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묘관스님(妙觀, 1936生, 비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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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묘관(妙觀)스님은 1957년 청정종단 수호를 위한 불교정화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인재양성을 위해 종립 동국대학교에 많은 발전기금을 기부하기도 하신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936 일본 야마구찌현 오노다시 출생
1947 해인사 약수암에서 정인(貞仁)스님을 은사로 출가
1948 해인사 강원에서 학봉스님으로부터 초발심자경문치문 수료
1950 해인사에서 인곡(麟谷) 창수(昌洙)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1953 변월주 스님으로부터 사집[1], 사교[2] 수학
1963 해인사 약수암 안거 성만, 해인사 강원 3회 졸업(지관스님으로부터 화엄경 수학)
1965 해인사 강원 수의과 졸업(지관스님으로부터 전등록 수학)
1966 해인사에서 자운(慈雲)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1970~1973 해인사 약수암 원주 소임 및 안거 성만
1979~2003 용흥사 주지
1986 전국비구니회 경남지부 총무
1986~1990 조계종 단일계단 수계산림 니(尼)유나
1989~2000 해인사 약수암 도감
1991~1999 제1~16기 조계종 행자교육원 니사감, 조계종 단일계단 구족계 수계산림 니습의도감
2001~2003 조계종 단일계단 구족계 수계산림 니갈마위원
2001~2004 해인사 약수암 죽림선원 안거
2002~2004 조계종 단일계단 구족계 수계산림 니존증아사리
2004 해인사 약수암 도감
2019 명사법계 품수
문중 청해문중(靑海)
수계제자(『한국비구니명감』) 자홍(慈弘)·홍제(弘齊)·청호(靑浩)·고은·혜조·홍경·경호·청하
문중계보(『한국의 비구니문중』) 지언(智彦, 4)→성주(性主, 5)→영찬(永讚, 6)→정인(貞仁, 7)→묘관(妙觀, 8)→자홍(慈弘, 9), 홍제(弘齊, 9), 청호(靑浩, 9), 경조(鏡照, 9)

활동 및 공헌

출가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 뜨란출판사, 2007, pp. 658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 뜨란출판사, 2007, pp. 659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 뜨란출판사, 2007, pp. 660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 뜨란출판사, 2007, pp. 660
[해인사 장경각에서 정행노스님, 불필스님, 청조스님을 모시고]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 뜨란출판사, 2007, pp. 661
[용흥사전경]사진출처:네이버블로그https://blog.naver.com/buddhafind/222189332398

묘관(妙觀)스님은 1936년 5월 30일 일본 야마구찌현 오노다시에서 아버지 백병장과 어머니 하광명월 사이의 1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수원이며, 이름은 백화자이다. 스님은 다까지오 국민학교 3학년을 다니던 중 해방을 맞아 1945년 9월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해 11월 이모스님이 계시는 절에 머물면서 수양 차 오신 선생님에게 천자문을 배우기도 했다.

스님은 12세 때인 1947년, 이모인 정인스님을 뵈러갔다가 스님이라는 그 자체가 무작정 좋아서 정인스님을 은사로 2월 15일에 출가했다.

수학

출가 다음해부터 해인사 강원에서 학봉 강사스님께 초발심자경문을 시작으로 1년 동안 공부했고, 15세 때 변월주 스님께 사집을 보고 사교까지 보다가 6·25전쟁이 발발해 부득이 공부를 중단해야만 했다. 대교는 정화 이후 지관스님께 배웠다. 정화 때에는 단식을 하고, 대법원에 가서 데모에 동참하다가 용산경찰서에서 하룻밤을 지내기도 하는 등 청정종단을 수호하기 위해 열과 성을 다했다.

정화가 완전히 끝난 뒤 스님은 해인사로 향했지만 당시 비구스님들이 해인사 큰절 30리 안에는 비구니를 두지 않는다는 방침을 세워 발길을 동화사로 돌렸다. 동화사로 가던 중, 대구 서봉사 본공스님 본공(本空)스님의 말씀에 따라 대구 화원 용연사로 갔다. 그곳에서 1년을 살면서 학봉스님을 모셔서 경전 강의을 듣기도 했다. 후에 부산 보림사에서 성능스님께 기신론을 배웠다. 공부를 하기 위해 용연사에서 해인사로 갔다가 해인사 강원에서 비구니를 가르치지 않는다고 하여 부산 보림사로 간 것이다. 이때가 1949년이었다.

