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덕수스님(德修, 1922生, 비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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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덕수스님은 불교정화운동에 지대하게 기여한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922 충남 홍성 출생
1940 윤필암에서 응함(應咸)스님을 은사로 출가  
1940 동산(東山)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동산(東山)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1941 상주 남장사강원 사집 수료
1942 문경 윤필암 안거 성만
1954 한국불교 승단 정화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  고양 흥국사에서 7년간 주지 역임,  청양 장곡사에서 4년간 주지 역임
1992~2004 현재 예산 수덕사 견성암 주석, 견성암 선원장
문중 삼현(三賢)문중
수행지침 욕심 부리지 말고 정직하게 살자.
수계제자 현진(玄眞)·현초(賢草)·고헌·성곡·효봉·보광·홍은·계성
<조선해방기념-만공조실스님을 모시고 청년일동>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p. 478

활동 및 공헌

출가

덕수(德修)스님은 1922년 4월 20일 충남 홍성군 구학면 모봉리에서 2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평양이며, 이름은 조한창이다. 불심이 깊었던 스님의 증조모께서는 정혜사에 다니면서 손주들을 위해 무릎이 닳도록 기도를 했다. 이런 집안 분위기 속에서 스님도 어릴 때부터 어머니를 따라 절에 다니게 되었다. 스님은 19세 되던 해에 먼저 출가한 언니 덕문스님의 뒤를 이어 문경 대승사 윤필암에서 응함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이듬해 남장사 강원에서 사집을 수료하고, 21세 되던 해에 윤필암에서 안거 후 제방 선원에서 안거를 성만했다.

불교정화운동 참가

<설악산 대청봉에 선 덕수스님>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p. 481
<덕수스님>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p. 482
<덕수스님>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p. 485

덕수스님은 대한불교조계종 출범의 1등공신이다. 스님은 1960년대 개운사에 주석하면서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종단을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했다. 5.16 군사 정변으로 정권을 장악한 군부는 처음에 불교 정화를 내부 분규라며 비구와 대처승이 동일한 비율로 무조건 통합할 것을 강요했다. 그 후 출가한 스님들이 불교정화의 명분과 당위성에 대해서 박정희 정권을 설득하여 비구 중심의 통합종단 출범에 큰 기여를 한다. 이렇게 박정희 정권의 인식 변화를 이끌어낸 한 분이 바로 덕수스님이었다. 스님은 박의장의 장모와 친분을 맺어 정화의 당위성을 설파하는 종단 큰 스님들의 편지를 전달하고 때로는 방문을 주선하기도 했다. 다음은 불교계가 불교정화운동의 정당성을 주장하여 정부를 설득하는데 덕수스님이 기여한 사항을 밝힌 월주 스님 회고록 『토끼뿔 거북털』을 인용한 내용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최고 권력자인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의 관계였다. 종단에서는 다각도의 노력을 기울였다. 비구니 덕수 스님이 박 의장의 장모 이경영 씨(법명 대각화)를 어머니처럼 모셨다. 이 씨는 사위가 5·16을 일으키자 개운사로 찾아와 불공을 올렸고, 이를 계기로 덕수 스님과 가깝게 지냈다. 스님은 속가 언니(덕문스님)도 함께 출가한 자매 비구니였다. 청담, 경산 스님이 진정서를 쓰거나 종단의 입장을 정리하면 덕수 스님의 손을 거쳐 이 씨와 박 의장에게 전달했다. 개운사를 다니던 육영수 여사도 남들의 이목이 우려된다며 사찰을 소개받아 도선사의 청담 스님과 인연을 맺게 된다. 청담, 경산 스님 등은 박 의장 등 권력 핵심부에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정화운동의 대의를 집요하게 설득했다. 박 의장 일가의 적극적인 도움이 정화운동에 기여한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당시 비구 측에 불리하게 전개되던 대처 측과의 소송까지 모두 취하시켰다. 박 의장 일가의 태도가 비구 측에 우호적으로 바뀌자 정부 측 인사들도 직간접으로 정화운동에 힘을 실어줬다.

