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탁연스님(卓然, 1949生, 비구니)

biguni
이병두 (토론 | 기여)님의 2022년 12월 24일 (토) 17:06 판 (다른 비구니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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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탁연(卓然)스님은 조계종 비구니 최초 총무원 문화부장과 제15대 중앙종회의원을 역임한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949 경남 고성 출생
1969 해인사 국일암에서 현오(玄悟)스님을 은사로 출가
1969 해인사에서 자운(慈雲)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1976 봉녕사 강원 졸업
월하(月下)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1983 중앙승가대학교 졸업
1989 일본 야마나시현(山梨縣) 미노부산(身延山)단기대학(短期大學) 졸업
1991 동경 릿쿄(立正)대학 졸업
1992 묘엄(妙嚴)스님으로부터 전강
1996 동경 릿쿄(立正)대학원 졸업
문학박사 취득
봉녕사 강사 취임      
1997~2000 동국대학교 강사
1999~2002 대한불교 조계종 행자교육원 교수사(제16기~제23기)
2003 봉녕사 교무, 학감.
2003~2005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 문화부장 취임. 총무원 문화부장연임
2008 대한불교조계종 중앙선거관리위원
2010 대한불교조계종 제15대 중앙종회의원
문 중 청해문중(靑海)
수행지침 아는 대로 행하고 현실에 충실하자
저서 및 작품 『유식(唯識) 30송에 있어서 팔식설(八識說) 연구(硏究)』 외 다수
수계제자 준성·해휴

활동 및 공헌

[묘엄스님과함께]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437
[총무원 문화부장시절 업무수행중]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438
[미산스님,광우스님등과 함께 진관사에서(2004.6.26)]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442

출가 계기

탁연(卓然)스님은 1949년 12월 5일 경남 고성의 독실한 불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스님이 태어난 지 두 살 되던 해, 어머니 나이 스물에 한국전쟁으로 그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남편을 잃은 어머니는 출가를 선택했고, 불심이 깊었던 친할머니는 며느리의 출가를 돕고자 절까지 동행해 며느리가 삭발할 때까지 함께 지냈다. 이때 탁연스님은 여섯 살짜리 꼬마였다.

며느리가 삭발하던 날, 할머니는 머리 깎는 모습을 보고 손녀가 울먹일까봐 밖으로 데리고 나왔는데 눈치 빠르고 당찬 손녀는 이렇게 야무지게 말했다. “괜찮아! 나도 알아. 그러니까 들어가자.” 그러고는 자기도 머리를 깎아 달라고 졸라 어머니와 함께 삭발을 했다. 한 달쯤 지나 할머니를 따라 산을 내려왔지만 13년이 지난 후에도 아이의 생각은 변하지 않았고, 19세 되던 해에 탁연이라는 이름으로 출가하였다.

그러나 탁연스님은 여고 시절 졸업을 앞두고 많은 고민을 했다. ‘정말 출가를 할 것인가? 출가하는 것만이 중요한 게 아니라 회향을 잘 하는 게 문제일 텐데...’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모친이 그러했듯이 자신에게도 언제든지 뜻하지 않는 불행이 닥칠 수 있고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괴로움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삶에 대한 불안과 괴로움이 출가를 하면 없어진다고들 하니까 안 태어난 셈치고 멋지게 공부 한 번 해보자!’ 이렇게 결심하고 출가하러 갔을 때 성철 큰스님께서 물으셨다. “왜 스님이 되려고 하노?" 이에 탁연스님이 대답했다. “그저 송아지가 소 따라 왔습니다.” 그 말을 듣고 성철 큰스님께서 한바탕 크게 웃으며 말씀하셨다. “꼭 맞는 말이다.”

탁연스님은 1969년 해인사 국일암에서 평생을 참선 수행하고 있는 현오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출가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입학 합격 통지서를 받은 후였다. 대학에 떨어진 탓에 출가했다는 소리를 듣기 싫었기 때문이다.

