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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옥스님은 청암사 백련암에 주석할 때 단청 불사를 원만히 회향하셨고, 1936년 청암사가 수해로 큰 피해를 당했을 때에는 사찰 복구와 석탑을 세우기 위한 대중의 결집을 이끌어내기도 하였다. | 혜옥스님은 청암사 백련암에 주석할 때 단청 불사를 원만히 회향하셨고, 1936년 청암사가 수해로 큰 피해를 당했을 때에는 사찰 복구와 석탑을 세우기 위한 대중의 결집을 이끌어내기도 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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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실달사 주지 역임=== | ===대구 실달사 주지 역임=== |
2023년 6월 10일 (토) 21:46 판
혜옥(慧玉)스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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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명 | 혜옥(慧玉) |
법호 | 정암(晶岩) |
속명 | 박두림(朴斗林) |
출생 | 1901.01.18. |
출가 | 1903년 |
입적 | 1969.05.26. (세수69세, 법랍66세) |
사찰 | 대휴사 경상북도 김천시 지례면 상부리 384 |
특이사항 |
목차
정의
혜옥스님은 근대 한국 비구니계 3대 강백(講伯)의 한 분으로 '걸어다니는 대장경’이라 불리울 정도로 교학에 뛰어났으며 평생을 전법행각으로 일관한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생애
1901 | 경북 금릉 출생 |
1903 | 삼선암에서 문오(文悟)스님을 은사로 출가 |
1911 | 밀양 심상소학교 졸업 |
1914 | 범어사에서 영명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
1919 | 해인사에서 호월(湖月)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
1929 | 김천 청암사 극락전 강원 사미과 수료 |
해인사 국일암 강원 사집, 사교과 수료 | |
법주사 수정암 강원 대교 수료 | |
1946 | 대구 실달학원 강사 |
1947 | 대구 실달사 주지 |
1954 | 한국불교승단 정화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 |
1956 | 정화 이후 김천 청암사 초대 주지 |
밀양 표충사, 해인사 삼선암 등 안거 성만 | |
1968 | 김천 대휴사 주석 |
1969 | 1969년 5월 26일 대휴사에서 입적(세수 69세, 법납 66세) |
문중 | 계민문중(戒珉) |
수행지침 | 승가오칙을 철저히 수행 |
수계제자 | 정헌(正憲)・인완(仁完)・정봉(正夆) |
활동 및 공헌
출가
정암(晶岩) 혜옥(慧玉)스님은 1901년 1월 18일 경북 금릉군 대덕면 추양리에서 아버지 박동재와 어머니 김혜순 사이의 세 자매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본관은 밀양이며 이름은 박두림이다. 스님의 나이 세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머니가 직접 해인사 삼선암으로 스님을 데려가 대비당(大悲堂) 문오(文悟)스님을 은사로 출가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동자승으로 밀양 심상소학교를 마친 스님은 1914년 14세에 범어사에서 영명 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하였다. 이후 초발심자경문과 ‘구시화문(口是禍門)’을 교훈삼아 김천 청암사 극락전에서 사미과를 수료하였는데, 이미 이때부터 강백으로서의 자질을 보였다. 혜옥 스님이 공부하시던 당시는 일제강점기였으므로 청암사 큰절에는 대처승이 있었고, 고봉 스님, 우룡 스님, 고산 스님 등의 비구 스님들은 청암사 극락전에서 강사로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었다.
혜옥 스님의 굳건한 수행 의지는 속가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 스님이 출가하여 사미니계를 받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어머니 또한 발심·출가하여 혜순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혜순 스님은 구마라집의 어머니처럼 늘 혜옥 스님의 공부를 지극 정성으로 도왔다. 물자가 귀해서 옷감이 넉넉하지 않던 시절, 청암사 백련암에 머물던 혜순 스님은 법주사 수정암에서 공부하고 있던 혜옥 스님을 위해 새 풀옷을 입고 가서 해우소에 가서 서로 맞바꾸어 입고 돌아올 정도로 혜옥 스님의 구도정진을 뒷바라지하여 주위 사람으로부터 부러움을 자아냈다고 한다.
