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선혜스님(善慧, 1911生, 비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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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선혜(善慧)스님은 영원암 주지를 맡아 중창불사 진행, 화봉사를 창건했으며 노동으로 정진의 방편을 삼은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생애

1911 평안남도 출생
1935 안변 석왕사에서 응명(應明)스님을 은사로 출가
1935 석왕사 강원 졸업, 회암사 등 선원 안거 성만
1935 경기도 이천 영원암 주지 취임, 영원암 가람 중창불사
1960 포천 화봉사(현 관음사) 창건
1968 영원암 중창
1975 영원암에서 입적(세수 65세, 법랍 41세)
문중 법기(法起)문중
수행지침 실천과 교육
생활신조 일하며 공부하자
상훈 조계종 총무원장 표창
수계제자(『한국비구니명감』) 성근(成勤)・성원(性圓)
문중계보(『한국의 비구니문중』) 창수(昌守, 6)상근(祥根, 7)→보성(寶成, 8)→응명(應明, 9)→선혜(善慧, 10)→성근(成勤, 11), 성원(性圓, 11)

활동 및 공헌

출가

1935년 함경남도 안변 석왕사에 입산하여 응명(應明)스님을 은사로 출가 하였다.

교육과 수행

석왕사 강원을 수료하고 회암사 등지에서 수선안거를 성만하였다.

구렁이를 물리치고 마을 행패꾼들을 따르게 만들다

1953년 스님이 처음 영원암에 들어갔을 때 그곳은 구렁이 집이라 할 만큼 구렁이가 많아 생활하기에 어려움이 있을 정도였다. 낮에는 손을 걷어붙이고 일에 전념하여 도량을 정리하고 밤에는 늦게까지 다라니 주력을 하기를 3개월, 스님의 기도에 부처님께서 감응하신 때문일까. 그 많던 구렁이가 모두 사라졌다.

스님은 남다른 힘을 갖고 계시었다. 선혜스님이 영원암에 오시기 전에는 대처승이 주지로 있었다. 마을사람들이 도량에서 행락과 음주를 즐기는 것을 예사로 하고 있었던지 스님이 주지로 오시고 나서도 그러한 일이 잦았다. ‘청정도량 안에서는 이러면 안 된다’고 타일러도 보고 설득도 했지만 그들은 오히려 행패를 부리는 등 무례한 행동을 일삼곤 했다. 그런데 그렇게 스님에게 행패를 부리며 대들던 사람들은 절에서 내려가는 길에 반드시 다치거나 화를 입었다. 이것이 소문이 나 삽시간에 인근 마을로 퍼져 행패를 부리던 사람들이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들은 스님을 마치 부처님을 보듯 경외하고 따랐다.

포천 화봉사 창건

1960년, 우연히 포천 가산면 방축리를 지나다가 ‘절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스님은 그 길로 무작정 목재소를 찾아가 ‘지금은 당장 수중에 돈이 없으니 우선 목재 나무를 제공해 주면 훗날 시주를 받아 갚겠다’고 청하였다. 처음엔 탐탁하지 않게 여기던 목재소 주인은 스님의 끝없는 정성에 감동하여 나무를 외상으로 주기로 하였다. 스님의 마음에 든 땅 역시 주인을 알 수 없었기에 수소문하여 땅주인을 무려 한 달 동안 찾아다니며 설득한 끝에 결국 그 땅을 주인으로부터 시주받아 화봉사를 구축하였다.

강선암과 영원암(영원사) 불사

화봉사에서 2~3년을 머무른 스님은 다시 강선암에서 몇 년을 지내며 불사를 하고 1968년에 영원사로 거처를 옮겼다. 이때부터 스님은 본격적으로 영원사 불사에 전력을 기울어 지금의 영원사를 구축하였다. 불사의 원만성취를 위하여 어느 것 하나 헛되이 쓰지 않고 근검절약하며 생활한 스님은 고무신이 닳는 것을 염려하여 신발을 벗어 들고 다니면서 농사를 지었다. 신라 때부터 내려온 고찰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에 힘을 보태어 주기를 간곡히 청하여 화주를 받아 불사를 진행시켰다. 그러한 스님의 모습에 마을 사람들도 감동하여 불사에 동참을 하게 되었으며 농사일로 바쁜 낮 시간을 피하여 밤 시간에 법당을 지었다. 그렇게 시작된 불사는 절로 들어오는 진입로인 오솔길을 차량의 통행이 가능하도록 확장하 고서야 끝을 맺었다.

[선혜스님의 원력이 녹아있는 영원암 전경] 출처: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p 345

노동으로 정진의 방편을 삼고

스님은 평생을 벼농사와 불사 등 노동으로 수행했으며 입적하는 그 날까지도 일을 하다 흙발로 방에 들어오셔서 그대로 입적에 들었다. 그 때가 1975년 스님의 세수 65세, 법랍 41세였다. 낮에는 늘 일을 하신 스님은 밤에 잠자는 시간을 아껴 주경야독으로 경전을 독송하였다. 주로 고왕경을 독송하였기에 옆에서 스님을 시봉했던 성원스님은 그냥 듣기만하고도 고왕경을 외울 정도였다고 한다. 말보다는 실천으로, 자연과 더불어 수행인으로 게으르지 않은 근면함으로 평생을 노동으로 정진하신 스님은 흙에서 살다 흙으로 돌아가신 분이다. 제자들에게도 ‘일일부작(一日不作)이면 일일불식(一日不食)’을 자연스럽게 배우고 실천하게 한 선혜스님은 수계제자로 성근스님과 성원스님이 있다.

영원사

원적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영원암은 638년(신라 선덕여왕 7년) 해호선사가 창건했는데, 당시의 절은 지금의 절터보다 약간 위쪽에 있었다고 한다. 수마노석으로 조성한 약사여래좌상을 봉안하였으며 일제시대까지는 영원암으로 불렸다. 사적기에 의하면 1068년(고려 문종22)에 혜거 국사가 불타버린 영원암을 중창하였다고 하며 그때 심었다고 하는 은행나무가 지금도 살아 있다. 설화에 의하면 스님들이 돌부처님을 떠메고 산을 넘어 오다가 날이 어두워져 그 곳에 놓고 주무셨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부처님이 없어진 것이다. 찾아보니 마당에 사라진 돌부처님이 앉아 계셨다고 한다. 그래서 그 자리를 명당이라고 생각하고 절을 지었다고 한다. 선혜스님이 부임하고 나서 마당이 너무 좁아 지금의 장소에 다시 올려 지었으며 그 마당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옥함玉函이 발견되었으나 한 때 후임으로 임명장을 가져온 대처승이 매각하여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 뜨란출판사, 2007, p. 343~348.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년, p. 256.
  •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 363.
  • 이천-가볼만-한-곳-영원사-약사여래상과의-향기로운 2017.04.10. 경기공공누리 3유형
  • 두산백과 “영원사”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선혜(善慧)스님 본항목 선혜스님(善慧, 1911~1975) 善慧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선혜스님(선혜스님(善慧,_1911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속성
선혜스님(善慧) 법기문중(法起) ~의 일원이다
선혜스님(善慧) 응명스님(應明) ~의 수계제자이다
선혜스님(善慧) 안변 석왕사 ~에서 출가하다
선혜스님(善慧) 포천 화봉사 ~을(를) 창건하다
선혜스님(善慧) 이천 영원사 ~을(를) 중창하다
선혜스님(善慧) 안거 ~을(를) 성만하다 양주 회암사 등

지도

  • 영원사 : 경기도 이천시 백사면 송말리 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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