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성연스님(性蓮, 1920生, 비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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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성연(性蓮)스님은 양진암 선방(禪院) 개원과 양진암 선원장으로 탁발로 20년 대중외호한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920 경남 합천 출생
1932 해인사 약수암에서 쾌유(快兪)스님을 은사로 출가
1937 동산(東山)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해인사에서 자운(慈雲)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1955 동화사 양진암 원주[1] 취임
1956 동화사 양진암 선원 개원
1977~1980 충북 보은지역의 대 수해로 피해 입은 법주사 수정암 큰방채 개축
1981~1982 양진암 불사 (선원개축, 법보전, 미소실, 정묵당)
수정(水晶) 문중 초대회장, 25년간 대중외호
1981~2004 양진암 선원장
2012.5.30. 양진암에서 입적 (세수 93세, 법납 81세)
문중 수정(水晶)문중
수계제자(『한국비구니명감』) 일홍(一弘)일륜(一輪)∙진원(眞原)∙희선(喜善)∙현선(賢善)∙법일∙묘담
문중계보(『한국의 비구니문중』) 재일(載日, 4)→봉정(奉政, 5)→유성(宥成, 6)→쾌유(快愈, 7)성연(性蓮, 8)일홍(一弘, 9), 일륜(一輪, 9), 진원(眞源, 9), 희선(喜善, 9), 현선(賢善, 9), 명선(明善, 9), 범일(梵日, 9)

활동 및 공헌

출가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 뜨란출판사 2007년 p305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 뜨란출판사 2007년 p306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 뜨란출판사 2007년 p307

성연(性蓮)스님은 1920년 10월 14일 경남 합천군 가야면 숭산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성주이 며, 이름은 배연이이다. 스님은 1932년 2월 10일 13세의 어린 나이에 해인사 약수암에서 쾌유(快兪)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그리고 1937년 동산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하고, 해인사에서 자운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하였다.

은사 쾌유(快兪)스님

은사 쾌유(快兪)스님은 언제나 스님의 곁을 지켜주는 든든한 분이셨다. 성연스님이 절 집의 가풍을 채 익히지 못하여 일을 잘못하기라도 하면 모두 당신이 한 것이라며 어린 스님의 흠을 덮어 주는 자비로운 어른이셨다. 다른 어른 스님들께 꾸중을 들을 때에도 늘 방패막이가 되어주셨다.

당시에는 모든 것을 탁발로 해결했기 때문에 어린 성연스님도 은사스님과 함께 탁발을 하러 다녔는데, 일곱 짐을 다 돌아도 탁발한 양이 턱없이 모자라 굶주리기 일쑤였다. 그때의 배고픔을 기억하는 성연스님은 지금도 손님이 찾아오면 공양 시간이 아니어도 무엇이든 꼭 대접하려고 애를 쓴다. 이 때문에 '양진암 노스님은 날아다니는 까마귀도 불러서 밥을 주는 분'이라는 재미있는 소문이 났다고 한다.

625 전쟁 당시

스님은 6.25전쟁 때 경남 고성 문수암의 성철 큰스님, 청담 큰스님과 한 달가량을 함께 지낸 적이 있다. 스님에게는 그 한 달간이 매우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총알과 폭탄을 피해 모두가 나락사이를 기어다니던 시절, 15명의 비구니스님들이 법문을 듣겠다는 일념 하나로 가사장삼을 수하고 대로에 당당히 나섰다. 스님들은 밤새 쏟아지는 폭탄과 총탄 속에서 하룻밤을 지냈지만, 아무도 다친 사람이 없었다. "밤새 콩 볶는 소리가 들렸는데 도량에는 총알 하나가 없었지요 담 너머 대밭에는 총알이 새까맣게 떨어져 있었는데도 말이에요"

신장의 옹호를 받는 거침없고 당당한 수행자의 발걸음을 그 어떤 폭 격도 막지 못했던 것이다. 이때 님은 이념과는 상관없이 배고픈 북한 군인들에게 밥을 해주기도 하였다. 총알이 천지사방으로 날아다니는 길을 밤새 걸어온 비구니스님들을 큰스님은 내치지 못하고 함께 정진할 것을 허락하셨다.

그러던 어느 날 큰스님께서 병을 얻으셨다. 제자로서의 향심으로 성연스님은 무스님과 같이 약을 구하러 진주로 떠났다. 무사히 약을 구해서 돌아오는데 때마침 내린 장맛비에 진주 남강 다리가 끊어지고 말았다. 두 스님은 하는 수 없이 강물을 헤엄쳐서 건너기로 하였다. 무착스님은 당시로는 보기 드문 구척장신이라 다행히 강물이 어깨 정도까지 차올랐지만 왜소한 스님에게는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스님은 그 어떤 두려움도 느낄 겨를이 없었다. 왜냐하면 비닐이 귀할 때라 종이로 만든 약봉지가 자칫 물에 젖어 귀한 약이 망가질까 염려되었기 때문이다. 성연스님은 큰스님의 병을 낫게 해드리고 싶은 일념으 로 약봉지를 머리에 이고 새끼줄로 꽁꽁 묶은 채 위험을 무릅쓰고 강을 건넜다.

