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현진스님(玄眞, 1934生, 비구니)

bigu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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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현진스님은 인정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부산 옥련선원을 중창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934 경북 영천 출생
1948 동학사 미타암에서 인정(仁貞)스님을 은사로 출가
1948 무불(無佛)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성운(性雲)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1966~2002 옥련선원 대작 불사, 수행 정진
1986 옥련유치원 개설
1992 석조미륵대불 조성
1998 재단법인 옥련선원(허가)
전통사찰등록(제28호)
1999 해군사관학교법당 호국사 중창(경남 창원)
임진왜란 좌수영 무주망령 천도비 건립
2002 창원, 춘천, 계룡대, 강원도 등 군 포교 불사
2004 현재 옥련선원 회주
문 중 삼현(三賢)문중
수행지침(오도송) 석골청산(石骨靑山)은 수낙처(樹落處)하니 호해부유(昊海浮有)가 아득하고

백일정진삼매정(百日精進三昧定)하니 시삼계우주(是三界宇宙)가 붕괴함이로다.
아현법신청정명(我現法身淸淨明)하니 일월광명(日月光明)이 분운(粉雲)이요,
만상여이진공로(萬象如離眞空路)하니 천만제불(千萬諸佛)이 과불찰(果佛刹)이로다.
호호탕탕(浩浩蕩蕩)하여 전면후면(前面後面) 사면(四面)이 괴회(壞回)하니
우주진공 묘각원(宇宙眞空 妙覺圓)일레라.

생활신조 시주의 은혜를 항상 무겁게 생각하며, 내가 배운 만큼 중생 포교에 회향한다.
상 훈 대한불교 조계종 총무원장 감사패 외 다수
수계제자 상훈(常熏)·일오(一悟)·대선(大善)·민철(民徹)·철오(哲悟)

활동 및 공헌

출가

보현 현진(玄眞)스님은 1934년 11월 25일 경북 영천 보현산 아래 대황리에서 아버지 적선거사와 어머니 평산 신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밀양이며, 이름은 박갑술이다. 부친의 꿈에 태양이 솟아올라 입속에 들어오더니 스님을 잉태하였다고 한다. 스님은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여 사서삼경을 통달하였으나 안타깝게도 11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편부슬하에서 자라면서 인생의 무상을 느꼈다. 그리하여 1948년 15세에 계룡산 동학사 미타암에서 인정(仁貞)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고, 무불화상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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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도(悟道)

스님은 인정스님 문하의 동학사 미타암에서 은사스님을 시봉하며 수행 정진을 시작하였다. 이후 세존도, 백도, 광양, 성불사 등 전국을 다니면서 선지식을 찾고, 철저한 참선 수행을 거듭하다가 광양 백운산에서 정진 중 한 소식을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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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도송(悟道頌)

     석골청산(石骨靑山)은 수낙처(樹落處)하니
     호해부유(吴海浮有)가 아득하고
     백일정진삼매정(百日精進三昧定)하니
     시삼계우주(是三界宇宙)가 붕괴(崩壞)함이로다.
     아현법신청정명(我現法身淸淨明)하니
     일월광명(日月光明)이 분운(粉雲)이요,
     만상여리진공로(萬象如離眞空路)하니
     천만제불(千萬諸佛)이 과불찰(果佛刹)이로다.
     호호탕탕(浩浩蕩蕩)하여
     전면후면(前面後面) 사면(四面)이 괴회(壞回)하니
     우주진공(宇宙眞空) 묘각원(妙覺圓)일레라.

  • 출처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권. 뜨란출판사, 2007, p. 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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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증도가(證道歌)

     나물 먹고 물 마시고
     대장부(大丈夫) 팔을 베고 누웠으니
     잠이 올까 앉았으니
     잠이 올까!
     호호탕탕(浩浩蕩蕩) 진공중(眞空中)에
     뉘를 만나 하소하리.
     일소일소(一笑一笑) 부일소(復一笑) 함일레라.

