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상덕스님(常德, 1951生, 비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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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의진(義眞) 상덕(常德)스님은 현재 청암사승가대학 학장인 의정(義淨) 지형(志炯) 강백과 함께 청암사를 현재의 모습으로 중창하고 청암사 승가대학을 국내 굴지의 승가대학의 면모를 갖추게 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965 충남 개심사에서 성근스님을 은사로 득도
1966 ~ 1969 개심사 강원에서 성능스님에게 금강경 수학
1968 제7교구 수덕사 원담(圓潭)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1973 공주 동학사승가대학 졸업
1974 대한불교조계종중앙교육원 수료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월하(月下)스님을 계사로 구족계, 보살계 수지
1981 서울 경국사 법보강원 졸업
1983 중앙승가대학교 졸업
1984 ~ 1987 화운사승가대학, 청암사승가대학 중강
1987 ~ 1990 대한불교조계종 단일계단 사미니계 습의사
1990 ~ 청암승가대학 강사
1991 ~ 1993 대한불교조계종 단일계단 행자교육원 습의사, 갈마사
1993 ~ 1994 대한불교조계종 단일계단 비구니계 습의사, 동국대학교 교육대학원 수료
1998 ~ 2002 조계종 행자교육원 제14~22기 갈마위원
2003 ~ 2015 청암사 주지
2003 ~ 2006 동학사승가대학 총동문회장
2005 ~ 2015 청암사율학승가대학원 교수사
2009 ~ 2015 대한불교조계종 사회복지법인직지사복지재단 이사
대한불교조계종 단일계단 비구니계 교수사
2010 ~ 2013 대한불교조계종 제15대 중앙종회의원
2012 ~ 2015 사단법인 대한태극권협회장
문중 삼현문중(三賢)
저서 및 작품 〈능엄경의 여래장 사상에 대한 소고〉(1998)
수계제자(『한국비구니명감』) 명조(明照)·자목(慈穆)·해명(海明)·명학(明學)·명석·명경·명림·명관·명허·명율 외
문중계보(『한국의 비구니문중』) 귀완(貴完, 7)→정각(正覺, 8)→보인(寶仁, 9)성근(性根, 10)상덕(常德, 11)→명조(明照, 12), 자목(慈穆, 12), 혜명(慧明, 12), 영빈(永彬, 12), 명석(明錫, 12), 명경(明鏡, 12), 호련(昊璉, 12), 명관(明觀, 12), 명연(明衍, 12), 명허(明虛, 12), 명률(明律, 12), 명광(明廣, 12), 명행(明行, 12), 명열(明悅, 12), 명수(明修, 12)

활동 및 공헌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273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274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275
[도반 지형스님과 함께]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276
[청암사 강원]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277
[청암사 사층석탑]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27
[청암사 경내]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27

출가

의진(義眞) 상덕(常德)스님은 1951년 10월 서울 성동구 신당동에서 아버지 이완영과 어머니 김계생(대덕화 보살) 사이의 4남 2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이며, 이름은 이상덕이다.

무릇 법도를 세움에 있어서는 한 치의 틈도 용납치 않아야 하고, 하화(下化)에 있어서는 일신을 돌보지 않는 보살의 한없는 자애로움이 마땅하리라.

불법의 혜명을 이어감에 대원력(大願力)을 세우고, 불령산 아래 천년 고찰의 가람 청암사에서 그 뜻을 펼침에 20여 년을 한결같은 묵연함으로, 때로는 엄준하면서도 부드러운 외유내강의 수행자로, 어버이의 자상함으로 후학들의 귀감이 되고 마음의 고향이 되어주는 분이 바로 상덕스님이다.

집안이 불교와 인연이 깊어서 스님들과의 왕래가 잦았던 터라 스님은 어려서 부터 어머니를 따라 절에 자주 갔다. 특히 어머니인 대덕화 보살은 불심이 남달리 돈독한 분이셨다.

세속에서의 삶보다는 출가자로서의 삶이 더할 나위 없이 고귀하다는 것을 몸소 체득한 어머니의 영향으로 스님의 출가는 어렸을 때부터 기정사실이 되어 있었다. 모친의 남다른 불법에의 귀의와 굳은 신심은 이후로 스님의 수도 생활에 오롯한 지침이 되어 가슴속 깊이 각인되었다.

