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정운스님(淨雲, 1954生, 비구니)

bigu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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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정운(淨雲)스님은 석남사에서 성우(惺牛)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충남 보령에 세원사를 창건하였으며 청소년 복지에 힘을 썼고 도자기 전시회를 개최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954 부산 출생
1975 석남사에서 성우(惺牛)스님을 은사로 출가
1977 통도사에서 월하명근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1979 통도사에서 월하명근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1980 운문사 강원 졸업
1981 내원사 하안거 성만
1986 중앙승가대학교 사회복지학과 졸업
1989 충남 보령 세원사 창건, 농어촌 포교활동
2002 한국 문인협회, 한내문학회, 현대불교문학회 회원
2003 혜정대학 도예디자인과 졸업
2004 군산대학 산업도예과 재학, 세원사 주지
2012 청소년의 건전 육성과 선도․보호 활동에 기여한 공을 인정받아 '대통령 표창' 수상
2015 수덕사 미술관에서 우건 정운스님의 이야기가 있는 도예전
2016 청소년 보호와 육성의 유공을 높이 평가받아 대통령이 수여하는 ‘국민포장’을 수상
2018 제17대 중앙종회 비구니 대표로 선출
2022 세원사 주지, ‘우건 정운스님의 이야기가 있는 도예전2’ 개최
문중 삼현문중(三賢)
수행지침 일일부작(一日不作) 일일불식(一日不食)
생활신조 회향
저서 및 작품 정운, 『그대, 그대 자신으로』, 불광, 1996, (시집) 외 다수
상훈 한글 유공자 표창(1994) 외 다수
수계제자(『한국비구니명감』) 일진(一眞)·유진(惟眞)·원재(源載)
문중계보(『한국의 비구니문중』) 대은(大恩, 7)→도길(道吉, 8)→인정(仁貞, 9)성우(惺牛, 10)정운(淨雲, 11)→일진(一眞, 12), 유진(惟眞, 12), 원재(源載, 12),

활동 및 공헌

출가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521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522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523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525
[보령 세원사 전경]
사진출처 : 다음카페 https://cafe.daum.net/amjaesa/MbCw/122
[정운스님 작품]
사진출처: 불교신문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144155
[정운스님 작품]
사진촬영: 김은희(2022년)

정운(淨雲)스님은 1954년 12월 26일 부산 범내골에서 아버지 박성준과 어머니 김만선 사이의 1남 2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본관은 밀양이며, 이름은 박찬이이다.

스님은 어릴 때부터 책을 읽고 글 쓰는 일을 좋아했을 뿐만 아니라 여고 시절 교내 백일장에서 늘 우수한 성적을 거둘 만큼 문학적 재능을 보여 왔다.

어릴 적 꿈은 만인의 어머니가 되는 것이었으며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남몰래 고심했다고 한다. 결국 그 꿈을 이룰 수 있는 길은 출가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산문에 들어서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부모님이 쉽게 찾을 수 없는 곳, 그것도 부산에서 멀리 떨어진 해남 대흥사로 무작정 지도 한 장을 들고 찾아가서 출가의 뜻을 밝혔다. 그런데 그곳은 비구스님들의 수행 도량이었다. 당시 대강백이신 운기 노스님께서는 그런 사정을 설명하며 대신 언양 석남사의 성우스님을 찾아가라고 소개장을 써주셨다.

은사 성우스님

스님은 어쩔 수 없이 고향과 가까운 석남사를 출가 사찰로 택해야 했다. 절집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기에 무작정 찾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스님의 나이 22세 되던 해인 1975년의 일이었다. 석남사에서 행자 생활을 시작한 스님은 성우스님을 찾아왔다는 말을 꺼내지 않고 마음속으로만 늘 ‘어떤 분이 성우스님일까?’ 궁금해하였다.