  • 출처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권. 뜨란출판사, 2007, p. 60

옥련선원 중창

옥련선원

스님은 한 소식을 얻은 뒤 인연의 터를 찾아 부산 수영구에 있는 백산으로 오게 되었다. 스님의 세수 33세 되던 1966년의 일이다. 백산의 지리를 살펴본 스님은 비구니 도량으로 부족함이 없는 데다 민족정기가 어린 곳이라 직관하고 일생을 바친 대작불사의 원력을 세웠다.
부산 수영구 민락동에 위치한 옥련선원은 670년(무무왕 10년) 원효대사가 백산사로 창건하여 910년(성덕왕 9년)에 최고운(崔孤雲) 선생이 은둔 참선한 유서 깊은 고찰이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좌수영의 보루로 사용되었으며, 근세에 들어와서는 금봉 해월선사 등 고승들이 토굴 정진을 한 곳이기도 하다. 1635년(인조 13년) 해운선사가 옥련암으로 개칭하고, 다시 1976년 대웅전을 중창하면서 가람의 규모가 커져 대찰로서의 그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니 절 이름을 옥련선원(玉蓮禪院)이라 개칭하였다. '옥'은 백산을 잉태한 옥황상제의 천제단이 있었던 데서, '련'은 지형이 연화형인 데서 비롯된 이름이며, ‘선원'은 앞으로 많은 선사를 배출할 선방이란 의미에서 지어졌다.
옥련선원은 한국 고유의 불교, 문화, 예술 및 건축사의 추이를 이해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고 인정되어 1998년 10월 10일 전통사찰 제28호로 지정되었다. 삼국시대의 마애미륵석불과 신라 시대의 불상으로 추정되는 부석불석상 등 여러 가지 불화와 탱화 등이 있다.
스님은 약 5년에 걸쳐 주위의 토담집을 헐고 주변 환경을 정리한 뒤 부지를 확보하고 대웅전을 세웠다. 금당은 목조구간에 외 5포, 내 7포로 2년간의 공사기간을 거쳐 1980년 10월 6일에 준공하였으며, 많은 신도와 유지들의 봉축 속에 첫 불사를 성공리에 이루었다.
이에 힘을 얻어 25년 동안 장구한 불사가 계속되었다. 1979년에는 선방 10칸과 범종각 6각에 범종 1200백관을 주조하는 등 많은 불사를 하였다. 또한 2,000평 규모의 2층 건물을 지어 1층에는 유아교육을 위한 옥련유치원 13학급을 개설하고, 2층은 신도법회회관으로 활용하여 월 2회 정기법회와 각종 행사를 유치하고 있다.

석조 미륵대불 조성

옥련선원 석조미륵대불

1990년에는 석조 미륵대불을 3여년의 불사 끝에 민족의 구심점으로 완성하였다. 높이가 50척이요, 황등 화강석이 1,500톤이나 소요되어 석조 좌불로는 국내 최대를 자랑하고 있다. 명산에 명물이 들어서면서 그동안의 불사도 완료되었다.

호국불교의 근간 군법당 건립

한편 교화의 의지를 사내(寺內)에서 뿐만 아니라 밖으로도 널리 알리는 포교의 차원에서 1999년 창원의 해군사관학교 법당 호국사를 중창하고, 강원도 홍천 27사단의 육군법당을 창건하는 등 군법사가 없던 시절부터 군법당 불사에 기여하면서 군포교에 일익했다. ‘낮에는 군법당 밤에는 옥련선원’이란 말이 나돌 정도로 포교와 불사에 여념이 없었다. 덕분에 강원도 화천부터 경남 창원까지 전국에 11채의 군법당이 생겼다. 최근에 조성된 논산훈련소 호국연무사에도 적잖은 힘을 보탰다. 또한 임진왜란 때 좌수영에서 싸우다 목숨을 잃은 무주고혼들을 위하여 도량 내에 임진왜란 좌수영 천도비(任辰倭亂 左水營 薦度碑)를 세워 부산 시민의 토양회와 함께 매 년 백중 때에 천도재를 지내고 있다. 일제강점기 삭발염의한 현진스님의 삶에 ‘호국불교’는 간과할 수 없는 화두였다.

성보문화재 보존

지난 반세기 동안 스님과 신도들의 눈물 어린 정성과 동참으로 일구어낸 옥련선원은 사찰 경내지 일만여 평에 9동의 전각과 보물급 문화재 1점이 있으며, 문화재로 지정받을 것으로 예상되는 석조미륵대불과 범종이 있다.
또한 상주하는 대중 20여 명과 다수의 산하단체가 있으며 신도 수는 무려 5만여 명에 이른다. 이에 감응이라도 하듯 사리탑을 모실 때 스리랑카에서 모셔온 부처님 진신사리 3과가 5과로 늘어나는 영험을 보이셨으니 소리에 메아리가 따르듯 신심에 감응한 것이 아니겠는가.
대웅전 뒤쪽에는 머리가 땅으로 향한 불좌상이 부조된 바위가 있다. 이것은 1998년 5월 16일 시지정문화재자료 제7호로 지정된 문화유산 마애지장보살좌상(磨崖地藏菩薩坐像)이다. 마애지장보살좌상은 지금의 옥련선원 일대에 백산사가 있던 시기인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원래 옥련선원 대불좌상 바로 밑에 인접해 있는 거대한 바위군의 일부였으나 좌상 쪽 바위가 벼락을 맞고 떨어져 나와 거꾸로 땅에 꽂힌 것이 지금의 모습을 하게 되었다.
수백 년을 견뎌온 비바람의 흔적으로 좌상의 원형은 마멸되고 자리 잡은 위치 또한 한적하여 사람들에 게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마애불이 거의 남아있지 않은 부산지역에서는 현존하는 유일한 마애불로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현재 마애지장보살좌상은 옥련선원이 부산광역시 문 화재 관리단체로 지정되어 관리하고 있다.