비구, 대처승과의 갈등

정화 이후 개운사는 비구스님들의 뒤에서 묵묵히 실질적인 힘을 더해 정화를 이룩해낸 비구니 스님들이 살게 되었다. 서울에서 재정이 튼튼한 사찰중의 하나로 손꼽혔던 개운사는 당시 주지였던 대처승의 횡포가 심하기로 유명했다. 이리하여 개운사의 큰방에서는 비구니스님들이 발우공양을 하고, 대처승들은 사무실 쪽에서 밥을 지어 먹으며 살게 되었다. 당시 개운사의 주지 소임은 덕수스님의 사형이신 덕문스님이 맡았다. 덕문스님은 소임을 사는 기간 동안 요사채를 짓고 법당을 짓기 위한 터를 닦아 놓았다. 이는 전후 불교역사에 불사의 원력을 더하여 도량 가꾸기에 전념을 쏟은 비구니들의 역량을 여실히 반영하는 대목이다. 이렇게 비구니스님들의 개운사 도량 중창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동안에도 대처승들의 횡포는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그 중 한 예를 들어보면, 4월 초파일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하여 비구니스님들이 줄을 매고 등을 달아 놓으면 대처승들이 도량을 돌아본다며 등줄을 모조리 끊어놓아 등이 마당으로 떨어져 못쓰게 만들곤 하였다. 견디다 못한 비구니스님들이 경찰서에 신고를 하면 대처승들은 연신 허리를 굽혀 사과하며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지키지도 않을 약속을 하였다. 경찰들을 설득해 보낸 뒤에는 또다시 같은 횡포를 되풀이하곤 했다. 이를 참고 인내하며 이겨내는 동안의 노고는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덕문 주지스님은 잘못된 시절 탓에 제때 공부를 하지 못한 것이 너무나도 아쉬워 비구니 강원을 개설하려는 원력을 세우고 일을 추진했다. 그러나 총무원의 큰스님들께서 ‘비구가 강원을 열기도 전에 비구니가 당돌하게 먼저 나선다.’며 노골적으로 비구니를 차별하고 업신여겼다. 그런 모멸을 겪을 때마다 덕문스님을 비롯한 수많은 비구니들은 몸과 마음으로 속절없이 눈물만 삼켜야 했다. 결국 총무원의 뜻에 따라 덕문스님의 강원 개설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절망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개운사에 비구가 들어오게 되어서 스님은 다시 대원암으로 거처를 옮겨야 했다. 이후 개운사에 새로운 주지가 올 때마다 여러 가지 이유로 덕문스님과 문제가 생기곤 했었다. 그러나 월주스님이 개운사 주지를 맡으면서 비구니스님들에게 이르길 “진심으로 하는 이야기인데, 대원사를 가타부타 관여하지 않을 터이니 스님들이 하고 싶은 대로 소신껏 살아보시오.” 하며 배려를 해주었다. 비구니라는 이유로 마음대로 휘두르며 어떻게 해서든 트집을 잡아 괴롭히던 여느 비구스님과는 다른 유일한 분이셨다. 월주스님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안고 비교적 평온한 생활을 하던 중, 덕문스님은 59세의 이른 나이로 입적을 하셨다. 그리고 이어 덕수스님이 주지를 맡게 되었다.
스님이 주지 소임을 맡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당시 조계사 총무원장으로 재직 중이던 손경산 스님과 총무부장으로 재직 중인 월주스님이 덕수스님을 총무원에 등원하라며 호출을 하였다. 그 자리에서 탄허스님이 『화엄경』 불사를 할 장소가 마땅치 않다는 이야기를 시작하더니 조금도 망설임 없이 어른 비구스님의 명령이 떨어졌다. 대원암은 교통도 편리하고 전기와 전화가 가설되어 있으니 『화엄경』 불사에 이보다 적합한데가 없다며 대원암을 내놓게 하였다. 그리고 월주스님에게 “이 자리에서 흥국사 주지로 임명을 해라.”고 말씀하는 것이었다. 덕수스님은 억울하고 분한 마음이 가득했지만 가타부타 아무런 말도 못하고 어쩔 수 없이 경기도 고양시의 흥국사로 가게 되었다. 개운사 시절, 지금의 보타사인 칠성암의 소유문제로 그곳에 살던 대처승 김규선과의 마찰이 많아 그 일로 경찰서 출입이 잦았다. 결국 대처승을 쫓아내지는 못했으나 김규선은 ‘덕문이는 호랑이고 덕수는 그 이상인 사자이다.’라는 말을 자주했다고 한다.

