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원표스님(圓表, 1951生, 비구니)

biguni
이병두 (토론 | 기여)님의 2022년 12월 24일 (토) 16:32 판 (다른 비구니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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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원표(圓表)스님은 한국 전통차와 서각을 통하여 수행과 포교에 공헌한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951 경남 고성 출생
1972 청암사에서 법천(法泉)스님을 은사로 출가
1973 해인사에서 지관(智冠)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1977 범어사에서 고암(古庵)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1982 응송스님으로부터 다(茶)법제 전수받음.
중앙승가대학교 졸업
1987 한국 철제각연회 전시 (매년)
1988 무견(無見)서각연구실 개원.
영봉다원 개원
1990~1991 일본 동경 한국문화원 주최 서각전시회 출품
2004 경남 사천 다선암 주지
문중 육화문중(六和)
수행지침 보는 것을 다시 보고, 듣는 것을 다시 듣는다.(자성반조(自性返照))
생활신조 항상 아는 데로 살 줄 알아야 한다.
저서 및 작품 ‘진주 죽헌서실 회원전’ 찬조 출품 2회
특기 다(茶)법제, 서각
수계제자 석호(石虎)

활동 및 공헌

출생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479
[서각 작업하는 모습]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480
[일본에서 열린 서각 전시회]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481
[다선암 차 채취]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482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483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484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485
[원표스님과 스님의 서각 작품]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486
[차밭]
사진출처:네이버블로그, https://blog.naver.com/sacheoncity/221325263265
[원표스님의 서각 작품]
사진출처:진주신문 http://www.newsjinju.kr/news/articleView.html?idxno=13579

무견(無見) 원표(圓表)스님은 1951년 3월 21일 경남 고성군 영오면 오동리 337번지에서 아버지 서보훈과 어머니 하덕희 사이에서 태어났다. 속명은 서미향이다.

속가의 세 자매가 출가

스님의 집안은 불심 깊은 할머니의 영향으로 속가의 세 자매가 모두 출가할 만큼 불연이 지중하였다. 일본 리쇼(立正) 대학의 유식학 박사를 취득한 탁연스님석남사로 출가한 도관스님은 원표스님의 속가 자매이다.

원표스님은 21세 때인 1972년 7월 12일 불연을 따라 경북 김천시 증산면 청암사에서 법천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특별한 신심이나 남다른 사정이 있다기보다는 그야말로 시절 인연이 되어 부처님의 제자가 되는 길을 밟기 시작했다.

스님은 출가 다음해인 1973년 사미니계를 받았지만 스스로 출가자답게 열심히 살지 못하고 있다고 자책하며 방황하였다. 그러다가 70년대 후반부터 스님은 대금에 매력을 느꼈는데, 마침 대금산조 인간문화재 김동표 선생을 만나게 되었다. 스스로 선택한 일은 기필코 해내고야 마는 성격인 스님은 내친 김에 대금산조까지 모두 배우기를 마쳤다.

10.27 법난을 겪으며 심리적 갈등을 느끼다

원표스님은 몇 번의 안거를 마친 후 1980년 중앙승가대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런데 그 해 가을 10.27 법난이 일어났고, 사건을 지켜보며 스님은 엄청난 심적인 갈등을 겪었다.

‘불교가 이 땅에 전래된 지 1,600년이라는 유구한 역사를 가졌고 수많은 대덕 고승이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법난을 겪을 수밖에 없단 말인가! 그 많은 역대 선지식들이 인연 따라 이 땅에 태어났으면 마땅히 불국토가 되어 있어야 하거늘, 과연 역대 조사들이 주(住)한 곳은 어디인가?’스님의 의문은 끊이지 않았다.

마삼근 화두

그 즈음 스님은 붓글씨에도 관심이 많았는데, 재주를 타고난 데다 아침에 시작하면 저녁에 붓을 놓을 만큼 끈기가 있어 주위 도반스님이나 붓글씨 선생님의 격려와 찬탄 속에 기대를 온몸에 받고 있었다.

1982년 32세 되던 해, 스님은 중앙승가대 제 2회 졸업생으로 학교를 졸업했다. 졸업 즈음 스님은 역대 조사의 주처(住處)에 대한 의심을 품고 선방으로 갈 것인가, 아니면 그토록 해보고 싶은 붓글씨를 계속할 것인가를 놓고 갈등하였다. 그러다가 결제가 임박할 즈음 ‘승려가 되어 역대 조사의 주처에 대한 의심을 풀지 않고 뭘 하겠단 말인가?’라는 결론을 내리고 선방으로 향했다.

스님은 음성 미타사에서 걸망을 풀었다. 그런데 반 철이 지나도록 큰스님께 받은 마삼근 화두에 도무지 의심을 일으킬 수 없었다.

‘왜 의심이 안 일어나는가?’, ‘그러면 내가 아는가?’, ‘모른다.’, ‘모르면 당연히 의심이 일어나야 되지 않는가?’

