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인(寶仁)스님은 1924년 경기도 화성군 태안에서 2남 3녀 중 셋째 딸로 태어났다. 본관은 반남이며, 이름은 박승석이다. 독실한 불교 집안이었던 까닭에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불법을 접하게 된 스님은 절에 가서 기도를 하고 스님들을 만나면서 불심을 키워갔다. 그러던 중 수원 팔달암 에서 만공 큰스님의 법문을 듣고 난 뒤 발심하여 15세에 견성암에서 정각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입산 2년 뒤인 1940년 수덕사에서 만공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계했다.
당시는 2차세계대전의 태평양 전쟁의 일제치하 말기로 극심한 부역의 징집 위기를 겨우 넘겼다. 대신 엄청나게 힘든 노동을 해야만 했다. 늘 콩 깻묵밥, 도토리 깻묵밥 등 끼니가 될 수 없는 것들을 배급받아 근근이 연명하며 정진을 했다.
스님은 이처럼 열악하고 암울한 환경 속에서도 의연하게 수행을 계속했다. 1941년 18세에 윤필암에서 2철 안거를 성만하였고, 이후 너무나도 경이 보고 싶은 마음에 견성암을 나와서 용하 조실스님이 계신 남장사로 갔다. 최초의 비구니 강원인 상주 남장사에는 20명 정도가 공부하고 있었다. 이때 수연스님과 함께였다.
그런데 스님이 공부를 시작하려고 할 때 견성암 어른스님들께서 공사를 벌였으니 빨리 들어오라.'는 전갈을 보내와 되돌아가게 되었다. 당시 경전공부보다는 참선을 중요시했던 만공 큰스님은 훗날 정수옥 스님이 견성암에 들렀을 때 “니가 글을 가르쳐서 애들이 참선도 안하려 하니 뭐가 될지 모르겠다.” 하시며 꾸짖었다고 한다.
수행
한번은 스님이 두 벌뿐인 인조적삼을 빨아 널었는데 그만 메뚜기 떼가 다 쪼아 먹어 낭패를 겪었다. 물자가 귀하던 시절이라 어려운 일이 많았지만 그래도 도반들끼리 서로 이해하고 도와주던 신심 나던 시절이었다. 열악한 상황에서도 경을 보겠다는 일념으로 사교과를 수료한 스님은 다시 견성암으로 돌아왔다.
병술년에 온 나라를 근심에 빠뜨렸던 수해는 견성암에도 많은 타격을 입혔다. 산사태가 나는 바람에 솥이 잠겨버렸고, 객실에 계시던 노스님들을 업어서 큰방으로 모셔야만 했다. 수해가 끝난 후 법희 노스님과 일엽스님 등을 모시면서 참선 정진을 계속하던 중 정혜사 위에 있었던 견성암이 지금의 자리로 옮겨오게 되었다. 이는 높은 산중에 위치한 비구니스님들의 살림을 걱정하신 벽초 노스님의 배려가 가장 컸다. 그 후 스님은 여러 곳을 다니며 안거를 성만했다.
그리고 1950년 3월 부산 범어사의 동산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했다.
보인스님은 1952년 8월 대성암에서 2안거를 성만하고 다시 견성암에서 1961년까지 정진하다. 가 1962년 해미 개심사 강원 총무로 부임하여 1970년까지 맡은 바 소임을 다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972년부터 견성암 입승 소임을 3년 동안 역임하고, 1985년부터 3년 동안 견성암 선원장을 역임했다. 또한 1986년에는 대한불교 조계종 금강계단 비구니 7증사를 역임했다.
입적
2004년 10월 20일(음력 9월 7일) 견성암에서 세수 81세, 법랍 67세를 일기로 입적했다. 스님은 입적하기까지 늘 화두를 잃지 않고 정진에 정진을 거듭하였으며, 후학들에게 한 생각, 한 깨달음을 얻기를 당부했다.
수계제자로는 성근(性根)·성진(性辰)·도선(道宣·성오(性悟)·성영(性瑩)·지성(智性)·성준(性俊)·성륜(性侖) 스님 등이 있다.
수덕사 견성암
근대 한국 불교사에 최초의 비구니 선원으로 개원한 견성암은 1900년경 정혜사 동쪽에 초가집으로 지어져 5~6명의 비구니 납자들이 모여 정진했으나, 전국에서 선원 개원 소식을 듣고 선객(禪客)들이 모여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1930년 조실 만공스님의 뜻에 따라 비구니 도흡스님이 증축한 이래 1965년 벽초스님에 의해 현재의 위치인 수덕사 서편 산중턱으로 자리를 옮겨서 2층 석조건물 법당과 요사채인 동선당, 서 선당 관음전을 증축하여 전국 최초이자 최고의 비구니 선원으로 면모를 갖추었다.
선방은 백여 명의 남자들이 수도 정진하고 있으며, 초심납자부터 중진 대덕 노스님에 이르기까지 정진과 화합을 원칙으로 부처님의 근본사상과 불가의 전통을 계승·유지하는 정진처(精進處)가 되고 있다. 그리고 전국에서 유일하게 대중의 의사에 따라서 공개적으로 대중살림을 운영하는 비구니 선원이다.
특히 견성암은 만공스님께 인가를 받으신 법희(法喜), 만성(萬性)스님과 대영, 수옥, 응민스님 등 한국 근대 불교사에 빛나는 선승들을 배출했고 또 선객으로서 이곳 선방을 거쳐 가지 않은 이가 없을 정도다.
본당에 걸려 있는 견성암 칠근루(七斤樓) 현판과 1928년에 작성한 견성암(見性庵) 방함록서(芳啣錄序)는 만공스님의 친필이며, 개화기의 여류시인 김일엽(金一葉)스님이 1930년대부터 수도 정진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 금강산 마하연은 한국전쟁 당시 파괴되었다. 이 사진은 마하연의 모습을 볼 수 수 있는 아주 귀한 사진이다.
- 선복스님은 비구니 법희·일엽·만성 스님 등과 함께 만공 스님의 수법제자이다. 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202371
- 옛 견성암에서의 가사불사 사진은 젊은 비구니스님들이 가사를 만들고 있고 뒤에 노스님들께서 증명을 하고 있다.
참고자료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 뜨란출판사, 2007, pp. 445~4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