1950년 인곡스님께 해인사에서 사미니계를 수계했다. 1963년 28세에 다시 해인사로 와서 지관스님께 화엄경과 전등록(傳燈錄)을 배웠다. 스님이 해인사에서 경을 볼 때는 비구니 명주스님, 창일스님, 묘관스님과 비구 법조스님, 태정스님, 명진스님, 권기종 교수와 함께 했는데 이 7분은 모두 해인 강원 3회 졸업생이다. 그 앞 졸업생은 운허스님께 배우고 첫 화엄경을 지관스님께 배웠다. 당시 해인사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호롱불을 밝히면서 신심을 다져나갔다.

그 후 해인사에서 자운스님을 계사로 모시고 비구니계를 수지했다. 이때가 1966년이었고, 1970~1973년에는 약수암에서 원주소임을 맡아 살았다.

활동

또한 스님은 약수암에서 선방 불사와 법당 불사를 도왔으며, 불사 후에는 선방에서 안거를 하면서 지냈다. 약수암에서 묘관스님은 젊은 스님들에게 초심과 사집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강원이 없을 때는 삼선암, 국일암 학인들 20여 명을 가르치기도 했으며, 강원이 생기고 난 뒤에는 학인들을 운문사, 동학사 등으로 보냈다.

묘관스님은 1979년 2월 22일 합천 용흥사 주지로 임명되었다. 용흥사 주지로 재직 중이던 1985년 10월 9일 전국 비구니 수행교육을 수료했다. 그 다음해인 1986년 8월 11 일 제7회 단일구족계단 유나 화상으로 위촉되었다. 한편 같은 해 5월 30일에는 전국비구니회 경남지부 총무로 임명되어 1990년까지 활발한 활동을 했다.

또한 스님은 1991년부터 2004년까지 수계산림 도감과 갈마위원 및 니존증아사리를 역임했고, 1989년에 서 2000년까지 약수암 도감을 역임했다. 한편 불사에도 힘을 써서 2000년에 합천 용흥사 법당 30평을 준공했다. 묘관스님은 종립학교인 동국대학교의 발전을 위하여 수차례에 걸쳐 발전기금을 기부하기도 했다.

2004년 해인사 약수암 도감으로 재직했으며 2019년 비구니 스님에 대한 최고 지위인 명사법계를 품수했다. 묘관스님의 수계제자로는 자홍(慈弘)·홍제(弘齊)·청호(靑浩)·고은·혜조·홍경·경호·청하스님 등이 있다.

참고자료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묘관(妙觀)스님 본항목 묘관스님(妙觀, 1936~) 妙觀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묘관스님(妙觀,_1936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속성
묘관스님(妙觀) 청해문중(靑海) ~의 일원이다
묘관스님(妙觀) 정인스님(貞仁) ~의 수계제자이다
묘관스님(妙觀) 해인사 약수암 ~에서 출가하다
묘관스님(妙觀) 인곡스님(仁谷) ~(으)로부터 계를 받다 사미니계
묘관스님(妙觀) 자운스님(慈雲) ~(으)로부터 계를 받다 비구니계
묘관스님(妙觀) 명사법계(明師法階) ~을(를) 품수하다
묘관스님(妙觀) 합천 용흥사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주지(감원)
묘관스님(妙觀) 대한불교조계종 행자교육원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니사감
묘관스님(妙觀) 안거 ~을(를) 성만하다 합천 해인사 약수암
묘관스님(妙觀) 계단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구족계단 비구니 증사(별소계단 니존증아사리)

지도

  • 용흥사 : 경상남도 합천군 합천읍 합천리 1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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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관계망




주석

  1. 선종에서 중시하는 것으로, 불교를 학습하는 데에 기본이 되는 네 가지 책. 곧 《서장(書狀)》, 《도서(都書)》, 《선요(禪要)》, 《절요(節要)》를 이른다.
  2. 여러 설이 있으나 보통 능엄경, 기신론, 금강경, 원각경의 4과목을 강원에서는 4교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