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문수스님(紋秀, 1939生, 비구니)

bigu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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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문수(紋秀)스님은 4살 때 양친을 잃고 사찰에서 길러져서 한국전쟁이 끝난 후 비구니로 수계 및 활동하여 뒤늦게 만학 및 구도의 길을 걸은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939 충북 중원 출생
1942 옥수동 미타사에서 대성(大性)스님을 은사로 출가
1953 공주 마곡사 대원암에서 2년간 수학
1955 옥수동 미타사에서 포명(圃明)스님[1]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1958 운문사 강원 사교과 수료
1967-1970 명성여자중학교 수학
1970 양산 통도사에서 월하(月下)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1970-1973 명성여자고등학교 졸업
1971-1973 옥수동 미타사 재무, 교무 역임
1974~1978 선원 안거 성만
1979 동국대학교 행정대학원 졸업
1981 경국사 대교과 졸업
1984~1988 중앙승가대학교 졸업
1995 경기도 용인 금강사 주지 취임
2004 서울 성동구 옥수동 미타사 주지
문중 서울 옥수동 미타사문중
수계제자(『한국비구니명감』) 법련(法蓮)·법래·법우(法牛)
문중계보(『한국의 비구니문중』) 대성(大性)→문수(紋秀)→법연(法蓮), 법래, 법우(法牛), 불퇴(不退)

활동 및 공헌

출가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 뜨란출판사 (2007년, pp.529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 뜨란출판사 (2007년, pp.528
[미타사전경]
사진출처: 티스토리 https://blog.daum.net/gotemplestay/587
[미타사 용운암]
사진출처: 티스토리 https://gotemplestay.tistory.com/587

지묵(智默) 문수(紋秀)스님은 1939년 7월 10일 충북 중원군 용대면 용대리에서 아버지 박재양과 어머니 조일녀 사이의 3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죽산이며, 이름은 박순선이다.

스님은 태어나자마자 어머니가 사망하시고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면서 서울에 사는 친척에게 맡겨지는 아픈 경험을 했다.

1942년 네 살 때 현재의 미타사로 오게 되어 경각 노스님의 각별하신 보살핌을 받으며 성장했고, 1950년 12세 때 6·25전쟁으로 대구 실달사와 공주 마곡사 말사인 대원암 등으로 피난했다가 1954년 16세에 서울 미타사로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1955년 미타사에서 포명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수지했다. 이때 경각 노스님께서 이런 말씀을 들려주셨다.


“네가 오기 전날 꿈에 흰옷을 입으신 관세음보살님께서 천상에서 내려오시더니 아이 하나를 내 품에 안겨주고 가셨다. 그 이튿날 너를 만나게 되었으니, 꼭 꿈에 본 아이와 같았느니라.”

스님은 경각 노스님의 이 말씀이 스님의 일생에 보배와 같은 이야기가 되었고, 이후 가슴에 간직한 채 고생스럽고 어려울 때마다 떠올리며 위안을 얻었다고 했다.

수행

스님의 어린 사미니 시절은 교육보다는 생존을 위하여 살림하고 재를 지내는 일이 더 막중하고 우선적이었다. 스님은 그 덕에 우리 교단 전통의식의 안팎 채비를 모두 갖출 수 있었고, 가람을 수호하여 오늘날까지 지켜온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1958년 20세에 운문사 강원에 입학했으나 허약해진 건강에 심한 울력과 일과로 병을 얻어 2년 만에 중퇴하고 본사로 돌아와 요양할 수밖에 없었다. 스님은 몸이 허약하여서 강원을 끝까지 마치지 못한 것을 늘 아쉬워했다.

스님은 1970년에 용운암 주지 소임을 맡았는데, 용운암은 스님의 노스님이신 경각스님께서 창설하신 미타사 산내 암자이다. 또 같은 해에 월하(月下)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받았고 1973년 35세에 명 여자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문수스님은 1974년 36세부터 4년 동안 미타사에서 안거를 했다. 1979년 41세에는 동국대 학교 행정대학원을 졸업하고, 1981년 경국사에서 지관스님에게 대교를 졸업했으며, 1984년 46세에는 중앙승가대학교를 졸업하여 평소에 원하던 내외의 학문을 섭렵해서 오늘날 젊은 후학들에게 커다란 본보기가 되고 있다.

