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성주스님(性主, 1825生, 비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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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성주스님(性主)스님은 해인사의 부속 암자인 약수암을 창건하고 참선 수행정진에 일생을 받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826 경북 칠곡 출생(흥선대원군의 양딸)
1842 천은사에서 지언(智彦)스님을 은사로 출가
경허(鏡虛)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1847 경허(鏡虛)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1881 해인사 남산 제일봉밑에서 천일기도
기도 가피(굽은 손가락이 펴짐)
1903 현재의 해인사 약수암 창건
1921 1921.4.26. 약수암에서 입적(세수96세,법랍80세)
  • 대원군 당시 국태민안을 위하여 대규모로 수륙재를 지내는 등 지배층이 배척하던 불교를 궁중에 선양하는데 많은 노력을 함.
문중 청해문중(靑海)
생활신조 자신의 허물에 대해서는 조금도 용납하지 않을 만큼 대쪽 같아야 한다.

계행(戒行)이 청정해야 한다.

수계제자(『한국비구니명감』) 영찬(永讚)·의영(義永)·법륜(法輪)·도삼(道三)
문중계보(『한국의 비구니문중』) 대유(大宥, 1)→월림(月林, 2)→원준(圓準, 3)→지언(智彦, 4)→성주(性主, 5)→영찬(永讚, 6), 의영(義永, 6), 법륜(法輪, 6), 도삼(道三, 6)

활동과 공헌

출가

성주스님은 1822년 음력 12월 29일 경북 칠곡군 칠곡읍에서 연안 차씨 보광당 거사와 안동 장씨 도월화 보살님과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연안이며, 이름은 차성주이다.
성주스님이 태어난 그 당시의 우리나라는 다사다난했고, 예로부터 전해져 온 전통문화와 새로운 문화와의 갈등이 매우 심했다. 조선 시대 말엽은 한마디로 과도기이자 격변기였다.
서울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스님은 흥선 대원군의 양딸이었다. 그 덕분에 성주스님은 당시 어려운 국내 사정에도 불구하고 여러가지 신문화를 남보다 일찍 접할 수 있었고 문예에도 출중했고 박학다식 하였다.
독실한 불교집안에서 성장한 까닭에 성주스님이 출가할 때 부모님이 가마에 태워 천은사까지 데려다 주었다. 성주스님은 1842년 22세에 지언(智彦)스님을 은사로, 경허스님을 계사로 모시고 천은사에서 출가하였다.

생활

스님은 천은사에서 늘 기도 정진하였는데, 흥선대원군 당시 국태민안(國泰民安)을 위하여 대규모 수륙재를 지내고, 지배층에서 배척했던 불교를 궁중에 선양하는 데 많은 노력을 쏟았다. 스님은 1856년 세수 32세 때
천은사에서 거처를 옮겨 해인사 남산 제일봉에서 토굴을 짓고 천일기도를 하던 중 어릴 때부터 굽었던 손가락이 펴지는 가피를 입었다. 그 당시에 해인사 원당암에는 상궁들이 살았는데 성주스님도 그곳으로 옮겨 거주하였다.
원당암 칠성각 옆에 복숭아나무가 한그루가 있었는데, 큰절 스님들이 장난으로 복숭아를 모두 따서 가버린 일이 있었다. 그러자 스님은 부처님께서 드실 과일을 먼저 먹었다고 걱정하면서 절을 옮길 결심까지 하였다.
부처님을 향한 스님의 마음이 얼마나 간절한지를 알 수 있는 일화이다. 기록을 보면 환경(幻鏡)노스님께서 그 당시 도감을 살았고, 비구스님들이 스님의 공양주를 지원해 살았다고 하니 스님의 인품을 상상하고도 남음직하다.
스님은 자신의 허물에 대해서는 조금도 용납하지 않을 만큼 대쪽같았고 계행이 청정하여 항상 주위의 본보기가 되었다.

