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묘전스님(妙全, 1938生, 비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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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묘전(妙全)스님은 어린 나이에 출가하여 평생 공부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신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938 경북 청도 출생
1946 운문사 내원암에서 영옥(永玉)스님을 은사로 출가
1955 범어사에서 동산(東山)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1957 운문사 강원 『치문』 수학
1959 승가사 1년 정진
1960 망월사 춘성 큰스님 회상에서 기도 정진
1961 개심사 강원 『능엄경』 수학
1963 관음사 향곡 큰스님 회상에서 산철 정진
동화사 양진암 하안거 성만
범어사 대성암 3년 정진 1966 동학사 강원 『금강경』 수학
1967 범어사에서 석암(昔岩)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1968 내원사 하안거 성만
1971 통도사 경봉 큰스님 회상에서 정진
1976 운문사 청신암 원주
2004 현재 청신암 주석
문 중 보운문중(普雲)
수행지침 포교, 기도, 참선 등 모든 것이 다 수행이다.
생활신조 정진
수계제자 지송(知松)·탄호(吞昊)·현욱(玄煜)·지공(知供)

활동 및 공헌

출가

[청신암에서 수인노스님, 성우스님, 일원스님 등과 함께]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 뜨란출판사 (2007년, p.630)
사진출처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 뜨란출판사 (2007년, p.632)
[운문사 청신암 문수전]
사진출처:티스토리 https://loh4624.tistory.com/6211088
[운문사 청신암 북극전]
사진출처:티스토리 https://loh4624.tistory.com/6211088

묘전(妙全)스님은 1938년 3월 27일 경북 청도군 운문면 신원동 황정리에서 아버지 김임득과 어머니 하지안명 보살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이며, 이름은 김연옥이다.
스님의 부모님은 일제시대에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해방 후 돌아와 고향인 운문사 아랫마을 황 정리에 삶의 보금자리를 마련하셨다. 정치는 혼란스러웠고 국민들은 끼니조차 잇기 어려운 시기였다. 일본에서 막 건너온 스님의 가족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절 아랫마을에 살던 어린 소녀는 탁발을 다니시는 스님들의 모습을 자주 접하게 되었고, 소녀 는 탁발오신 스님으로부터 ‘절에 가면 흰쌀밥을 먹을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스님의 손을 잡고 부모님의 품을 떠나 1946년 음력 12월 나이 9세에 운문사 내원암으로 출가했다.

수계

스님은 1947년 부산 금정산 서운암으로 거처를 옮기고, 그곳에서 영옥스님을 은사로 삭발염의 했다. 스님은 1955년 8월 15일, 나이 18세에 사미니계를 받기 위해 부산 범어사로 가게 되었다. 범어사는 어린스님에게 천상의 극락정토를 연상하게 했다. 스님은 계를 받고 나서 3일간 더 머물게 해달라고 부탁을 드렸다. 그리고 그 3일 동안 새로운 경험을 했다. 스님들은 항상 누더기 옷에 검정고무신을 신고 농사를 지으며 사는 줄 알았던 어린 스님은 흰 고무신에 깨끗하고 단정하게 승복을 차려 입고 큰스님을 찾아뵈어 공부를 점검받는 납승의 모습을 처음으로 보면서, 지금까지 자신이 접했던 것과는 다른 세계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묘전스님은 1967년 3월 15일 범어사에서 석암화상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했다.

공부에 대한 열정

스님은 한국동란으로 경제적으로 피폐하고 1957년 대처승을 척결하기 위한 불교정화운동으로 노스님과 은사스님을 도와 대처승들에게 대담히 맞서야 하는 어지러운 상황에서도 공부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다.
운문사에서도 어린 사미니스님은 밥하고 빨래하고 누더기를 걸치고 농사를 지으며 어른스님 들을 시봉하면서 생활했다. 묘전스님은 어느 날 노스님에게 여쭈었다.
“노스님, 스님도 나이가 많이 들면 죽습니까?" 노스님이 어린 스님에게 대답하셨다. “스님도 죽는다. 죽는 것은 마찬가지이나 부처님 말씀을 열심히 공부하면, 죽어서 육체는 먼지가 되어 날아갈 것이고, 영혼은 극락정토(열반)에 머물 것이다.”
어린 스님은 노스님에게 “그럼 저는 부처님 말씀을 언제부터 배울 수 있습니까?”하고 여쭈었다. 노스님은 부처님 말씀을 배우고 싶어 하는 스님의 생각을 읽고 강원에서 경전을 배울 수 있도록 허락하셨다.

