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보선스님(普善, 1946生, 비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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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보선(普善)스님은 오로지 진실하고 정직한 마음과 부처님 법대로 수행하는 것을 평생의 지침으로 여기며 정진하신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946 경남 함양 출생
1965 해인사 약수암에서 신행(信行)스님을 은사로 출가
1965 해인사에서 자운(慈雲)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1970 범어사에서 자운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운문사 강원 사집 수료
1972 범어사 대성암을 시작으로 전국 선원 안거
1975 갓바위 선본사에서 2년 총무 역임
1978 약수암 3년 결사
1995~1997 약수암 원주
2004 약수암 주석
문중 청해문중(靑海)
수행지침 하루도 빠짐없이 정법수행으로 일관하자.
수계제자(『한국비구니명감』) 자용(慈容)·혜범(惠梵)·혜음(慧音)·대운(大芸)·혜철(慧哲)·경심(鏡心)·법열(法悅)·현순(玄純)·상적(象迹)·정현(正玄)·지요(至要)·법연(法蓮)
문중계보(『한국의 비구니문중』) 지언(智彦, 4)→성주(性主, 5)→도삼(道三, 6)→신행(信行, 7)→보선(普善, 8)→자용(慈容, 9)

활동 및 공헌

출가

[해인사 가야산 마애불 앞에서]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256
[약수암 대웅전]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257

보선(普善)스님은 1946년 6월 21일 경남 함양군 휴천면에서 아버지 강순거와 어머니 장맹임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진양(진주)이며, 이름은 강귀남이다.

스님은 어린 시절에 부모님을 일찍 여읜 데다가 병고에 시달린 탓에 외할머니께 업혀 다니며 계우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더 이상 학업을 계속할 수 없었다. 어릴 때부터 몸이 허약하여 병치레가 잦았던 스님은 나이 19세 때인 1964년 같은 동네에 살고 있던 불자에게 절에 가면 아프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출가를 결심했다.

스님은 곧바로 해인사 약수암에서 출가하여 행자 생활을 얼마 동안 했으나 일이 너무 고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집에 있으니 몸이 다시 아파 ‘필시 내가 출가할 인연인가 보다’고 여겨 굳게 마음먹고 집으로 돌아온 지 한 달 만에 약수암으로 되돌아갔다.

미륵교 사건으로 시봉들이 모두 떠나 당시 뒷방 하나 없이 혼자 계신 70세 넘은 신행노사(信行老師)를 어른스님들의 권유로 은사로 모시게 되었는데, 당시는 수시로 수계를 하던 때라 자운화상(慈雲和尙)에게 사미니계를 수지받았다.

이후 스님은 범어사 대성암에서 자운화상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했다.

수학

그리고 3년간 대중 소임을 맡으며 은사 스님을 시봉한 후 22세가 되던 1967년에 청도 운문사 강원에 입방하여 묘엄(妙嚴)스님에게 사교를 수료했다. 이어서 1969년 명성(眀星)스님이 강사로 부임했을 때 자성 참구하고자 당시 7~8명이 함께 강원을 나서 선방으로 향했다.

묘전스님을 친견하러 갔을 때 스님은 두루마기가 없어 동방아[1]만 착용할 만큼 형편이 어려웠다.

묘전스님은 홑 옷만 입고 울력을 하는 학인들을 큰소리로 야단치듯이 주지실로 부른 다음 당신이 입고 있던 솜 속바지를 벗어주고, 또 옆에 있는 시봉의 솜 누비 동방아까지 벗겨 학인들에게 입혀주는 자애를 베푸셨다.

그러나 스님은 혼자만 따뜻하게 입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어른이 주신 것을 마다할 수도 없어 겨울방학 때 본사에 들러 솜 고의를 연로하신 은사스님께 드렸다. 그렇게라도 해야 마음이 편했던 것이다.