약수암 창건

[약수암 법당]
사진출처: 다음 블로그, https://blog.daum.net/elegant0302/2296

스님의 연세 79세인 1904년 논 30마지기를 큰절의 불량답(佛糧畓)으로 시주하고 현재의 약수암 절터를 얻었다. 원래 이 터에는 가시 넝쿨 속에 샘이 있었는데 물빛이 뽀얐고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았으며 위장병에 좋고 물맛이 좋아서 사찰의 이름을 약수암이라 했다. 약수암은 대한불교 조계종 제12교구 해인사의 부속 암자로 가야산 그윽한 공간에 자리 잡고 있다.
성주스님이 원당암 남쪽에 지모암을 짓고 정진하다가 1904년 현재의 약수암 터에 칠성각을 창건하였고, 1928년에는 도삼(道三) 스님이 노전채인 큰방을 지었다. 1970년 법공(法空)스님이 선방을 지었고, 1975년 묘관스님이 60여 평 규모의 요사를 신축하여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현재 가야산 내 비구니 처소로서 삼선암과 더불어 쌍벽을 이루고 있다.
약수암을 창건할 당시 집집이 돌아다니며 시주를 구하지 않고 앉아서 시주를 받을 만큼 스님의 덕망이 높았다. 참선 수행시 수마가 침범하면 새끼줄로 허리를 매고 정진할 정도로 구도심이 남달랐다.
한번은 약수암에서 경허(鏡虛) 큰스님을 증명법사로 화엄산림(華嚴山林)을 개설하였는데 온 도량이 상서로운 빛이 감돌고 무지개가 서렸다. 스님은 변변한 옷 한 벌 제대로 갖추지 않을 만큼 항상 검약 청빈하였지만 다른 스님들께는 옷을 지어 공양하고 대중스님을 위하여 가사불사를 많이 하였다. 붓글씨도 타인들이 감탄할 정도로 잘 썼는데 안타깝게도 지금은 전하는 것이 없다.
스님이 생전에 원하는 바는 약수암 도량에 신심 납자들이 끊이지 않는 것이었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21년 4월 26일 세수 96세, 법랍 80세로 고요히 입적하였다.

약수암과 죽림선원

[약수암 죽림선원]
사진출처: 다음 블로그, https://blog.daum.net/elegant0302/2296

성주스님이 창건한 약수암 선원은 초창기부터 비구니 납자들이 수선했음을 알 수 있다. 그 증거로 1909년 용성스님이 성주스님의 부탁으로 약수암에 올라가 참선 정진 중인 비구니 납승들에게 법문을 내린 것을 들 수 있다. 당시 용성스님은 약수암에 머물던 비구니 회현, 남전 수좌들의 선문답에 자상하게 선의 정수를 일러주며 선지식 역할을 하였다.
약수암은 1922년 회전 스님을 비롯해 7명의 스님이 세 칸짜리 선방을 지어 참선 정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때 선원이 개설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1940년부터 성선유스님이 감원이 되어 대중 외호의 원을 세워 산내 비구니 선방으로 터전을 다져 나갔다. 1945년 해방이 되던 해 회전 스님이 입적한 뒤 본방 대중 스님 25명이 탁발을 하면서 참선에 들어 수행도량으로서 명맥을 유지해 오다가, 1970년 법공 스님이 선원을 개원하여 본격적으로 정진 대중을 받기 시작해 지금까지 결제 철마다 큰방 대중 50명을 포함하여 70명의 대중이 수선 안거에 들어 실참 수행하고 있다.
약수암 죽림선원은 대웅전 오른편에 담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터에 장중하게 자리 잡고 있다.
선원은 큰방과 목욕탕과 다각실로 이루어져 있는데 큰방은 정면 6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앞뒷면과 한쪽 옆면에 마루가 쭉 놓여 있다. 65평 규모이며 수용 인원은 50명이다.
약수암 선원은 예로부터 노스님들이 정진 대중으로 하여금 편안하게 선에 들 수 있도록 힘쓰고 있으며 또한 선원 터도 안정되어 있기에 마음 놓고 공부하며 정진하기에 더없이 훌륭한 도량이다. 구참 납자와 신참 납자 사이도 화목하여 화합 대중으로서의 면모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예로부터 좋은 수행처란 첫째 토지연, 둘째 도반연, 셋째 단월연이라 했는데 이 세 가지 조건을 약수암 죽림선원은 다 갖추고 있는 셈이다.
결제 시에는 일반 정진하다가 하안거 때에는 7월 1일부터 8일까지 용맹정진하며, 동안거 때는 납월 1일부터 8일까지 용맹정진 한다. 일반 정진기간에도 정진 시간 외에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참선에 들 수 있도록 큰방은 항상 개방되어 있다.
매달 그믐날에는 해인사 대적광전에서 해인사 전 산내도량 대중과 법망경포살을 하고 보름에는 삼선암이나 약수암에서 결제 중인 산내 비구니스님들이 모여 비구니계 포살을 하고 있다. 또 결제, 해제 시 해인사에서 방장 스님으로부터 상당법문을 들으며 공부를 점검한다.

