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현스님(慈賢, 1896生, 비구니)"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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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3월 20일 (월) 20:38 판
자현(慈賢)스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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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명 | 자현(慈賢) |
법호 | 인월(印月) |
속명 | 조자현 |
출생 | 1896.07.07. |
출가 | 1926년 |
입적 | 1988.01.04(음1987.11.15) (세수93세, 법랍63세) |
사찰 | 보현사 서울특별시 성북구 동소문동6가 28-1 |
특이사항 |
목차
정의
자현(慈賢)스님은 자리이타의 대승보살도를 실천한 대보살로 불모지에 새 도량을 창건하였으며 무의탁 어린이, 청소년 교화, 노인복지에 앞장 선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생애
연도 | 내용 |
---|---|
1896 | 서울 출생 |
1928 | 보현사에서 계행(戒行)스님을 은사로 출가 |
1930 | 서울 대각사에서 용성(龍城)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
1936 | 도봉산 원통사 중창 (관음보전, 요사채) |
1945 | 도봉산 자현암 창건 |
1959 | 서울 돈암동 보현사 창건 |
1968 | 서울 염곡동 자룡사 창건 |
1971 | 재단법인 보현회 설립 |
1979 | 보현사에 중앙승가학원 (중앙승가대학교 전신) 개원 |
1988 | 1988.1.4(음11.15)입적 (세수 93세, 법납 63), 청옥색의 영롱한 사리 700여과 수습 |
문중 | 법기문중(法起) |
수행지침 | 염불 정진 |
수계제자 | 혜향(慧香)・성해(性海)・무상(無常)・자경(慈慶)・대원(大願) |
활동 및 공헌
출가
인월(印月) 자현(慈賢)은 조선조 고종황제 건양 원년인 1896년 7월 7일 경기도 광주군 염통골(현재의 서초구 염곡동 말죽거리)에서 아버지 조공군(曺公君)거사와 어머니 풍천 임씨 사이의 5남매 중 맏딸로 태어났다. 본관은 창녕이며, 이름은 조자현이다. 스님은 나이 겨우 7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무상(無常)한 줄 알면 무상보리(無上普提)가 되는 것이다.”라는 법문처럼 일찍이 세간의 무상함을 뼈저리게 느끼신 스님은 급기야 1926년 4월 세수 31세에 홀연히 집을 나섰다. 스님이 찾아간 곳은 옥수동에 있는 미타사였다. 스님은 그곳에 며칠 동안 머물며 출가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보문사와 돈암동 적조암을 찾았다. 그러나 아무래도 도심보다는 조용한 곳이 공부에 도움이 될 것 같아 금강산으로 향하던 중 강원도 철원(현 경기도 연천) [1] 보개산 심원사 지장암에 머물게 되었다.
당시 지장암에는 입산 수도한 지 20년 된 노비구니 성기(性基)스님과 대중 몇 명이 정진 중이었다. 스님은 지장암에 머물면서 이곳이 자신의 수행처로 적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곳에서 성기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삭발염의 하고, 성기스님의 둘째 상좌 보관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하니 비로소 보개산 지장암의 여법한 수행자가 되었다.
그 후 스님은 성기스님의 맏상좌인 계행스님의 상좌로 건당하게 되었는데, 그 때까지 상좌가 없는 계행스님의 법을 잇도록 하라는 성기스님의 각별한 청에 따른 것이었다. 창섬(昌暹)-유증(有曾)-봉적(奉寂)-성기(性基)-계행(戒行)-자현(慈賢)으로 이어지는 법기문중의 복전암 계열의 법맥은 이렇게 계승되었다. 그 후 1930년 3월 15일 서울 종로 대각사에서 백용성 큰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하였는데 이때 스님의 나이 35세였다.
