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계환스님(戒環, 1953生, 비구니)

bigu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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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계환(戒環)스님은 동국대 불교학과 교수로서 교학연구와 후학양성에 매진한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953 대구 출생
1971 보문사에서 법준스님을 은사로 출가[1]
1972 청룡사에서 일타(日陀)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1978 범어사에서 고암(古庵)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1979 운문사 강원 졸업
1979~1980 석남사 동·하안거 성만
1985~1987 日本花園大學 佛敎學科 졸업, 日本 京都 佛敎大學大學院 석사과정 수료(문학석사)
1987~1990 日本 京都 佛敎大學 佛敎文化硏究所 한국어 강사
1990 日本 京都 佛敎大學大學院 박사과정 수료
1990~1994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불교학과 강사
1992~1994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상임연구원
1994~1995 불교방송(BBS) ‘자비의 전화’ 진행자
1995~1996 불교방송(BBS) 포교위원회 포교위원
1995~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교수
1997~ 한국불교학회 상임이사
1997~1999 조계종 교육원 교재편집위원회 편집위원 ,
동국대학교 비구니 수행관 혜광사 주지 겸 사감 역임
1999~2001 조계종 교육원 역경편집위원회 역경위원
1999~2003 옥수사회종합복지관 자문위원
1999~2004 BK21 불교문화사상사 교육연구단 제2팀장 . 원교사 주지
2001~2003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학과장
2002~2003 보조사상연구원 운영위원
2002~2004 국제불교사상사학회 이사, 한국선학회 이사
2003~2004 동국대학교 일본학연구소 운영위원, 보조사상연구원 연구위원,
제8차 세계여성불자대회 국제분과 위원장
2004 한국불교학회 편집위원장
2018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불교학과 정년 퇴임
문중 법기문중(法起)
수행지침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
생활신조 주변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삶을 살자
저서 및 작품 『中國華嚴思想史硏究』, 『백팔고개 넘어 부처되기』, 『왕초보 경전 박사 되다』, 『대승불교의 세계』, 『중국불교』, 『홍명집』, 『경전산책』, 『상식으로 만나는 불교』, 『만화로 보는 불교(번역)』외 다수
수계제자 현수(賢修)·현문(玄文)[2]

활동 및 공헌

출가 계기

[대학원 수업을 마치고 수강생들과 함께 (1998. 5. 29) ]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453
[원교사 서재에서 ]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454
[운문사 특강을 마치고 소임진들과 함께]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455
[일본 大谷大學에서 열린 인도학 불교학회 만찬장(1987. 6. 6)]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456
[좋은 느낌 소중한 만남 탐방(1999. 1. 27)]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457

계환(戒環)스님은 1953년 음력 7월 25일 대구시 중구 남산동 1가 105번지에서 아버지 장한식(張漢植)과 어머니 김두래(金斗來) 사이의 2남 3녀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속명은 장애순이다.

스님의 가족은 불심이 깊었다. 할머니는 대구 대성사에서 신도회장을 하셨고, 백일기도 중에는 오직 소금만 반찬삼아 드실 정도로 용맹심과 신심이 철저하였다. 할머니는 유독 막내 손녀 장애순을 귀여워하여 절에 갈 때도 데리고 다녔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는 어머니가 할머니의 뒤를 이어 신도회장을 맡았다. 이와 같은 가정환경 속에서 스님은 어릴 때부터 불교와 자연스럽게 친숙해졌고 부처님과 생활하는 스님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1972년 2월 고등학교 졸업식 날 졸업장을 받자마자 출가를 단행했다. 인생의 일대 전환점을 맞이한 것이다.

수학

출가한 해 스님은 서울 청룡사에서 일타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하였고, 3년 후인 1975년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에 입학하였다. 스님은 평소부터 생을 걸어 불법을 공부하며 수행 정진을 일구어온 스님들을 스승으로 모시고 가르침을 받고 싶었다. 그런데 불교대학임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대부분의 교수진이 재가자였고, 스님으로서 교수직을 맡고 있는 분은 극히 드물었다. 이런 현실은 스님을 늘 안타깝게 만들었으며, 자신부터 훗날 스님들 교육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으로 거듭나야겠다는 선구적인 서원을 세우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까닭에 스님은 지금도 일반 외래 강의는 나가지 않아도 각 강원에서 요청이 있을 때에는 반드시 출강하는 것을 철칙으로 삼고 있다.