그 당시 성우스님은 선원장으로 계셨기 때문에 행자가 쉽게 뵐 수 있는 분이 아니었다. 다만 성우스님의 인격과 덕행은 모든 선객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는 얘기를 주변에서 듣고 짐작만 할 뿐이었다. 감히 찾아가서 은사가 되어 달라고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때마침 석남사에서는 행자에게 은사를 정해주기 위하여 대중공사[1]를 하기로 하였다. 대중공사에서 행자가 스승으로 삼고 싶은 어른 스님께 절을 세 번 드리면 그것으로 은사와 상좌 사이가 결정되는 것이었다. 스님은 그 기회를 기다렸다.

드디어 결제가 임박하여 은사스님을 정하는 날이 다가왔다. 12명의 행자가 각자 원하는 분에게 절을 세 번 드리고 은사도 행자도 모두 흡족해하는 가운데 대중들이 공인하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정운스님의 차례가 왔다.
“저는 성우스님의 상좌가 되겠습니다.”
스님의 부탁을 들으신 성우스님께서는 사양하셨다.
“내가 나이가 많아서 어린 너를 키울 자신이 없으니 좀 더 젊은 스님을 택하도록 해라.”
하지만 이미 마음속으로 은사를 정하고 출가지를 이곳으로 택했던 정운스님으로서는 포기할 수 없었다. ‘저 분이야말로 내 평생 중노릇 하는 데 훌륭한 길잡이와 힘이 되어주실 덕망 있는 분’이라고 줄곧 확신하였기 때문이다.

그 많은 대중 앞에서 정운스님은 ‘연세 많으신 스님께 부담되는 상좌가 되지 않도록 제가 알아서 하겠으니 스님의 상좌가 되도록 해달라.’고 간청했다. 그 말에 굳게 정진만 하시던 성우스님의 마음이 열려 스님을 상좌로 맞아주셨다. 성우스님은 어린 상좌를 당신의 이름으로 삭발만 시키고 그 길로 지리산 상무대로 결제하러 떠나셨다.

행자생활

스님은 선방이 있는 산중에서 머리를 깎고 그야말로 조심스럽게 행자 생활을 하였다. 초심 때에는 감히 큰 방에서 고참스님과 함께 정진할 수도 없을 뿐더러 탁자 밑에도 앉지 못했다. 그저 후원에서 정진하는 스님들의 참을 만드는 일 아니면 시중드는 일로 주어진 몫을 해내야 했다.

어쩌다가 선방을 지나다 보면 공부한다는 스님들이 간혹 앉아서 졸고 있었는데 스님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마다 내가 나중에 선방에 앉게 되면 저렇게 졸지는 않으리라고 속으로 다짐하기도 했다. 한참 뒤에야 수행의 길에서 수마(睡魔)를 쫓아버리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절감하였다.

수학과 수행

26세 되던 해인 1979년 스님은 통도사에서 월하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하였고, 다음 해 1980년 운문사 강원을 졸업하였다.

스님이 강원을 졸업하자마자 곧장 고참 수행자들이 공부하는 3년 결사에 뛰어들었던 것은 공부를 시작하면 금방이라도 무엇인가 뚜렷한 성과를 거둘 수 있으리라는 기대와 그 길만이 중노릇의 으뜸이라는 자만심 때문이었다. 초심자인 스님에게 주어진 자리는 탁자 밑이었고, 스님의 바로 맞은편은 선방에서 최고 어른인 입승스님[2] 자리였다.

스님에게는 참으로 부담스러운 자리가 분명했다. 입승스님은 스님의 맏사형이기에 어렵기도 했거니와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스님은 선방에만 들어가면 절대로 졸지 않고 화두가 성성히 자신을 깨울 줄 알았다. 그러나 왜 그리도 잠이 쏟아지는지 주체할 수 없었고, 그때마다 냉엄한 선방의 규율대로 장군죽비가 사정없이 스님의 어깨를 내리쳤다.

초심 때 졸음에 겨워하는 선방 스님들을 보고 속으로 흉보던 자신을 부끄러워하면서 스님은 나름대로 뼈를 깎는 정진으로 고삐를 죄고 불을 당겼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심한 위장병을 얻은 탓에 더 이상 선방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다.

‘과연 대중 속에 묻혀 배우고 익히면서 정말 만인의 어머니가 되는 꿈을 이룰 수 있을까’하는 회의 속에서 스님은 수만 배의 절 기도로 자신을 다져나갔다.