도봉산 원통사 중창
지장암에서 2년여 동안 어른 스님들을 시봉하면서 일념으로 수행에 정진하던 중 지장암으로부터 남쪽으로 10여 리 떨어진 석대암에서 100일 기도를 하게 되었다. 당시 석대암은 지장보살의 영험으로 장님이 눈을 뜨고, 앉은뱅이가 일어서 걷게 된 기적 같은 가피가 일어난 곳으로 유명하였다.
석대암에서 100일 정진을 거의 끝내고 회향을 할 즈음, 하루는 스님의 꿈에 지장보살이 나타나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며 손으로 어느 곳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너의 갈 곳은 따로 있느니라.” 지장보살이 가리키는 곳을 살펴보니, 만학천봉에 둘러싸인 드높은 산등성 위에 있는 절이 보였다. 그 절은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듯하였고 다 쓰러져 가는 법당 안의 법단 뒤에는 하얀 관음보살상이 있었다.
꿈에서 깬 스님은 그 절을 가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이 들었다. 이튿날 기도를 하고 있는데, 법당 밖에서 평소에 듣지 못하던 새소리가 들렸다. 스님이 나가보니 기이하게 생긴 파랑새 한 마리가 법당 주위를 맴돌며 미묘한 소리로 노래를 하는 데 마치 스님에게 따라오라고 하는 것 같았다. 밖으로 나가보니 기이하게 생긴 파랑새 한 마리가 법당 주위를 맴돌며 오묘한 소리로 노래하는데, 마치 스님에게 따라오라고 말하는 듯하였다. 이를 이상하게 생각한 스님이 새를 따라 나섰는데, 도중에 길을 잃고 헤매다가 한 노파를 만나게 되었다. 노파의 집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고 일어나보니 다시 그 새가 자신을 따라오라는 듯 날갯짓을 하였다. 스님은 그렇게 며칠 동안 새를 따라 걸었다. 스님은 어느새 포천, 의정부를 거쳐 도봉산 쪽으로 접어들었다. 그런데 눈 앞에 폐사찰이 나타났다. 선반 위엔 먼지에 쌓인 하얀 목불(木佛) 관음보살상 한 분이 계셨다. 분명 꿈에서 본 사찰이었다. 그 곳이 바로 도봉산 원통사였다.
‘참으로 이상하고 기이한 일이다. 꿈에서 보았던 바로 그 절이 아닌가? 이 절을 중창하라고 지장보살님과 관음보살님이 나에게 계시를 준 것이 분명하다.’ 스님은 곧바로 팔을 걷어부치고 먼지로 뒤덮인 사찰을 정리하고 관음전을 짓겠다는 발원을 하였다. 서울 서대문 영천의 선바위 절에 계시는 김포웅스님을 입승[2] 으로 모시고, 중창 권선문을 들고 서울과 금강산, 설악산 내의 각 사암으로 화주를 다녔다.
관세음보살의 위신력를 경험하다.
설악산 백담사를 다녀올 때의 일화는 관세음보살의 위신력을 다시 한번 일깨워 주었다. 때는 무더운 장마철이었다. 스님께서 금강산에 구경을 갔다가 그곳 스님들이 열심히 정진하시는 모습을 보고 재발심을 하여 거주하시던 절을 어느 비구스님에게 내어 준 뒤 길을 떠났는데, 백담사 계곡의 개울을 건너다 급류에 휩쓸려 떠내려갔다. 스님은 계속 관세음보살을 부르면서 그 와중에 화주책 걱정만 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떤 할머니의‘ 정신 차려’하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눈에 나무 뿌리가 보였고, 스님은 그것을 잡고 겨우 물가로 나왔는데 온몸이 시퍼렇게 멍이 들어있었다. 하지만 스님은 개울을 건널 방법이 없는 게 더 걱정이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체격이 큰 사람이 다가와 스님을 업고 개울을 건넜다. 그리고 할머니가 계시는 외딴 집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곳에서 하룻밤 자고 일어나보니 할머니는 밤새 스님의 옷을 깨끗이 빨아 손질까지 해 놓은 상태였다. 자현스님은 나중에 다시 그곳을 가보았으나 아무런 자취도 찾지 못했다. 그제서야 모든 것이 관음보살의 가피력이었음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렇게 생사를 넘나들며 탁발을 하여 원통사로 돌아와 보니 원통사는 어느새 도둑들이 우글거리는 도둑 소굴로 변해 있었다. 스님은 그들을 보고 “이 인과를 어찌하려고 이렇게 찬 이슬을 맞고 다니시오?”하며 그 당시 쌀 한가마 값인 거금 5원을 선뜻 내어주었다. 도둑들은 자현스님의 자비에 감동을 받아 온 동네를 다니며 도인이 계시다고 소문을 냈다. 그 후 원통사에는 신도들이 줄을 섰고, 그 원력으로 현재의 원통사 중창이 가능하게 되었다.