구도

그러나 스님은 '이 어찌 출가인의 본분이겠는가?' 하는 마음이 들어 흩어진 생각을 정리하고자 용운암 살림을 상좌인 법련스님에게 맡기고, 1995년 57세에 경기도 용인시에 토굴을 만들어 조용히 참선 정진했다.

스님은 '앞으로 수명이 얼마나 남았는지는 모르나 지내고 보니 허무한 평생, 그토록 방황했던 젊은 날이 남의 일 같이 애처롭다. 그러나 후회는 없다. 다만 여생을 정신 차려 이 생을 마감하는 납월 팔일을 떳떳하게 맞고 싶을 뿐이다. 그러기 위해서 지난날의 실패와 회한을 재정리하여 새 힘으로 되돌리는 공부를 하겠다.'고 밝혔다.

2004년 미타사에 주석하는 문수스님의 수계제자로는 법련(法蓮)·법래·법우(法牛)스님이 있다.

옥수동 미타사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본사인 조계사(曹溪寺)의 말사이다. 888년(진성여왕 2)대원(大願)이 창건하였으며, 1115년(예종 10)에 봉적(奉寂)과 만보(萬寶) 두 비구니가 지금의 금호동 골짜기에서 종남산(終南山)으로 절을 옮겨 극락전을 창건하였다.

1824년(순조 4)대원(大願)이 무량수전을 짓다가 3년만에 입적하자, 그의 상좌 환신(幻信)이 뒤를 이어 1827년에 완공하였다. 1862년(철종 13)인허(印虛)가 화주가 되어 조대비(趙大妃)의 하사금과 조진관(趙鎭寬)의 부지 기부로 극락전을 다시 짓고 요사를 수리하였다.

1873년(고종 10) 비구니 성흔(性欣)이 불전과 요사를 고쳤으며, 1928년에는 선담(仙曇)이 7층 석탑을 세웠다. 1933년에는 주지 돈형과 화주 이경화(李京華), 전경각 등이 산신각을 중수하였고, 1938년에는 화주 안성훈(安性勳) 등이 무량수전을 중수하였다.

부속 암자로는 대승암과 칠성암, 금보암·금수암·정수암·용운암·관음암 등 7개가 있다. 사세가 번성할 당시에는 모두 9동 66칸의 건물이 있었다.

유물로는 1883년(고종 20)에 조성된 칠성탱화를 비롯하여 1887년에 학허(鶴虛)가 그린 아미타후불탱화와 현왕탱화, 감로왕탱화·신중탱화·지장탱화, 1900년(광무 4)에 보암(寶庵)이 그린 신중탱화와 아미타후불탱화가 있다.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 뜨란출판사, 2007, pp. 527~529.
  •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 263.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년, p150)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문수(紋秀)스님 본항목 문수스님(紋秀, 1939~) 紋秀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문수스님(紋秀,_1939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속성
문수스님(紋秀) 옥수문중동미타사 ~의 일원이다
문수스님(紋秀) 대성스님(大性) ~의 수계제자이다
문수스님(紋秀) 옥수동 미타사 ~에서 출가하다
문수스님(紋秀) 포명스님(圃明) ~(으)로부터 계를 받다 사미니계
문수스님(紋秀) 월하스님(月下) ~(으)로부터 계를 받다 비구니계
문수스님(紋秀) 용인 금강사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주지(감원)
문수스님(紋秀) 미타사(옥수동) 용운암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주지(감원)
문수스님(紋秀) 안거 ~을(를) 성만하다 제방선원

지도

  • 옥수동 미타사 : 서울특별시 성동구 옥수동 415-1



다른 비구니 스님

지식관계망




주석

  1. 금강산 유점사 출신의 선사(禪師). 청담순호(靑潭淳浩,1902~1971)스님은 진주 호국사에서 포명(圃明)스님의 설법을 듣고 출가의 뜻을 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