흥국사 주지 소임

덕수스님이 흥국사에 가게 된 날은 입춘이었다. 그날 아침 대원암에서 입춘기도를 마치고 흥국사에 가서 살림을 둘러본 스님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사무실에는 약간의 서류와 얼마의 보리쌀과 쌀 몇 되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전기 불사 명목으로 신도들에게 불사금을 걷어 공사를 한다고 해놓은 게 전기선이 아닌 이상한 것들만 천장 곳곳에 매달려 있는 등 도량은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부처님을 이런 환경에 모셔둔 것이 너무나도 죄송스러워 스님은 곧바로 불사에 들어갔다. 그런데 수중에 가진 돈이 없었기에 신심 있는 보살님들의 도움을 받아 탑과 팔각정 불사를 이루었다. 또한 흥국사에 전화가 없어서 아랫동네까지 가서 빌려 쓰는 바람에 사람들과의 시비가 자주 일어나자 스님은 무엇보다 전화가설을 시급한 문제로 생각했다. 당시 칠성암의 주지였던 대처승 김규선은 박정희 대통령의 장모이신 대각화 보살의 힘을 등에 업고 이런저런 도움을 받고 있던 터였다. 덕수스님은 이같은 정보를 얻고 불광동까지 버스를 타고 가서 청와대 경무대에 있던 박대통령의 장모님께 전화를 걸었다.
“이북에서 쳐들어와 우리를 끌고 가도 모를 것이니 전화가 꼭 필요합니다. 저 있는 곳은 경기도라 시내전화로도 안 되고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아무 말 없이 스님의 말을 듣고 있던 노보살님은 “가만 있어봐.”라며 전화를 끊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경무대에서 사람이 나와 흥국사의 사정을 살피고 간 뒤 곧바로 직통전화를 놓아주었다. 흥국사는 법당은 물론 다락과 탁자 밑 어디고 할 것 없이 도량전체가 쓰레기 더미였다. 스님은 석 달 내내 밤낮으로 도량정비와 청소를 하느라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였다. 방구들이 막혀 불이 제대로 들어오지 않아 몹시 추웠고, 지붕에서 비가 새는 것은 예사였다. 하수시설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아 추운 겨울에도 오수를 버리려면 밖으로 나가야만 했다. 물도 산신각 옆의 조그만 우물에서 길어다 먹어야 하는 등 불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당시 흥국사는 절 옆쪽에 위치한 산장과의 문제가 재판에 계류 중이었는데, 열악한 환경 속에서 도저히 살 수가 없어 전기를 함께 놓아주는 조건으로 재판을 취하시켰다. 덕수스님은 그 후 7년간 흥국사 주지 소임을 보면서 도량 전화와 더불어 제대로 된 사찰의 모습을 갖추기 위하여 불사를 거듭하였다.

