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일효스님(一曉, 1934生, 비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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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일효(一曉)스님은 명길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목포 관음사를 불사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934 경북 구미 출생
1549 대구여자상업고등학교 졸업
1958 사천 다솔사 미륵암에서 명길(明吉)스님을 은사로 출가
1961 범어사에서 동산(東山)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1973 동학사 강원 졸업 범어사에서 석암(昔岩)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1973~1986 서봉사, 남장사, 용흥사, 청룡사, 동학사, 선응사 등 주석
1975 선응사 총무 역임
1986 관음사 주지 취임, 목포교도소 지도법사
1998 한국불교교육대학 졸업
2014 입적
문중 봉래(蓬萊)문중
생활신조 노력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상훈 법무부장관상 표창패(2002) 외 다수
수계제자(『한국비구니명감』) 송연(淞蓮)
문중계보(『한국의 비구니문중』) 상운(祥雲, 5)→본공(本空, 6)→도안(道眼, 7)→명길(明吉, 8)일효(一曉, 9)

활동 및 공헌

출가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권. 뜨란출판사, 2007, p. 577
[피아노를 치는 스님]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권. 뜨란출판사, 2007, p. 578
[스님이 가꾼 정원에서]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권. 뜨란출판사, 2007, p. 578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권. 뜨란출판사, 2007, p. 579
[동학사 동문회 가을여행]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권. 뜨란출판사, 2007, p. 580
[설악산 상봉에서 도반스님과 함께]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권. 뜨란출판사, 2007, p. 581
[사제스님들과 함께]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권. 뜨란출판사, 2007, p. 582
[영산회상을 생각하며]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권. 뜨란출판사, 2007, p. 583

일효(一曉)스님은 1934년 3월 7일 (주민등록상에는 1922년으로 기재되어 있으나 여기서는 실제 나이를 적용함) 경북 구미시 무을면 우산리 243번지에서 아버지 이우직과 어머니 김차현의 2남 6녀 중 넷째 딸로 태어났다. 본관은 한산이며, 이름은 이채옥이다.

1954년 대구여자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학교에 다닐 때부터 허약했던 몸이 더욱 나빠지자 26세 되던 해에 상주 남장사 관음전으로 쌀 한 말과 이불을 준비해 기도하러 가게 되면서 불교와 인연을 맺었다.

그 당시 관음전에는 은사스님이신 명길스님이 부전을 살며 기도를 하고 계셨다. 스님은 깊은 인연을 한 눈에 알아본 것인지 처음 뵌 명길스님을 마음속 깊이 흠모하여 따랐다. 이후 관음전에서 계속 생활하는 동안 명길스님은 기도하는 부전으로 계시고, 일효스님은 애기 보살로 공양주 소임을 맡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진주에 계신 은사스님으로부터 편지를 받아보신 명길스님이 편지를 아궁이 속에 넣고 그대로 일어서 밖으로 나가버리셨다. 그 모습에 불안을 느낀 일효스님은 명길스님과 헤어지게 될까 두려운 마음에 얼른 아궁이 속에서 편지를 꺼내 주소를 적었다. 며칠 후 기도를 하던 명길스님이 남장사 관음전을 떠나시고 스님도 보름 정도 더 머물다 집으로 돌아갔다.

그렇지만 절집 생활의 단아한 정취를 잠시 경험해본 스님은 집으로 돌아와서도 늘 은사스님 생각과 절집 생활이 그리워 아버지께 진주에 있는 절에 가겠다고 말씀드렸다. 이 말을 들은 아버지와 가족 전체가 만류하였고, 한바탕 큰 난리를 치른 스님은 집안에 갇혀 바깥 출입을 금지 당하고 말았다. 그런 와중에도 오매불망 은사스님을 찾아갈 궁리만 하던 일효스님은 한 가지 묘책을 생각해냈다. 먼저 명길스님께 편지를 올리고 당시 집에서 키우던 누에를 팔아 여비를 마련해 절에 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먼저 누에를 팔러 가시는 바람에 스님의 모든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몸은 비록 집에 있지만 절에 가고 싶은 생각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마음은 심란하기만 하였다. 어느 날 스님은 산에 있는 고구마 밭을 매러 갔는데 아버지가 딸을 위로하러 올라오셔서 함께 밭을 매게 되었다.

그때 아버지가 조끼를 벗어 놓은 틈을 타 스님은 돈 4,000원을 가지고 달음질쳐서 집으로 달려왔다. 하지만 아버지가 사랑방에서 문밖 출입을 하지 않으시고 딸을 감시하고 있으니 옴짝달싹 할 수가 없었다. 스님은 용기를 내어 다시 한번 아버지께 절에 가고 싶다는 의사를 말씀드렸다. 가족들은 눈물을 흘리며 스님을 설득하고 나섰다. 스님은 잠시 절을 향한 마음을 접을까 생각도 해 보았지만 이미 속가를 떠나버린 마음을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래저래 속상한 마음을 감추고 생활을 하던 어느 날 촛불 세 개가 스님에게 안기는 꿈을 꾼 후 진주에 계시는 명길스님에게서 날아든 반가운 한 통의 편지에 스님은 다시금 용기를 내게 되었다.