딸의 출가에 대한 어머니의 원력으로 인연이 도래하길 기다리던 어느 날, 외출했다가 돌아온 어머니가 문득 서산 개심사로 출가를 권유하셨다. 스님의 나이 15세 때의 일이다. 스님은 그동안 어머니께 누누히 출가에 대해 들어왔기에 별다른 갈등이나 동요는 일어나지 않았다.

서산 개심사는 성능스님이 강주로 계신 비구니 강원이었다. 그 당시에는 고봉스님(청암사 강원), 대은스님 (화운사 강원), 성능스님 등 선·교를 겸한 분들이 각 강원에 주석하고 있었는데 어머니는 개심사가 적합하다고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

숙세의 인연이 무르익은 덕분인지 출가하기로 결정을 하자 스님의 마음은 무조건적으로 더할 나위 없는 기쁨으로 가득 찼다. 더 나아가서는 “나 중노릇하러 간다.”고 자랑하며 개심사로 출가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15세이던 1965년 음력 3월 15일 충남 개심사로 출가하여 열흘 만에 삭발했다. 그 당시 은사스님이신 성근(性根)스님은 오대산 육수암에서 정진 중이었기 때문에 노스님이신 보인(寶仁)스님이 삭발을 해주셨다.

수학

스님은 삭발 후 큰방에서 스님들과 함께 기거하며 3년여의 행자 생활을 했고, 그 사이 염불과 예참 등을 익히고 『초발심자경문』, 『치문』 등을 배웠다.

출가하고 1년이 넘어서야 뵙게 된 은사스님은 제방을 두루 다니며 공부하는 선객으로 가끔 씩 들를 뿐이었고, 스님은 노스님(개심사 총무 소임)을 시봉하면서 열심히 공부해나 갔다.

스님은 대혜선사의 서장을 배우던 1967년 17세 되던 해에 수덕사에서 원담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했다. 비구니계는 후에 1974년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월하스님을 계사로 수지하게 된다.

스님은 개심사 강원 강주이신 성능(性能)스님에게 4년간 『금강경』 등을 수학하다가 강원이 폐강되자 1969년 가을 동학사 강원에 방부를 들였다. 이곳에서 스님은 앞으로 아름다운 도반의 길을 함께 걸어갈 지형스님을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1973년 동학사 강원을 졸업하고 계속 공부를 하던 중 경학을 더 깊게 연찬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다. 이후 가산 지관스님 문하에서 재강을 받게 되는데, 이로써 지형스님에 이어 비구니스님으로는 두 번째로 지관스님의 전강 제자가 되었다.

스님의 보다 깊고 넓은 배움을 향한 노력은 삼선교 청룡암에서 정릉 경국사로 이어졌고, 1983년 중앙승가대학교를 졸업하고 1993년 동국대학교 교육대학원을 수료함으로써 명실상부한 부처님의 일대시교(一代時敎)를 모두 이수하게 되었다.


청암사 중창 및 청암사 강원 중흥

참된 수행자를 배출해야 한다는 원력을 세운 스님은 화운사 강주로 있던 지형스님의 권유로 1984년부터 2년여 동안 화운사에서 중강을 맡았다. 그러다가 1987년 정월 그믐에 지형스님과 함께 학인 16명을 데리고 평생의 수행 정진과 원력의 텃밭이 될 청암사로 들어오게 되었다.

청암사는 신라시대에 창건된 이후 조선시대 인조 때의 대강백이었던 회암 정혜선사가 최초로 강원을 개설했고, 근세에 이르러 한영, 권상로, 고봉스님 등이 강석을 펼친 유서 깊은 전통강원이었다.

70년대 초반 고봉스님이 강석을 펴 우룡, 고산, 덕민스님 등이 공부를 했으나 그 후로 강맥이 완전히 끊어진 것을 상덕스님과 지형스님이 강원을 다시 개원하면서 교학도량의 맥이 되살아난 것이다.