스님의 향학열은 좀처럼 식을 줄 몰랐다. 한 곳에 머물며 안주하지 않고 부지런히 정진하며 공부를 더 하고 싶었던 스님은 재학 중이던 동국대학교에 휴학계를 내었다. 그러고는 좀 더 체계적인 단계로 우선 먹물들이기 과정부터 시작하겠다는 생각에서 운문사 강원에 입학하였다. 스님은 운문사강원의 강주 법계(法界) 명성(眀星)스님을 뵈었는데 참으로 고고한 스승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운문사 강원 시절 스님은 서울의 출가 생활에서 배우지 못했던 것을 익히고 부처님 말씀과 조사스님들의 어록을 보는 공부도 물론 좋았지만 자연에서 배우는 공부하는 것이 매우 보람 있었다. 비록 화려하지는 않지만 자신이 서야 할 자리에서 묵묵히 풍파를 견뎌내는 인고의 모습이, 향기롭지는 않지만 두 팔 높이 들어 언제나 기도하는 자세로 세상을 껴안는 겸허함이 아름답게만 여겨졌다. 그래서 스님 자신도 이후에는 저 나무처럼 아낌없이 줄 수 있는 삶을 살고자 서원하였다.

운문사 강원에 재학 중일 때의 많은 추억들 가운데 한 가지다. 어느 여름날이었다. 그 당시 강원에서는 커피를 금하고 있었는데, 스님과 도반스님들은 갑자기 너무나도 간절하게 커피 생각이 났다. 그래서 딱 한 곳 강주스님 방에만 있던 손님 접대용 커피와 냉장고의 얼음을 몰래 갖고 나와 큰 양푼에다 냉커피를 타서 한 사발씩 나누어 마셨다. 그날 밤 스님네 반 모두가 평소에는 전혀 입에 대지 않던 커피를 마신 탓으로 가슴이 두근거려서 한 밤을 꼬박 지새울 수밖에 없었다.

수행

스님이 입승 소임을 살 때에는 그 엄격함이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였다. 어긋난 일을 보면 그냥 넘기지 않고 호되게 경책하였다.
한번은 한 후배 스님을 대중공사에 붙여서 심하게 혼낸 적이 있었다. 수행자로서의 옳은 길을 보여주고자 한 일이었지만 너무 모질게 대한 것은 아니었나 싶어 자꾸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졸업한 후에 스님을 찾아온 그 후배 스님이 그 때의 꾸짖음이 중노릇을 하는데 회심의 계기가 되었다며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나서야 무거웠던 마음의 짐을 덜어낼 수 있었다고 한다.
그 후부터 스님은 말로써 남을 다스리기보다는 관세음보살처럼 말없이 말하고 남순동자처럼 들음 없이 듣기를 발원하였다.

  백의관음무설설(白太觀音無說說) 백의관음은 말없이 말하고,
  남순동자불문문(南巡童子不聞聞) 남순동자는 들음 없이 듣도다.
  병상녹양삼제하(甁上緣楊三際夏) 꽃병 위에 버들은 항상 여름인데,
  암전취죽시방춘(巖前翠竹十方春) 바위 위의 대나무는 시방에 봄일세.

석남사 동안거 결제에 참가

1978년 계환스님은 범어사에서 고암화상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하였으며, 1979년 운문사강원을 졸업하였다. 스님은 곧바로 선방 문고리라도 잡아보고 싶은 마음에 석남사 동안거 결제에 들어갔다. 한 철 동안 공양주를 살면서도 매일 삼천배를 하는 가행정진과 용맹정진에도 빠지지 않자 당시 입승이신 현묵스님으로부터 걱정을 듣기도 하였다. 이어서 하안거 때는 묵언을 하며 한 철을 정진하였다.

일본 유학

학문에 대한 미련을 떨치지 못한 스님은 결국 일본으로 유학의 길을 떠나 1985년에 하나조나대학(花園大學) 불교학과를 졸업하였다. 졸업식장에서 수석 졸업자로서 불교대학을 대표하여 단상으로 졸업장을 받으러 나갔을 때, 은사스님은 다른 사람들의 박수가 다 끝난 줄도 모르고 혼자서 오래도록 박수를 치고 계셨다고 한다.

