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곡일타(東谷日陀)

bigu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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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법호·법명 : 동곡일타(東谷日陀 : 1929~1999)
  • 생애·업적

일타 스님은 1929년(己巳) 9월 2일(음력 8월 1일) 오시(午時)에 충청남도 공주군 우성면 동대리 182번지에서 부친 김봉수(金鳳秀)씨와 모친 김상남(金上男)씨 슬하에 4남매 중 3남으로 태어났다. 속명은 김사의(金思義)이며 법명이 일타(日陀), 법호가 동곡(東谷)이다.
1936년 공주 본정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고, 1942년(14세) 친가 외가의 식구 41명이 모두 출가함에 따라, 보통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통도사 윤고경(尹古鏡) 스님을 찾아가 출가득도(出家得度)하였다. 1945년 현 보광고등학교인 통도사립중학교를 졸업하고, 1946년 18세 때 정월에 은사 스님이 입적하자 순천 송광사 삼일암 선원의 효봉 스님 회상에서 첫 하안거(夏安居)를 하고 속리산 복천암 선원에서 동안거(冬安居)를 지내면서 참선의 길로 들어섰다.
1947년 불교 공부의 기초가 미진함을 느끼고 통도사 불교전문강원에 입학하여 경학(經學) 공부에 몰두하였다. 1949년(21세) 통도사 불교전문강원 대교과(大敎科)를 졸업하고 범어사 금강계단에서 동산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와 보살계를 수지하였으며, 1950년 22세부터 다시 운수납자(雲水衲子)의 길로 들어서서 진주 응석사와 범어사, 성주사 선원 등에서 금오, 동산 스님을 모시고 정진하였으며 1951년부터 1952년까지 경남 통영 안정사 천제굴(闡提窟)에서 성철 스님과 함께 참선 정진했다.
1953년(25세) 자운 율사의 권유로 천구율원(千瞿律院)에서 육상전서를 열람하고 계법(戒法)을 정립하였으며, 1954년 강원도 오대산 서대에서 혜암 스님과 함께 생식과 장좌불와로 하안거를 마친 뒤, 적멸보궁에서 하루 3천 배 씩 7일 기도를 하고 연지연향(燃指燃香) 발원을 하고 “오로지 중노릇만 잘하리라.” 결심하며 오른쪽 네 손가락을 심지로 삼아 불을 붙였다.
이듬해인 1955년(27세) 스님은 경북 봉화군 소천면 태백산 도솔암으로 들어가 동구불출(洞口不出) 오후불식(午後不食) 장좌불와(長坐不臥)를 지키며 홀로 6년의 결사(結社)를 시작하였다. 그렇게 정진을 하다가 1956년 음력 3월 22일에 큰 환희의 경지를 이루어 게송을 지었다.

頓忘一夜過 (돈망일야과)
時空何所有 (시공하소유)
開門花笑來 (개문화소래)
光明滿天地 (광명만천지)

몰록 하룻밤을 잊고 지냈으니
시간과 공간은 어디로 가버렸나
문을 여니 꽃이 웃으며 다가오고
광명이 천지에 가득 넘치는구나.