만행

비구니스님들의 힘으로 동화사를 정화한 후에는 금당에서 원주 소임을 살고 2년 가량 절망을 지고 만행을 하였다. 만행 길에는 석남사 무착스님과 현재 국일암의 성원스님이 동행하였다.

양진암에 주석

이후 1956년에 동화사 양진압으로 들어와서 비구니 선방을 열었다. 동화사 첫 주지스님의 속 가성이 배씨였는데, 성연스님의 속성과 같다며 누님 누님' 하며 지냈었다. 성인스님은 원주소임을 마치고 길을 떠나면서 주지스님에게 빈 절이 나면 연락해달라는 부탁을 남겼고. 그렇게 하여 지금의 양진암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이때 공부를 하겠다며 스님을 따라 양진암으로 들어온 스님은 성타스님, 현묵스님, 쾌승스님, 육문스님 등 7명이었다.

양진암 시절, 스님은 탁발을 다니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새벽예불만 끝나면 절망을 지고 탁발을 다녔다. 스님은 그때부터 20년간 탁발로 선방 수좌들의 공부를 뒷받침하였다. 스님의 탁발은 밤 12시가 넘어서야 끝나는 힘겨운 수행 길이었다. 스님은 돌아오는 길에 염불을 하였는데, 그 소리가 온 산에 울려 퍼져 호랑이나 산짐승도 범접하지 못하였다.

양진암 중창

처음 성연스님이 양진암에 왔을 때는 쇠락한 건물 몇 동만이 전부였다. 스님은 1981년 관음전과 법보전 미소실, 정묵당을 증·개축하여 36명의 수좌가 공부하는 유서 깊은 도량으로 일구어 냈다. 손상좌 정묵스님이 원주 소임을 맡은 이후 낡은 미소실 원주실을 새로이 증·개축하였고 1996년부터 다시 정묵당 증·개축불사를 하였다.

성연스님은 충남 보은 지역에 내린 큰 비로 수해를 입었을 때 산사태로 떠내려오는 목재를 주워 수정암의 큰방채를 개축하기도 하였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횃불에 의지한 채 개울가로 밀려 내려오는 목재를 끌어 올려 힘겹게 불사를 했던 것이다.

사중 살림을 구석구석 살피면서 세수 70세까지 발우를 폈던 성연스님은 세수 80세가 넘은 고령에 봄마저 편치 않지만 그래도 하루에 두 시간씩 반드시 정진을 한다. 스님은 TV보는 것을 절대 금하고 있다. 상좌들은 물론 어쩌다 절을 찾은 손님이 TV를 켜면 잠시는 봐주지만 금방 전원을 끄며 기도하고 공부해야지. 한눈을 팔면 쓰냐!" 하고 불호령을 내린다. 지난 25년 동안 성연스님을 곁에서 지켜본 손상과 정목스님은 노스님의 성품과 일상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동안 노스님이 남한테 안 좋은 얘기를 하거나 큰 소리치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누군가의 흉을 보는 것도 그냥 넘기지 않고 혼을 내셨습니다. 하지만 젊은 스님들이 은사스님과 갈등이 생기면 자비로 모든 것을 받아주는 좋은 의지처가 되어 주셨고 또 도량 구석구석을 잘 개간해서 푸성귀를 심어 웬만한 야채 들은 자체적으로 해결하도록 해주셨어요 노스님은 정말 다양한 채 소들을 많이 가꾸셨지요. 그런데 노환으로 병을 얻은 뒤부 터는 기억력이 많이 안 좋아지셨습니다. 과거의 일들은 기억하지만 근래의 것은 기억을 잘 못하세요. 그래도 법문 만큼은 굉장히 잘하십니다. 저희들한테도 오로지 공부하고 염불하라는 말씀이십니다. 어떤 때는 말도 못 붙이게 할 정도로 법문에 열중하십니다. 당신 갈 길이 바쁘다고 하시면서요. 노스님을 뵈면 내가 과연 저 나이 때 저만큼 정진을 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듭니다. 나중에 성연 노스님만큼만 되면 참 좋겠어요."

