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적조스님(寂照, 1942生, 비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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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백련(白蓮) 적조(寂照)스님은 형제자매가 모두 출가하여 수행정진하는 승려 가문의 일원으로서 무소유의 청정수행을 실천하신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942 경남 합천 출생
1955 마산 제일여중 졸업, 태백산 홍제사에서 성우(惺牛)스님을 은사로 출가
1957 석암(昔岩)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1958 동학사 중강[1]
1964 동학사 강원 사교 이수
1966 자운(慈雲)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석남사, 약수암, 삼선암, 양진암, 금련선원, 금선선원 등 제방 선원에서 수선 안거 성만
1968 운문사 강원 중강
1980 합동 수계산림 비구니계단에서 사감, 인례, 찰중 역임
2000 금선선원 선원장
2020 전국비구니회 원로의원, 현재 고양 금륜사 주석
문중 삼현(三賢)문중
수행지침 부처님의 이타사상(利他思想)
생활신조 조석예불
상훈 동학사 강원 수료식 때 총무원장 상 수상(1961) 외 다수
수계제자(『한국비구니명감』) 선월(禪月)·구연(九淵)·성봉(聖峰)·현소(賢昭)·명공(明空)
문중계보(『한국의 비구니문중』) 대은(大恩, 7)→도길(道吉, 8)→인정(仁貞, 9)성우(惺牛, 10)적조(寂照, 11)→선월(禪月, 12), 구연(九淵, 12), 성봉(聖峰, 12), 현소(賢昭, 12), 명공(明空, 12)

활동 및 공헌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 374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 375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 376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 377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 378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 379
[금륜사]사진출처:다음블로그 https://blog.daum.net/gotemplestay/432

아버지의 죽음, 육남매 출가의 시작

백련(白蓮) 적조(寂照)스님은 1942년 2월 25일 경남 합천군 쌍백면 평지리에서 아버지 진준이와 어머니 표복례 사이의 2남 4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여양이며, 이름은 진동유이다.

스님의 아버지는 매사에 철저한 분으로, 예수교는 우리 동양의 종교가 아니라는 말씀을 늘 하셨다. 또 불교에는 미신적인 이미지가 많이 내포되어 있다고 여기며 종교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불교의 보시 정신이나 맑은 삶에 대해서는 진리로 믿으며 살았다.

그런데 6·25전쟁이 끝나고 3년 뒤 아버지가 갑자기 병이 나서 돌아가시게 되었다. 그러자 독실한 불자인 종고모께서 돌아가신 영가와 자손을 위해 49재를 지낼 것을 권유하셨다. 어머니는 종고모의 뜻에 따라 부친의 49재 문제로 안정사 뒤에 있는 골짜기에 초가삼간 천제굴을 지어놓고 수행 정진 중이시던 성철 큰스님을 찾아뵙게 되었다.

아버지의 천도재를 마치고 얼마 뒤에, 큰스님이 들려주신 자상한 위로의 말씀에 집안의 기둥이나 마찬가지인 큰 오라버니가 발심하여 큰스님 문하로 출가하는 엄청난 사건이 일어났다. 이 분이 바로 성철 큰스님의 맏상좌이자 10년 행자로 유명한 천제스님이다.

천제스님은 성철 큰스님과의 운명적인 만남을 두고 '육신의 부친을 떠나보내고 마음의 부친을 만나는 순간' 이었다고 회상하였다. 졸지에 가장을 여의고 하늘같이 믿고 의지했던 큰아들마저 갑작스레 출가를 하자 가족들은 마음을 둘 데가 전혀 없었다. 맏이의 출가는 식구들이 받아들이기에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자 당시 행자였던 천제스님은 가족들에게 불법을 설해달라며 큰스님께 간곡한 청을 올렸다.

천제스님의 가족을 향한 애틋한 마음은 마침내 결실로 나타나 그로부터 2년 뒤 스님의 가족 모두가 인홍스님이 계신 태백산 홍제사로 출가를 하게 되었다.

