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종수스님(宗秀, 1922生, 비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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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종수(宗秀)스님은 늦은 나이에 출가하여 피나는 정진과 수행으로 대중을 교화하고 전남 무안에 용덕사를 창건한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922 대전 출생
1974 광주 신광사에서 법명(法明)스님을 은사로 출가
1975 해남 대흥사에서 석암(昔岩)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1976~1978 삼선암, 대성암, 석남사 등 안거 성만
1977 송광사에서 구산(九山)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1978~2000 전남 무안군 용덕사 주지 취임. 가람 수호 및 주석
2020.12.19(음력) 입적(세수(歲數) 99세, 법랍(法臘) 52세)
문중 육화문중(六和)
수행지침(오도송) 만곡상풍일무실(晩殼霜風一無實)이요 만승출가무득(僧出家無得)이오나

금생종식(今生種植)하야 내생현재(來生現在)오며
득종성불(得種成佛)이요 광념대심(廣念大心)이면 비해자연(悲解自然)이라.

생활신조 보시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며, 밥풀 한 알이라도 귀중한 줄 알고 산다
수계제자(『한국비구니명감』) 화진(和眞)· 화형(和炯)· 혜문(慧門)
문중계보(『한국의 비구니문중』) 창문(昌文, 8)→인우(仁友, 9)→명덕(明德, 10)→법명(法明, 11)→종수(宗秀, 12)→화진(和眞, 13), 화형(和炯, 13)

활동 및 공헌

늦은 나이에 출가하다

[명법사에서 선경스님, 법진스님과 함께]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509
[석남사에서 인홍 노스님과 함께]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509
[신도회 임원들과 함께]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510
[구법당 낙성식 때 안해운 노스님, 법진 노스님을 모시고]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창건 대공덕비 제막식]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511
[용덕사 대웅전과 부처님 진신사리탑]
사진출처:우리문화신문 https://www.koya-culture.com/mobile/article.html?no=132285
[용덕사 창건공덕비]
사진출처:우리문화신문 https://www.koya-culture.com/mobile/article.html?no=132285
종수스님]
사진출처:우리문화신문 https://www.koya-culture.com/mobile/article.html?no=132285
[종수스님 승탑]
사진출처:우리문화신문 https://www.koya-culture.com/mobile/article.html?no=132285

종수(宗秀)스님은 1922년 10월 8일 전남 무안군 해제면 학송리에서 아버지 문성규와 어머니 양경국 사이의 1남 2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속명은 문덕금이다. 양친께서는 두 개의 국기가 대나무 끝에 매달려 바람에 펄럭이는 태몽을 꾸셨다고 한다. 부처님 법이 좋아 일찍 출가하고 싶었던 스님은 사정이 여의치 않아 1974년 53세의 늦은 나이로 광주 신광사에서 법명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대개가 힘든 행자 시절을 보낼 적에 스님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젊은 도반들이 배려를 많이 해준 덕분에 별 무리 없이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스님은 출가 이듬해인 1975년 해남 대흥사에서 석암화상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하였고, 1977년 57세 때 송광사에서 구산 대종사를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하였다. 남들보다 뒤늦은 출가임을 늘 잊지 않은 스님은 해인사 삼선암, 범어사 대성암, 석남사 등을 찾아 안거하며 선지를 찾고자 노력하였다.

전남 무안군 용덕사 주지 소임

종수스님은 1978년 세수 57세에 이르러 용덕사 주지 소임을 맡아 불사의 원력을 세우게 되었다. 그러나 용덕사가 위치한 곳이 농촌이다 보니 신도들도 대부분 농부였고, 불자도 많지 않았다.

스님은 처음 이곳에 28평 법당을 지었는데 너무 협소하여 염려하던 차 당시 문화재 관리자 일을 하고 있던 신재연 불자와 인연이 되었다. 당시 신 씨가 불사에 필요한 목록을 하나하나 모두 적어 기록해 놓으라고 해서 스님이 대들보를 비롯하여 기둥과 서까래 등 일일이 항목을 적어 보니 그 액수가 실로 어마어마하였다.

