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도원스님(道圓, 1904生, 비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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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도원(道圓)스님은 일생을 선객으로 머물다 간 선승으로 승가사의 최초 비구니스님 주지를 역임하고 승가사를 중창한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904 강원 철원 출생 김화소학교 졸업
1947 견성암에서 법희스님을 은사로 출가
1955 삼각산 승가사 주지, 정화운동에 적극 참여
1957 북한산 승가사 극락전, 영산전, 약사전 큰방 요사채 중건
대한불교비구니 우담바라회(조계종 전국비구니회 전신)재정운영위원장 역임
1971. 4.1(음력) 입적(세수 68, 법납25세)
문중 삼현(三賢)문중
상훈 조계종 종정 표창2회 (정화운동 적극 참여)
수계제자 성수(性修)・성택(性澤)

활동 및 공헌

출가

[중창 이전의 서래당(1970)]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 뜨란출판사 2007년, p279
[도원스님 기념비]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 뜨란출판사 2007년, p282
[승가사 대웅전]사진출처:다음블로그https://blog.daum.net/gotemplestay/288
[승가대사상(보물1000호)]
사진출처:다음블로그https://blog.daum.net/gotemplestay/288
[마애석불(보물215호)]
사진출처:다음블로그https://blog.daum.net/gotemplestay/288
[남북통일호국9층보탑]
사진출처:다음블로그https://blog.daum.net/gotemplestay/288

도원스님은 1904년 12월18일강원도 철원군 김화읍에서 아버지 전기택과 어머니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천안이며 이름은 전금옥이다. 스님은 출가 전과 출가 후의 삶이 크게 변하지 않았던 이적(異蹟)의 소유자였다. 속인으로서의 생활 모습과 출가자로서의 생활 모습이 별반 다르지 않았으며 그만큼 스님은 속인 때부터 참선수행의 모범을 보인 것이다. 스님의 출가 연대는 자세히 밝혀져 있지 않다. 다만 1930년 중반에서 1940년대 초로만 추정할 뿐이다. 스님은 수덕사 견성암을 찾아 만공스님을 참배한 뒤 출가의 뜻을 말씀드렸고, 만공스님은 곧바로 스님을 법희스님에게 인도했다. 은사 법희스님과의 지중한 일대사 인연은 그렇게 맺어졌다.

은사이신 법희스님과 제자들

근세 한국불교사에서 최초로 비구니 선풍을 진작시킨 인물로 묘리당(妙理堂) 법희(法喜)스님을 들 수 있다. 나지도 멸하지도 않는,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는, 늘지도 줄지도 않는 여여(如如)한 법 그대로를 고스란히 간직한 항성(恒星) 법희스님과의 인연은 말없는 무진법문(無盡法門)의 실체와 같았다. 법희스님의 제자들 중에 스승을 닮아 해맑은 얼굴에 영특하고 명민하여 대중에게 칭송으로 회자되는 이들이 많은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맏상좌 춘일(春一)스님을 비롯해 영명(靈明), 수옥, 영호(永浩), 도원(道圓), 혜능(慧能), 정화(貞和), 수찬(守贊), 상륜스님 등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 상좌 중 영호스님은 인물과 재능이 뛰어났고 부지런하여 대중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으나, 안타깝게도 24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또한 수옥스님은 비구니계 3대 강백으로 이름을 드날린 인물로서, 해박한 학식과 납자의 본 분사를 잃지 않았던 비구니계 대표적 인물 중의 한 분이었다. 그러나 수옥스님 역시 은사보다 앞서 적정열반의 도정에 들어섰다. 당대의 대자유인 춘성(春城)스님의 소개로 법희스님과 사자(師資)의 인연을 맺은 영명스님은‘그림자 상좌’로 불리 울 만큼 일생동안 은사를 어버이 섬기듯 지극정성으로 보필했다.

지금까지 생존해 계신 상좌로는 조계종 전국비구니회 부회장직을 맡고 있는 승가사 주지 상륜스님과 수원에 수덕사의 정혜사와 같은 이름의 포교도량을 세워 활발한 교화활동을 하고 있는 정화스님이 대표적이다. 그러한 법희스님의 상좌 중에서 특히 일생을 여여한 선객으로 살다간 눈 밝은 스님이 있으니, 그 분이 바로 도원스님이시다. 납자의 본 분사를 일생의 업으로 소화하며 삼각산9三角山) 승가사(僧伽寺)의 옛 명성을 구현했던 도원스님의 원력은 지금도 뭇 스님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전해주고 있다.

법희스님의 가르침

은사 법희스님의 선지(禪智)를 드날렸던 견성암에서 수행생활은 스님에게 또 다른 경이로운 세계를 터득하게 해주었다. 은사 법희스님을 시봉하며 일대시교(一代時敎)와 선실수(禪實修)의 참모습을 내면 깊숙이 간직하게 된 견성암에서의 생활은 스님을 경지에 올려놓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비구니스님으로서는 처음으로 승가사의 주지를 역임

비구니스님으로서는 처음으로 천년고찰 승가사의 주지를 역임한 스님의 덕행은 고(空)함 속에서도 훈기(薰氣)로 남아 후학들의 가슴을 적시고 있다. 스님은 일생을 선객으로서 머물다 간 진정한 선승 이셨다. 승가사 주지로 부임한 이후에도 수행과 불사를 둘로 나누지 아니했으며, 천 년 세월 동안 소멸과 중창을 거듭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는 승가사의 법등(法燈)이 다시 천년을 기약할 수 있게 된 것은, 그렇게 조용한 변혁을 주도한 스님의 은덕이라 할 수 있다.