스님은 불사를 하기 위해 목재를 샀는데 운반할 방법이 없어 막막하였다. 그러던 차에 마침 목탄차 운전사를 만나게 되어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후에 자현스님은 은혜를 갚기 위해 그 목탄차 운전자를 찾았 나섰고 결국 보답을 했다고 한다.
원통사 중창을 위한 노력
하루는 원통사에 땅꾼이 들렀다. “뱀이라고 목숨이 아니오?” 스님의 물음에 땅꾼이 볼멘소리로 대답했다. “뱀을 잡지 않으면 무엇으로 먹고 살아요?” 이 일이 계기가 되어 스님은 땅꾼을 불러들여 부목(負木)을 시키고 그가 세상을 뜬 뒤에는 정성껏 장사를 지내 주었다.
한편 스님은 평소 사지가 멀쩡한 거지들이 구걸을 오면 “안 보이는 곳에 병이 든 사람은 아무데서도 못 얻어먹는다. 눈 멀쩡한 놈이 얻어먹는 것이 병이지 다른 게 병이겠느냐.”하며 가르침을 준 후 밥을 주었다. 자현스님은 시은을 귀하게 여겼다. 김치를 담글 때에도 “부처님 밥이 얼마나 무서운지 아우?”하며 시장에서 주어온 갖가지 채소로 담갔다. 그렇게 아끼고 절약하는 스님이었지만 길가의 노점에서 언제나 가격에 관계 없이 평등하게 고루고루 사주곤 하였다. 또 탁발을 한 후에는 어느 동네 어느 집 누구라는 이름까지 정확히 적어 책자를 만들어서 매일 같이 축원을 해주었고, 시주한 사람이 죽게 되면 그 영가를 위해 오랜 시간 동안 기도를 하였다.
이런 스님을 보고 비구 춘성 큰스님은 “자현스님은 무량대복전(無量大福田)이다. 이처럼 시주하고 기도하면 안 되는 것이 없다.”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영가들을 위한 축원에서 힘을 얻은 것인지 스님은 점차 영가 천도를 잘 하는 스님으로 유명해졌고, 그 원력으로 모든 불사가 이루어졌다.
그렇게 탁발하고 화주하여 먼저 법당 8칸을 새로 짓고, 칠성각과 종각 그리고 요사채를 건립한 후 다시 관음보전을 세웠다. 이 때가 1936년 스님의 세수 41세 되던 해였고, 폐찰 원통사에 들어온 지 9년 만의 일이었다. 원통사를 중창한 후에는 조국독립을 위한 천일기도 서원과 만일염불회를 개설하고, 기도 염불을 통한 조국독립과 법계 중생의 이고득락(離苦得樂)을 발원했다.
석우, 춘성, 고암, 청호, 포응, 포명, 동산, 대우, 석주, 경산, 고성스님 등 당대의 대표적 비구 고승들이 원통사 선방에 안거 수선한 때가 바로 이 무렵이었다. 그리고 염불삼매에 몰입하던 자현 스님이 비구 고승들과 법거량을 나누며 홀연히 심안이 열린 것도 이즈음이었다.