은사 문오스님 '오부전 스님'
은사 문오스님은 사미니 때부터 예불을 익혀 30여 년 동안 법당과 전각의 조석 예불을 지성으로 드렸기 때문에 삼선암 스님들뿐 아니라 해인사 모든 사중의 스님들이 문오스님을 ‘삼선암 부전 스님’으로 불렀다. 법명의 문오에서 '오'자를 따다가 '오부전' 스님이라고 했는데, 산내에 오부전 스님을 모르는 스님이 없었다. 스님은 철저한 예불과 엄격한 수행을 거듭하셨고, 입적한 뒤에는 오색 영롱한 사리 3과가 나왔다고 한다. 당시 비구니는 부도를 모시지 못한다는 불문율이 있었으나, 평생 한결같이 수행하고 베푸신 덕화로 삼선암 앞길 옆에 부도를 모시게 되었다.
문오스님은 제자들에게 불교의 율(律)과 선(禪)은 두 버팀목이지만 특히 율은 얇은 유리그릇과 같아서 깨지기 쉽고 깨지면 결국 선(禪)과 교(敎)를 담을 수 없으니 스스로 계율로써 청정함을 견지하고 여기에 선과 교를 담아라"라는 가르침을 주셨다. 또 계율을 지킬 때에는 '내가 처한 현실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한 걸음 늦추면서 앞일을 처리함이 올바른 지계정신'임을 강조하셨다.
수행
은사스님의 가르침을 받은 혜옥스님은 길을 가다가 고기 굽는 냄새가 나면 '아이고, 송장 타는 냄새가 난다.‘고 하는 등 일생 동안 계행을 청정하게 지키며 살았다. 스님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해인사 국일암에서 사집과를 수료하고, 법주사 수정암에서 대교과를 마치는 등 배움의 열정을 놓지 않았다. 물자가 귀한 시대였던 만큼 풍족한 여건 속에서 배움의 장을 마련하지 못하자, 칡잎이나 모래 위에 글을 써가며 공부에 대한 의욕을 불태웠다. 스님의 독경소리가 너무도 낭랑하여 도량에 있는 사람들은 스님의 독경소리를 들으면 마치 극락세계에 와 있는 것처럼 환희심이 충만했다고 한다.
강설을 시작하다
혜옥 스님은 어려서부터 총기와 지혜가 뛰어나 듣고 배운 것을 다 암기했기 때문에 ‘걸어 다니는 대장경’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다. 그렇게 공부에 열중하던 어느 날 청암사에 원인 모를 불이 났다. 당시 주지 김대운(金大雲) 화상은 청암사를 중창한다는 취지로 스님에게 법문을 청하게 되었다. 스님은 아직 배움이 미흡하다며 사양의 뜻을 비쳤으나, 청암사 대중의 간곡한 청으로 법상에 올랐다. 1915년, 나이 불과 15세 때의 일이다. 사부 대중이 모인 자리에서 당당하게도 법상에 올라 초발심자경문을 강설하니, 대중들이 크게 감명받고 스님께 큰 절을 올렸다. 이때부터 스님은 비구니로서 큰스님 대접을 받았다. 그 당시만 해도 불교계는 비구니가 법상에 오르거나 주장자를 드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분위기였으므로 혜옥 스님처럼 비구니이면서 더구나 어린 나이에 법상에 올랐다는 것은 감히 상상하기도 어려운 특별한 사례였다.
이후 스님은 나이 19세 때인 1919년 4월에 해인사에서 호월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하고 ‘정암당(晶岩堂)’이란 당호를 받았다. 그 후 스님은 밀양 표충사에서 수선안거 3하(夏)를 성만하는 등 강백이면서 동시에 선 수행도 철저히 하였다.
보살행
특히 스님은 무주상보시의 실천에 남다른 모습을 보여 주었다. 혜옥 스님은 객승이나 신도가 찾아오면 가리지 않고 갖고 있던 것을 모두 나누어 주는 바람에 시봉하는 사람은 의복을 마련하느라 며칠 밤을 세우기도 했다. 심지어 형편이 어려워 양말도 신지 못하고 맨발로 스님의 방에 들어서는 사람이 있으면 당신이 신고 있던 양말을 벗어주기도 했고 객스님이 오면 아예 장롱을 열고 모두 내어주는 바람에 시봉하던 스님들이 부득이 장농문을 잠근 적도 있었다고 한다. 어느 해는 부처님 오신 날 행사를 마치고 나니 사중에 쌀 한 가마 살 돈 밖에 남지 않았다. 이에 대중이 걱정을 하자, ‘재물을 쌓아 놓고 살면 탐욕이 생기니 기도나 열심히 하라.’며 일의일발(一衣一鉢) 납자의 본분사를 그대로 보여주었다. 결국 그 해에는 양식이 부족해 발우를 들고 탁발을 나갔는데, 이 때도 ‘일곱 집만 얻어 오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한다.