수계제자

스님의 수계제자로는 상훈(常熏)·일오(一悟)·대선(大善)·민철(民徹)·철오(哲悟)스님 등이 있다.

부산 옥련선원

옥련선원(玉蓮禪院)의 정확한 창건 시기는 알 수 없으나 670년 원효(元曉)가 백산사(白山寺)로 이름을 정했다는 설이 있으며, 910년에 최치원(崔致遠)이 백산사에서 은둔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백산은 동래 지역의 진산(鎭山)으로 지역민의 신앙의 장소였다. 백산의 관덕암(觀德巖)은 특히 자손 번창을 위한 영험 있는 기도처였다고 전해지며 관덕암 마애 여래상은 지금도 남아 있다. 또한 백산은 조선 시대 경상 좌수영의 중요한 군사적 기지이기도 하다. 백산의 정상에는 적을 살피는 누대(樓臺)라는 첨이대(覘夷臺)가 있었다고 한다.
이렇듯 신앙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중요한 백산의 사찰은 1635년(인조 13) 해운선사가 옥련암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976년에는 주지 현진(玄眞)이 보현전을 중창하면서 옥련선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어서 1985년 옥련유치원을 지었고, 1992년 석조 미륵 대불을 봉안하였다. 정월 대보름이면 대규모 달집태우기 등 연례행사를 치르고 있다.
옥련선원의 가람 구성은 1976년에 중창한 보현전을 비롯하여 그 이후에 건립한 대웅전·심우전·내원정·수련정·연마실·범종각을 비롯해 옥련 회관과 부속 유치원으로 되어 있다. 대웅전 안에는 관세음보살상과 지장보살상이 봉안되어 있고 신중탱화와 관음 탱화가 있다. 심우전은 선방(禪房)으로, 내원정은 신도회 사무실로, 보현당과 수련정은 요사로 사용하고 있다.
관덕암의 마애 지장보살 좌상은 조성 연대에 대해서 논란이 있으나, 대체로 조선 후기[17~18세기] 작품으로 보며, 부산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없는 마애불의 형태를 띠고 있다. 얼굴과 머리 부분을 음각으로 표현하고 다른 부분은 양각으로 표현하고 있는 점 역시 드문 기법이라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 현재 상태는 거꾸로 뒤집혀져 있다. 또 1992년 1,500톤의 화강석으로 제작한 약 15m 높이의 미륵 대불이 있다. 이밖에 진신 사리 5과를 모신 사리탑과 임진왜란 때 죽은 무명 고혼(無名孤魂)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임진왜란 천도비가 있다.

옥련선원 임진왜란 천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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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좌수영 무주망령 천도비

옥련선원(玉蓮禪院)은 수영구 민락동의 백산(白山)에 있는 사찰이며, 삼국시대 원효대사가 ‘백산사’라고 사찰의 이름을 지은 곳이다. 그 후 해운선사가 ‘옥련암’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1976년 주지 현진 스님이 보현전을 중창하면서 사찰의 명칭을 ‘옥련선원’으로 변경했다. 이곳 옥련선원에는 임진왜란 때 사망한 이름 없는 외로운 혼령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임진왜란 천도비가 있다.
임진왜란 때 부산은 일본군이 침공해 온 첫 길목이기에 그 피해가 컸다. 부산진성과 동래읍성을 함락시킨 일본군은 좌수영으로 몰려와 백성들을 마구 살상했다. 이에 겁을 먹은 수사(水使) 박홍(朴泓, 1534~1593)이 군영을 이탈하면서 군사들은 무장지졸이 되어 우왕좌왕 갈피를 잡지 못할 때 박홍 휘하에 있던 향토의 의병들이 결사대를 조직했다.
25의용군을 비롯하여 좌수영 성내의 주민과 성곽 주변의 백성들이 힘을 합쳐 죽을 각오로 일본군과 맞서다가 대부분 일본군의 총칼 아래 죽어갔다. 그러나 이들의 순국을 기억하고 기리는 후손이 없었다. 이에 ‘부산 토향회’에서는 그들의 충절을 기리고 원혼을 위로하기 위해 옥련선원 동쪽 담장 부근에 1999년 8월 25일에 ‘임진왜란 좌수영 무주망령 천도비(壬辰倭亂左水營無主亡靈薦度碑)’를 건립했다. 비석의 뒷부분은 기와집 모양이며, 밑에는 오석(가로 2.2m, 세로 1.5m)으로 비의 몸체를 삼았다. 비석의 총 높이는 2.9m이며, 몸체에 비문이 기록되어 있다.

