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래(蓬萊)문중

bigu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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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래문중(蓬萊門中)은 금강산 유점사를 종문 본찰로 삼고 있다. 남과 북의 왕래가 끊어진 이후부터는 종문의 본찰을 오대산 월정사로 삼아 도제들의 결집을 도모했으나, 남북의 길이 조금씩 트이면서 다시 금강산 유점사로 환원했다. 문중이름 ‘봉래’는 여름 금강산에서 왔다. 금강산은 근대 대표적 비구니 선승 중 한 분인 제6세 본공(本空, 1907~1965)스님이 출가한 곳이자 본공스님의 상노(上老) 스님인 문중 제3세 사득(四得, 1862~1940)스님이 이곳에서 출가·수행한 행적을 기린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비구니 사득스님은 속가에서 받은 유산을 유점사⋅장안사⋅표훈사⋅신계사⋅마하연 등 금강산 주요 사찰에 아낌없이 보시해 가람을 중흥시키고 득도암을 창건해 비구니스님들의 수행도량을 마련한 분이다. 사득스님의 공적은 본공스님의 경희스님이 발견한 「금강산유점사열반계안서(金剛山楡岾寺涅槃禊案序)」에도 잘 드러나 있다.

경희스님은 유점사출신법홍(法弘, 1915~2003,원효종종정역임)⋅덕암(德菴, 1913~2003, 태고종 종정역임)⋅월하(月下, 1915~2003, 조계종 종정역임) 등 금강산에서 수행했던 대표적 비구스님을 차례로 인터뷰하여 사득스님이 금강산 여러 사찰에 보시한 행적에 대해 한 번 더 확인을 받았다.

봉래문중은 1987년 3월 25일(음2.26) 본공스님의 기일에 즈음하여 대구 서봉사에서 문중회의를 열고 문중계보를 편찬하기로 결의했다.

봉래문중은 최선(最善)계통과 최상(最祥)계통으로 분파되어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최선스님과 최상스님은 봉래문중의 초조로 모셔진 비구니스님이다. 최선스님은 사득(1862~1940)스님의 노스님이고, 최상스님은 사득스님과 같은 항렬인 태전(泰典, 1859~1935)스님의 노스님이다.

사득스님은 세납 26세 때인 1887년 금강산 유점사에서 세묵(世黙)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이래 15 하안거를 성만하고 1940년 세납 79세 법랍 53세로 입적했다. 태전스님은 세납 29세 때인 1887년 태묵(太黙)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후 13 하안거를 성만하고 1935년 세납 77세 법랍 48세로 입적했다.

(이상 하춘생(2013), 『한국의 비구니문중』, 해조음, pp204~216 참조)

봉래문중의 대표인물로는 본공스님의 손상좌인 운문사 명성스님과 화곡동 성심사 회주 명우스님 등이 있다. 명성스님은 제8대와 9대 전국비구니회 회장을, 명우스님은 제10대 전국비구니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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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하춘생(2013), 『한국의 비구니문중』, 해조음, p 216) 봉래문중_지도.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