서로 애착심을 버리고 공부하는 출가자로 살려면 문중을 달리 해야 한다는 성철 큰스님의 말씀에 인홍스님은, 네 자매의 큰 언니인 혜근스님법기(法起)문중으로, 둘째 적조스님은 삼현(三賢)문중으로, 셋째 보명스님청해(靑海)문중으로 각각 문중을 달리해 출가하도록 인도하셨다.

그리고 너무 어렸던 막내 본각스님(법기(法起)문중)은 당시 인천 부용암에서 아이들을 잘 보살피고 있던 인홍 노스님의 권속에게 보내졌다. 어린 본각스님이 잘 성장하도록 배려한 노스님은 은사 또한 직접 정해주셨다.

어머니는 1955년 태백산 홍제사 보살계 산림에서 자운 율사스님에게 출가를 앞두고 ‘성종’이라는 법명까지 받았으나 뜻밖의 병을 얻어 출가의 뜻까지는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적조스님은 만 13세 때인 1955년 삭발염의하고 성우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당시 큰스님 밑에서 천제스님이 수행을 너무나 잘하고 있던 터라 석남사 별당 인홍 노스님은 그런 스님의 가족이라면 수행을 잘하겠다고 생각하시고 태백산 홍제사로 출가하는 스님 가족을 인도해주셨다.

미래를 내다보려면 글부터 배워야 한다는 인홍 노스님의 말씀에 따라 적조스님은 마을 훈장님에게 장오스님과 함께 동몽선습과 맹자를 배웠으며, 당시 7세이던 삼소스님은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 뒤 첫 정화가 일어나고 대구 동화사에서 강원을 개원하자, 적조스님은 행자 때 그곳으로 가게 되었다. 당시 동화사는 최초의 비구니 총림이었다.

수학

적조스님은 석암 노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계하고, 동화사에서 혜붕 노스님께 경전을 배우다가 다시 16세 때인 1957년 동학사로 거처를 옮겼다.

1958년 17세에 동학사에서 경봉 조실스님에게 도서를 배우면서 『초발심자경문』『치문』을 가르치게 되었다. 당시 시력이 좋지 않았던 조실스님은 당신이 한 말을 한자도 빠짐없이 영리하게 기억하여 그대로 옮길 수 있는 학인을 선정했는데, 적조스님이 바로 그 적임자로 뽑혔던 것이다.

스님은 17세 때부터 23세에 원각경을 볼 때까지 강의를 계속 하였고, 원각경을 본 후 총무원장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사교입선(捨敎入禪)

그 후 스님은 자운 큰스님께 비구니계를 수계하고, 사교입선을 하였다. 당시 은사스님이 계셨던 내원사 성불선원(현 동국제일선원)에서 첫 안거를 난 뒤 석남사에서 2~3년 동안 안거를 하며 초심자에게 『초발심자경문』과 『치문』, 『서장』을 가르쳤다.

스님의 세수 33세 때인 1985년에는 해인사 약수암에서 안거를 하면서 입승 소임[2] 을 담당하였고, 양진암, 삼선암 선방 등에서 안거를 하며 입승을 맡았다. 또한 스님은 단일계단의 수계산림에서 일익을 담당하였다.

적조라는 법명은 성철 큰스님께서 직접 지어주셨고, 지인(智印)은 자운 큰스님께서 지어주셨다. ‘우리 모두가 부처님의 이타사상을 가슴에 새기고 발자취를 닮도록 노력해야 한다.' 는 적조스님은 수행자의 가풍을 경책하는 글을 항상 마음에 새기고 있다.


        기한(飢寒)에 발도심(發道心)이라
        포난에 생음심(生陰心)이라

        춥고 배고프면 도 닦으려는 마음이 생기지만
        배부르고 등 따뜻하면 쓸데없는 망상만 더하느니라.