수행

여러 도반들과 함께 성철 큰스님께 화두 들고 공부하는 법에 대해 물었을 때 큰스님은 “노장(老長) 돌보지 말고 공부해라. 도(道)만 깨치면 되지.”하고 스님의 의중을 은근히 한번 떠보신 후 ’선방 가더라도 노장 시봉하면서 공부하라.’는 당부를 곁들여 화두를 내리며 용기를 주신 일 또한 잊을 수 없다.

스님은 노환으로 고생하시는 은사 스님을 일 년 간 간병하면서 본사 선원에서 정진했다. 그러자니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하고 졸음에 겨워 선방에서 넘어지기도 했다. 이듬해 다행히 은사스님의 병환에 차도가 있어 범어사 대성암에서 안거를 할 수 있었고, 그곳에서 세 철을 보낸 뒤 내원사, 동화사 내원암 등 제방 선원에서 해제 결제 없이 두세 철을 연이어 성만하고, 직지사 백련암에 서 신원스님과 1년간 정진했다.

1974년 29세 되던 해 보석사에서 정진하던 중 스님은 은사스님이 위중하다는 연락을 받고 본사로 돌아왔다. 그 후 두 달 간 대소변을 받아가며 모든 정성을 다해 스님을 시봉했으나 스님이 입적하시자 새삼 무상을 절감하고 제방을 다니며 참선에만 힘을 쏟았다. 그러던 중 잠시 숙연이 있는 팔공산 선본사 갓바위에서 2년 동안 총무 소임을 보며 삼십대 중반을 보냈다.

스님은 만성(萬性)스님을 친견했을 때 그 분의 안광이 너무나 형형해 마치 그 눈빛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묘한 느낌을 받았다. 그 후 대오각성 해야겠다는 결의를 굳게 세우고 다른 도반들보다 출발이 늦은 것 같아 성급한 마음이 든 나머지 대성암에서 무리하게 정진하다가 그만 상기병을 앓게 되었다.

그 모습을 보고 지산 큰스님은 “전신상기(全身上氣)니 쉬며 놀아라.” 하고 조언하셨다. 스님은 전강, 경봉, 성철, 향곡, 송담스님 등 제방의 큰스님들을 친견하며 상기를 다스리는 법을 여쭈었는데 한결같이 ‘호흡(呼吸)을 통해 내려라.’, ‘밖에 나가서 놀아라.’ 하고 말씀하실 뿐이었다. 스님은 상기병을 치유하고자 백방으로 노력하는 한편 정진을 계속해 나갔다.

38세 되던 1983년부터 스님은 2년간 본사 암주(庵主)(감원(監院)) 소임을 맡아 요사채 중수와 법당, 선방, 요사 등 모든 당우의 단청 불사 그리고 수각 및 하수도 정비 불사를 하며 선원과 대중을 외호했다.

투병생활

또한 1986년 정월 보름부터 1989년 정월 보름까지 본사 약수암 죽림선원(竹林禪院)에서 3년 결사를 성만하는 등 몇 해 전까지도 건강이 허락하는 한 본방대중으로 참선 정진했다. 결사 도중 보선스님은 하혈을 하여 주변에서 병원치료를 권유받았다.

그러나 스님은 ‘상기병으로 평생 힘껏 정진하지도 못했는데 수행자가 결사하다 죽으면 그보다 좋은 일이 없다.’며 한사코 결사를 고집했다. 그리고 회향하는 날 삼칠일간 만행 정진하는 선원 대중을 뒤로 하고 비로소 병원을 찾아갔다. 그리고 얼마 후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서 두 차례에 걸쳐 대수술을 받아야만 했다.

모든 것이 아쉽고 귀하던 그 시절, 조공을 하고 나면 다음날까지 물도 마시지 않으며 식탐을 절제했던 6경신(연 6회) 수행을 했다. 그리고 참선과 더불어 30년간 700배 절 수행을 계속해 법당 마루에는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스님의 손발이 닿은 자리의 색깔이 달라졌다고 한다.

