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혜안스님(慧眼, 1923生, 비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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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혜안(慧眼)스님은 해인사 삼선암 불사에 정진하여 현재 가람의 모습으로 터를 닦으신 대한민국 비구니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923 전남 강진 출생
1951 합천 해인사에서 정행(淨行)스님을 은사로 출가
1951 합천 해인사에서 인곡(麟谷)창수(昌洙)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1957 합천 해인사 삼선암 요사채 80평 신축
1961 합천 해인사에서 자운(慈雲)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합천 해인사 삼선암 큰방 인법당 중수
1963 합천 해인사 삼선암 서쪽 선원 확장
1974~1976 청도 운문사 주지 역임
1988 조계종 단일계단 제9회 구족계 비구니증사
1995 요사채 신축
2000 2000.5.23. 합천 해인사 삼선암에서 입적(세수79세, 법랍51세)
문중 삼현(三賢)문중
수계제자(『한국비구니명감』) 경도·경옥·경현·경륜·경훈·경욱·경관·경각·경진·경담·경호·경문·경재·경오·재각·민광
문중계보(『한국의 비구니문중』) 준기(俊基, 5)→지종(智鍾, 6)→성학(性學, 7)→정행(淨行, 8)혜안(慧眼, 9)경옥(敬玉, 10), 경도(敬道, 10), 경현(敬賢, 10), 경훈(敬訓, 10), 경륜(暻輪, 10), 경욱(敬旭, 10), 경관(敬寬, 10), 경각(敬覺, 10), 경일(鏡日, 10), 경진(敬眞, 10), 경담(鏡潭, 10), 경호(鏡湖, 10), 경문(京門, 10), 경재(敬宰, 10), 경오(鏡悟, 10), 재각(在覺, 10), 민광(玟光, 10)

활동 및 공헌

출가

혜안(慧眼)스님은 1923년 4월 25일 전남 강진군 군동면 화산리에서 아버지 위대식과 어머니 윤삼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장흥이며, 이름은 위금임이다. 스님은 1951년 합천 해인사 삼선암의 정행(淨行)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같은 해 해인사에서 귀산스님(인곡선사)께 사미니계를 수지했고, 1961년 합천 해인사에서 자운율사로부터 비구니계를 수지했다. [1]에 따르면, 효봉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와 비구니계를 수지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불사는 곧 수행