스님은 자신을 채찍질하며 괴로워했다.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간절한 의심이 생기지 않아 회의를 느끼고 급기야 공부를 그만두어야겠다는 극단적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서울 가면 할일이 얼마나 많은데 의심도 나지 않는 화두를 들고서 시간을 헛되이 보내고 있는가. 이 얼마나 아까운 일인가? 두 번 다시 선방에 오지 않겠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이었다. 도무지 공부가 되지 않아 포행을 나가 길가에 앉아 있는데 도반스님이 다가와 ‘왜 공부를 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천만 번 생각해도 의심이 나지 않는 화두를 붙들고 있으면 뭐 하노. 의심이 나야 공부를 하지. 이제 안 할 거라.” “큰스님들도 처음에는 그렇게 시작해서 큰스님이 되셨듯이 원표스님도 열심히 하면 누구보다 빠르게 공부에 들어갈 수 있을 거야.” 스님은 도반스님과의 대화 끝에 다시 용기를 얻었다. 해제 무렵에도 간절한 의심은 갖지 못했지만, 하면 될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의심이 안 난다고 하는 이놈이 무얼까?’를 물고 늘어지다

스님은 해제 후 바로 세등선원으로 산철 결제를 들어갔다. 그리고 계속 ‘왜 의심이 안 날까?’ 자문하고 있는데, 문득 ‘의심이 안 난다고 하는 이놈이 무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전강 큰스님‘이뭣고’ 법문을 듣고 나서 비로소 화두가 정립되었다.

그때부터 스님은 나름대로의 수행 수칙을 정해 대중에 나가지 않게 될 때까지 촌보도 물러서지 않고 몇 년 동안 정진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스스로의 신체 리듬에 맞는 수면 시간을 파악했다.
필요한 만큼 자고, 정진할 때는 항상 깨어 있으며, 낮에 졸고 밤에 앉아 있는 일은 하지 말 것! 과식하거나 간식을 먹어 정진에 방해가 되지 않게 할 것! 산책을 하지 말 것! 도반을 사귀어 공연히 구업을 짓지 말 것! 지대방에 가서 느긋하게 차를 마시며 시간을 허비하지 말 것! 스님은 위와 같은 수칙을 세워 놓고 철저히 공부에 몰두하였다.

스님이 불영사에서 정진하던 시절이었다.
한 번은 불국사 조실 [월산 큰스님이 반 살림 법문을 하셨는데, 저녁에는 대중들이 개인 면담을 했다. 원표스님이 큰스님께 여쭈었다. “역대 선지식이 주한 곳이 어디입니까?” “그것 참 괜찮은 질문이네. 너 화두가 뭐꼬?”

조실스님의 질문에 스님은 처음에는 마삼근 화두부터 시작했다가 전강 큰스님의 법문 테이프를 듣고 ‘이뭣꼬?’ 화두를 들게 된 경위를 설명하였다. 그러자 조실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제대로 들고 있네. 하면 되겠어. 한번 해봐. 3년, 6년, 9년 넘어가면 어려워. 해 넘기지 말고 해봐라.” 조실스님은 ‘알음알이는 공부에 걸림이 된다.’고 덧붙이며 역대 선지식의 주처에 대한 말씀은 더 이상 언급하지 않으셨다.

도각문전찰간착(倒却門前刹竿着) 화두

이후 스님은 해인사, 수덕사, 오대산, 범어사, 불영사 등 제방 선원에서 정진을 거듭했다. 스님은 어느 산중이든 걸망을 지고 들어설 때는 ‘이 산중에서 공부 한번 실컷 해봤구나.’하는 생각을 가질 만큼 정진하겠다고 다짐했다. 공부가 순조롭게 되지 않아 공부에 대한 갈증으로 객기를 부려보기도 했지만 한 순간도 참구의 고삐를 놓은 적이 없었다.

수덕사 견성암에서 정진할 때였다. 어느 순간 모든 경계가 일시에 끊어지고, 칠흑 같은 어둠이 들이닥쳤다. ‘이 경계에 속으면 안 되고, 공부가 잘 된다는 생각조차도 하면 안 된다.’고 스스로를 경책하며 정진하던 중 불현듯 ‘없는 것보다 더 가벼운 것이 무엇인가?’라는 의심이 일어났다. 이에 원표스님은 당시 견성암 조실이었던 원담 큰스님을 찾아가 여쭈었다. “없는 것보다 더 가벼운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 참 맹랑한 말이네. 우리 대중이 외국 스님 17~18명과 매일 자자<ref>하안거를 마칠 때, 모든 승려들이 서로 자기의 죄과를 고백하고 참회하여 다른 승려들에게서 훈계를 받는 일 <ref>를 하는데, 이런 질문은 처음이다.” 그러면서 큰스님은 원표스님의 화두가 무엇이냐 물었고, 원표스님은 그때까지의 공부 과정을 말씀드렸다. “화두는 바로 들고 있네. 그렇게만 들고 하면 돼.” 큰스님은 격려와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그때 스님이 다시 큰스님께 ‘역대 선지식이 주한 곳이 어디입니까?’ 하고 여쭈었다. 그러자 큰스님께서는 ‘도각문전찰간착(倒却門前刹竿着)의 의지(意旨)’를 말씀하시면서 계속 참구하라고 하셨다. 스님은 수덕사 큰절에서 견성암으로 돌아오면서 ‘왜 문밖의 찰간대를 꺾으라 했을까?’ 라는 의심에 몰두하는 바람에 돌아오는 길도 잃어버린 채 계속 주위만 돌다가 문득 찰간대 화두에 대한 의심이 풀려 오던 길을 되돌아가서 큰스님을 뵙고 말씀을 올렸다. “너의 집에 불이 붙었으니까, 이 덕숭산에서 태우든지 끄든지 한번 해봐라.” 큰스님 말씀에 스님은 그러겠노라고 대답하고 물러나왔다.