성철 큰스님께서는 '모든 물건을 아끼고 살아야 복을 받을 수 있고 아끼지 않으면 복을 감하니, 시주의 은혜를 화살 맞는 것과 같이 하라. 시주의 은혜를 갚으려면 다음 생에 소나 말로 태어나서 갚아야 한다.'고 누누이 당부하셨다고 한다.

적조스님 또한 중국 총림에서 스님들이 제일 많이 다니는 길 위에 새겨진 다음의 글을 들어 시주물을 대하는 수행자의 자세를 후학들에게 환기시키곤 한다. '시주의 쌀 한 말은 수미산 덩어리와 무게가 같다. 만약 도를 이루지 못하고 도를 깨치지 못하면 뿔을 이고 소가 되고, 털을 입고 말이 된다.'

스님은 행자 때 대중과 함께 큰 방을 사용했는데, 하루 일과를 마치고 들어오면 노스님 인홍스님, 혜춘스님, 성우스님은 방선하고도 꼿꼿이 앉아 계셨고, 자다가 소변이라도 보려고 일어나면 여전히 그 자리에 미동도 없이 앉아 계셨다. 잠을 거의 주무시지 않고 정진하셨던 것이다. 어른 스님들의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스님 또한 크게 발심할 수 있었다.

불법(佛法)과 형법과 군법

“불법(佛法)과 형법, 군법은 이 사회를 지탱해주는 마지막 보루라고 말하는데, 그 중 형법은 여전히 서슬 푸르게 살아 있고, 군법은 조금 약해진 편이나 여전히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독 불법은 자꾸 쇠퇴해가고 있는 것 같아 걱정스럽습니다. 젊은 승가가 우리 불법의 미래를 잘 지켜가길 바라고 있습니다.”

스님은 동학사에서부터 7~8년 동안 중이염을 앓았다. 당시 유명한 병원을 들락거리며 치료 받던 중, 성철 큰스님께서 과거전생 업병인데 무슨 병원을 가느냐며 호통을 치시더니 하루에 이천 배를 하라고 하셨다. 이에 스님은 곧바로 기도를 시작하였다. 절을 하는 도중 귀에서 고름이 흘러 나왔지만 개의치 않고 기도를 계속 하였다.

이렇게 일념으로 절 기도를 하고, 25세 때 백일 기도가 끝날 무렵 그동안 통증으로 고생해 온 귓병이 감쪽같이 나았다. 병원에서 주는 약을 몇 번 먹은 것 말고는 전혀 치료한 적이 없던 터라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그 후 스님은 부처님께 감사 기도를 다시 드렸는데, 성철 큰스님께 여쭈니 “감사 기도하는 놈은 처음 본다.”면서 기특해하셨다.

적조스님의 세 가지 기도원칙

적조스님은 기도할 때 첫째, 도량과 몸과 마음이 청정해야 하며, 둘째, 시간을 엄숙히 지켜야 하며, 셋째, 졸지 말고 돈독한 신심을 가지고 임해야 한다는 세 가지 원칙을 갖고 있다.

수계제자로는 선월(禪月)·구연(九淵)·성봉(聖峰)·현소(賢昭)·명공(明空)스님 등이 있다.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 373~380.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407.
  •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p. 384, 389.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적조(寂照)스님 본항목 적조스님(寂照, 1942~) 寂照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적조스님(寂照,_1942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속성
적조스님(寂照) 삼현문중(三賢) ~의 일원이다
적조스님(寂照) 성우스님(惺牛) ~의 수계제자이다
적조스님(寂照) 봉화 홍제사 ~에서 출가하다
적조스님(寂照) 석암스님(昔巖) ~(으)로부터 계를 받다 사미니계
적조스님(寂照) 자운스님(慈雲) ~(으)로부터 계를 받다 비구니계
적조스님(寂照) 안거 ~을(를) 성만하다 울주 석남사, 합천 해인사 약수암, 합천 해인사 삼선암, 대구 동화사 양진암(도학동), 경주 금련선원, 경주 금선선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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