해인사 삼선암 전경

혜안스님은 한평생 불사와 가람 수호의 길을 걸어왔다. 좁은 터에서 어렵게 불사를 할 때는 개인적인 갈등도 있었지만 기도로 극복했고, 불사의 어려움을 부처님께 하소연하면 꿈에 불보살님이 현몽하여 불사를 원만히 마칠 수 있게 도와주셨다. 한번은 불법으로 벌목했다는 이유로 한 달간 구류 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혜안스님은 '불사는 곧 수행'이라는 신념으로 수행과 일을 따로 구분하지 않고 항상 가람 수호를 수행 삼아 정진했다. 삼선암이 현재의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은 모두 스님의 끊임없는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1955년 혜안스님이 삼선암의 도감에 취임하여 1957년 요사를 80평으로 확장했으며, 1961년에 인법당을 중수하고, 1963년에 칠성각을 중창했다. 1981년에는 선원 15평을 42평으로 증축했고, 1995년 선불장과 후원 요사를 건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가람 수호에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불사금이었다. 그러나 천일기도를 통해 삼선암에 목탁 소리가 끊이지 않도록 했고, 이 기도는 곧 불사의 힘이 되었다. 스님은 그동안 신도들에게 별도의 불사비를 받지 않고 삼선암을 운영해왔다. 신도들이 가끔씩 스님에게 외국 여행을 다녀오시라며 여행비나 용돈을 드려도 쓰지 않고 모아두었다. 스님은 시주의 은혜를 목숨처럼 여겼고, 외국에 사는 신도가 초청장을 보내오면서 한번 모시기를 간절히 희망해도 거절할 만큼 성품이 강직했다. 요즘은 불사를 할 때 먼저 불사비를 마련해놓고 시작하는 경우가 많은데, 스님은 그때그때 불 사금을 충당해나갔다. 신도들에게 시주하라는 말씀도 삼가하고 도량을 넓히는 불사를 계속해온 것이다.
혜안스님은 매우 지혜롭고, 염불도 잘하고, 은사스님 시봉은 물론 불사까지 해내던 스님이었다. 법당과 요사채, 선방 등도 모두 손수 지었다. 은사스님이 돌아가신 후에는 식당을 새로 중건했다. 스님은 도반스님인 대원암 태호스님과 절친했다. 그래서 태호스님이 입적했을 때의 상심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깊었다. 은사스님은 '혜안스님 만한 사람 없다.' 하시며 혼자 불사하는 것에 대해 매번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혜안스님은 사중에 돈이 생기면 그때마다 쓰지 않고 차곡차곡 모아 두곤 했다. 은사스님에 대한 혜안스님의 효심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일이 있다. 삼선암을 짓기 10년 전부터 식당을 짓자는 의견이 있어 왔지만 혜안스님은 '돈도 없으면서 식당을 짓느냐. 관리비도 많이 나오고 사람도 상주해야 하니 안 된다.' 하며 만류했다. 그러던 스님이 어느 날은 은사스님 계실 곳이 마땅치가 않다며 서둘러 머물 곳을 만들기 시작했다. 많은 불사로 힘에 부칠 때면 스님은 손수 목탁을 치면서 기도를 했다. 신도들은 항상 스님의 끊이지 않는 목탁 소리를 들었다.
스님의 상좌들은 폐사 직전의 사찰을 돈도 없이 오직 신심으로 복원해낸 혜안스님을 보며 불사는 신심이 도와야 할 수 있는 것임을 깨닫고 스님의 모습을 본받고자 노력했다. 혜안스님은 보시를 직접 챙기지 않았다. 간혹 보시를 챙길 경우에는 자신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공심으로 불사를 하거나 어려운 형편에 처한 사람을 도와주곤 했다. 공부하는 방에서 끊임없이 정진을 하면서 참선 또한 게을리 하지 않았던 스님은 성품이 당차고 한 가지 일을 결정하면 끝까지 밀고 나갔으며, 부드러우면서 강직하고, 어떤 사안에 대해 가능한 한 모든 사람들과 의논하여 결정을 했다. 만약 단독으로 처리할 일이 생기면 그 경과들을 전부 보고했다.
운문사에서 100일 기도를 한 후 다시 불사에 매진할 때 은사스님은 혜안스님의 건강을 무척 염려했다. 그래서 이제 불사를 그만 하고 쉬라고 말씀하셨다. 혜안스님은 더는 불사를 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지만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정신없이 불사를 하다 보면 어느 때는 스스로도 혼란스러웠지만, 스님은 부처님을 위해 불사를 하고 가람을 수호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고 큰일이라고 믿었다.
혜안스님은 공부를 하려고 하면 그때마다 이상하게 일이 생겨서 못했다. 운문사 강원에서도 사교까지 보고 『화엄경』을 못 보고 나왔는데, 그때는 정말 안타까웠다. 아무래도 전생에 가람 수호와 인연이 큰 것 같다.” 며 공부에 대한 아쉬운 마음을 달래곤 한다. 그래서인지 스님은 후학들에게 불사보다는 오직 공부와 수행을 열심히 하라고 권했다. 자신의 일을 게을리 하지 말고 부지런히 수행하는 한편 공부도 같이 해야 한다며 공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스님은 출가한 모든 스님을 존경했으며, 특히 전강 큰스님의 말씀을 자주 들으며 마음에 새겼다. 전강 큰스님의 말씀을 들으면 마음이 편하고 듣기에도 좋았으며, 들을 때마다 항상 새로운 것을 깨우치고 느낄 수 있었다.
삼선암에서 지내는 동안 스님의 기억에 가장 남는 분은 지형스님의 노스님인 문오스님이었다. 항상 참선을 하셨는데, 밖에 나가서도 참선하는 모습만 보여주셨다. 참선 외에 기도와 염불도 많이 하신 문오스님은 자비롭고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하면서 공부도 잘하셨는데, 그 모습이 많이 부러웠고 존경스러웠다. 혜안스님은 문오스님을 보고 '나도 저러한 삶을 살아야겠다.'고 다짐을 했었다.