자현암, 보현사, 자룡사 창건
스님의 청정 도량 가꾸기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1945년 행방 직후에 원통사 입구에 자현암을 창건하여 만인의 기도처로 개방하였으며, 1959년에는 서울 돈암동에 보현사를 신축하고, 다시 1968년에는 스님이 태어난 서울 서초구 염곡동에 자룡사를 창건하였다.
‘재단법인 보현회’를 설립
그 후 1971년 보현사와 자룡사의 소유 자산을 통합해 ‘재단법인 보현회’를 설립하고, 노인복지와 무의탁 어린이 교화, 청소년 교화에 힘썼다. 그리고 신도들의 염불 참선 지도와 불경의 번역, 출판 등을 통한 생활 불교 실천에 앞장섰다. ‘재단법인 보현회’는 스님이 열반한 후 조계종단에 귀속되었다.
보현사에 중앙불교승가학원을 개원
1979년 4월 14일 스님은 도제 양성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보현사에 중앙불교승가학원을 개원하였다. 이 승가학원은 오늘날 조계종 승가교육의 중심도량이 된 중앙승가대학의 효시이다. 이렇듯 자현스님의 원력과 미래를 보는 탁월한 통찰력은 만 중생의 제도와 미래 불교의 동량을 육성하는 기틀이 되었다.
1982년 스님은 보현사에 보광전을 신축하고 비로자나불을 조성, 봉안하는 한편, 세계 평화, 남북통일, 민족단합, 구국영혼의 왕생극락을 발원하는 기도염불을 하였다. 또 보현회 교전을 발간했다.
스님은 평생 동안 병고와 음식에 대하여 일체 말씀이 없었다. 평상시 오른손으로는 목탁을 치고, 왼손으로는 염주를 돌리며 대중을 위해 탁발하고 불사에 전념하였던 자현스님은 불우한 이웃에게는 자신이 입고 있던 옷까지도 서슴없이 벗어 주는 분이었다. 이같은 자비심으로 6·25 한국전쟁 당시에는 국군과 인민군을 가리지 않고 구명(救命)운동을 하였다.
입적과 사리 700여과 출현
수많은 불자들의 귀의처이자 수도장인 가람을 수호하며 오직 기도와 염불 수행으로 정진하시던 자현스님은 입적하시기 한 달 전 어느 날 대중을 모두 모이게 하여 한 사람씩 손을 잡으며 ‘내가 죽더라도 울지 말고 언제나 단월(檀越)의 시은(施恩)[3] 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당부하였다.
자현스님은 1988년 1월 4일(음력 11월 15일) 세납 93세, 법랍 63세로 고요히 열반에 들었다. 이 때 스님의 몸에서 더없이 그윽한 향기가 풍겼고, 이미 숨을 거두었는데도 한 동안 염주가 돌아갔다고 한다. 다비장은 3일 후 봉선사(奉先寺)에서 치러졌다. 많은 스님과 신도들이 운집한 가운데 치러진 다비에서는 청색과 옥색의 영롱한 사리 700여과가 출현하였다. 가히 수행 정진의 결정체라 할 수 있으며, 근대에 볼 수 없는 이적(異蹟)이었다.
스님의 유해는 백일재를 지낸 다음날 많은 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동해안 죽도 앞바다에서 향탕에 유해를 목욕재계 시키고 초자리에 참기름을 바른 다음 유해를 싸서 태워 쌀가루에 개어 대두(大頭)만한 크기로 만들어 물고기와 함께 방생을 하였다. 평소 바다에 육신 보시를 하겠다던 자현스님의 뜻에 따른 것이었다.
스님의 수계제자로는 혜향(慧香)·성해(性海)·무상(無常)·자경(慈慶)·대원(大願)스님 등이 있다.
