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대각스님(大覺, 1914生, 비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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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대각(大覺)스님은 평생동안 무아(無我)와 무상(無相)의 인욕수행 실천하셨고 부산 묘심사를 중건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914 부산 동구 출생
1926 홍제암에서 정법(正法)스님을 은사로 출가
범어사에서 석암(昔岩)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1953 석남사 정수원 6하안거 성만, 입승 소임
1959 봉암사 도솔암 3년 결사
1963 윤필암 안거 성만
1963 봉정암 적멸보공에서 연비 소신공양 (오른손 검지, 중지 네마디)
1964 도솔암 3년 결사
1965 대승사 하안거 성만
1966 김용사 3하안거 성만
1970 부산 묘심사 중건, 주지역임
1973 해인사 약수암 2안거 성만
2002 묘심사 주석
2003 2003.4.1. 묘심사에서 입적 (세수 90, 법랍 52세)
문중 법기(法起)문중
수행지침 청정한 계율
수계제자(『한국비구니명감』) 묘관(妙觀)묘선(妙禪)・묘혜(妙慧)
문중계보(『한국의 비구니문중』) 지환(智幻, 5)→부영(扶榮, 6)→심공(心空, 7)→정법(正法, 8)→대각(大覺, 9)묘관(妙觀, 10), 묘선(妙禪, 10), 묘혜(妙慧, 10)

활동 및 공헌

출가와 수행

[성철 큰스님을 모시고]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p. 247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p. 248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p. 249

대각(大覺)스님은 1914년 5월 26일 부산시 동구 수정 4동에서 아버지 이종혁과 어머니 김대광화 보살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이고, 이름은 이갑수이다. 스님은 마산 수성국민학교를 졸업하고 1926년 정법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출가 후 범어사 금강계단에서 석암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하였다.

평생을 참선 정진에 전념한 스님은 지극한 구도 정진으로 깊은 신심을 연마하여 유서 깊은 석남사 정수원에서 하안거를 무려 6번이나 성만하였고, 입승 소임을 맡기도 하였다. 1959년 봉암사 도솔암에서 3년 결사를 하고, 1963년 윤필암에서 다시 하안거를 성만 하였다.

연비 소신공양

1963년 오대산 봉정암 적멸보궁에서 도반인 현묵, 혜근, 성타스님 등과 함께 연비 소신공양(오른손 검지와 중지 네 마디)을 올리며 신심을 불태웠다.

법화경의 약왕보살본사품에는 일체중생희견보살(一切衆生喜見菩薩)이 신통력의 발원으로 몸을 불태우니 그 광명이 80억 항하사와 같은 세계를 두루 비추었다는 소신공양(燒身供養)이야기가 있다. 그 때 부처님들은 동시에 찬탄하기를, “선남자여! 이것을 제일의 보시라고 하나니, 여러 가지 보시 중에 가장 높은 보시가 되는 것은 법으로써 모든 여래를 공양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일체중생희견보살(一切衆生喜見菩薩)은 몸을 다 태워 법공양(法供養)을 마친 뒤 다시 일월정명덕불의 국토에 화생(化生)하여 게송(偈頌)으로 부친에게 말하기를, ‘아꼈던 내 몸까지 선뜻 버리고, 거룩하신 세존께 공양 올림은 위없는 큰 지혜를 구하기 위함”이라 하였다.

금강경의 할절신체(割截身體)의 무상(無相)수행과 마찬가지로 신명(身命)을 버리는 마음이란 한낱 육체적인 몸을 태워 죽이는 것이 아니라, 신명보다 더 존중되는 불법을 깨닫는 것에 있다. 즉 소신공양은 무아(無我), 무상(無相), 무념(無念)의 구체적인 실천을 통하여 깨달음의 당체인 각자의 법신불(法身佛)을 구현하는 구체적인 수행이 되며, 그 법신불이 된 일체중생 희견보살의 광명이 80억 항하사 국토를 비추었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제불(諸佛)이 소신공양을 찬탄하였다는 말은 소신이 옳고 육체적인 자살 행위를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끈질긴 집착을 놓아 버린다는 정신에서 아상(我相), 인상(人相)과 아집(我執), 아소집(我所執)을 완전히 불식시킨 것을 의미하며, 이러한 수행이 참된 법공양이 되는 것이라고 제불이 칭찬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열반경에 전하는 설산동자의 구법이나, 숭산 소림사에서 왼쪽 팔을 잘라 신명을 버리고 법을 구한 혜가의 단비구법(斷臂求法)도 모두 무아, 무상, 무념의 구체적인 실천 수행의 일면을 전하고 있다.

