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천일스님(天日, 1912生, 비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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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천일(天日)스님은 대중교화에 전력해 온 보살로 현재의 마포 석불사를 이룬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912 서울 출생
1921 서울 보문동 미타사에서 법심(法心)스님을 은사로 출가
1922 사미니계 수지
1930 동산(東山)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한국전쟁 때 화재로 석불사 소실, 중창불사
1962 석불암 주지 취임
1965 불교계 최초로 마포연화어린이회 구성, 어린이법회 개설
1969 우담바라회 회장(전국비구니회 전신)
1970 견성암, 대성암 안거 성만
1971~1975 전국비구니회 제2대회장 역임
1974 대한불교조계종 중앙종회의원
1977 1977.5.6.(음3.19) 입적(세수 66세, 법납 56세)
문중 육화(六和)문중
수계제자(『한국비구니명감』) 법진(法眞)・법수(法守)법선(法宣)・법인(法印)・법운(法雲)・법륭(法隆)・법륜(法輪)
문중계보(『한국의 비구니문중』) 도삼(道森, 5)→보함(普含, 6)→계흔(啓欣, 7)→법심(法心, 8)→천일(天日, 9)→법진(法眞, 10), 법수(法守, 10), 법선(法宣, 10), 법인(法印, 10), 법운(法雲, 10), 법륭(法隆, 10), 법륜(法輪, 10)

활동 및 공헌

출생

[1972.5.22.]
사진출처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210
[1972.5.22.]
사진출처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212
[1967.8.20.(음력)]
사진출처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21
[1972.10.10.]
사진출처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21
사진출처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21

명쾌한 통찰력과 지혜를 갖춰 어려운 시기마다 선지식으로 평가받았던 천일(天日)스님은 1912년 음력 4월 10일 서울 성북동에서 아버지 개성(제주 분종) 고씨와 어머니 김해 김씨 월광화 보살 사이의 2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개성이며, 이름은 명희(明喜)이다. 스님은 사물에 대한 분별력을 갖기도 전인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7세 때 어머니와 외가 식구를 따라 서울 마포 석불사로 이사를 온 것이 출가의 기연(奇緣)을 접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석불사 창건 일화

스님이 동진 출가해 평생 동안 주석했던 석불사의 창건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진다. 외할아버지인 무진(無盡)거사가 하루는 꿈을 꾸었는데 마포나루 가시덤불 속에서 버려진 불상이 승천하는 꿈이었다. 무진거사는 그 꿈이 기이하다 싶어 다음날 꿈속에서 보았던 마포나루를 찾으니 ‘백운암'이라는 정자가 있던 자리였다. 거사는 그곳에서 꿈속에 보았던 불상을 찾고, 그 일을 계기로 자신의 두 딸에게 평생 동안 부처님을 시봉하도록 하였다. 그 인연으로 무진거사는 자신의 두 딸 즉, 천일스님의 어머니와 이모는 각각 월광화와 일광화라는 법명을 받게 되었고, 석불사는 그렇게 창건되었다. 때는 조선 땅에 개화의 물결이 일고, 일제가 조선을 식민지화하려고 치성을 떨던 1800년대 말경이었다.

그 불연은 분명 서광이었다. 한강변 마포나루를 한눈에 내려다보는 석불사에서 일광화와 월광화가 밤낮으로 기도 정진을 하니, 훗날 스님이 출가하여 중생을 제도하게 되는 전조와 다름이 없었다. 무진거사가 찾았던 그 불상은 지금도 석불사 경내에 우뚝 서있는 석불입상 기단석 아래에 봉안되어 있다.

출가

천일스님은 석불사로 이사 온지 3년째 되던 1921년 정월 서울 성북구 보문동 미타사에 주석하고 있던 비구니 법심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은사 법심스님은 제1조 상월당 국인(霜月堂 國仁)스님과 제2조 신암당(信庵堂) 보학(普學)스님 법맥을 계승해 온 육화문중의 제8세로서, 월한-행명-도삼-보함-계흔스님의 계맥을 이어받은 당시 비구니 선맥의 중추였다.