스님 일행이 청암사에 당도했을 당시 청암사의 각 당우들은 쇠락해질 대로 쇠락하여 비가 오면 대야를 받쳐놓아야 했다. 기와 지붕 위에는 잡초들이 무성했으며, 축담은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을 정도로 무너지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대방채인 육화료에 대중이 머물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스님은 아침에 수업이 끝나면 학인들과 함께 기둥과 마루의 찌든 때를 매일 양잿물로 닦아내고 솔과 걸레로 문질렀다. 그러고도 끝없는 보수 불사가 이어져 연일 울력[1]이 계속되었는데, 스님은 늘 학인들과 동사섭하며 열악한 조건 속에서 1인 3~4역을 해냈다.

어떤 어려운 일이 닥쳐도 스님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항상 대장부의 기상으로 당당했으며 철저한 신심으로 초연함 속에 지냈기 때문이다.


청암사 강원

되는 것 안 되는 것 등 모든 것이 부처님의 일이요, 부처님이 해결할 일이었기에 늘 기도를 통해 하나하나 풀어나갔다. 일상이 그대로 수행인 참 수행자의 모습에서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던 것이다.

스님은 크고 작은 일도 늘 지형스님과 의논하여 함께 해나갔으며, 상대가 누구이든 먼저 주장하기보다는 서로의 입장을 헤아려 깊이 인내하며 화합했다. 이러한 스님의 인내와 화합의 가르침은 때로는 학인들과의 수업을 통해, 때로는 몸소 실행을 통해 은은하게 배어나왔다. 학인들은 그런 스님의 모습만 보아도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고 자신을 낮추어야 함을 배웠다.


청암사 중창불사

2003년 가을부터 청암사 주지 소임을 맡게 된 상덕스님은 지형스님과 함께 육화료, 보광전, 정법루, 진영각, 극락전 등 보수공사와 선열당, 중현당, 종각, 백화당 신축에 이어서 교육관 건립과 일주문, 사천왕 이전 불사와 해우소, 그리고 대웅전 보수 불사를 완성했다. 제 스님에게는 도량을 뒤흔드는 기계 소리가 부처님의 법음으로 들릴 만큼 익숙하다. 다만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는 학인들이 자못 안쓰러울 따름이다.

후학자들에 대한 당부

수행자의 위의를 세움에 있어서는 서릿발 같은 위엄으로, 평상시 학인 제접 시에는 어버이의 자애로운 온유함과 도반같은 친밀함으로 대하는 스님은 어묵동정(語默動靜) 행주좌와(行住坐臥)에 ‘하심유화(下心柔和)’하며, 늘 천진한 미소를 잃지 않는다. 스님은 후학들에게 이렇게 당부한다. ‘중은 어떠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본분사를 소홀히 하면 안 된다. 그리고 자기가 있는 자리에서 공부해야지, 공부의 처소를 가려 이리저리 밖으로 찾아다닌다면 참공부와는 십만 팔천 리나 떨어지고 뜬구름을 잡는 것과 같아 아무 이득이 없다.’ 일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가람의 수호와 중창에 모든 것을 바치는 스님의 정성에 불보살이 감응한 듯 폐허였던 청암사는 현재 130여 명이 넘는 대중이 상주하며 불법의 혜명을 잇고자 수행 정진하는 도량으로 거듭나고 있다.

상덕스님은 1987년과 1990년 조계종 제8회와 제11회 단일계단 사미니계 습의사를 지냈고, 1991년과 1993년에는 조계종 행자교육원 제1기, 5기 습의사를 지냈다. 또한 1993~1994년까지 조계종 단일계단 비구니 습의사를 지냈으며, 1998년부터 2004년 현재까지 행자교육원 갈마위원을 맡았다. 스님의 논문으로는 「불교승가의 성립과 운영에 대한 소고」와 「능엄경의 여래장 사상에 대한 소고」가 있다.

상덕스님의 수계제자로는 명조(明照)·자목(慈穆)·해명(海明)·명학(明學)·명석·명경·명림·명관·명허·명율스님 등 10명이 있다.