스님은 탐욕이라고는 좁쌀만큼도 없어서 당장 내일 아침거리가 없어도 걱정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루는 손상좌가 “스님, 내일 아침거리가 없습니다.” 하고 고하자 스님은 “솥을 깨끗이 씻어놓고 있으면 되니까 염려 말고 염불이나 해라.” 하고서 계속 글을 읽으셨다고 한다. 이러한 스님의 무욕행은 입적 시 장례비용이 없어 손주 상좌인 재철 스님이 직접 장례비용을 빌리러 다녀야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청암사 백련암에 주석
혜옥스님은 청암사 백련암에 주석할 때 단청 불사를 원만히 회향하셨고, 1936년 청암사가 수해로 큰 피해를 당했을 때에는 사찰 복구와 석탑을 세우기 위한 대중의 결집을 이끌어내기도 하였다.
대구 실달사 주지 역임
1947년부터는 대구불교 부인연합회의 초청에 의해 실달사를 맡아 운영하면서 일주문 쪽으로는 실달유치원을 개설하고, 후문 쪽으로는 강당을 신축하여 강설을 통한 포교에 일대 혁신을 불러 일으켰다. '실달'이란 '싯다르타' 즉 부처님을 의미한다. 1946년 개설한 실달학원은 부처님의 정신을 함양하는 교육기관이라는 뜻으로 오늘날 승가대학의 초기형태라고 할 수 있겠다. 스님은 새싹 불자를 키워야 한다고 강조하며 7회 졸업생을 배출할 때까지 원생기도와 유치원 보조 협력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재정난으로 유치원을 더 이상 운영할 수 없는 한계에 부딪치자 이를 매각하여 대구시 중리동에 양로원을 개설하고 노인복지에 힘을 쏟았다.
대구 북성로 2가 19번지에 위치했던 실달선원은 ‘옥골 마당’이라고 불리었다. 이곳은 옛날에 감옥 자리여서 사람을 많이 죽인 곳이었기 때문에 밤이면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고 한다. 그래서 다른 스님들이 늘 무서워했는데 혜옥 스님이 불경을 많이 읽은 뒤부터는 이 소리가 나지 않고 도량이 편안해졌다고 한다.
전도행각
스님은 제자리에 앉아서가 아니라 스스로 곳곳을 찾아다니며 전법 행각으로 일생을 보냈다. 언제 어느 곳이든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이라면 주저하지 않았다. 주석하던 사찰로 학생들이 수학여행을 오면 삼귀의(三歸依)라도 알고 가라며 그 자리에서 법문을 설했으며, 혹시나 신도들이 잡담을 하는 모습을 보면 크게 호통을 치며 ‘부처를 찾아라.’고 법문을 하였다. 또한 ‘삼일수심천재보三日修心千載寶) 백년탐물일조진(百年貪物 一朝塵)’이라는 자경문의 경구를 애송하면서 제자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으며, ‘제행무상(諸行無常) 시생멸법(是生滅法) 생멸멸이(生滅滅已) 적멸위락(寂滅爲樂)’이라는 무상게(無常偈)를 교훈삼아 스스로는 가행정진하고, 후학들을 독려하였다. 평소에도 새벽 3시에 일어나 예경을 마치면 어김없이 보현행원품을 독경하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하였고, 일요일에는 김천포교당과 교도소, 양로원 등을 두루 찾아다니며 법문을 설하는 등 전법 활동을 조금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사람마다 한 권의 경전이 있는데
그것은 종이나 활자로 된 것이 아니다
펼쳐 보면 한 글자도 없지만
항상 환한 빛을 발하고 있다.
아유일권경(我有一卷經) 불인지묵성(不因紙墨成)
전개무일자(展開無一字) 상방대광명(常放大光明)
방광
1947년 스님의 나이 47세 때, 대구 실달사 주지로 부임하여 머물던 때의 일이다. 지장기도회를 조직해 일주일씩 법문을 하게 된 어느 여름날, 법을 설하는 스님이나 이를 듣는 대중 모두가 일심동체가 되어 환희심으로 충만해지던 즈음 기적적인 일이 발생했다. 스님이 법문에 들어가면서 앞에 제시한 ‘아유일권경 불인지묵성 전개무일자 상방대광명’이라는 게송을 읊자마자 세 차례나 방광(放光)이 일었고, 폭염의 더위마저 극락정토로 변해가는 이적(異跡)에 대중의 환호가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
산림법회
마야부인회 주최로 금룡스님(금광스님), 수옥스님과 함께 서울 개운사에서 법화산림을 설할 때의 일화는 비구니계에서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다. 비구니 3대 강백이 한 자리에서 너무나 유창하고 진실한 법문으로 대중에게 크나큰 발심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크게 감동한 마야부인회는 법회를 회향하는 자리에서 세 비구니 스님들에게 은으로 만든 법륜마크(가사고리)를 증정했다고 한다.