약수암 원주

세수 50세부터 53세(1998년)까지 3년 동안 본사 암주(원주(院主)) 소임을 보며 낡은 칠성각을 해체하고 그 자리에 약사전(樂師殿)을 창건했고, 수원지에서 끌어오는 상수도 정비 및 지하수 개발로 식수원을 보강했다.

평상심이 도(平常心是道)

보선스님은 사견에 빠지지 말고 오로지 진실하고 정직한 마음으로 충실히, 부처님 법대로 정진하는 것을 평생 수행 지침으로 여기며 지금까지 살아왔다. 시봉들에게도 몸에 밴 검소함으로, 대중을 먼저 생각하는 공심으로, 말보다는 하루도 빠짐없는 예불과 공양 자리 및 대중 울력 참여 등 일상 속의 끊임없는 작은 수행으로 ‘평상심이 도'임을 일깨워주고 있다.

보선스님은 상기병을 비롯한 고혈압, 관절염, 녹내장, 백내장 등 갖은 병마로 좌선과 절을 계속 하지 못하고 있지만 행선과 독경, 주력 등의 일과를 수행하며 변함없는 신심으로 일관하고 있다.

보선스님의 수계제자로는 자용(慈容)·혜범(惠梵)·혜음(慧音)·대운(大芸)·혜철(慧哲)·경심(鏡心)·법열(法悅)·현순(玄純)·상적(象迹)·정현(正玄)·지요(至要)·법연(法蓮)스님 등이 있고, 손상좌로는 원제(圓濟)·원융(圓融)·원돈·원오(圓悟)·원광(圓光)·백비(百非)·무비(無非)스님 등이 있다.


해인사 약수암

[약수암 전경] 사진출처: 다음카페https://cafe.daum.net/jungyulmodusa/FGRT/1336?q=%ED%95%B4%EC%9D%B8%EC%82%AC+%EC%95%BD%EC%88%98%EC%95%94&re=1

성주스님이 지리산 천은사 도계암에서 수행하다가 1903년 가야산 남쪽 계곡의 마르지 않는 샘을 발견하고 이곳에 가람을 창건하니 지모암이다. 덕망이 높았던 성주스님은 이후 지모암의 명칭을 약수암으로 바꾸고 많은 후계승들을 배출했는데, 청해문중 일파로서 번성을 이룬 것과 약수암이 종문의 본찰로 자리매김한 것은 그로부터 연유한다.

청해문중 태동 당시 고문으로 추대된 보현(普賢)·학련(鶴蓮)·태구(茶具)와 문중태동의 주역인 묘관(妙觀)·용운(龍雲)등이 모두 이 계열에 속한다.

약수암은 성주의 네 번째 상좌 도삼(道三)이 1927년 1차 중건했으며 두 번째 상좌 의영(義)의 증손인 법공이 1969년 중창하고 죽림선원을 개설해 비구니 납자들로 하여금 수선정진할 수 있도록 도량을 일신한 이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출처 :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 127~128.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 뜨란출판사, 2007, pp. 254~258.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210.
  •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 340.
  • 경남신문, 심재근의 우리땅 순례 (74) 황강 22 합천군 야로면~가야산 해인사 암자 (2012년) http://www.knnews.co.kr/news/articleView.php?idxno=1039313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보선(普善)스님 본항목 보선스님(普善, 1946~) 普善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보선스님(普善,_1946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속성
보선스님(普善) 청해문중(靑海) ~의 일원이다
보선스님(普善) 신행스님(信行) ~의 수계제자이다
보선스님(普善) 해인사 약수암 ~에서 출가하다
보선스님(普善) 자운스님(慈雲) ~(으)로부터 계를 받다 사미니계, 비구니계
보선스님(普善) 해인사 약수암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주지(감원)
보선스님(普善) 해인사 약수암 ~을(를) 중창하다
보선스님(普善) 안거 ~을(를) 성만하다 부산 범어사 대성암(청룡동)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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