수학과 수행

탁연스님은 1976년 봉녕사 승가대학을 졸업하고 10년이 넘게 해인사 국일암, 석남사 등 제방선원에서 참선 수행을 했다. 출가할 즈음 성철스님께서 백련암에 계실 때였기에 자주 친견을 하였고, 성철스님은 죽을 힘을 다해 좌선을 해야 한다고 일러주었다.

한번은 강원에서 강사스님이 되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렸다가 크게 꾸중을 듣고 좌선공부를 하려고 했는데 허리를 다쳐 앉아서 정진을 할 때 무척 고생을 했다. 척추 디스크와 싸우며 뒷방에서〈치문〉 한 권을 다 배웠고, 출가한지 5년 만에 강원에 가서 공부를 지속했다.

스님은 1983년 중앙승가대 졸업 후 1년 반 동안 지장암 주지 소임을 맡았는데 주지를 살면서 주지 소임은 수행력이 없으면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그래서 벅차게만 여겨지는 주지직을 사임하고 더 공부하기 위하여 일본으로 건너가 10년을 머무르며 일본 릿쿄(立正) 대학에서 불교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에는 그토록 바랐던 봉녕사 승가대학 강사로 재직하여 8년 동안 학인스님들을 가르치며 의미 있는 시간을 보냈다.

어머니 벽해스님

스님은 산청 심적사에서 수행 정진 중인 어머니 벽해스님 (동화사 내원암 선원장)을 자주 찾아뵈며 함께 수행의 길을 걷고 있다.

조계종 비구니 최초 총무원 문화부장을 맡다

2003년 3월 1일 스님은 봉녕사 강사직을 휴직하고 잠시 일본에서 볼일을 보고 돌아와 모친 벽해스님이 주석하시는 심적사로 향하던 길에 총무원으로부터 문화부장 자리를 맡아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스니은 아직도 팔경계가 들먹여지는 종단의 현실에서 문화부장 자리를 맡는 것은 너무 벅찰 것 같아서 고사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모친 벽해스님도 딸의 문화부장 임명 소식을 듣고 “그런 거는 받는 게 아니다. 물리면 안 되겠느냐?” 라며 걱정하셨다. ‘드러나지 않고 물처럼 살라.’고 늘 강조해온 벽해스님으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임명권자인 법장 총무원장 스님과 탁연스님의 인연은 언젠가 탁연스님이 학인스님과 수덕사에 들렀다가 점심을 함께 하며 좋은 말씀을 들은 것이 전부였다. 2~3일 동안 스님은 심사숙고를 거듭했고, ‘일은 주어질 때 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결국 수락하였다.

비구니스님의 종무행정 참여에 대한 논란

그런데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때 총무원 내부에서는 탁연스님의 의사와는 별개로 비구스님들 사이에서 ‘된다, 안 된다’ 하며 논란이 분분했다고 한다. 문제는 탁연스님 개인의 자질과 능력이 아니라 비구니스님에게 종무 행정의 요직을 맡기느냐 마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사정을 몰랐던 스님은 뒤늦게야 전국 비구니의 위상이 스님의 두 어깨에 얹어져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어떻게 종무 경험이 없는 스님이 선택되었을까? “법랍도 30년이 넘고 세수도 50세가 넘었으니 무난하다고 윗 분들이 판단하신 모양이에요. 너무 어리면 견디기 어렵고 나이가 많으면 부담스럽죠. 그 외에도 몇 가지를 고려하셨겠지요.” 그 몇 가지란 어디에 내놔도 흠잡히지 않을 조건이었을 것이다. 일본 리쇼대학 박사학위 취득이라는 학력, 겉으로 보기에는 소박하고 후덕해 보이지만 그 누구에게도 쉽게 굽히지 않는 당찬 성격 등이 고려되었을 것이다.

조계종 총무원 문화부장은 총무원 집행부 내의 최고 고위직 가운데 하나로 비구니 승려가 총무원 고위직에 임명된 것은 지난 1962년 통합 종단 출범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문화부장은 불교문화유산을 발굴 관리하고 대중화하는 업무를 책임지는 실로 막중한 자리였다.