※ 운문회보 발취, 깨달음의 꽃 참조, 법기문중 계보 참조 불기 2533년 (1989년 4월 5일) 제 28호
철원(현 연천) 심원사 지장암
강원도 철원 심원사는 ‘생 지장보살 도량’으로 이름이 높다. 애초에 심원사가 개창된 곳은 지금의 심원사에서 서남쪽으로 약20km 떨어진 경기도 연천 보개산이다.
647년 영원조사가 영주산에 흥림사로 창건하였다. 그 후 무학대사가 주지로 주석하며 삼창하고 산 이름을 영주산에서 보개산으로 바꾸어 부르고, 절 이름을 심원사로 고쳐 불렀다 한다.
도봉산 원통사
원통사는 조선 영조 때 영의정을 지냈던 조현명(趙顯命), 서명균(徐命均) 등이 나라의 일을 이야기하며 심신을 닦았던 곳으로 당대 유학자들 사이에 명소로 이름 높았다. 현재 경내에는 조선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가 기도하였다는 석굴이 있으며, 약사전 아래 큰 바위에는 태조가 기도를 마치던 날 천상의 상공(相公)[정승]이 되어 옥항상제를 배알하는 꿈을 꾸었다 하여 새겼다는 ‘상공암’이라는 글씨가 있다.
또한 절 뒤쪽에 있는 우이암으로 불리는 바위는 관음보살이 부처를 향해 기도하는 형상을 하고 있어 원래는 관음봉으로 불리었다고 한다. 주변의 자연 지세를 자세히 살펴보면 호랑이·코끼리·학 등 여러 동물 모습을 한 바위들이 이 바위를 향해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형상이다. 사람들은 이곳을 천혜의 관음 성지라고 믿고 있다.
신라 시대인 863년(경문왕 3)에 도선 국사가 도봉산에 절을 창건하여 원통사라 하였으며, 1053년(문종 7) 승려 관월 운개(觀月雲開)가 중창하였고, 1392년(태조 1)에 승려 천은 득일(天隱得一)이 삼창하였다. 그 후 조선 영조 때 승려 유인(宥牣)이 중수하고 절 이름을 보은사(報恩寺)라 바꾸었다. 또 1810년(순조 10)에 승려 청화(淸和), 1887년(고종 24)에 승려 응허 한규(應虛漢奎)가 중창하였다.
1928년 비구니 자현(慈賢)스님이 주지로 부임하여 퇴락한 절의 중건을 발원하고 설악산의 춘성(春城) 스님을 청하여 천일 관음 기도를 올려 1929년에 불전을 중건하였다. 승려 보경, 보현(寶鏡普賢)스님을 데려와 아미타불과 지장보살상을 조성하여 봉안하였다. 1931년에 천일기도가 끝나자 그해 겨울에 지리산의 승려 보응 스님과 함께 다시 만일 염불회를 시작하여 1933년에 칠성각을 세우고 1936년에 법당 일부와 큰방을 중수하였으며, 이때에 절 이름을 잠시 보문사(普門寺)로 바꾸기도 하였다. 이후 1938년에 독성각이 세워졌다.
가람은 관음 보전·약사전·삼성각·정해료·종각, 그리고 자연 동굴의 나한전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전인 관음 보전은 정면 다섯 칸, 측면 두 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929년에 건립되었다. 내부의 불단에는 아미타여래상, 관음보살상, 지장보살상이 봉안되어 있다. 불화는 아미타 탱화가 봉안되어 있고, 신중탱화 1점과 소종 1점이 있는데 모두 근래에 제작된 것이다. 약사전은 정면 한 칸, 측면 한 칸의 맞배지붕 건물인데, 최근에 그려진 약사여래 탱화가 있다.