1980년 강원을 졸업한 후 스님은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씀과 아울러 결연히 참선하라는 은사스님의 권유로 내원사 선원으로 3년 결사에 들어갔다.

‘은사스님께서 하시는 공부는 과연 어떤 것인가?’, ‘왜 스님께서는 참선 외에는 할 공부가 없다고 하셨을까?’, ‘왜 이 길을 권유하셨을까?’ 스님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을 가지고 용맹정진을 하였다. 그렇지만 오히려 궁금증은 더해갔고, 그런 의문들은 고스란히 숙제로 남아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그 무렵 비구니 대학이 생겼다. 전국비구니회는 훗날을 위해 후학들을 가르쳐야 한다고 적극적으로 홍보를 하였고, 젊은 스님들 대부분이 학교 공부를 원하였다.

수학

정운스님 역시 불교 공부를 하고 만인의 어머니가 되는 길이 반드시 참선에만 달려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스님은 곧 서울로 올라와 불교학과 더불어 사회복지학을 공부하였다.

1986년 중앙승가대학교 사회복지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스님은 어떤 힘이든 힘이 있어야만 부처님 일을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포교에 뜻을 두게 되었다.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 인가를 찾다가 남들이 힘들어 하는 일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스님은 중앙승가대학 사회복지학과에 이어 군산대학교 산업도예과.한서대학교 대학원에서 아동청소년복지학 석.박사을 졸업한 사회복지학 박사이다.

충남 보령 세원사 창건

현재 스님이 살고 있는 곳은 충청남도 보령시 오서산의 남쪽이요, 성주산의 서쪽인데, 경치가 아름다운 이곳은 만세보령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정운스님이 처음 이곳에 내려온 동기는 다음과 같다. 스님이 우연히 이 지방으로 만행을 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시내버스 안에서 어떤 아주머니가 스님을 보고 ‘아주머니!’ 하고 불렀다.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불교를 모른다고 하더라도 승복을 입은 이에게 아주머니라고 부르다니....... 스님은 이곳에서부터 포교를 해야겠다고 결심하였다. 그리고 자질구레한 욕심들을 미련 없이 내팽개치고 맨몸으로 지금의 살림살이에 뛰어들었다.

삶을 일구어나가는 데 저마다 목적의식과 생활 패턴이 다르듯이 수행 생활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가에 따라 각각의 수행 방법이 있기 마련이다.

대부분의 스님들은 참선, 염불, 기도, 학문, 포교 등 크게 다섯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정운스님의 경우는 포교 쪽에 큰 비중을 둔 것이다. 비록 자신의 수행이 조금 늦어질지라도 한 사람 한 사람씩 불법에 눈을 뜰 때 고마움과 기쁨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스님은 사찰이 전무하다시피 한 불교의 불모지나 다름없는 충남 보령에 고추밭을 개간하여 법당을 세우고 세원사를 창건하였다. 스님의 나이 36세 되던 1989년의 일이었다.

스님은 끊임없이 기도를 하였고, 한 푼이라도 절약하기 위하여 공양주도 두지 않은 채 모든 것을 손수 해결하면서 포교를 시작했다.

그런 가운데 불심을 담은 글로써 포교를 하면 효과가 빠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스님은 오랫동안 잠재되어 있던 문학적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하였다. 1990년 계간지 〈문학공간〉에 김규동, 신동집 선생의 추천을 받아 정식으로 문단에 등단한 스님은 문학을 도외시하던 비구니계에 적잖은 충격을 일으켰다.

더욱이 선객의 상좌인 비구니가 글을 써서 발표한다는 것이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정운스님은 은사스님으로부터 올곧게 배운 사상을 바탕으로 표연히 일어서기 시작했다.