유학 당시 스님은 반드시 일본인보다 앞서야 한다는 일념을 가지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그 까닭은 한국에 대한 일본인들의 무지가 스님의 자존심을 무척이나 상하게 만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일본인들 중에는 이웃나라 한국이 세계 지도상에서 어느 곳에 위치하는지도 모르는 사람도 많았다. 반면에 스님은 일본에게 배울 점도 마음 깊이 품고 왔다. 그것은 바로 일본 불교가 여러 종교 중에서 단지 하나의 종교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이 그대로 불교라는 점이다. 일본 아이들은 부처님께 정성을 다하고 예를 갖추어 공양을 올리는 것과 같이 조상님께 매일매일 합장을 한 후에 식사하는 부모의 모습을 보며 성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기며 그대로 따르게 된다. 이렇듯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불교를 배우며 자라기 때문에 기독교나 타종교가 들어올 자리는 전혀 없는 것이다.
외국의 것이라면 전후 사정이나 이해를 따 지지 않고 무조건 맹종하는 듯한 우리나라의 현실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인 모습이다.

유학 생활 중에 있었던 일이다. 스님이 일본말을 다 익히기 전에 이십대의 교포 아가씨와 저녁 식사를 함께 할 기회가 있었는데, 즐겁게 식사를 마치고 헤어지면서 스님은 일본말로 “성불하십시오.” 라고 말했다. 그러자 아가씨의 안색이 싹 달라졌다. 나중에서야 ‘성불하라’는 말이 일본에 서는 ‘죽어서 극락가라’는 뜻으로 통용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스님은 물론 전화를 해서 오해는 풀었지만 처음엔 무척 당황했다고 한다.

불교가 인도에서 중국, 한국, 일본으로 전해지는 과정에서 각국의 문화와 접목하면서 똑같은 불교 용어라도 나라에 따라 이렇게 왜곡되고 변질되어 쓰인다는 사실을 접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야단법석, 이판사판, 아수라장 등의 용어가 본래 말 뜻과는 전혀 다르게 사용되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스님은 1987년부터 1990년 2월까지 일본 경도불교대학의 불교문화연구소에서 한국과 한국불교에 관심을 가진 일본 교수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한편, 1989년에는 경도부(京都府)의 성양 시청(城陽市廳) 교양 강좌에서 한국 불교를 강의하기도 하였다. 또한 본인의 학문에도 매진하여 1987년에는 일본 경도불교대학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수료하고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이에 멈추지 않고 1990년 3월에는 경도 불교대학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하였고, 1992년에는 같은 대학원에서 〈법장교학의 사상사적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현재 이 학위 논문은 단행본으로 번역되어 『중국화엄사상사연구』로 출판되어 있다.

활발한 포교활동과 동국대 불교학과 교수로서 학문연구와 후학양성에 매진하다

[원교사] 사진출처: Fantastic Plastic World~*
(https://blog.naver.com/sky7214/222565255946)

스님은 배움에의 열정만큼이나 지도자로서 거듭나기 위한 발원도 커서 동국대학교 문과대학 일문과 강사,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불교학과 강사,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상임연구원, 불교방송 BBS 포교위원회 포교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불교방송에서 ‘자비의 전화’를 진행할 때는 생방송이 주는 중압감도 컸지만, 불자들의 현실적인 질문을 통하여 우리 불교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파악하는 계기로 삼았다. 스님들이 무심코 지나쳐버리기 쉬운 문제까지 콕 집어내는 어린이 불자를 비롯해서 연세 많은 불자들의 넉넉한 체험에서 우러나온 질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내용들을 다루면서 오히려 스님 자신에게 많은 공부가 되었다고 한다.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제한된 방송 시간 때문에 쏟아지는 전화 질문에 충분히 응답해드리지 못한 안타까움을 엮어 나중에 『백팔고개 넘어 부처되기』라는 제목으로 책을 출간하기도 하였다.

활발한 활동을 펼쳐온 스님은 1997년부터 1999년까지 동국대학교 비구니 수행원인 혜광사의 주지 겸 사감을 역임하였다. 또한 조계종 교육원 교재편집위원회 편집위원을 역임하였으며, BTN 동국TV 불교아카데미 ‘중국불교사상’을 진행하기도 하였다.