스님은 20여 명의 학인스님들과 함께 강원 생활을 시작했으나 운문사의 형편 때문에 공부에만 열중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스님은 공부를 해야겠다는 일념으로 노스님과 은사스님의 허락을 얻지 않고 삼각산 승가사로 갔다. 스님은 승가사에서 1년간의 소임을 마치고, 한 달 정도 만행을 한 끝에 춘성 큰스님이 주석하고 계시는 도봉산 망월사로 가서 춘성 큰스님의 회상에서 6개월간 용맹기도를 하며 큰스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1961년, 나이 24세 때는 해미 개심사 강원에서 2년 정도 부전 소임을 살면서 경전을 배웠다. 스님의 대중 생활은 철두철미했다. 그리고 항상 '난 아무것도 모릅니다.'하면서 모든 일을 숨어서 했으므로 어른스님들이 기특하고 예쁘게 여기셨다.
묘전스님은 그곳에서 능엄경을 배우다가 자신의 본래면목을 볼 수 있는 참선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향곡 큰스님이 계시는 관음사로 거처를 옮겨 1963년에는 향곡 큰스님의 문하에서 사부대중들과 함께 참선 공부에 매진했다.

그 후 대구 동화사 양진암에 방부를 들여 정진하던 중 공부하려는 마음이 지나쳐 열병을 얻고 각방 신세를 져야만 했다. 그때 운문사에서 주지 소임을 맡고 계시던 노스님께서 사제 일원스님을 데리고 와 간병을 하도록 해주셨다. 건강이 회복된 스님은 일원스님을 운문사로 떠나보내고 다시 향곡 큰스님이 계신 관음사에 방부를 들여 공부를 했다. 그곳에서 한철을 보낸 스님은 성수 큰스님을 친견하고 강원에 가서 경전을 보고 싶다는 말씀을 드렸다. 그러나 큰스님께서 “중은 마음공부가 제일이다.”하고 말씀하셔서 범어사 대성암에 방부를 들여 만성 노스님 회상에서 3년 간 안거를 했다.
안거를 마치고 난 스님은 다시 경전을 보아야겠다.'는 생각에 1966년 스님의 사제스님과 함께 동학사에 방부를 들였다. 경전을 보고 싶어 하는 스님의 학구열은 남달랐다. 그날 배운 것을 108번 독경하지 않으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고, 만약 일이 있어서 일어나게 되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일념으로 공부하는 스님의 간절한 독경소리는 대중의 마음을 감동시키기에 충분 했다고 도반스님들은 말한다.
동학사에서 스님이 금강경을 보고 있을 때 사중의 주지스님과 강당의 강주스님이 서로 의견 충돌이 잦아 강당의 분위기가 소란스러워, '나는 복이 없어 공부할 연이 없나보다.' 하며 어쩔 수 없이 은사스님께서 거주하는 운문사 사리암으로 돌아갔다.

양산 내원사에서 하안거를 지내던 어느 날 운문사를 떠나 부산 기장 보명사에 거하고 계시는 수인 노스님께 인사를 드리러 갔다가 그곳에서 3년간 노스님을 시봉하면서 지냈다. 청신암에서 노스님을 극진히 시봉하는 모습을 본 어떤 보살님이 수인노스님, 성우스님, 일원스님 등과 함께 스님에게 절을 지어 줄 테니 그곳에 가서 주지를 살아달라고 간절히 청했다.
이에 스님은 “보살님, 저는 한 곳에 머물 수 없는 스님입니다. 아직 젊기 때문에 이 절 저 절을 다니며 공부를 해야 합니다.” 하며 정중히 거절했다. 그러나 보살님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스님에게 주지를 살아달라고 간청했다. 끝내 보살님의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었던 스님은 절의 낙성식까지만 보아주고 공부를 하기 위해 절을 떠났다. 그 절이 현재의 부산 동명사이다.
스님은 동명사를 떠나 경봉 큰스님이 거주하고 계시는 통도사로 향했다. 큰스님께서는 당신을 찾아온 학인에게 “중은 이 세상에 태어났으면 멋들어지게 살아야 한다. 재물을 모아 사치를 부리며 멋들어지게 살라는 게 아니다. 마음을 멋들어지게 쓰면서 살라는 것이다. 여기서 나한테 마음을 어떻게 멋들어지게 쓰는지 배워서 가라. 알았나?” 하고 말씀하셨다.
묘전스님은 마음을 멋들어지게 쓰는 법을 배우기 위해 큰스님 회상에서 한 철을 보냈다.