스님이 승가사 주지로 부임한 것은 1953년의 일이다 승가사가 비구니 주석사찰로서 그 위용을 갖추게 되는 계기가 된 것은 이 때부터다. 유서 깊은 승가사 주지로 부임을 한 도원스님이, 도량 가꾸기에 힘써 쓰러져 가는 전각을 다시 세우게 된 것은 단지 사찰 건물을 짓는 불사와는 사뭇 그 의미가 달랐다. 왜냐하면 6·25때 모두 소실되어 황폐된 사원의 복원 불사는 찬란한 불교문화의 보고(寶庫)를 일으켜 세우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17평의 극락전(지금은 대웅전)과 8평의 영산전, 큰방(선방)과 원주실채, 요사채 등 가람으로서 하나하나 기틀을 잡아간 것들이 바로 그것을 증명 해준다. 오늘날 스님의 뒤를 이어 주지로 부임한 상륜스님이 사격(寺格)을 크게 융성시킨 전조(前兆)를 이미 그 때부터 싹틔우고 있었던 것이다.

스님의 이 같은 원력의 소산은 1천 4백여 년의 유구한 역사 속에서 국가안위를 기원하는 호국닌야(護國蘭若)로서 나라와 국민의 안녕에 큰 영향을 끼친 전례와 대중의 참선 수도도량으로서 혁혁한 대선지식을 배출하게 된 승가사의 옛 명성을 다시 찾는 전기가 되었다. 또한 조계종 전국비구니회의 창립초창기에 재정운영위원장을 수행하며 비구니의 위상강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사실도 스님의 그러한 원력구현의 한 방편이었다.

입적

그렇게 일생을 선납자로서의 본분사를 지키며 청정 도량을 일구고 비구니의 위상 강화에 앞장선 스님은 애석하게도 1971년 음력 4월 10일에 홀연히 입적에 들고 만다. 세수 69세, 법랍 25세였다. 일하면서도 늘 선정에 들어계시던 일상(日常)은 승가사 주지로 부임한 이후에나 조계종 전국비구니회 간부직을 수행할 때에도 그대로 배어 나왔으며, 입적할 때까지 변함이 없으셨다. 현재 스님의 수계제자로는 성수(性修)・성택(性澤)스님이 있다. 이밖에 지상(智相)·지산(智山, 이상 성수스님계)·상오(常吾)·우일(宇日)·종호(宗昊)·아용(兒恿 이상 성택스님계)스님 등이 대표적인 손상좌들이다.

삼각산 승가사

오늘날 비구니 선원 사찰로 더욱 유명한 승가사는, 창건 이후 덕 높은 스님들을 수없이 배출하면서 1천년도 넘는 역사의 숨결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서울 종로구 구기동 산 1번지 북한산 비봉 중턱에 자리 잡고 있는 승가사는 그 빼어난 풍경과 영험한 기도 효험으로 옛부터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즐겨 찾던 명소였다. 북한산의 수려한 자태는 어느 곳 하나 손색이 없지만, 승가사로 오르는 계곡의 경치는 특히 빼어나 북한산의 여러 계곡 가운데 으뜸으로 꼽힌다. 그래서 그런지 당대의 시인 묵객들이 이 사찰을 주제로 읊었던 시가 여러 편 전해오고 있다. 매월당 김시습(金時習)도 어렸을 적에 이 절에서 공부했다고 전하는 바, 이곳에서 지은 헌시(獻詩)를 세종대왕에게 올려 신동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 유원순(兪元淳)의 시 한편을 옮겨본다.

崎嶇石機攝雲行 華構隣天若化城(기구석기섭운행 화구린천약화성) 秋露輕霏千里爽 夕陽逍浸一江明(추로경비천리상 석양소침일강명) 樣空嵐細連香穗 啼谷禽閑遞磬聲(양공람세련향수 제곡금한체경성) 可羡高僧心上事 世途名利惚忘情(가이고승심상사 세도명리홀망정)

기구한 돌다리에 구름을 밟고 올라가니 좋은 집 높이 있어 조화의 고장 같아라. 가을 이슬 가늘게 떨어지니 천리 안계(眼界)상쾌하고 석양이 멀리 잠기니 저 강물이 밝게 빛난다. 공중에 오락가락 가는 아지랑이 향불 연기에 이었고 골짜기에서 울리는 한가한 새소리 풍경소리를 대신하네. 그보다 부러운 일은 높은 스님의 생각하는 일인 것이 인간 세상의 명리에는 도무지 마음에 없다네.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 뜨란출판사 (2007년, p278~283)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년, p89)
  • 하춘생. 『깨달음의 꽃2(한국불교를 빛낸 근세 비구니)』. 여래, 2001, pp. 241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도원(道圓)스님 본항목 도원스님(道圓, 1904~1971) 道圓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도원스님(道圓,_1904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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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원스님(道圓) 삼현문중(三賢) ~의 일원이다
도원스님(道圓) 법희스님(法喜) ~의 수계제자이다
도원스님(道圓) 수덕사 견성암 ~에서 출가하다
도원스님(道圓) 서울 승가사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주지(감원)
도원스님(道圓) 서울 승가사 ~을(를) 중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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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승가사 : 서울특별시 종로구 구기동 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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