해인사 원당암(구 봉서사) 중창

원당암은 대한불교조계종 제12교구 본사인 해인사의 부속암자이다. 신라 왕실의 원찰(願刹)이었다고 하여 원당암이라 하였다. 802년(애장왕 3) 해인사 창건을 위한 기초 작업장으로 창건하여 봉서사(鳳棲寺)라 하였으며, 애장왕이 이곳에 머물면서 공사와 정사를 함께 돌보았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조선 세조 때에는 비구 학조(學祖)가 오래 머물렀으며, 1501년(연산군 7)에는 『고봉화상선요(高峰和尙禪要)』를 판각, 간행하였다. 이때까지는 봉서사라고 불렀던 독립된 사찰이었다. 그 뒤 원당암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1852년(철종 3)에 우룡(雨龍)이 중수하였고, 1874년(고종 11)에 비구니 성주(性主)가 크게 중수하였으며, 조선시대 말기에 주지 해운(海雲)이 일신 중창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원당암 [願堂庵]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570277&cid=46648&categoryId=46648

수계제자

1999년도 하안거 때는 도감 일운 스님이 선원을 외호하였으며 선덕, 상덕스님을 비롯하여 52명이 정진하며 성주스님의 유지를 기리고 있다.
수계 제자로 영찬(永讚)·의영(義永)·법륜(法輪)·도삼(道三)스님 등이 있다.
여섯 분의 시봉 중에 도삼스님은 입적 후 사리가 나와 약수암 위의 부도에 모셔져 있으며 또 의영 스님은 『법화경』을 강할 정도로 해박했으니 진정 그 스승에 그 제자들이다.

해인사 약수암의 변천

성주스님이 지리산 천은사 도계암에서 수행하다가 1903년 가야산 남쪽 계곡의 마르지 않는 샘을 발견하고 이곳에 가람을 창건하니 지모암이다. 덕망이 높았던 성주스님은 이후 지모암의 명칭을 약수암으로 바꾸고 많은 후계승들을 배출했는데, 청해문중 일파로서 번성을 이룬 것과 약수암이 종문의 본찰로 자리매김한 것은 그로부터 연유한다.
청해문중 태동 당시 고문으로 추대된 보현(普賢)·학련(鶴蓮)·태구(茶具)와 문중태동의 주역인 묘관(妙觀)·용운(龍雲)등이 모두 이 계열에 속한다. 약수암은 성주의 네 번째 상좌 도심(道三)이 1927년 1차 중건했으며 두 번째 상좌 의영(義)의 증손인 법공(空)이 1969년 중창하고 선방(죽림선원)을 개설해 비구니 납자들로 하여금 수선정진할 수 있도록 도량을 일신한 이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출처 :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 127~128.

참고자료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성주(性主)스님 본항목 성주스님(性主, 1826~1921) 性主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성주스님(性主,_1825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속성
성주스님(性主) 청해문중(靑海) ~의 일원이다
성주스님(性主) 지언스님(智彦) ~의 수계제자이다
성주스님(性主) 구례 천은사 ~에서 출가하다
성주스님(性主) 해인사 약수암 ~을(를) 창건하다
성주스님(性主) 경허스님(鏡虛) ~(으)로부터 계를 받다 사미니계, 비구니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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