이 밖에도 스님은 한국불교학회 이사를 비롯하여 조계종 교육원 역경위원회 역경위원, 옥수종 합복지관 자문위원 등을 역임하였고, 1999년에는 원교사(圓敎寺)를 건립하여 포교에도 열성을 다하고 있다. 특히 원교사에서는 ‘화소회(華笑會)’라는 청년회를 결성하여 ‘등불 하나가 천년의 어둠 을 몰아내고 한 가지 지혜가 만년의 어리석음을 없앤다.’는 취지 아래 젊은 불자들을 지도했다. 화소회는 현재 40여 명의 회원들이 매달 정기 모임을 통하여 불심을 키우는 한편 장학사업과 사회봉사 활동을 겸하고 있다.

또한 스님이 3년여에 걸쳐 심혈을 기울여 완역해서 1999년에 발간한 『홍명집(弘明集)』은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 이후 육조시대까지 불교와 중국 전통사상 사이에서 필연적으로 빚어지는 결합과 대립, 그리고 이문화(異文化)를 접촉함으로써 제기되는 다양한 문제점과 이에 대한 대처 방안들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이 책은 현재 다종교 사회 속에서의 한국 불교가 지닌 문제점을 살펴볼 수 있는 참고가 되기 때문에 대학원의 교재로 쓰이고 있다.

스님은 한국불교학회 편집위원장, BK21 불교문화사상사 교육연구단 제2팀장, 한국선학회 이사, 일본학연구소 운영위원, 국제불교사상사학회 이사, 옥수종합복지관 자문위원, 보조사상연구회 연구위원을 역임하였고 그리고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불교학과 교수로서 2018년 8월 정년 퇴임했다. 지도 제자만 수십 명을 배출해온 스님의 수계제자로는 현수(賢修)·현문(玄文)스님 등이 있다.

참고문헌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계환(戒環)스님 본항목 계환스님(戒環, 1953~ ) 戒環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계환스님(戒環,_1953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속성
계환스님(戒環) 법기문중(法起) ~의 일원이다
계환스님(戒環) 법준스님(法俊) ~의 수계제자이다 보문종문중
계환스님(戒環) 법순스님(法純) ~의 삭발제자이다 법기문중
계환스님(戒環) 보문동 보문사 ~에서 출가하다
계환스님(戒環) 일타스님(日陀) ~(으)로부터 계를 받다 사미니계
계환스님(戒環) 고암스님(古庵) ~(으)로부터 계를 받다 비구니계
계환스님(戒環) 운문사 강원(승가대학) ~을(를) 졸업하다
계환스님(戒環) 교토불교대학(일본) 대학원 ~에서 학위를 취득하다 문학박사
계환스님(戒環)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상임연구원
계환스님(戒環) BBS불교방송 자비의전화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상담법사
계환스님(戒環) 한국불교학회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상임이사
계환스님(戒環)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교재편집위원, 역경위원
계환스님(戒環) 동국대학교 혜)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주지(감원)
계환스님(戒環) 대한불교조계종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역경편집위원
계환스님(戒環) 옥수종합사회복지관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자문위원
계환스님(戒環) 두뇌한국(BK)21교육연구단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불교문화사상사분야(동국대학교 선정) 제2팀장
계환스님(戒環) 서울 원교사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주지(감원)
계환스님(戒環)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학과장을 역임하다
계환스님(戒環) 보조사상연구원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연구위원
계환스님(戒環) 국제불교문화사상사학회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이사
계환스님(戒環) 한국선학회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이사
계환스님(戒環) 동국대학교 일본학연구소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운영위원
계환스님(戒環) 제8차세계여성불자대회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국제분과위원장
계환스님(戒環) 안거 ~을(를) 성만하다 울산울주 석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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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원교사 :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1가동 36-44



주석

  1. 『한국의 비구니문중』에 계환스님이 법기문중(法起門中)의 법순(法純)의 법을 이어받은 삭발제자로 기록되어 있다.(출처: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p.167, 368.)
  2. 『한국의 비구니문중』에는 계환스님의 수계제자로는 현수(賢修)와 현진(賢眞)으로 되어 있어 차이가 있다.(출처: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p.167, 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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