청암사

[청암사]
사진출처:문화재청http://www.heritage.go.kr/sansa/html/view_20.html

불영산의 푸르른 정기로 둘러 싸여진 청암사靑巖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직지사의 말사로 신라 헌안왕3년(859) 도선국사가 건립한 고찰(古刹)이다. 사적에 따르면 조선 인조 25년(1647) 화재로 전소(全燒)되었으나 벽암(碧巖)각성(覺性)스님이 이 소식을 전해듣고 그 문도(門徒) 허정(虛靜)혜원(慧遠)스님으로 하여금 재건토록 하였으며, 이에 혜원스님이 심혈을 기울여 청암사를 중창했다. 그 후 숙종의 정비(正妃) 인현왕후가 서인으로 있을 때 청암사 극락전에서 특별기도를 올린 인연으로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으며, 불영산의 적송산림은 국가보호림으로 지정되어 궁(宮)에서 무기 등이 하사되었고 조선시대말기까지 상궁(尙宮)들이 신앙생활을 하던 곳으로 유명하다. 고종 9년(1905) 주지 대운당스님이 잠결에 빨간 주머니를 얻는 꿈을 꾼 후 한양에 가니, 어느 노보살님이 자신이 죽은 후에 염불을 부탁하며 대시주를 했다. 대운당스님은 이렇게 쇠락한 극락전을 중건하고 염불 만일회(萬日會)를 결성하였으며 극락전에서는 염불소리가 끊어지지 않는 염불당으로서 역할을 다했다고 한다.
청암사승가대학은 벽암각성의 강맥을 이은 대화엄 종장 모운진언(暮雲震言, 1622-1703)이 청암사를 전문 강원으로 개설한 것이 효시이다. 그 이후로 허정 혜원(虛靜慧遠)이 강교(講敎)와 설선(設禪)의 꽃을 피웠으며, 1711년경 조선시대 벽암 각성, 모운 진언, 보광 원민조사의 법맥을 이은 화엄학의 대강백 회암 정혜(晦庵定慧, 1685-1741)조사는 청암사 강원을 융창 발전시킨 대강백이다. 그 당시 청암사는 불교 강원(講院)으로서의 명성을 드날렸으며, 운집한 학인수는 300명이 넘었고 승속의 추앙을 받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 후 수많은 제자들로 면면히 이어져 근래 고봉(高峰)스님과 그의 제자 우룡스님, 고산스님으로 이어졌다.
현재 청암사승가대학 학장이신 의정지형 강백과 의진상덕 강백은 1987년 3월 25일 청암사비구니승가대학을 설립하여 20년에 걸쳐 전 도량 및 부속건물을 보수Ÿ신축하고, 목조로 된 사십이수(四十二手) 관음보살상을 새로 조성하여 모셨으며, 범종각을 신축하는 등 후학양성에 원대한 발원을 불사에 펼쳤다. 훼손되지 않은 자연경관 속에 고찰의 신비로움을 그대로 간직한 채 전통강원의 맥을 이어가고 있는 청암사는 대중스님들이 부처님 경전공부와 더불어 수행의 향기를 쌓아가고 있는 곳이다.

참고자료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상덕(常德)스님 본항목 상덕스님(常德, 1951~) 常德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상덕스님(常德,_1951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속성
상덕스님(常德) 삼현문중(三賢) ~의 일원이다
상덕스님(常德) 성근스님(性根) ~의 수계제자이다
상덕스님(常德) 서산 개심사 ~에서 출가하다
상덕스님(常德) 원담스님(圓潭) ~(으)로부터 계를 받다 사미니계
상덕스님(常德) 월하스님(月下) ~(으)로부터 계를 받다 비구니계
상덕스님(常德) 중앙승가대학교 ~을(를) 졸업하다
상덕스님(常德) 김천 청암사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주지(감원)
상덕스님(常德) 김천 청암사 ~을(를) 중창하다
상덕스님(常德) 화운사 강원(승가대학)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중강
상덕스님(常德) 청암사 강원(승가대학)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중강
상덕스님(常德) 청암사 율학승가대학원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교수사
상덕스님(常德) 대한불교조계종 행자교육원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습의사, 갈마위원
상덕스님(常德) 대한불교조계종 중앙종회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중앙종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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