탁연스님은 지금까지 문화 사업과 인연을 쌓거나 행정을 경험할 기회는 갖지 못했지만 문화에 대한 관심만은 누구 못지않다고 취임식에서 말했다. 그리고 불교계에서 무엇보다도 시급히 해결해야 할 남녀 차별 문제에 관하여 ‘지금도 비구니스님들은 다양한 사회 활동을 하면서 보람 있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전국비구니회장 스님 등과 협의해 부처님 법에 어긋나지 않는 범위 안에서 비구니의 권익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탁연스님은 2003년 3월 4일 조계종 총무원장인 법장스님께 임명장을 받았다. 1,600년 절집 역사의 한 획을 긋는 주인공이 된 것이다.

공부만 해왔을 뿐이라고 스님은 겸양을 보였지만 불교 행정을 통한 능력발휘를 기대하는 염원은 높기만 하였다. 특히 총무원 문화부는 문화재 발굴과 보존 등 업무 성격상 비구보다는 비구니가 능력을 발휘하기에 적당하다는 평가가 그동안에도 계속 있어온 터였다.

‘100세 비구니가 3세 비구에게 절을 올려야 한다.’는 불법의 오랜 관습에도 불구하고 시대변화를 반영한 탁연스님의 ‘발탁 인사’가 기대를 모으는 것도 이런 이유였다. 법장 총무원장 스님은 탁연스님 바로 아래 직위인 문화국장에도 비구니 심원스님을 임명해 비구니 참여 확대에 대한 분명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비구니의 종무 행정 참여를 막는 종헌이나 종법의 근거는 없다. 조계종단 종헌 종법에 위배된다는 일부 비구스님들의 주장은 2002년 종헌 종법을 개정하면서 사문화된 조항으로 비구니스님들의 종무행정 참여를 막을 제도적 근거는 이미 삭제된 상태이다. 어쨌거나 전반적으로 여성의 지위가 향상된 사회분위기의 영향은 물론 불교계 안에서도 과반수를 차지하는 비구니스님들의 왕성한 활동과 능력 발휘를 이제 더 이상 무시할 수 없게 된 것만큼은 분명하다.

그러나 성차별 의식이나 정서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성차별 문제는 일반 사회에서도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는 사안인데, 불교계에서는 이제 막 해결의 실마리를 풀기 시작한 셈이다. 하지만 『율장』에 명시된 ‘100세 비구니라도 초하비구(하안거 한 철 난 비구)에게 절을 해야 한다.’는 조항은 성차별의 가장 막강한 근거가 되고 있다. 물론 불제자로서 부처님의 말씀을 그르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일부에서는 불경에 위경이 많듯이 『율장』 역시 당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만 담겨 있는지 명확하지 않고, 또 후대에 첨가되었을 가능성도 있기에 재검토 또는 재해석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탁연스님은 그렇게까지 생각한 적은 없다. 부처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비구는 250계, 비구니는 348계로 아흔여덟 가지가 더 많은데, 계율을 보면 알겠지만 그 내용은 거창하고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지극히 일상적인 소소한 생활 태도를 구체적으로 명시해 놓았거든요. 부처님 가르침 중에서 중요한 덕목이 버리는 것인데, 경험을 통해 볼 때 여성들은 ‘아깝다’는 마음에 후일을 생각하여 버리지 못하고 쌓아두는 경향이 있어요. 세간사에는 미덕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수행의 측면에서 볼 때 그런 성향은 깨달음에 이르는 길에서 버려야 할 요소이죠.”