은사스님 봉양

1976년 은사 영옥스님께서 건강이 좋지 않아 대중처소에 계실 수 없게 되자 은사스님이신 영옥스님을 모시고 운문사 청신암으로 돌아갔다. 무너진 벽을 다시 바르고 더러워진 기둥은 양잿물로 닦고 비가 새는 곳을 막는 등 옛 청신암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는 복원불사를 했다. 몇 십 년의 불사를 진행하면서 일이 몸에 익은 스님은 반 목수가 다 되었다.
은사스님은 항상 아미타경을 독송하셨고, 앉아 있을 때나 일을 하실 때 아미타불 염불을 하셨다. 은사스님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밭일, 사중일 등을 찾아 조용히 하셨고, 나이가 연로해서도 손수 빨래를 하면서 누구에게도 당신의 일을 맡기지 않으셨다. 상좌로서 죄송한 마음에 은사스님께 “스님, 제가 해드릴게요.” 하고 여쭈면 “내 일은 내가 헐란다. 지금은 너거한테 빚지고 싶지 않다. 나중에 많이 아프면 해도고!” 하셨다. 이러한 은사 스님을 오랫동안 모시고 산 스님 또한 궂은일을 남에게 미루지 않고 몸소 하는 것이 몸에 배었다.
은사스님은 1997년 2월 24일 저녁 5시에 저녁 공양을 다 드시고, 그 자세로 가만히 앉아 입적 하셨다. 세수 83세, 법랍 53세이셨다. 입적하신 스님의 모습은 너무나 편안해 보였고 얼굴빛이 아 살아 계신 것 같았다. 은사스님께서는 평소에 입버릇처럼 “나는 너희 애 안 먹일란다.” 라고 하셨는데, 그 말씀 그대로 아미타경을 독송하다가 연화대에 앉은 것처럼 임종을 맞이하셨다.

수행의 본보기를 보여준 자상한 스승

묘전스님은 항상 “내가 크게 남을 돕지는 못하지만, 몇 푼씩 아껴서 내가 도울 수 있는 만큼 도 우면서 살겠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암자의 어려운 살림에도 불구하고 부모가 없는 6명의 아이를 키웠다.
스님은 노스님과 은사스님에 대한 향심이 지극한 상좌였고, 불교정화시절 대처승들과 현장에서 맞선 대담한 비구니였다. 또한 언제나 눈 맑은 납자로 살려고 애썼으며, 수행의 가르침을 제자들 앞에서 몸소 실천하는 자상한 스승으로, 불쌍한 사람을 자비로 돌보는 따뜻한 가슴을 가진 가난한 수행자로 살아왔다.
묘전스님은 후학들에게 마음을 너그럽게 쓰는 것을 제일로 삼고, 예불하고 밥 먹고 밭 매고 청소하고 일하는 것 모두를 공부로 삼고 살아달라.'고 당부했다. 또 '물질이 풍부한 시대에 살고 있지만 근검절약하여 검박한 생활을 하라.'고 가르쳤다.

수계제자(2004년 현재)

수계제자로는 지송(知松)·탄호(吞昊)·현욱(玄煜)·지공(知供) 스님 등이 있다.

참고문헌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 뜨란출판사 (2007년, pp.625~633)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년, p.140)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묘전(妙全)스님 본항목 묘전(妙全, 1938~ ) 妙全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묘전스님(妙全,_1938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속성
묘전스님(妙全) 보운문중(普雲) ~의 일원이다
묘전스님(妙全) 영옥스님(永玉) ~의 수계제자이다
묘전스님(妙全) 운문사 내원암 ~에서 출가하다
묘전스님(妙全) 동산스님(東山) ~(으)로부터 계를 받다 사미니계
묘전스님(妙全) 석암스님(昔巖) ~(으)로부터 계를 받다 비구니계
묘전스님(妙全) 안거 ~을(를) 성만하다 대구 동화사 양진암(도학동), 부산 범어사 대성암(청룡동), 양산 내원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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