성연스님은 수정문중의 초대 회장을 지냈으며 문중에 힘든 일이 생기면 도맡아 해결하고는 하였다. 지금은 봉녕사 학장스님이 회장을 맡고 있는데, 성연스님은 문중의 큰 어른으로서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

'일체 안되는게 없다. 모든 것은 물 흘러가듯 저절로 다 된다'고 말씀하는 성연스님은 지금도 토끼잠으로 잠깐씩 눈을 붙일 뿐 여전히 포행과 참선, 큰스님 법문청취로 하루를 바쁘게 보내고 있다.

입적

성연스님은 2012년 5월 30일 양진암에서 입적하였다. 세수 93세 법납 81세. 수계제자로는 일홍(一弘)∙일륜(一輪)∙진원(眞原)∙희선(喜善)∙현선(賢善)∙법일∙묘담님 등이 있다.

동화사 양진암

[양진암 전경]
사진출처:네이버 블로그 https://m.blog.naver.com/daegu_news/50146458492

갓바위 부처님과 통일약사대불(統一樂師大佛0로 유명한 팔공산에 위치한 양진암은비구니스님들의 수행처로 유명하다. 대구시 동구 도학동 1번지에 있는양진암은 동화사의 말사로 조선 영조 19년(1743년)에무주국사가 창건했다.그 뒤 광무 2년(1898년)에 중수했다. 이후 건물이 퇴락하여1980년에 완전 개축했다. 양진암은 동화사에서 서북쪽으로 8백미터 지점에 위치하며 인법당(因法堂)[2] 이 중앙에 있고 좌측에는 요사채로 쓰이는미소실이 우측에는 참선후 몸.마음을 조용히 쉬는 장소인 정묵당이 각각자리잡고 있다.또 인법당의 후면에는 석축을 높게 쌓아 법보전을 세웠으며 마당의전면중앙에는 3층 석탑이 있다. 양진암의 중수기에 "양진공부(養眞工夫)하고 나면 양진암이 어디던가. 너와 내가 둘이 아니리니 그것이 얀진공덕(養眞功德)이니라"고 적혀 있어 암자의 이름이 지닌 속뜻을 새기고 있다. 인법당의 우측 후면 경사지에는 석축을 쌓았다. 장하석(長下石) 외벌대 기단위에 정면에는 항아리 모양으로 다듬은 기초를 놓았으며 측면과 후면에는 방형(方型)기초를 놓았다. 익공계(翼工系)의 건물로서 맛배지붕, 천정(天井)은 중앙 부분에만 우물반자로 하였고 나머지는 우물반자를 빗지게 설치했다. 양진암의 앞으로는 넓은 채마 밭이 깔끔하게 가꿔져 있어 스님들의 정성을 짐작할 수 있게 해주고 있다.그리 깊은 산은 아니지만 맛있는 약수와 맑은 공기로 인해 매일 많은 신도들이 절을 찾고 있다. 암자의 양옆에는 맑은 계곡물이 흐르고 있으며 수려한 산의 모습과 어울려 수행처로서 손색이 없는 곳임을 실감케하고 있다. 비구니 스님들의 참선도량으로 암자에는 현재에도 스님들이 하루 12시간의 입선고행(入禪苦行)을 하고 있다. 인법당(因法堂), 정묵당(靜默堂), 미소실(微笑室) 등이 산세와 조화롭게 어울려 가람의 모습이 더욱 돋보이는 양진암은 절앞의 채마밭과절 뒤의 수목들, 암자옆의 계곡이 나름대로의 자세를 잡고 있어 절에 들어가는 순간 새로운 마음이 생기게 된다. 솔바람소리와 산짐승들의 울음소리 고요한 풍경소리 등이 수행하는비구니스님들과 너무도 잘 어울리는 그림같은 암자가 바로 양진암이다.

참고자료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성연(性蓮)스님 본항목 성연스님(性蓮, 1920~2012) 性蓮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성연스님(性蓮,_1920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속성
성연스님(性蓮) 수정문중(水晶) ~의 일원이다
성연스님(性蓮) 쾌유스님(快愈) ~의 수계제자이다
성연스님(性蓮) 해인사 약수암 ~에서 출가하다
성연스님(性蓮) 동산스님(東山) ~(으)로부터 계를 받다 사미니계
성연스님(性蓮) 자운스님(慈雲) ~(으)로부터 계를 받다 비구니계
성연스님(性蓮) 동화사 양진암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주지(감원)
성연스님(性蓮) 동화사 양진암 ~을(를) 중창하다
성연스님(性蓮) 동화사 양진암 ~을(를) 건립하다 양진암선원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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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관계망




주석

  1. 살림살이를 관리하는 소임
  2. 불당이 따로 없는 작은 절에서 승려가 거처하는 방에 불상을 모신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