흥국사, 장곡사를 떠나 어디로 가나

스님은 개운사에 있을 때부터 비구니들의 배움의 터전을 마련하는 것이 원이었다. 그러나 사찰 내부에서 서로의 의견이 맞지 않는 예기치 않은 상황이 발생하였다. 그리고 20명의 회원으로 구성된 달마회가 4월로 예정되어 있던 모임을 한 달 앞당겨 3월에 흥국사에서 열기로 하였다. 마침 그해 3월 25일은 덕문스님의 기일이었다. 경험이 부족했던 덕수스님은 맨몸으로 흥국사를 떠나 오갈 데가 없는 처지가 되었다. 그 길로 만행을 시작한 스님은 하루하루 쉴 곳을 찾아 헤매야 했고, 길을 걷다가 인연이 닿는 아무 절이나 찾아 들어가 쉬기도 하였다. 부처님 전에 절을 할 때면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스님은 오직 세상 모든 이들이 잘 되기만을 부처님 전에 기원하였다. 그렇게 전국을 떠돌며 운수행각을 하던 덕수스님은 어느 날 청양 장곡사에 다다랐다. 당시 장곡사에는 비구스님이 살고 있었는데, 마침 스님이 잘 아는 신도가 요양 차 그곳에 머물고 있었다. 이에 스님은 함께 기도하고 약도 먹으며 몸을 회복할 생각으로 잠시 장곡사에 있기로 하였다.
어느 날 스님이 설악산에 다녀오니 절을 지키던 비구스님은 온데간데없고 젊은 처사가 절을 지키고 있었다. 절에서 기르던 고양이는 몇 날 며칠을 굶주렸는지 바싹 말라 뼈만 앙상했다. 덕수스님은 승복을 입은 이상 빈 도량을 두고 차마 떠날 수 없어서 청소라도 하고 가려고 장곡사에 남게 되었다. 아쉬운 대로 인근 보살님의 도움을 얻어 겨우 밥을 해먹으며 살았는데, 툭하면 경찰서에서 간첩이 아닌가 하여 둘러보며 스님을 의심하는 것이었다. 물론 당시 지리산을 비롯한 깊은 산속에 군경에 쫓긴 공비들이 시도 때도 없이 민가에 출몰하다 보니 경찰로서는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일이 너무 잦다 보니 화가 난 스님이 급기야 경찰서에 항의를 하였다.
“경찰이 눈치코치도 없이 무슨 경찰노릇을 합니까. 똑똑히 민심을 파악한 후 제대로 하십시오.”
얼마 후 마곡사에서 스님에게 장곡사 주지 임명장을 보내왔다. 스님은 우선 급한 대로 비가 새는 법당과 기와 불사와 구들, 축대 등 형편없는 도량을 정비하기 시작했다. 당시 장곡사에는 문화재로 등록된 철재 부처님이 계셨다. 그런데 문화재 관리국에서 나와 사진을 찍을 때 자세히 살펴보니 부처님 몸이 심각하게 부식되어 있는 것이었다. 덕수스님은 비로자나불을 비롯하여 약사여래불 등 삼존불을 불사하고, 양심선언을 한 군수를 찾아가 도움을 청하여 수도 및 정랑 등의 불사를 하게 되었다.
그러는 사이 스님의 주지 임기가 끝나가고 있었다. 이 사실을 알고 군수를 비롯한 동네 지역민이 총무원에 탄원서를 제출하고 직접 찾아가 ‘덕수스님은 불사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으니 지역민을 위해서나 사찰을 위해서나 더 머물게 해달라.’고 간곡히 요구했다. 그러나 본사인 마곡사나 총무원에서는 이를 철저히 무시했다. 보물이 있는 곳이기 때문에 비구니스님 혼자서 감당할 수 없을 것 같다고 오히려 현지 주민들을 설득하는 것이었다. 이런 일을 미리 염려한 주민들은 스님이 불사를 시작할 때 “스님 불사하지 마세요. 불사하면 절을 뺏깁니다.” 하며 불사를 만류했었다. 그러나 덕수스님은 ‘부처님 제자가 허물어져가는 부처님 도량을 보고도 제대로 가꾸지 않으면 그것은 도리가 아니다.’라며 번듯하게 불사를 해놓았던 것이다.
그러나 덕수스님은 본사나 총무원에서 절을 뺏을 거라는 소문을 듣고 난 뒤 오히려 후임자가 편안히 살 수 있도록 장을 담그고 이불 빨래도 다 해놓는 등 도량 곳곳을 깨끗이 청소해놓았다. 그 후 주민들의 걱정대로 어느 날 갑자기 마곡사와 총무원에서 보낸 사람들이 들이닥쳐 스님 앞에 문서를 내밀며 막무가내로 도장을 찍으라고 하였다. 이에 스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류에 도장을 다 찍어준 후 마곡사 재무에게 한마디를 하였다.
“이런 식으로 일을 처리 하니까 조계종이 안 좋은 소리를 듣는 것 아닌가? 신성한 사찰에서 대체 이게 무슨 짓인가. 전후 사정을 이야기하고 절차를 밟아 제대로 내려오면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그랬더니 그들은 스님에게 차비를 하라며 봉투를 건넸다. 일개 말사를 인수인계하며 봉투를 주는 처사에 스님은 기가 막히고 억장이 무너졌지만, 깨끗하게 물러나야겠다는 생각에 정중하게 사양하였다. 설상가상 그날 저녁부터 스님의 몸이 몹시 아파 장곡사에서 자고 다음날 떠나려 했지만 그것마저 여의치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잘 아는 사람에게 전화를 하여 경운기를 보내 달라고 부탁을 하고 옷가지 등 몇 가지 짐만 급하게 싸서 동네 사람 집에서 3~4일을 앓아누웠다. 그런 와중에 전에 절에서 일하던 처사가 그들이 건넨 봉투를 가지고 왔다. 스님은 ‘내 뜻을 그렇게 모르겠느냐.’며 화를 내서 돌려보낸 후 병원에 입원을 하고 말았다. 간신히 몸을 회복하고 퇴원한 스님은 그동안 탄원 등 여러 가지로 신경을 써준 군수님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어 군청으로 인사를 갔다. 군수님은 스님을 보자마자 불교종단의 불합리한 제도에 재가불자로서 분노를 터뜨리며 안타까움과 아쉬운 마음을 전했다.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스님은 아픈 몸을 이끌고 마땅히 갈 데가 없었다. 스님은 어렵게 빈 집을 마련하여 잠깐 쉬다가 만행을 계속하였으며, 71세 되던 해에 현재 거주하고 있는 견성암으로 오게 되었다.