무심도인
1956년 청암사 주지로 부임한 이후에도 김천 수도사(지금은 폐사찰임)와 대구 부인사 경산포교당 등지에서 강설의 의지를 멈추지 않았으며, 다시 청암사 백련암에서 정진 수행한 후 입적 한 해 전인 1968년 68세에 김천 대휴사로 거처를 옮겼다. 스님은 평소 시래기국, 된장찌개, 보리밥 등을 좋아했으며, 상좌들이 공양을 챙겨 드리면 드시고, 미쳐 못 챙기면 그냥 지나쳐 버리는 무심도인이었다. 평상시 세 분 상좌스님들의 시봉이 눈물겹도록 극진하였으며, 관세음보살 주력으로 병마를 이겨 나갔다. 상좌 인완스님은 몸이 불편한 가운데서도 가행정진의 열정을 버리지 않았던 은사스님을 자주 회고하곤 했다.
혜옥 스님은 늘 새벽 3시에 일어나 예경을 마치면 어김없이 『화엄경』「보현행원품」을 독경하는 일이 일과였고, 아침공양 후에는『화엄경』을 독송하시는 등 하루 종일 경전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스님은 스님의 회상에 머무는 사람은 비구나 비구니, 심지어 일반인이라도 조석 예불을 거르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고 한다. 예불에 참여하지 않았을 때는 방문을 열고 발로 엉덩이를 걷어차는 바람에 객이라도 꼭 예불에 참여해야만했다고 한다.
한국불교정화운동에 적극 참여
혜옥 스님은 불교 정화운동에도 적극 동참하여 정화 운동이 한창이던 1954년 한국불교계 중앙 간부인 종회의원으로서 종무 행정에도 참여하였다. 스님은 모든 정화운동에 참여하였고 이와 함께 중앙종무행정에 참여하여 비구니의 위상을 높였다. 스님은 정화운동에 참여한 공로를 인정 받아 경북 김천시 증산면 평촌리 청암사의 비구니 초대 주지로 취임하여 임기를 마쳤다. 그후 스님은 김천시 평화동 수도사(현재 폐사됨), 대구 부인사 경산포교당, 김천 용화사 등의 사찰에 주석하면서 가람 수호와 법문을 멈추지 않았다. 이어서 다시 청암사 백련암에서 수행정진한 후 1968년에 김천 대휴사로 거처를 옮겨 주석하면서 후진 양성과 대중교화에 정성을 다하였다.
입적
미인은 박복하고 나라의 큰 재목은 단명한다고 했던가! 좀더 오랜 시간 사바세계에 남아 반목과 질시 그리고 고통에서 헤매는 중생들을 제도해야 했을 혜옥스님은 평소 신명을 다 바쳤던 ‘중생교화’라는 큰 원력을 유언으로 남긴 채, 1969년 5월 26일 새벽 3시 김천 대휴사에서 사바(裟婆)의 행보를 마감하였다. 세수 69세요, 법랍 66세였다. 스님의 문하에 인완(仁完)·정헌(正憲)·정봉(正夆)스님 등이 있으며 그 밖의 큰 뜻을 이어받은 많은 제자들이 오늘도 전국 각지에서 불법실천에 앞장서고 있다.
- 운문회보 발취, 불기 2529년 (1985년 5월 1일) 제12호
혜옥스님과 염주
아래는 증손 수정스님이 2023년 5월 9일 한국비구니승가연구소에 보내주신 혜옥스님에 대한 보충자료이다.