종수스님은 엄청난 공사비 때문에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비록 시작은 힘들어도 불사를 완성할 수 있으리라 믿고 모든 것은 부처님께 맡겨 둔 채 일을 시작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불사를 시작하고 나자 신도들이 잇따라 찾아와 불사금을 내놓았다. 이렇게 해서 기적처럼 불사를 원만히 진행할 수 있었다. 용기를 얻은 종수스님은 불사를 할 때 신장님이 옆에서 옹호해주신다고 믿고 더욱더 신심을 내어 추진한 결과 대웅전, 삼존불 봉안, 범종각 건립, 범종 불사를 모두 회향하였다.

1993년에는 요사채 2동과 창고 등을 짓고 도량 장엄 불사와 더불어 부처님 진신사리 5층 보탑 봉안을 하였으며, 2003년에는 관음전 건립 및 일천관세음보살을 조성·봉안하는 등 불사를 완공하여 회향하였다.

초인적 의지로 정진하여 가피 체험을 하다

뒤늦은 출가는 스님 자신에게 엄격한 채찍이 되어 수행과 정진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했다. 쉼 없는 수행으로 스님은 거의 1년 가까이 몸을 가누기조차 힘들 만큼 고생을 겪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진의 고삐를 조금도 늦추지 않았다. 그 즈음 석남사에서 있었던 일이다. 12월 8일 경이다. 그날도 스님은 여느 날과 다름없이 하루 종일 신심을 다하여 용맹정진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에선가 아름다운 소리가 들려오는가 싶더니 세 살 때부터의 기억들이 일순 다 떠오르면서 배우지 않은 한자까지도 저절로 깨우치게 되었다. 이를 이상히 여긴 스님은 선방스님에게 자신의 공부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물었다. 그랬더니 지금처럼만 열심히 정진하라고 일러주기에 용기를 내어 더욱더 정진에 힘을 가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1월 1일에는 입승스님이 법문해주기를 간청하는 바람에 법문을 하기도 하였다.

아름다운 회향

스님은 한평생이 마치 미끄럼을 타듯, 하루 저녁 지나가는 듯 빠르게 지나가서 당신처럼 늙게 되므로 결코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고 당부한다. 젊어서 공부를 해야 힘을 얻고 정진하는데도 장애가 없으니 하루라도 젊었을 때 정진하라는 말씀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

스님은 모름지기 수행자라면 신념이 강해야 하며, 작은 시주물이라도 그 은혜가 귀중한 줄 알아야 하고 보시하는 마음을 지니고 스님들이나 신도들에게 말을 조심히 해야 할 뿐만 아니라 늘 화합하며 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평생토록 부처님 제자로 살아온 것을 기쁘게 여기고 있는 스님은 이제는 부처님과 중생들에게 회향할 때라는 생각으로 동국대학교 종합병원 건립에 평생 모은 것을 성금으로 보시하였으며 불교방송에도 성금을 기탁하였다. 스님은 모름지기 수행자라면 신념이 강해야 하며, 작은 시주물이라도 그 은혜가 귀중한 줄 알아야 하고 보시하는 마음을 지니고 스님들이나 신도들에게 말을 조심히 해야 할 뿐만 아니라 늘 화합하며 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종수스님은 2020년 12월 19일(음력) 세수(歲數) 99세, 법랍(法臘) 52세로 입적했다. 스님의 수계제자로는 화진(和眞)·화형(和炯)·혜문(慧門)스님 등이 있다.

종수스님 오도송[1]


  늦은 곡식 서리 바람 열매가 없음이요. 산승의 늦은 출가 성불키 어려우나
  금생에 불법 닦아 내생에 있으오며 대자대비 불법심이 부처님 법 이루옵고
  한량없는 불심으로 보리심을 크게 내면 슬픔은 사라지고 진면목을 볼지니라.
 
  만곡상풍무실(晩殼霜風無實)이요. 만승출가무득(晩僧出家無得)이오나
  금생종식(今生種植)하야, 내생현재(來生現在)오며
  득종성불(得種成佛)이요 광념대심(廣念大心)이면, 비해자연(悲解自然)이라

종수스님 시

자화상(自畵像) -2019년 3월5일

  국화 꽃잎 하늘 하늘거리는
  새벽 찬 공기 따라 젖은 국화 꽃잎의 냄새(향기)
  도량석 목탁소리따라 거니는 그 꽃의 향기가 그(이)리도 좋구나
  구 시월 피는 늦가을의 국화꽃 향기는
  노승 인 내 모습을 어느새 닮아 있었네.
                       

