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효성스님(曉星, 1948生, 비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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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효성(曉星)스님은 성안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수월암을 중창 불사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948 강원 명주 출생
1958 서울 도봉산 금강암에서 성안(成安)스님을 은사로 출가
1960~1966 동학사 강원 졸업
1962 금강암에서 경봉(鏡峰)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1965 해인사에서 자운(慈雲)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1968 서울 성북구 수월암 안거 성만
1973 동국대학교 행정대학원 수료, 수월암 주지 취임
수월암 중창 불사
1993 수월암 지장전 불사 회향
2016 수월암 주지
문중 법기(法起)문중
수행지침 생활에 진실되고 항상 충실하자.
수계제자(『한국비구니명감』) 혜범(慧梵)·혜일(慧日)·혜조(慧祖)
문중계보(『한국의 비구니문중』) 심공(心空, 7)→정자(淨慈, 8) →원심(圓心, 9)→성안(成安, 10)→효성(曉星, 11)→혜범(慧梵, 12)

활동 및 공헌

출가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권. 뜨란출판사, 2007, p. 601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권. 뜨란출판사, 2007, p. 602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권. 뜨란출판사, 2007, p. 603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권. 뜨란출판사, 2007, p. 605
[수월암전경] 사진촬영: 김은희 2022년
[수월암전경] 사진촬영: 김은희 2022년


효성(曉星)스님은 1948년 12월 5일 강원도 명주군 주문진에서 아버지 정진규와 어머니 홍앵녀 사이의 장녀로 태어났다. 본관은 동래이며, 이름은 정금연이다. 스님이 중학교 다니던 어느 날, 학교에서 집에 돌아와 보니 낯선 스님 두 분이 집에서 쉬고 계셨다. 당시 생존해 계셨던 할머니가 그때부터 스님들과 인연을 맺어 그 후 스님들은 일이 있을 때마다 항상 집에 들르셨다. 그러던 어느 겨울방학, 절에 놀러 가자는 스님의 말씀에 효성스님은 망설이지 않고 따라나섰다. 효성스님은 그 길로 스님을 따라가 금강암에서 홍성안(洪成安)스님을 은사로 삭발하고 출가를 하였다. 1958년의 일이었다.

그 후 1962년 7월 15일 경봉(鏡孝) 큰스님을 모시고 도봉산 금강암(金剛庵)에서 사미니계를 수지하고, 1965년 10월 10일 자운(慈雲) 큰스님을 계사로 해인사에서 비구니계를 수지하였다.

동학사 강원생활

출가하여 은사스님과 노스님을 모시고 생활하며 지내던 중 은사스님인 성안스님이 입적하셨다. 이후 스님은 중학교를 다니다가 출가를 했으니 무엇보다 공부가 급선무라 생각하고 어렵게 모은 6만원을 가지고 동학사 강원으로 향했다.

때는 금강암에서 내려오는 길에 개울이 흐르고 있었는데, 개천에 다리가 없어서 살을 에는 듯한 차가운 물에 신발을 벗고 맨발로 건너가야만 했다.

그렇게 스님은 어렵게 동학사 강원에 입학을 하였다. 이때가 1960년 1월 16일이었다. 당시 동학사 강원 또한 어려운 형편이어서 학인 스님들은 6만원을 내야만 입학을 할 수 있었고, 입학한 뒤에는 한 철에 한번 쌀값을 내야만 했다.

동학사에 입학한 뒤 노스님께서 주신 돈으로는 도저히 강원 생활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스님은 학비를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그래서 소임을 많이 살 수밖에 없었다. 경전 공부를 하며 관광객을 안내하기도 하고, 재무, 서기, 병법[1] 등을 살면서 공부를 계속하였다.