돈오요문에도 무아, 무상의 인욕수행의 실천을 위한 다음과 같은 유명한 게송이 있다.


        인욕제일도(忍辱第一道) 인욕 행이 불도 수행의 근본이 된다.
        선수제아인(先須除我人) 먼저 반드시 아상(我相), 인상(人相)을 없애야 한다.
        사래무소수(事來無所受) 어떠한 일이 있을지라도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즉진보리신(卽眞菩提身) 곧 그대로가 깨달음의 법신(法身)이 되리라.

그 후 대각스님은 1964년에 진주 도솔암에서 3년간 결사한 뒤, 1965년 문경 대승사에서 하안거를, 다시 1966년 문경 김용사에서 3 하안거를 성만하였다.

묘심사 중건

한편 1970년 부산 묘심사 주지로 부임하면서 사찰을 중건하였고, 1973년 해인사 약수암에서 2 하안거를 성만으로 정진의 힘을 늦추지 않으며 청정한 계율로써 근본을 삼았다.

입적

대각스님은 2003년 4월 1일 묘심사에서 만중생에게 선업(善業)을 회향하시고 홀연히 입적에 들었다. 스님의 세수 90세, 법랍 52세였다. 수계제자로는 묘관·묘선·묘혜스님 등이 있다.

부산 묘심사

[부산 묘심사] 사진출처: http://www.mediatoday.asia/497326

묘심사(妙心寺)는 1888년(고종 25) 지금의 서구 토성동에서 대성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였다. 일제 강점기인 1912년부터 임제종 포교당으로 기능하였다. 일본인이 사찰을 운영하다가 해방 후에 기독교인에게 팔리기도 하였는데, 당시 몇몇 신도가 당시 성보들을 현재의 사찰 자리로 옮겼다. 1960년 무렵 관음보살 좌상, 지장보살 좌상, 범종 등을 가지고 와서 묘심사(妙心寺)로 다시 창건하였다. 1960년대 말 비구니 대각이 많은 불사를 거듭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도심에 위치한 묘심사 경내에는 대웅전과 삼성각, 종각 등이 있다.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익공식 팔작지붕이다. 대웅전에는 금동 석가여래 좌상과 관음보살, 대세지보살이 좌우 협시하고 있다. 또 1946년 제작한 지장시왕도와 신중도가 있다. 대웅전 옆으로 유리 보호각을 둘러씌운 지장보살 입상이 동자를 안고 서 있다. 그 뒤편 계단 위로 삼성각이 자리한다. 삼성각 내에 칠성도, 산신도와 근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높이 30㎝의 돌좌상이 있다. 지장보살 입상 옆으로 ‘ㄱ자’의 현대식 요사채가 있다. 대웅전과 지장보살 입상 맞은편으로 범종을 매단 종각이 있는데, 여기서는 수정동 산복 도로와 부산항이 한눈에 들어온다.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p. 246~250.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60.
  •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 160, 365, 367.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대각(大覺)스님 본항목 대각스님(大覺, 1914~2003) 大覺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대각스님(大覺,_1914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속성
대각스님(大覺) 법기문중(法起) ~의 일원이다
대각스님(大覺) 정법스님(正法) ~의 수계제자이다
대각스님(大覺) 해인사 홍제암 ~에서 출가하다
대각스님(大覺) 석암스님(昔巖) ~(으)로부터 계를 받다 비구니계
대각스님(大覺) 부산 묘심사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주지(감원)
대각스님(大覺) 부산 묘심사 ~을(를) 중창하다
대각스님(大覺) 안거 ~을(를) 성만하다 문경 봉암사 도솔암, 문경 대승사 윤필암, 문경 대성사, 문경 김룡사, 합천 해인사 약수암

지도

  • 묘심사 : 부산광역시 동구 수정동 1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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