마침 장마철이라 일을 나가지 못한 아버지도 한 달쯤 집에 있자니 지루하였는지 스님에게 낚싯밥을 만들어 달라고 하셨다. 보리 가루에 된장을 섞어 낚싯밥을 만들고 점심밥과 함께 아버지께 드리고 다리까지 나가서 배웅을 하고 돌아오니 어머니는 마침 큰방에 계셨다. 일단 아무도 자신에게 관심을 갖지 않게 되자 스님은 마침내 절로 갈 수 있는 천금의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했다. 조용히 뒷집으로 간 다음 입던 옷과 신발을 빨랫줄에 나란히 걸어 놓고 새옷으로 갈아입은 후 20리 길을 걸어서 버스를 타니 그제야 비로소 안심이 되었다.

대구까지 가서 하룻밤 자고 다음 날 삼랑진에서 열차를 타고 진주까지 간 후 사천에서 다시 하룻밤 묵은 뒤에 명길스님이 계신 미륵암으로 올라갔다. 미륵암에 당도하니 그동안의 생활은 아득히 잊혀지고 주위에 펼쳐진 산의 운치에 더욱 신심이 발하였다. 그렇게도 간절히 그리던 명길스님을 만나자 그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컸다. 당시 명길 스님은 미륵암에서 노스님 두 분과 함께 계셨다. 어렵게 출가를 이룬 만큼 정진의 고삐를 단단히 쥐어 잡고 진주 미륵암에서 명길스님을 은사로 삭발염의를 하여 출가하였다. 이때가 1958년의 일이었다.

일효스님이 행자 생활을 할 때는 경제적으로 모두가 어려웠던 시절인 만큼 탁발을 해서 생계를 꾸려야 했다. 어른스님을 따라 탁발을 다니면서 보릿대나 쌀 등을 탁발하여 그것으로 옷이나 신발 등 생필품을 구입하여 생활하였다.

스님은 고단한 탁발 생활도 마치 극락세계를 유람하는 것처럼 여기며 돈독한 신심을 다져나갔다. 매일 환희심으로 모든 일을 대하니 소소한 설거지조차도 즐거웠다. 어려서부터 워낙 몸이 안 좋은 탓에 노스님께서 우려하시며 ’대중과 함께 하지 말고 바릿대도 따로 씻어놓으라.'고 하여도 슬프거나 부끄러운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저 순응하며 장독에 깨끗이 씻어 엎어놓고 살았다.

신심이 가득한 하루하루의 정진 생활 중에 한번은 밖에서 “옥아! 옥! 옥아!” 하며 세 번의 공청이 들리는 것이었다. 은사스님께 여쭈어 올리니 ‘업장이 무거워서 그러니 기도로 소멸하라.'고 하셨다. 스님은 그 말을 받들어 탁발을 하여 기도를 시작했다. 스님이 기도를 시작한 지 7일째 되던 날 밤 꿈에 어떤 사람이 검은 치마를 던져주는데 스님이 그 옷을 받아 입으니 몸에 딱 맞았다. 꿈이 하도 이상하여 은사스님께 다시 여쭈니 아직도 그 업이 깊어 그렇다며 더욱더 성심껏 기도를 하라고 하셨다.

더욱 열성을 가하여 기도를 하다 보니 천수경이 자면서도 외워질 정도였고 그 후로는 약을 먹지 않아도 건강이 절로 좋아지는 등 부처님의 가피를 많이 입었다. 이렇듯 스님의 행자 시절은 기도수행이 곧 삶이었다.

수학과 수행

일효스님은 28세 되던 해인 1961년 미륵암에서 부산 범어사에 주석 중이던 동산스님께 사미계를 수지한 후 대구 서봉사 학봉스님께 초발심자경문을 배우고 상주 용흥사에서 치문을 배웠다.

그 후 서울 청룡사에 가서 명성스님께 치문을 마치고, 동학사 호경 강사스님께 사집부터 대교과를 마치고 1973년에 졸업하였다. 또한 동학사 학인으로 재학 중이던 1972년에는 총무 소임을 살기도 하였다.

일효스님은 40세 되던 해에 석남사에서 하안거를 나고, 그해 진주 정혜사에 거주하다가 43세인 1976년 목포 선응사에서 은사스님을 모시고 총무 소임을 보았으며, 틈나는 대로 서예학원을 다니면서 사군자와 글 등을 틈틈이 익혀서 신도님들에게 나누어드리는 등 보시행을 폈다.