농어촌 포교활동

문학과 포교, 스님에게는 그 어느 것도 게을리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글이든 뭐든 포교에 도움이 된다면 실행해나갔다. 그렇게 일념으로 노력한 결과, 불교의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보령 지역에서 포교당 및 청소년 포교에 큰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스님의 활동은 차차 결실을 맺었다. 1995년 대한불교 청소년교화연합회 보령시 지부장을 시작으로, 1996년에는 소년소녀가장 세대 보호자로 보령시에서 위촉받았으며, 1998년에는 청소년 자원보호자로 대전 법원에서 위촉받았다. 또한 보령시 청소년 유해환경감시단장(국무총리-청소년보호위원회), 보령시 청소년 상담실장(보령시장), 1999년 보령시 청소년위원회 위원(보령시장) 등으로 위촉되기도 하였다.

현재 스님은 '보령한국청소년연합회', 상담복지센터, 꿈드림', '청소년문화의집', '청소년자원봉사센터','청소년유해환경감시단'을 운영하고 있다. 관련 정보는 '보령시청소년문화의집' 홈페이지를 통해 얻을 수 있다. (http://www.dongmuya.or.kr/)

시인과 수필가, 연구자로서 활발히 활동 중

그동안 시인으로 활발한 활동을 해온 스님의 저서로는 1991년에 발간한 시집 『가슴으로 사는 사람들을 비롯하여 달을 보는 사람들』(1994년), 『또 다른 이름 되어』(1995년), 『그대, 그대 자신으로』(1999년) 등 5권의 시집과 수필집 『아직도 그곳엔 희망이 있더라』(1999년), 『스님 요즈음 뭘 하십니까』(여시아문, 2004), 『산에 사는 물고기』(이른아침, 2011년), 『용서는 나의 수행, 칭찬은 나의 기도』 (불교신문사, 2020년) 등이 있다.

또 연구논문으로는 <지역청소년지원센터 활성화를 위한 이용실태 및 요구조사>(석사논문.2006년)과 <차문화 프로그램이 청소년의 정서적 안정성과 자기 효능감에 미치는 효과> (박사논문.2010년) 등이 있다.

도예가 정운스님

스님은 1998년 청소년 1급 지도자 자격증을 취득하였고, 50세 되던 해인 2003년 2월에는 혜전대학 도예디자인과를 졸업하였다. 2004년 현재 군산대학교 산업도예과 4학년에 재학 하였다.

그동안 스님은 1994년 한글 유공자 표창을 비롯하여, 1996년에는 보령시장으로부터 어린이 유공자 표창을, 1999년 12월에는 보령시로부터 청소년사업 유공자 표창장을 수상하였다.

스님은 세원사 주지이자 보령시 청소년상담실 상담실장, 보령시 청소년 자원봉사센터 소장, 보령시 청소년 유해환경감시단장으로 재직 중이며, 한국문인협회 회원, 한내문학회 회원, 현대불교문학회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2012년 청소년의 건전 육성과 선도․보호 활동에 기여한 공을 인정받아 백범김구기념관 컨벤션홀에서 대통령표창을 수상하였으며2016년 청소년 보호와 육성의 유공을 높이 평가받아 대통령이 수여하는 ‘국민포장’을 수상했다. 2015년, 2022년에 도예전시회를 개최하였다.

스님의 수계제자로는 일진(一眞)·유진(惟眞)·원재(源載)스님 등이 있다.

참고자료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정운(淨雲)스님 본항목 정운스님(淨雲, 1954~) 淨雲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정운스님(淨雲,_1954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속성
정운스님(淨雲) 삼현문중(三賢) ~의 일원이다
정운스님(淨雲) 성우스님(惺牛) ~의 수계제자이다
정운스님(淨雲) 울산울주 석남사 ~에서 출가하다
정운스님(淨雲) 월하스님(月下) ~(으)로부터 계를 받다 사미니계, 비구니계
정운스님(淨雲) 보령 세원사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주지(감원)
정운스님(淨雲) 보령 세원사 ~을(를) 창건하다
정운스님(淨雲) 안거 ~을(를) 성만하다 양산 내원사

지도

  • 세원사 : 충청남도 보령시 주교면 주교리 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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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관계망




주석

  1. 재가를 비롯한 모든 불교인이 참여하여 의논을 하는 모임.
  2. 사찰의 규율과 질서를 다스리는 소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