후학에 대한 당부

덕수스님은 근세 한국 비구니 수난사의 힘겨운 시대를 고스란히 온몸으로 감당하며 기도와 수행 정진의 힘으로 꿋꿋하게 이겨내었다. 스님은 후학들에게 ‘자만심에 앞장서거나 욕심을 부리지 말 것, 이중성격을 쓰지 말 것, 모쪼록 성실하게, 흐르는 물도 아껴 쓰라는 부처님의 말씀과 같이 살 것’을 당부한다. 당신은 뚜렷이 해놓은 것은 없다며 겸손함을 내보이는 스님은 대쪽 같은 성품을 지니고 있기에 잘못된 일이 있을 때 그것을 바로 잡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였으며, 물질만능 시대에 살고 있는 후학들에게 시주의 은혜가 무거운 것을 상기하고 ‘정신 차려 중노릇 잘하라.’고 경책하였다.
스님은 윤필암, 남장사 관음암, 견성암 등지에서 일과 기도를 쉼 없이 계속하였는데 윤필암에 있을 당시 장좌기도를 며칠씩 하고 나면 발바닥이 수북하게 부어오르는 것은 예사였다고 한다. 대승사 선방에 성철 큰스님과 청담 큰스님이 정진을 하고 계셨는데, 날마다 대중들 몰래 윤필암을 돌아보고 가곤 하셨다. 하루는 성철 큰스님이 좌복을 하나 가지고 42가지 운동하는 법을 가르쳐주셔서 번거롭게 밖에 나가지 않고 안에서 운동을 할 수가 있었고, 능엄주를 하라고 하여 기도를 하고 정진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정진 중에 몰려오는 잠은 참기가 힘들었다. 잠을 쫓기 위해 산에 올라가 종아리를 걷은 후 회초리로 힘껏 내려치기도 하였는데, 종아리에서 피가 비치면 잠시 정신이 번쩍 났다. 하지만 다시 방에 돌아와 기도를 시작하면 잠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져서 찬물을 떠다놓고 물을 끼얹어가며 기도를 하였다. 그때는 정의(정랑에 갈 때 입는 옷)를 반드시 갈아입고 정랑에 가야했고, 법당에 들어갈 때 입는 옷도 따로 있었다. 상하복의 구분을 분명히 했고 법다움을 지키며 기도를 하였다.
2004년 현재 수덕사 견성암에서 수행 정진 중인 덕수스님의 수계제자로는 현진(玄眞)·현초(賢草)·고헌·성곡·효봉·보광·홍은·계성스님 등이 있으며, 유발 손주상좌인 박진현씨가 고려 탱화를 하고 있다.

참고자료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덕수스님(德修)스님 본항목 덕수스님(德修, 1922~ ) 德修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덕수스님(德修,_1922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속성
덕수스님(德修) 삼현문중(三賢) ~의 일원이다
덕수스님(德修) 응함스님(應咸) ~의 수계제자이다
덕수스님(德修) 대승사 윤필암 ~에서 출가하다
덕수스님(德修) 동산스님(東山) ~(으)로부터 계를 받다 사미니계, 비구니계
덕수스님(德修) 불교정화운동 ~에 참여하다
덕수스님(德修) 고양 흥국사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주지(감원)
덕수스님(德修) 청양 장곡사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주지(감원)
덕수스님(德修) 수덕사 견성암 ~에서 주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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