천도비 비문

(전반부 생략)
1592년 4월 13일 밤이다. 하늘은 유난히 맑고 달은 밝았다. 이 평화로운 나라의 관문인 부산포에 왜의 침략이 시작되었다. 전후 7년 동안 이 금수강산은 아비규환의 전쟁터로 변했다. 14일 부산진성이 함락되었다. 첨사 정발도 함께 전사했다. 15일 동래성이 함락되고 다시 다대포성이 함락되었다. 부사 송상현 첨사 윤흥신이 모두 억울하게 죽음을 맞았다.
슬프다. 나라의 관문이 헐리고 근역 삼천리가 이리떼에 짓밟혀 그들의 소굴이 되었다. 백성들은 삶터를 잃고 임금은 몽진했다. 대신들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신하들은 뿔뿔이 흩어져가니 나라는 불바다가 되었다. 오로지 남은 좌수영마저도 풍전의 등화가 되어 명멸하고 있었다. 그러나 장산의 봉수대는 불을 피워 좌수영에 정황을 보고했고 백산의 점이대는 바다의 정보를 좌수영으로 보내고 있었다.

부산 옥련선원 마애지장보살좌상

옥련선원 내 삼성각(三聖閣) 뒷산에는 예로부터 인근 주민의 신앙대상으로 전해 오는 관덕암(觀德巖)이라는 바위군이 있는데, 이 바위군에서 벼락 때문에 떨어져 나온 바위면에 보살좌상 1구가 새겨져 있다. 보살좌상이 새겨진 바위는 거대한 바위 둘이 맞붙어 있었던 것인데 벼락을 맞아 깨어지면서 거꾸로 박혀있기 때문에 보살좌상은 아래위가 거꾸로 되어 있다.
얕게 조각되었던 보살좌상은 근래에는 붉고 푸른 페인트가 칠해졌던 모습이 뚜렷한데, 바위가 떨어지면서 깨어졌는지 이후에 인위적으로 훼손을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거의 대부분 훼손되어 윤곽만 남아 있으나, 다행히 선각된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은 남아 있어 성격 파악에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이 보살좌상은 상호(相好, 부처나 보살의 얼굴부분)와 머리 부분을 음각으로 표현하였는데, 머리 위에는 육계의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고 이마 윗 부분에 두건대(頭巾帶)가 뚜렷하여 머리에 두건을 쓰고 있음이 분명한 점으로 보아 지장보살상으로 보여진다.
또한 상호와 머리 부분을 음각으로 표현한 이외에는 두광·신광과 동체의 각부, 연화좌 등 모든 부분을 양각으로 표현은 하였으나, 그 조각이 얕아서 암각화와도 같은 인상을 준다는 점에서 불화의 맥락에서 고찰해야 할 필요가 있는데, 광배의 처리를 볼 때 조선후기인 17∼18세기에 조성된 불화 광배에서 이 보살좌상의 광배에서 볼 수 있는 방사선 무늬의 표현을 볼 수 있어 이 마애지장보살좌상이 조선후기인 17∼18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게 한다.
옥련선원이 위치한 백산은 경상좌수영이 있었고, 백산의 정상부에 첨이대가 있는 등 남해를 지키는 군사적 요충지일 뿐 아니라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사명대사와도 관련이 깊은 곳이라는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어 옥련선원이 「마애지장보살좌상」은 해난구제와 수군의 귀의불(歸依彿)로서 역사적 의의가 깊다고 하겠다. 아울러 부산지역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마애불인 동시에 상호와 머리 부분을 음각으로 표현하고 다른 부분은 양각으로 표현하고 있는 점 등은 조선시대 뿐 아니라 우리나라 조각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라는 점에서 문화재적 가치가 크게 평가된다고 하겠다.

참고자료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현진(玄眞)스님 본항목 정현진스님(玄眞, 1934~) 玄眞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현진스님(玄眞,_1934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속성
현진스님(玄眞) 삼현문중(三賢) ~의 일원이다
현진스님(玄眞) 인정스님(仁貞) ~의 수계제자이다
현진스님(玄眞) 동학사 미타암 ~에서 출가하다
현진스님(玄眞) 무불스님(無佛) ~(으)로부터 계를 받다 사미니계
현진스님(玄眞) 성운스님(性雲) ~(으)로부터 계를 받다 비구니계
현진스님(玄眞) 부산 옥련선원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주지(감원)
현진스님(玄眞) 옥련유치원 ~을(를) 건립하다
현진스님(玄眞) 옥련선원석조미륵대불 ~을(를) 건립하다
현진스님(玄眞) 창원 호국사(해군사관학교법당) ~을(를) 창건하다
현진스님(玄眞) 임진왜란 좌수영 무주망령 천도비 ~을(를) 건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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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옥련선원  : 부산광역시 수영구 민락동 3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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