당시 동학사에는 경봉 큰스님께서 강백으로 계셨고, 봉녕사(奉寧寺) 강주로 계시던 묘엄스님께서 강사로 재직 중이셨다. 동학사 학인이면서 아랫반들을 가르치는 중강으로 적조(지인)스님, 혜성스님 등이 계셨으며, 학인은 총 80~100여 명이 되었다. 『초발심자경문』을 배우고 나면 『치문(牆門)』을 2~3년간 배웠고, 요즘 강원의 정규과목인 『서장』, 『도서』, 『절요(節要)』, 『선요(禪要)』, 『기신론(起信論)』, 『능엄경』, 『금강경』, 『원각경(圓覺經)』, 『화엄경』을 모두 배우면 졸업을 하였다

졸업에는 지금처럼 일정한 기한이 없고, 자신의 능력에 따라 정규 과목을 전부 배우고 나면 졸업이 되었다. 보통 6년 만에 졸업을 하였는데, 그나마 어려운 사정으로 졸업을 못하는 스님들이 많았다. 공부하는 방법은 서당에서 글공부를 하는 식으로 『서장』까지 외웠다. 처음 『치문』을 배울 때는 『치문』과 옥편이 걸레가 되도록 열심히 외웠으며, 당시는 지금처럼 사기나 기타 자료가 없어서 만족할 만큼 충분히 공부하지 못하였다.

졸업식은 몇 년에 한번 모아서 졸업을 하고 기념사진 촬영도 하였다. 또한 당시 어려운 사찰 형편으로 스님들이 영양실조에 걸린 경우가 많았다. 라면과 박카스가 처음 나왔을 때에는 박카스는 열이 나도 먹고, 배가 아파도 먹는 등 만병통치약인 줄 알고 사용했다.

한번은 밀가루전을 부쳐서 대중공양을 하게 되었다. 어른 스님들, 윗반 스님들 등 대중이 차서에 의해 순서를 돌다 보니 스님의 차례는 저녁 9시나 되어서야 돌아왔다. 그러나 빈속에 갑자기 기름기 있는 음식을 먹고 설사가 이질로 옮겨 큰 고생을 하였다. 아침에는 죽을 먹고, 점심과 저녁에는 김치와 고추장과 간장이 반찬의 전부였다. 어쩌다 특별식으로 콩나물이 올라오면 진지하시는 스님이 전 대중에게 골고루 나누어주었다.

수월암으로 오다

1966년 가을, 동학사 강원을 졸업한 뒤 학원을 다니면서 공부를 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다. 그러나 동학사 강원 시절에 걸린 영양실조가 폐렴으로 발전하여 건강이 악화되는 바람에 공부를 포기하고 수월암(水月庵)으로 와서 생활하게 되었다. 건강 때문에 수월암에만 머물게 된 스님은 당시 어느 보살님이 창건한 수월암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72년 경에는 당시 불교계의 사정으로 총무원장이신 영암스님께서 8년 동안 수월암을 자주 다녀가셨는데, 효성스님은 오실 때마다 지극정성으로 모셨다.

어느 날 스님은 영암스님께 혼자 계시니 심심하지 않으십니까?' 하고 여쭈었다. 이에 영암스님은 '혼자 있어도 공부하기가 바쁘다. 중 냄새도 안 나는 소리를 한다.'고 꾸짖으셨다.

대중이 피곤하여 조금이라도 게으름을 부릴 때면 “낮잠 주식회사에서 퇴근들을 하셨나?”라고 농담을 하셨다. 영암스님은 언제나 자상하고 부지런하며 유머가 넘치는 모습으로 대중을 이끌어 주셨다.

영암스님 외에도 성수, 자운, 월하 큰스님 등이 수월암에 자주 오셨다.

수월암 주지로 취임

효성스님은 1973년 동국대학교 행정대학원을 수료하고 그해 3월에 정식으로 수월암 주지로 취임하였다.