스님은 계율에 명시되어 있는 비구니 법을 충실히 지키려 애쓰고 그것을 가르치는 입장이었지만 비구니로서 자괴감에 빠질 때도 많았다고 한다. 잘 알다시피 불가에서는 출가 대중이 한자리에 모이면 품계 순서대로 앉게 되어 있다. 품계는 법랍에 의해 결정되며, 비구스님들이 품계 순서대로 앉고 그 다음 비구니스님이 앉는다. 다시 말해 법랍이 아무리 높은 비구니스님이라 해도 가장 낮은 품계의 비구스님보다 낮은 자리에 앉고, 그 다음에 사미, 사미니 순서대로 앉는다. 이를 너무나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살다 보면 공사석에서 비구·비구니스님이 한 자리에 모일 때가 더러 있다. 언젠가 스님은 그런 자리에서 인사를 나눈 일이 있었는데,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더니 법랍이 높은 비구스님들은 맞절을 하였다. 그런데 젊은 비구스님일수록 율장의 원칙대로 절을 받는 것이었다. 스님은 그 모습을 보고 당혹감을 떨칠 수 없었다. “그것도 분별심이죠. 법랍이나 세수가 높든 낮든 모두 불성을 갖고 있으니 부처님께 절한다 생각하면 문제될 것이 없지요. 스스로 ‘분별심이다.’하고 자신을 질책하고 말았지만 한동안 마음 이상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도 요즘은 융통성을 발휘해 서로가 예의를 갖춰 맞절하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부처님께서도 율장에 ‘고기를 먹지 말라.’고 하셨지만 아픈 이에 대해서는 예외 조항을 두셨고, ‘가죽 신을 신지 말라.’고 하셨지만 사막을 건널 때는 신어도 좋다고 말씀하셨어요. ‘돈을 갖지 말라.’고 하셨지만 요즘 세상에서는 돈 없이는 꼼짝도 못합니다. 율을 바꾸지는 못해도 상황에 따라 개차할 수 있는 또 다른 지혜가 필요한 시대가 아닌가 합니다.”

스님이 문화부장으로 임명된 뒤 일부에서는 행정 경험이야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수도 있지만 정치적이라면 정치적일 수도 있는 풍토를 잘 견뎌낼까 하는 노파심에 걱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스님은 적응을 잘 해나갔고 얼굴도 그 어느 때보다 밝고 활기찼다. 요즘 문화부에서는 문화재청장의 차관급 승격(현재는 1급)과 남북 문화교류시대를 대비하여 북한의 개성 지역 문화재 관리를 전담하는 부서를 정부에 신설하도록 하는 일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이지만 새로 알아가는 것도 재미있어요. 언제 내가 학인들을 가르쳤던가 싶어요. 예전부터 해왔던 일처럼 그저 이 일을 하고 있을 뿐이에요.” 그렇지만 스님은 남모르는 부담도 갖고 있다. 비구니를 대표하여 직무를 맡았는데 ‘일을 엉망으로 한다.’는 소리나 들어 비구니 망신을 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조사단 단장으로 신계사 복원에 기여하다

스님은 조계종 문화유산 발굴조사단 단장으로 2003년 11월 9일부터 25일까지 17일간 신계사 대웅전 터와 석탑 주변을 조사하였다. 이 조사에는 문화재 관련 남북학자들이 공동으로 참여하였는데, 분단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스님은 이후 시굴조사 보고서를 발간하였고, 신계사 복원 공사에 전력을 쏟았다. 신계사는 신라 법흥왕 때인 519년 보운스님이 창건한 절이다. 1887년 고종 때 중건되어 화려한 조선 후기 불교 미술의 진수를 보여주는 대웅전이 유명했던 신계사는 불교 신앙의 중심이었던 금강산 도량들 가운데 4대 사찰의 하나로 손꼽혀 왔다. 하지만 지난 1951년 한국전쟁 때 소실되는 바람에 3층 석탑과 부도만 남아 있었다. 이곳에는 앞으로 4년에 걸쳐 12동의 건축물이 전통방식 그대로 들어설 예정이다. 5년 동안의 협의 끝에 남북한 불교계는 마침내 2004년 4월 신계사 복원공사를 시작하기로 합의하여 9월 경까지 대웅전 건물을 짓기로 하였다.

1998년 3월 14일 체결된 ‘금강산 문화재 복원을 위한 합의서’를 바탕으로 남측의 ‘금강산신계사복원추진위원회’(한국불교종단협의회)와 북측의 ‘조선불교도연맹’이 공동으로 신계사 복원사업을 진행하하여 2007년 10월 13일 준공식을 거행했다.