교육

스님은 소학교를 다니며 재롱을 피울 나이였으나, 일제 통치를 받고 있던 시기였기에 학교를 다닐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어머니나 이모 또한 굳이 스님을 학교에 보낼 마음을 내지 않았다. 자암스님을 초빙해 한학을 배우고 불교의 예법과 수행의 기본을 습득하게 하였다. 스님의 총명함이 그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은 이 때 부터다. 한 번 배운 것은 잊지 않았으며, 문장력과 글씨와 출중한 바느질 솜씨는 대중의 감탄을 자아내기 충분했다. 특히 삭발득도(削髮得道)한지 겨우 석 달 만에 염불을 외우고 웬만한 경전의 글귀는 읽고 이해할 정도였다고 하니, 스님의 지혜가 어느 정도였는가를 가늠해 볼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출가한 다음 해인 1922년 사미니계를 수지한 스님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공부에 대한 열정 만큼은 멈출 줄 몰랐다. 석불사에서 간경과 화두참구에 드는 모습은 세납을 초월한 듯한 엄숙함으로 대중을 사로잡았으며, 조석예불을 거르는 일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석불사를 이어받다.

그렇게 석불사에서 진정한 불제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가운데 비구니계를 수지하니, 그 위엄은 대비구니로서의 부족함이 없었다. 후학들은 이때를 1930년대 중, 후반으로 기억한다. 그 즈음, 스님은 이별의 고통이 주는 뼈아픈 슬픔을 접하게 된다. 석불사의 실질적인 창건주였던 이모 일광화 보살이 1936년 세연을 거두더니, 1938년에는 어머니마저 세상을 하직하고 만 것이었다. 일찍이 아버지와 사별한 후 20여 년 동안 어머니와 이모의 수순자비(隨順慈悲心)을 간직하며 성장해왔던 스님으로서는 땅이 꺼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불과 2년 사이 어머니와 이모를 잃은 스님에게 고스란히 남겨진 것은 절 살림이었다. 화두를 챙기고 법을 전하며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의 원력을 세웠던 스님에게 절 살림은 또 다른 시련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기우(杞憂)에 불과했다.

석불사가 중생을 섭수하는 자비도량으로 개방되고 경내가 보다 확장되는 등 오늘날 석불사의 위용을 갖추게 되는 첫걸음이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6·25전쟁 때는 화재로 칠성각을 제외한 전 도량이 전소되는 비운을 맞기도 했으나, 청정도량을 가꾸고자 하는 스님의 원력까지 앗아가지는 못했다.

불교계 최초로 어린이법회를 개설

도량 가꾸기를 어느 정도 마감하던 즈음 스님은 운문 스님과 함께 석불사 경내에 불교계 최초로 마포연화어린이회를 구성하고 어린이법회를 개설했다. 1965년 스님의 나이 54세 때였다. 포교의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어린이 포교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일대 계기를 마련하게 된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였다. 스님은 아이들을 섭수하여 기르고 학교를 보내는 등 일찍이 사회복지사업에도 선견지명을 가졌다.

수행

한편 견성암과 대성암으로 오가며 안거를 성만하는 등 구도에 대한 스님의 열정 또한 식을 줄 모르고 계속 이어졌다. 평소 하심(下心)하는 바가 커서 신도들조차도 천일스님이 과연 염불을 할 줄 아는지, 수행력이 어느 정도인지 의아심을 가질 정도였는데, 신도들의 그러한 염려는 기도를 올릴 때면 여지없이 무너지곤 하였다. 스님은 그렇듯 평상의 모습 속에서 하심과 위엄으로 대중에게 도(道)를 일렀고, 입적에 들 때까지 예불을 거르거나 낮잠에 빠져본 일이 없으며, 바느질을 손수 하는 등 시간을 헛되이 보내는 법이 없었다.

중앙종회에 진출

스님의 승려상(僧侶相)은 해를 거듭할수록 중후해졌고, 그 모습에 신도대중의 수는 날로 증가했다. 그렇게 구도자로서의 위상을 갖춰가던 즈음, 조계종의 입법기구인 중앙종회에 진출하여 불교발전의 중추 역할을 담당하는 한편, 비구 중심의 한국불교의 현실 속에서 소외된 비구니계의 위상 정립에도 일조를 하기에 이른다. 스님의 나이 이순을 넘긴 63세 때인 1974년의 일이었다.