취임 이후 스님은 협소한 대웅전, 삼성각, 요사채 등 사찰 전각과 당우(堂宇)를 중창 불사하여 완공하였다. 또한 1993년 10월에는 연건평 90평의 지장전(地藏殿) 불사를 마쳤으며, 1994년 12월 불교 포교와 중흥에 기여코자 사찰 부지 145평을 매입하였다.

1994년 어느 노보살님이 당시 시가로 10억여 원이 넘는, 아산에 있는 몇 천 평의 땅을 희사하면서 수월암에서 운영하는 실버타운이나 양로원 등의 사회복지시설을 짓기를 원하였으나 스님의 인도로 동국대학교에 기증하였다.

현재 수월암에는 노인들의 모임인 문수회(文殊會,조의금 보내기), 중년층의 모임인 보리회(菩提會, 봉사활동), 직장인을 비롯한 젊은이들의 모임인 자비회(慈悲會, 사찰의 어려운 일 돕기), 신도들간의 친목 모임인 반야회(般若會) 등 다양한 모임이 있다. 이상 네 개의 모임은 각자 별도의 만남을 가지며 상호 간에 신심을 돋우고, 어려운 일이 있을 경우에는 서로 도우며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다.

스님은 ‘양로원이나 기타 사회복지시설은 다른 단체에서도 도울 수 있지만 주변의 독거노인들이나 어려운 분들은 몰라서 못 도와주는 경우가 많다.'며 그런 분들을 찾아 뵙고 양식이나 청소 등 무엇이 필요한지를 살피고 있다.

효성스님은 모든 면에서 항상 기쁜 만남이 되도록 노력했다고 한다. 또한 한 사람의 희생으로 삼보(三寶)의 정재가 늘어나고 참 불자가 늘어난다는 생각으로 다른 이들을 대했다. 자신이 생활에서 진심으로 정성을 다 하면 돌고 돌아 자신에게 오고 결국에는 그것이 불교를 위한 길임을 강조하며, 생활에 있어 진실과 희생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효성스님은 서울 성북구 수월암에서 수행 정진 중이다. 수계제자로는 혜범(慧梵)·혜일(慧日)·혜조(慧祖)스님 등이 있다.

서울 성북구 수월암

수월암은 성북구 성북로 170(성북동 274-2)에 위치한 사찰이다. 성북우정의공원 바로 건너편에 있는 조그만 사찰인 수월암은 1968년에 김상순·최수월화 두 사람이 창건하였다. 1972년 법당 서쪽에 칠층연화탑을 세워 탑 안에 비로자나불상・석가여래상을 봉안하였으며, 탑 4면에 사천왕상을 조각하였다. 탑 위층 동쪽에 약사여래상, 서쪽에 아미타여래상, 남쪽에 문수보살상, 북쪽에 관세음보살상을 각각 조각했다. 탑은 높이가 약 10m, 둘레가 16m이고, 탑 앞에는 거북조각에 비석을 세웠으며, 입구에는 ‘명랑약수’라는 샘물이 있다.

  • 출처 : 성북마을 아카이브, 삼각산 수월암https://archive.sb.go.kr/isbcc/home/u/story/view/652.do;jsessionid=4721F5C0788756AAFCAD4766BA41EF36

참고자료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효성(曉星)스님 본항목 효성스님(曉星, 1948~) 曉星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효성스님(曉星,_1948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속성
효성스님(曉星) 법기문중(法起) ~의 일원이다
효성스님(曉星) 성안스님(成安) ~의 수계제자이다
효성스님(曉星) 서울 금강암 ~에서 출가하다
효성스님(曉星) 경봉스님(鏡峰) ~(으)로부터 계를 받다 사미니계
효성스님(曉星) 자운스님(慈雲) ~(으)로부터 계를 받다 비구니계
효성스님(曉星) 서울 수월암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주지(감원)
효성스님(曉星) 서울 수월암 ~을(를) 중창하다
효성스님(曉星) 안거 ~을(를) 성만하다 서울 수월암(성북동)

지도

  • 수월암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2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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