또한 조계종 문화부에서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발간한 유리 원판 목록집 5권 중에서 불교 관계 자료만을 별도로 정리하여 목록집을 발간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유리 원판은 일제 강점기인 1909년부터 1945년까지 조선총독부가 우리나라 전역의 유적 유물 및 발굴 현장을 촬영한 3만8천여 점의 방대한 사진 자료이다. 이번 조계종에서 발간한 유리 원판 목록집은 그 유리 원판을 1997년부터 2001년까지 5년에 걸쳐 정리한 것으로 사찰, 사지, 불교 문화재 등 불교와 관련된 7천 863점의 사진 자료들이 수록되어 있다.

탁연스님은 수행자로서 매우 소박한 바람이 하나 있다. 뜻 맞는 도반스님들과 경전을 펼쳐놓고 토론하며 부처님 사상을 배우고 실천에 옮기는 요즘의 학림 같은 곳에서 20~30명의 대중이 모여 함께 살고 싶은 것이다. 2004년 총무원 문화부장을 사임한 탁연스님은 정곡사에 주석하다가 곧 문화부장에 재임되었다. 스님의 수계제자로는 준성·해휴스님이 있다.

참고문헌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탁연(卓然)스님 본항목 탁연스님(卓然, 1949~) 卓然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탁연스님(卓然,_1949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속성
탁연(卓然)스님 청해문중(靑海) ~의 일원이다
탁연(卓然)스님 합천 해인사 국일암 ~에서 출가하다
탁연(卓然)스님 현오(玄悟)스님 ~의 수계제자이다
탁연(卓然)스님 자운(慈雲)스님 ~(으)로부터 계를 받다 사미니계
탁연(卓然)스님 월하(月下)스님 ~(으)로부터 계를 받다 비구니계
탁연(卓然)스님 중앙승가대학교 ~에서 학위를 취득하다
탁연(卓然)스님 일본 릿쿄(立正)대학원 ~에서 학위를 취득하다 석사
탁연(卓然)스님 일본 릿쿄(立正)대학 ~에서 학위를 취득하다 박사
탁연(卓然)스님 대한불교조계종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행자교육원 교수
탁연(卓然)스님 대한불교조계종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총무원 문화부장
탁연(卓然)스님 대한불교조계종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중앙선거관리위원
탁연(卓然)스님 대한불교조계종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중앙종회의원
탁연(卓然)스님 대한불교조계종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문화유산발굴조사단장
탁연(卓然)스님 고성 신계사(금강산) [1] 복원에 기여하다