용덕사 창건 공덕비 내용

“용덕사는 한반도 소백산의 메아리가 줄기차게 달리다 머물러서 서남단의 다도해를 바라보며 솟아오른 봉대산 자락에 꽃피운 절로 전남 무안군 해제면 광산리 산 41번지, 구룡곡에 1965년 10월 15일 부처님 자비도량으로 개산하였다. (중간줄임) 용덕사를 창건한 종수 스님은 남편 사후를 추모하여 효열 미풍의 시묘 3년이라는 천하에 유례없는 공을 세운 분이다.

(중간줄임) 숲이 우거져 낮에도 혼자서는 내왕이 어려운 우적골에서, 문덕금(훗날 종수 스님)은 세상을 떠난 남편의 시묘살이에 들어갔다. 집안 어른들의 중매로 혼인한 문덕금의 남편은 결혼 7년 만에 세상을 떴다. 무덤 옆에 작은 토막을 짓고 방에는 짚을 깔고 짚 베개를 베고 꼬박 3년의 시묘살이를 했다. 3년간 머리를 감지 않았으며, 입고 있던 흰옷은 검정 옷으로 변해있었다.(중간줄임) 시묘살이 뒤에 유년시절부터 선천적으로 불교를 신앙했던 종수 스님은 비구니절로 들어가 수행자의 길을 걷고자했는데 문중 어르신들께서 ‘문중을 빛낸 분’을 어찌 남의 절로 가시게 할 수 있냐는 의논 끝에 문중의 선산 680여 평과 인법당(人法堂)을 지어 종수 스님께 희사했다.

이때가 1969년 11월 17일이었다. 사찰명은 구룡곡(九龍谷)의 용(龍)자와 속가명인 문덕금(文德今)의 덕(德)자를 취해 용덕사(龍德寺)라 지었다. 용덕사를 창건한 종수 스님은 1971년 지금의 절터에 관음전을 지어 관세음보살을 봉안하였다. 그 뒤 1972년 공주 마곡사에서 법명 스님을 은사로 출가의 길을 걷기 시작하여 광주 신광사에서 행자생활을 하고 1976년 대흥사 석암 대종사를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계하였다. 1978년 송광사에서 구산 대종사를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계한 뒤 해인사 삼선암, 범어사 대성암, 울주 석남사 등에서 참선수행을 하셨다.

이후 용덕사에 주석하시면서 불교 불모지였던 이 지역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펴시다가 용덕사를 대한불교조계종 22교구 대흥사 말사로 등록한 뒤 불사(佛事)에 착수하여 1990년 대웅전 건립 및 삼존불 봉안, 1992년 범종각 및 범종불사, 1993년에는 산신각 건립, 2001년에는 부처님진신사리 5층보탑 및 관음전 건립, 일천관세음보살을 조성 봉안하여 오늘의 가람을 완성하였다. 이러한 일은 종수 스님의 초지일관 광대무변한 원력과 일구월심의 기도 정진으로 이룩한 것이다. -불기 2548년(2019) 10월 2일 용덕사 창건 공덕비 건립 추진위원회-”

참고자료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종수(宗秀)스님 본항목 종수(宗秀, 1922~) 宗秀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종수스님(宗秀,_1922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속성
종수스님(宗秀) 육화문중(六和) ~의 일원이다
종수스님(宗秀) 법명스님(法明) ~의 수계제자이다
종수스님(宗秀) 부산 범어사 ~에서 출가하다
종수스님(宗秀) 석암스님(昔巖) ~(으)로부터 계를 받다 사미니계
종수스님(宗秀) 구산스님(九山) ~(으)로부터 계를 받다 비구니계
종수스님(宗秀) 무안 용덕사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주지(감원)
종수스님(宗秀) 안거 ~을(를) 성만하다 합천 해인사 삼선암, 부산 범어사 대성암(청룡동), 울주 석남사 등

지도

  • 용덕사 : 전라남도 무안군 해제면 광산리 4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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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고승들이 불도의 진리를 깨닫고 지은 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