깊은 산 높은 봉우리 위에 앉아 산새와 솔바람 소리를 벗 삼으며 깊은 삼매의 도를 이루었던 일타스님! 노년에도 스님께서는 이 태백산에서 정진할 때가 ‘참으로 좋은 시절’이었다고 회상하였다. 태백산 6년정진을 통하여 정법(正法)과 대원(大願)과 대행(大行)을 구족한 스님은 1960년 산에서 내려와 걸림없는 교화의 길을 열어 보였다. 때로는 당대의 도인 스님을 찾아 선문답을 나누었고, 조계종단에 큰일이 있을 때마다 종회의원, 교육의원, 법규의원, 감찰위원, 역경위원 등을 맡아 정법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또한 설변재(說辯才)를 갖추었던 스님은 30대의 젊은 나이에 대법사로 추앙 받아, 전국의 여러 사찰에서 걸림 없는 법문으로 중생을 교화하였다. 그와 같은 와중에서도 스님은 해인사, 화엄사, 통도사 극락암 등의 선원에 들어가 하안거, 동안거 결제에 한 차례도 거르는 일이 없었다. 1973년 동남아 10개국 여행을 마친 후 귀국 즉시 태백산 도솔암으로 다시 들어가 안거정진하였다.
1976년 48세 때 해인총림의 율사로 피임된 스님은 《사미율의》, 《불교와 계율》 등 계율과 관련된 여러 책을 발간하고 후학들을 양성하여, 일제강점기 때부터 무너졌던 이 땅의 계율을 재정립하는데 많은 힘을 쏟았다. 또한 1980년부터는 미국 LA의 고려사 포교를 시작으로 2년 동안 북미, 남미, 중미의 여러 지역을 순회하면서 한국불교를 세계에 널리 알렸다. 1990년 봄, 간경화라는 난치병에 걸렸음에도 불구하고 스님은 지리산 칠불암 아자방 선원으로 들어가 용맹정진하며 다음의 시를 남겼다.

약과 병을 함께 다 놓아 버리고
아자방 한가운데 앉았으니
저 멀리에 흰 구름이 나르고
가까이에서는 두견새가 우는구나.
옛 성인의 자취를 좇아 생각하니
이 아자방에서 큰 기틀을 얻으셨도다.
나도 여기에서 묵언정진하며
남은 해를 여여하게 보내리라.

藥病俱放下 亞字房中坐 (약병구방하 아자방중좌)
遠看白雲飛 近聞杜鵑啼 (원간백운비 근문두견제)
追念古聖蹟 於此得大機 (추념고성적 어차득대기)
我欲墨無言 殘年度如如 (아욕묵무언 잔년도여여)


1993년 대한불교조계종 전국 구족계 단일계단 전계대화상으로 추대되어 모든 승려들에 부처님께서 재정하신 계를 수계하는 중임을 맡았으며, 1994년 5월에는 대한불교조계종 원로회의 의원으로 추대되었다. 그리고 해인사 지족암에 선방을 만들고 은해사 본사인 은해사의 조실로 머물면서 후학을 지도하였다.
1996년(68세)부터 스님의 몸은 열반을 감지했음인지 생사리(生舍利)가 나오기 시작했다. 연비를 한 오른손에서 한 달에 한두 과 또는 세 과씩 나와 열반하기 전까지 1백여 과의 사리가 나왔다. 그 사리 중의 일부는 증장(曾長)하거나 분신(分身)을 하여 여러 개로 나누어지기도 하였다.
1999년 11월 22일 하와이로 건너간 스님은 11월 29일 하와이 와불산 금강굴에서 상좌 혜인(慧印), 혜국(慧國) 스님 등에게 후사를 부탁하고 임종게를 수서(手書)하였다.

하늘에 밝은 해가 진심으로 드러내니
만리에 맑은 바람 거문고를 타는구나.
생사와 열반이 일찍이 꿈이려니
산은 높고 바다 넓어 방해롭지 않구나.

一天白日露眞心 (일천백일로진심)
萬里清風彈古琴 (만리청풍탄고금)
生死涅槃曾是夢 (생사열반증시몽)
山高海闊不相侵 (산고해활불상침)


게송을 남긴 스님은 편안한 모습으로 열반에 들었으니, 세수는 71세, 법랍은 58년이었다. 스님의 저서로는 《기도》 《생활속의 기도법》 《윤회와 인과응보 이야기》 《시작하는 마음》 《영원으로 향하는 마음》 《자기를 돌아보는 마음》 《불자의 기본예절》 《범망경보살계》 5책, 법어집인 《부드러운 말 한 마디 미묘한 향이로다》 《집착을 버리면 행복이 보인다》 등 20권에 가깝다.
선(禪)과 교(敎)와 율(律)을 두루 통달했던 스님, 언제나 자비의 미소를 잃지 않은 스님이었다.
※ 출처 :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선원총람』, 2000, pp. 596~5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