입적

그렇게 50여년을 하루같이 깨달음을 구하고 대중교화에 진력해 온 비구니 천일스님은 무르익은 보살심(菩薩心)을 보다 많은 중생들에게 회향하겠다는 스님의 서원(誓願)이 이루어지기도 전에 피안의 길로 접어들고 말았다.

1977년 음력 3월 19일, 황혼이 한강의 서녘 하늘을 수놓던 시각이었다. 무상(無常)이요, 무아(無我)라. 스님의 세수 66세요, 법랍 57세였다.

천일스님의 큰 원력은 지금도 후학들에게 면면히 이어져 맏상좌 법진(法眞)과 법수(法守)·법선(法宣)·법인(法印)·법운(法雲)·법련・법륭(法隆)・법륜(法輪)스님 등과 혜원·혜광·대유·혜영·혜민스님 등 손상좌와 증손상좌 등 60여명이 스님의 유지를 따라 수행 정진하고 있다.

마포 석불사

[석불사 전경]
출처: 다음 블로그: https://blog.daum.net/gotemplestay/815
[석불사 미륵불]
출처: 다음 블로그: https://blog.daum.net/gotemplestay/815
  • 홈페이지: blog.naver.com/seokbulsatemple

대한불교조계종 석불사의 전신인 백운암(白雲庵)은 조선시대 제19대 숙종(肅宗 1674년~1720년) 때 환성(喚惺) 지안대사(志安大師 1664년~1729년)가 수도 한성(漢城)의 젖줄인 한강의 마포항 인근 지금의 석불사 터에 창건하였다. 백운암은 한강을 진호(珍護)하고 상인과 선원들의 무사 항해와 상업 번창을 기원하는 호국사찰이었으나 조선시대 배불정책(排佛政策)으로 백운암은 파괴, 폐사되고, 절터에는 한강변 여덟 정자 중 하나인 풍월정(風月亭)이라는 정자가 세워졌다.

200여년 전 불심이 돈독한 김해 김씨 무진거사(無盡居士)가 청룡 한 마리가 한강변에서 승천하는 꿈을 꾸고 그곳에 달려가 살펴보다 석불과 백운암이라는 편액(扁額)을 발견하고 이곳이 절터임을 알고 중창 불사(佛事)를 펼쳐 석불암(石佛庵)으로 개칭, 중건한 후 딸 일광화(日光華)와 월광화(月光華) 자매로 하여금 불공토록 하였다.

안타깝게도 1950년 한국전쟁 때 삼성각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소실되었으나 월광화의 딸로 동진출가(童眞出家)하신 천일(天日)스님(1912년~1977년)의 원력(願力)과 피땀 어린 노력으로 중창하였다. 이후 오랜 세월이 흘러 대웅전을 비롯한 전각 모두가 낡아지고 미륵부처님까지도 부식이 심해져 1990년부터 2010년까지 장장 20년에 걸쳐 대웅전, 극락전, 삼성각, 설법전, 요사채 등을 새롭게 불사하였고 불기2554년(2010년) 음력 8월7일 새로 모신 미륵부처님 봉불식과 중창불사 회향식을 올렸다.

이처럼 300여년의 오랜 역사를 지닌 석불사는 오늘날 서울 도심 속 한강변에 자리잡고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는 실로 유서 깊은 비구니(比丘尼) 사찰이다.

  • 출처: 석불사 石佛寺 Seokbulsa Temple

참고자료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천일(天日)스님 본항목 천일스님(天日, 1912~1977) 天日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천일스님(天日,_1912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속성
천일스님(天日) 육화문중(六和) ~의 일원이다
천일스님(天日) 법심스님(法心) ~의 수계제자이다
천일스님(天日) 보문동 미타사 ~에서 출가하다
천일스님(天日) 동산스님(東山) ~(으)로부터 계를 받다 비구니계
천일스님(天日) 서울 석불사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주지(감원)
천일스님(天日) 서울 석불사 ~을(를) 중창하다
천일스님(天日) 안거 ~을(를) 성만하다 예산 수덕사 견성암, 부산 범어사 대성암(청룡동)

지도

  • 석불사 : 서울특별시 마포구 마포동 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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