효행 깊은 스님

혜안스님은 효행이 깊은 스님으로도 정평이 나있다. 은사스님을 평생 모시고 사는 동안 말씀을 거역한 일이 없을 정도이다. 스님은 강원이나 선방을 가지 못해도 은사스님께 '왜'라는 토를 달지 않았다. 하지 말라면 안 하고 하라면 하는 것으로 알았으며, 어른들의 말씀을 거역해본 일이 없었다. 은사스님이나 노스님께서 드시고 싶은 것이 있으면 어떻게 해서라도 만들어 갖다 드릴 만큼 지극정성으로 효행을 다했다. 이 세상의 모든 스님들을 불보살처럼 존경하는 스님은 후학들에게 항상 공부하고 기도하며 은사스님을 잘 시봉하라는 말씀을 잊지 않는다. 효를 근본으로 어른스님을 시봉하면 그것이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행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혜안스님은 항상 말수가 적고 묵묵히 일을 해나갔다. 워낙 깔끔해서 옆에 다가가는 게 오히려 죄송할 정도였고, 언제나 조용한 모습으로 살아가기를 원했다. 가끔 상좌들에게 매몰차게 대하여 상좌들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를 하면, 그냥 듣고 흘려버렸다. 자신과 관계없는 일은 가차 없이 잘라버리고, 상좌가 무엇을 어떻게 하는지에 대해서는 뒤에서 세심한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주었다. 겉으로는 차갑게 대해도 속으로는 작은 일까지도 신경을 쓰며 상좌들을 위해 기도를 아끼지 않았다.

입적

혜안스님은 '다음 생에 태어나면 참선 수행하며 공부의 도를 닦고 싶다.'는 말을 남기고 2000년 5월 23일 해인사에서 세수 79세, 법랍 51세로 입적했다. 입적하기 얼마 전에는 시간이 흘러가는 대로 몸을 맡기며 스스로 자유롭게 살면서 기도와 참선 정진을 거듭했는데, 평생의 불사로 건강이 많이 쇠한 상태에서도 아직까지 정정하다며 인연이 닿아 불사를 더 할 것 같다고 말씀하곤 했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12구 본사 해인사의 암자 삼선암은 1893년에 자홍스님 창건, 1904년에 보찬스님과 지종스님 두분이 중건

합천 해인사 삼선암

삼선암은 암자옆의 계곡에서 세 신선이 노닐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해진다.

최근 새로이 비구니 선원, 반야선원 세운 것을 비롯하여 도량의 규모가 커졌다

삼선암 중심 법당. 회산(晦山) 박기돈(朴基敦, 1873~1947, 조선 말기 문신·서예가) 선생이 쓴 '三仙庵(삼선암)' 현판이 걸려 있으며 문오스님 부도가 있다


합천 해인사 성보박물관 소장 문화재

보물 9점, 국가민속문화재 1점, 유형문화재 7점, 문화재자료 2점 등 다수 [출처] 삼선암(三仙庵)_해인사 산내 암자

참고자료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혜안(慧眼)스님 본항목 혜안스님(慧眼, 1923~2000) 慧眼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혜안스님(慧眼,_1923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속성
혜안스님(慧眼) 삼현문중(三賢) ~의 일원이다
혜안스님(慧眼) 정행스님(淨行) ~의 수계제자이다
혜안스님(慧眼) 해인사 삼선암 ~에서 출가하다
혜안스님(慧眼) 인곡스님(仁谷) ~(으)로부터 계를 받다 사미니계
혜안스님(慧眼) 자운스님(慈雲) ~(으)로부터 계를 받다 비구니계
혜안스님(慧眼) 청도 운문사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주지(감원)
혜안스님(慧眼) 해인사 삼선암반야선원 ~을(를) 건립하다
혜안스님(慧眼) 해인사 삼선암인법당 ~을(를) 중창하다
혜안스님(慧眼) 계단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구족계단 비구니 증사(별소계단 9회 존증아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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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1. 이 신문은 '승인 2002.02.15 12:01'으로 되어 있는데, 지면 발행일을 확인 필요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