지도



주석

  1. 금강산 신계사는 금강산 유점사의 말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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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옥스님(光玉, 1943년생) 법농스님(法農, 1962년생) 성우스님(惺牛, 1918년생) 재문스님(載文, 1943년생) 하경스님(荷景, 1937년생)
광우스님(光雨, 1926년생) 법능스님(法能, 1932년생) 성원스님(性源, 1918년생) 재현스님(在玄, 1946년생) 해성스님(海成, 1958년생)
광호스님(光毫, 1915년생) 법륜스님(法倫, 1948년생) 성월스님(性月, 1947년생) 재호스님(宰毫, 1938년생) 해운스님(海雲, 1920년생)
금룡스님(金龍, 1892년생) 법성스님(法性, 1914년생) 성일스님(性一, 1944년생) 재홍스님(在洪, 1931년생) 해주스님(海住, 1951년생)
긍탄스님(亘坦, 1885년생) 법성스님(法惺, 1938년생) 성주스님(性主, 1825년생) 적조스님(寂照, 1942년생) 행원스님(行願, 1927년생)
뇌묵스님(雷默, 1919년생) 법성스님(法性, 1940년생) 성주스님(性住, 1938년생) 정관스님(靜觀, 1945년생) 허경스님(虛鏡, 1440년생)
능인스님(能忍, 1944년생) 법용스님(法涌, 1936년생) 성주스님(性珠, 1946년생) 정덕스님(正德, 1933년생) 현각스님(玄覺, 1935년생)
능인스님(能仁, 1946년생) 법운스님(法雲, 1927년생) 성지스님(聖智, 1926년생) 정률스님(廷律, 1963년생) 현묵스님(炫默, 1932년생)
대각스님(大覺, 1914년생) 법운스님(法雲, 1937년생) 성진스님(性眞, 1896년생) 정명스님(淨明, 1940년생) 현성스님(賢星, 1945년생)
대영스님(大英, 1903년생) 법인스님(法印, 1930년생) 성총스님(聖叢, 1944년생) 정명스님(正明, 1954년생) 현수스님(賢秀, 1943년생)
대우스님(大愚, 1949년생) 법일스님(法一, 1904년생) 성타스님(性陀, 1934년생) 정목스님(正牧, 1960년생) 현정스님(玄定, 1948년생)
대은스님(大恩, 1852년생) 법전스님(法田, 1927년생) 성탄스님(性坦, 1911년생) 정묘스님(靜妙, 1941년생) 현진스님(玄眞, 1934년생)
대행스님(大行, 1927년생) 법전스님(法典, 1945년생) 성현스님(聖賢, 1927년생) 정성스님(定星, 1940년생) 현진스님(玄眞, 1937년생)
대현스님(大玄, 1916년생) 법종스님(法宗, 1945년생) 세등스님(世燈, 1926년생) 정수스님(貞守, 1939년생) 현찬스님(賢讚, 1934년생)
대현스님(大玄, 1957년생) 법진스님(法眞, 1942년생) 소림스님(昭林, 1937년생) 정수스님(淨洙, 1941년생) 현행스님(賢行, 1928년생)
덕수스님(德修, 1922년생) 법천스님(法泉, 1944년생) 수옥스님(守玉, 1902년생) 정심스님(定心, 1918년생) 혜경스님(慧鏡, 1924년생)
덕운스님(德雲, 1942년생) 법형스님(法衡, 1921년생) 수인스님(守仁, 1779년생) 정심스님(正心, 1925년생) 혜광스님(慧光, 1940년생)
도광스님(度光, 1952년생) 법홍스님(法弘, 1943년생) 수인스님(守仁, 1899년생) 정안스님(正眼, 1950년생) 혜근스님(慧根, 1935년생)
도문스님(道門, 1942년생) 법희스님(法喜, 1887년생) 수진스님(守珍, 1916년생) 정안스님(淨岸, 1951년생) 혜돈스님(慧頓, 1949년생)
도상스님(道常, 1937년생) 법희스님(法希, 1930년생) 수진스님(修眞, 1950년생) 정운스님(淨雲, 1954년생) 혜등스님(慧燈, 1946년생)
도성스님(道成, 1922년생) 법희스님(法熺, 1952년생) 수현스님(修賢, 1940년생) 정원스님(正圓, 1939년생) 혜명스님(慧明, 1917년생)
도연스님(道鍊, 1911년생) 보각스님(普覺, 1904년생) 수현스님(修賢, 1941년생) 정인스님(正忍, 1946년생) 혜문스님(慧門, 1930년생)
