.
김일엽스님이 당시에 입승이셨고 불사 당시 견성암을 신식학교 건물을 본받아 석조건물로 짓는 구상을 했고 견성암 건축 시 재정을 확보하는 것에 공헌이 있었다. 예를 들어 재정확보를 위해 일엽스님의 상좌 월송스님 주연의 법극 ‘이차돈의 사’를 공연하기도 했다.
1986년 도감을 맡은 수연스님이 견성암 본당 1층에 선방을, 2층 법당 좌측에 서선당(西禪堂)(편액 원담 친필)을 짓고 선방 본당에 기와를 얹었다.

  • 자료 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p. 7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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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법희(法喜)스님 본항목 법희스님(法喜, 1887~1975) 法喜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법희스님(法喜,_1887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속성
법희스님(法喜) 삼현문중(三賢) ~의 일원이다
법희스님(法喜) 귀완스님(貴完) ~의 수계제자이다
법희스님(法喜) 동학사 미타암 ~에서 출가하다
법희스님(法喜) 동운스님(東雲) ~(으)로부터 계를 받다 사미니계
법희스님(法喜) 해광스님 ~(으)로부터 계를 받다 비구니계
법희스님(法喜) 만공스님(滿空) ~(으)로부터 전법하다 당호 : 묘리당(妙理堂)
법희스님(法喜) 수덕사 견성암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비구니 총림원장
법희스님(法喜) 안거 ~을(를) 성만하다 예산 수덕사 견성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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