1960년대 후반, 증손자 성우스님(2023년 현재 세납 70세)이 14살이었을 때 상노스님인 혜옥스님(당시 67세)을 가까이에서 모셨다. 물자가 귀하던 시대였는데, 혜옥스님은 밭가에 율무를 심고 키워 열매가 까맣게 익으면 하나씩 따서 속 씨를 빼고 손수 꿰어 염주를 만들어서 보는 사람마다 그것을 주었다. 사람들이 감사의 인사를 드리면 스님은 염주를 들고 염불을 하라고 일러 주셨다. 혜옥스님은 평소에 도량에 다니면서 항상 염주를 돌리셨다. 주무실 때도 염주를 돌리다가 잠이 드셨다. 스님은 평생 잠시도 쉬지 않고 염불하시면서 염주를 돌려서 엄지손톱이 닳아 엄지손톱을 깎을 일이 없었다. 성우스님이 스님의 손톱을 깎아드릴 때 네 손가락의 손톱만 깎아드리면 되었다. 염주를 돌리느라 엄지손톱이 늘 패어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증손자에게 상노스님하면 떠오르는 모습은 자나 깨나 염주를 손에 쥐고 돌리시던 모습이다.
“보소, 보소, 나는 과거 본행시에 염불한 공덕으로 이 극락에 나왔노라. 나는 과거 본행시에 보시한 공덕으로 이 극락에 나왔노라. 나는 과거 본행시에 참선한 공덕으로 이 극락에 나왔노라. 부처님 도량에 풀 한포기만 뽑아도 삼악도를 면하노라….”
사람들만 보면 “야야, 이것 좀 들어봐라. 주인공아 청아언(聽我言)하라. 기인(其人)이 득도공문(得度空門)이어늘…. 어떠냐? 참 좋제? 얼마나 좋노! 공부 열심히 해야 한다.” 혜옥스님의 초성이 너무나 청아해서 성우스님은 지금도 어릴 때 들었던 스님의 소리가 귀에 쟁쟁하다고 한다. 성우스님은 혜옥스님의 말씀을 그렇게 들으면서 모셨고, 혜옥스님은 59세 되시던 해 5월 25일에 열반하셨다.
대휴사
대휴선원의 전신은 은적암이다. 문의산에 위치한 은적암은 신라 헌강왕 당시 도선국사가 초창하여 은적암이라 이름 짓고 그 후 수백 성상을 이어져 내려오다가 일제강점기 한 일본인이 절터에서 양질의 규석을 뱔견하여 지금의 장소로 이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때가 1910년이었다. 옛터(지금의 광산자리)시절 마지막에 봉찬스님이 계시다가 사임하고, 현재의 자리로 내려와 2차, 3차로 복원했고 1945년 해방 후 상봉스님이 다시 복원하여 암자명을 대휴사로 개명하고 주석하시다가 입적하였다. 그 후 요사채만 3칸만 남은 채 폐허가 된 대휴사에 덕순스님이 인법당 삼아 주석하시면서 대중을 초청하여 오게 하였고 여기에 신축불사 원력을 세워 정진하고 대웅전, 요사채를 세웠다.
참고문헌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p. 88~92.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552.
- 수정 스님, 「정암당 혜옥 스님의 수행과 포교」 (전국비구니회, 『한국 비구니의 수행과 삶』, 예문서원 2007년, pp. 225~274)
-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 140~141.
- 하춘생. 『깨달음의 꽃1(한국불교를 빛낸 근세 비구니)』. 여래, 1998, pp. 195~205
- 아비라 카페, 47년전 대구시 실달유치원 자료를 구합니다. https://cafe.daum.net/abira/1YyP/436
- 지장신행회, 고승열전 혜옥스님(1901-1969) ~ 비구니 3대 강백으로 추앙 https://cafe.daum.net/jjnd/Lfr2/429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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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옥(慧玉)스님 | 본항목 | 혜옥스님(慧玉,1901~ 1969) | 慧玉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혜옥스님(慧玉,_1901生,_비구니) |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 항목2 | 관계 | 속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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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옥(慧玉)스님 | 계민문중(戒珉) | ~의 일원이다 | |
혜옥(慧玉)스님 | 문오(文悟)스님 | ~의 수계제자이다 | |
혜옥(慧玉)스님 | 합천 해인사 삼선암 | ~에서 출가하다 | |
혜옥(慧玉)스님 | 영명스님 | ~(으)로부터 계를 받다 | 사미니계 |
혜옥(慧玉)스님 | 호월(湖月)스님 | ~(으)로부터 계를 받다 | 비구니계 |
혜옥(慧玉)스님 | 대구 실달사 |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 주지 |
혜옥(慧玉)스님 | 김천 청암사 |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 주지 |
혜옥(慧玉)스님 | 안거 | ~을(를) 성만하다 | 밀양 표충사, 합천 해인사 삼선암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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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대휴사 : 경상북도 김천시 지례면 상부리 384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