삼성각은 정면 세 칸, 측면 한 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1988년에 조성한 칠성 탱화·산신 탱화·독성 탱화와 독성상이 봉안되어 있다. 약사전과 삼성각의 건물도 근래에 지어졌다. 나한전은 자연 동굴에 석가모니 삼존불 좌상과 지장보살 등 네 보살 입상, 십육 나한상 등이 각 층으로 구분되어 있고, 감실 안에는 10대 제자상이, 하단에는 인왕상 둘이 자리하고 있다. 종무소와 요사로 쓰이는 정혜료는 정면 여섯 칸의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으며 사각지붕의 종각에는 범종 한 구가 있다. 1988년 9월 7일 원통사는 전통사찰로 지정되어 문화재청의 관리하에 보존되고 있다.
- 출처 : 향토문화전자대전 http://www.grandculture.net/ko/Contents/Index
도봉산 자현암
자현암은 비구니 사찰로 신도는 1000여 명이고 주지는 명주스님이다. 2012년 현재 자현(慈賢)스님의 3대 제자 혜향[조실], 명주[주지], 해능[총무]스님이 함께 머무르고 있으며, 해능스님은 서각 전시회를 여러 차례 한 목공예가로 유명하다. 자현스님은 대각사 용성 대선사 문파로 해방 후 원통사와 자현암의 중수뿐 아니라 돈암동 보현사의 창건, 중앙 승가 대학 창립, 불교 복지 재단 승가원 창설 등에 크게 영향을 준 비구니 승단의 거목이다. 무수골에서 원통사로 오르는 초입에 자리 잡고 있으며 요사채, 대웅전, 삼성각, 범종각 등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경내에 주지 김혜향 스님의 공로비가 세워져 있다.
- 출처 : 향토문화전자대전 http://www.grandculture.net/ko/Contents/Index
- 디지털도봉문화대전, 자현암 http://dobong.grandculture.net/dobong/toc/GC04901068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p. 251~257.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393.
-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 151.
- 하춘생. 『깨달음의 꽃2(한국불교를 빛낸 근세 비구니)』. 여래, 2001, pp 159~172.
- 법보신문, 66. 중앙승가대 전신 중앙불교승가학원 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103494
- 불교신문, 64중앙승가대학 설립 - 中두 젊은 도반의 만남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112061
- 불교신문, 1981년 종단 공식 승가교육기관으로 승격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112205
- 중앙일보, 중앙불교참가학원|보현사서방일개설 https://www.joongang.co.kr/article/1507683#home
- 성북마을아카이브, 중앙승가대학교https://archive.sb.go.kr/isbcc/home/u/story/view/903.do;jsessionid=DC70897878C8F5492E65677B8FB63EA8
- 성북마을아카이브, 보현사 사적비https://archive.sb.go.kr/isbcc/home/u/item/view/10041.do;jsessionid=9A9F33EE5203CB53FED8A7DA9D85BCB1
- 한성대성곽마을 아카이빙, 보현사 https://hsarchives.org/archive/items/browse?tags=%EB%B3%B4%ED%98%84%EC%82%AC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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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현(慈賢)스님 | 본항목 | 자현스님(慈賢, 19~19) | 慈賢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자현스님(慈賢,_1896生,_비구니) |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 항목2 | 관계 | 속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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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현(慈賢)스님 | 법기문중(法起) | ~의 일원이다 | |
자현(慈賢)스님 | 계행(戒行)스님 | ~의 수계제자이다 | |
자현(慈賢)스님 | 서울 보현사(동소문동6가) | ~에서 출가하다 | |
자현(慈賢)스님 | 용성(龍城)스님 | ~(으)로부터 계를 받다 | 비구니계 |
자현(慈賢)스님 | 서울 원통사(도봉동) | ~을(를) 중창하다 | |
자현(慈賢)스님 | 서울 자현암(도봉동) | ~을(를) 창건하다 | |
자현(慈賢)스님 | 서울 보현사(동소문동6가) | ~을(를) 창건하다 | |
자현(慈賢)스님 | 서울 자룡사(염곡동) | ~을(를) 창건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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