목포 관음사에 주석하다

관음사 불사를 오늘과 같이 성취하는 데는 너무나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유달산 조각 공원에 인접해 있는 관음사는 공사 허가를 받기가 너무나 어려웠지만 2002년 월드컵대회를 계기로 당시 시장이었던 권이담 씨의 도움으로 불사를 무사히 마치고 2004년 10월 17일 낙성식을 보게 되었다.

1986년 53세 되던 해에 목포 관음사에 오면서 주지 소임을 보기 시작하였다. 스님은 목포에 거주하기 시작하면서 목포 교도소에 법문을 하러 다녔고, 부처님 법을 전하고 그들이 부처님 법대로 따르기를 기원하면서 열심히 교화 활동을 펼쳤다.

일효스님은 법문을 다니면서 여러 가지 일들을 겪었는데, 재소자들이 출감을 해서 밤에 찾아와 돈을 달라고 협박을 하다 스님의 관대함에 동하여 교화를 이루기도 하였다. 또 어떤 이들은 교도소에서 일을 하여 번 돈을 관음사 불사에 보태달라며 보내오기도 하였다.

이런 작은 일에 보람을 느끼면서 12년 정도 교화활동의 원력을 세우고 있는 일효스님은 1987년에 법무부장관 감사패를 받았다.

지금의 관음사는 먼저 법당을 짓고 1995년도에 요사채를 지었는데 축대를 아직 못 해서 낙성식을 미루고 있다. 조각 공원에 위치한 관음사의 토지는 행남사 장학회 소유로 되어 있다. 그전에는 원래 절터였는데 대처승이 살면서 행남사 장학회 김준형 씨에게 팔아버린 것이다.

이를 환원시키기 위하여 일효스님은 3년 동안 행남사 장학회와 목포시장을 쫓아다니며 설득하였으나 유달산은 시에 속해 있어 시에서 매입하기로 되어 있다면서 불허하였다. 그리하여 불가피하게 1990년 소유권이 행남사에서 시로 넘어갔고, 1991년부터 시에 토지 사용료를 내고 있다. 스님은 목포시에 10년 동안 사용료를 내면 법적으로 다시 사찰 토지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슴에 품고 공심을 가지고 애쓰고 있다.

스님은 후학들에게 ‘무엇이든 내가 원력을 세우고 노력하면 해낼 수 있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살아줄 것을 당부하였다.

2014년 입적하였다. 수계제자로는 송연(淞蓮)스님이 있다.

목포 관음사

[관음사 전경] 사진출처: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ohmark/220963164472

1939년에 최초 장정인(張正仁)스님이 초가로 토굴을 지어서 그 당시에 영험이 있다고 해서 산신당이라고 하였다. 그 후 김포월 스님이 계셨고 백성수 스님이 증축하고 관음사라고 이름하였으며, 그 후 법화종으로 관리해오다가 1987년 3월 17일에 명길스님과 일효산숭이 인수를 받고 보니 법당이 많이 훼손되어 해체복구를 서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어 아무런 준비 없이 집을 헐고 주춧돌을 놓은 후 전국 유명한 명산 대천만 찾아 기도하면서 권선에 나섰다가 5년만인 1992년에 대웅전 완공 재창건이 되었다. 1999년에 대한불교조계종으로 등록 제22교구인 대흥사 말사가 되었다. 2001년 선방과 마당을 넓혔으며 2004년 10월 17일 낙성식과 수계식을 보게 되었다. 일주문 귀목나무는 1939년생이며 나주에 계신 박범수라는 분이 심었다고 한다. 2008년 7월 23일 부처님 진신사리 안과를 봉안하여 5층석탑에 7m 높이로 탑을 모셨다.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권. 뜨란출판사, 2007, pp. 576~583.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381.
  •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 211, 410, 411.
  • 불교신문, 목포 관음사 진신사리 봉안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90013
  • 목포투데이, <초대 칼럼> 이 또한 지나가리니 - 관음사 송현 스님 http://m.mokpotoday.com/view.php?idx=102343
  • 미디어붓다, 기암괴석 유달산서 본 다도해 장관 일등바위에 일본 진언종의 흔적이http://www.mediabuddha.net/bbs/board.php?bo_table=03_24&wr_id=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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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효(一曉)스님 본항목 일효스님(一曉, 1934~2014) 一曉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일효스님(一曉,_1934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속성
일효스님(一曉) 봉래문중(蓬萊) ~의 일원이다
일효스님(一曉) 명길스님(明吉) ~의 수계제자이다
일효스님(一曉) 다솔사 미륵암 ~에서 출가하다
일효스님(一曉) 동산스님(東山) ~(으)로부터 계를 받다 사미니계
일효스님(一曉) 석암스님(昔巖) ~(으)로부터 계를 받다 비구니계
일효스님(一曉) 목포 관음사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주지(감원)
일효스님(一曉) 목포 관음사 ~을(를) 중창하다

지도

  • 목포 관음사 : 전라남도 목포시 죽교동 18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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