도원스님(道圓, 1904년생) 보각스님(寶覺, 1938년생) 수환스님(修還, 1950년생) 정일스님(淨日, 1934년생) 혜소스님(慧沼, 1931년생)
도준스님(道準, 1900년생) 보명스님(寶明, 1946년생) 순희스님(順姬, 1917년생) 정행스님(淨行, 1902년생) 혜안스님(慧眼, 1912년생)
도헌스님(度憲, 1939년생) 보명스님(寶明, 1954년생) 신전스님(信典, 1934년생) 정화스님(淨華, 1922년생) 혜안스님(慧眼, 1923년생)
도훈스님(道勳, 1933년생) 보문스님(普門, 1938년생) 연호스님(蓮湖, 1930년생) 정화스님(貞和, 1923년생) 혜옥스님(慧玉, 1901년생)
동근스님(東根, 1951년생) 보선스님(普善, 1946년생) 영수스님(暎修, 1941년생) 종수스님(宗秀, 1922년생) 혜운스님(慧雲, 1911년생)
동성스님(東城, 1913년생) 보영스님(普暎, 1937년생) 영운스님(靈雲, 1946년생) 종수스님(鍾修, 1922년생) 혜원스님(慧圓, 851년생)
동현스님(東玄, 1945년생) 보원스님(普願, 1944년생) 영원스님(盈圓, 1949년생) 종식스님(宗植, 1944년생) 혜은스님(慧隱, 1937년생)
동희스님(東熙, 1945년생) 보인스님(寶仁, 1924년생) 영춘스님(永春, 1894년생) 종실스님(宗實, 1951년생) 혜일스님(慧日, 1919년생)
만선스님(萬善, 1883년생) 보현스님(普賢, 1934년생) 예순스님(禮順, 1587년생) 지광스님(志光, 1934년생) 혜일스님(慧日, 1947년생)
만선스님(萬善, 1906년생) 보화스님(普和, 1933년생) 운달스님(雲達, 1942년생) 지명스님(智明, 1921년생) 혜전스님(慧田, 1929년생)
만선스님(萬善, 996년생) 본각스님(本覺, 1952년생) 원오스님(圓悟, 1933년생) 지문스님(志門, 1958년생) 혜종스님(慧宗, 1930년생)
만성스님(萬性, 1897년생) 본공스님(本空, 1907년생) 원표스님(圓表, 1951년생) 지성스님(志性, 1939년생) 혜주스님(慧珠, 1925년생)
명길스님(明吉, 1931년생) 봉려관스님(蓬廬觀, 1865년생) 월혜스님(月慧, 1895년생) 지순스님(芝順, 1913년생) 혜준스님(慧俊, 1935년생)
명륜스님(明倫, 1937년생) 불필스님(不必, 1937년생) 육년스님(六年, 1906년생) 지연스님(知衍, 1947년생) 혜춘스님(慧春, 1919년생)
명성스님(眀星, 1931년생) 상근스님(祥根, 1872년생) 육문스님(六文, 1946년생) 지오스님(智悟, 1955년생) 혜해스님(慧海, 1921년생)
명수스님(明洙, 1925년생) 상덕스님(常德, 1951년생) 윤호스님(輪浩, 1907년생) 지우스님(至牛, 1935년생) 회선스님(會善, 1926년생)
명심스님(明心, 1947년생) 상덕스님(常德, 1952년생) 은영스님(恩榮, 1910년생) 지원스님(知元, 1931년생) 효성스님(曉星, 1898년생)
명안스님(明岸, 1941년생) 상덕스님(尙悳, 1925년생) 응민스님(應旼, 1923년생) 지원스님(智圓, 1938년생) 효성스님(曉惺, 1927년생)
명오스님(明悟, 1916년생) 상락스님(常樂, 1928년생) 인성스님(仁成, 1901년생) 지원스님(智願, 1942년생) 효성스님(曉星, 1948년생)
명완스님(明完, 1937년생) 상륜스님(相侖, 1929년생) 인완스님(仁完, 1930년생) 지인스님(智因, 1937년생) 효천스님(曉天, 1941년생)
명주스님(明珠, 1904년생) 상원스님(相源, 1939년생) 인정스님(仁貞, 1899년생) 지행스님(智行, 1941년생) 효탄스님(曉呑, 1955년생)
명철스님(明哲, 1939년생) 상조스님(常照, 1951년생) 인허스님(印虛, 1911년생) 지향스님(智向, 1941년생) 희선스님(喜善, 1929년생)
묘각스님(妙覺, 1928년생) 상훈스님(常熏, 1944년생) 인홍스님(仁弘, 1908년생) 지현스님(智玄, 1916년생) 희원스님(喜圓, 1951년생)
묘각스님(妙覺, 1942년생) 서용스님(瑞庸, 1948년생) 인화스님(忍和, 1912년생) 지현스님(智賢, 1933년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