어느 비구니 노스님의 말씀을 듣고 무릎을 치다

이후 스님은 쉼 없는 정진 중에 공부를 많이 하신 어느 비구니 노스님을 만나게 되었다. 스님은 그 노스님께도 역대 조사들의 주처를 여쭈었다.

그러자 노스님께서는 고려말 삼정승이 국사로 모실 도인스님을 찾아 나선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삼정승이 전국을 뒤져도 국사로 모실만한 도인스님을 만나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대산 상원사에서 한 스님이 ‘저 북대에 짚신을 짜고 있는 늙은이가 있는데, 그를 찾아가보라.’고 했다.

이에 정승이 스님 말씀대로 노인을 찾아가 ‘최초 불(佛)이 누구입니까?’라고 물으니 그 노인은 ‘삼성반원(三星半月)이오.’하고 답했다고 한다. 비구니 노스님의 이야기를 듣던 중 원표스님은 곧 바로 ‘삼세제불의 주(住)한 곳과, 역대 선지식의 주한 곳과, 원표의 주한 곳을 알았다.’하며 무릎을 치게 되었다.

이후 원표스님은 토굴로 내려와 서각을 하고 차 농사를 지으며, 동중(動中)에 정(靜)을 익혀 보는 것을 다시 보고, 듣는 것을 다시 듣는 자성 반조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영봉녹차(靈鳳綠茶)’와 자하청다(紫河淸茶)를 제작·보급

스님은 ‘앞으로 나의 인생은 작설차의 맛과 같이 담백하게, 난초의 향과 같이 은은하게, 무궁화 꽃과 같이 깨끗하게 삶을 마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차가 귀하여 좋아하는 작설차를 마음대로 마실 수가 없던 스님은 직접 차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중앙승가대학교를 졸업한 후 원표스님은 한 스님으로부터 해남 대흥사에 가면 초의선사의 후손이 살고 있다는 소식을 우연히 듣게 되었다.

이 분이 바로 초의스님 열반 30년 뒤에 출가하여 초의스님의 다법(茶法)을 이어온 계승자이자 독립 운동가이신 응송(應松)스님이다. 스님은 응송스님을 찾아뵙고 차에 대해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응송스님은 차를 어찌나 좋아하였던지 독립운동을 할 때에도 걸망에 차와 다구를 가지고 다니며 즐겨 마셨다고 한다. 원표스님은 백화사 응송스님으로부터 [「동다송(東茶頌)」, 「다신전(茶神傳)」 등 차에 대한 이론을 배웠고, 무음자(無飮子)라는 다호(茶號)를 받았다. 매년 찻잎을 딸 때가 되면 스님이 계시는 곳에 가서 차를 만들었다. 응송스님은 초의스님의 다법을 원표스님에게 전해주고 1991년에 입적하셨다.

원표스님은 철마다 도반스님들과 야생차를 덖어 차를 만들었는데, 스님의 차를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야생차로는 수요가 한정될 수밖에 없으니 차를 직접 재배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1986년 영봉사지에 처음 차 종자를 심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 영봉다원이다. 영봉다원에서는 ‘다선일미(茶禪一味) 초의선다(草衣禪茶) 무음자(無飮子) 영봉녹차(靈鳳綠茶)’라는 이름의 증제차 및 발효차인 자하청다(紫河淸茶)을 만들고 있다. 자하청다는 거듭된 연구 끝에 우리나라 최초로 만들어진 완전 발효차이다.

자하청다는 녹차만 마시기에는 너무 단조로워 차를 다른 방법으로 만들어보면 어떨까 싶어 차를 발효시킨 것이다. 거듭된 연구 끝에 우리나라 최초로 만들어진 완전 발효차가 바로 자하청다이다. 스님의 자하청다 개발은 결과적으로 중국 보이차의 무분별한 유입을 막아 건강한 차문화를 보급하는 일에 일조하게 되었다.

차를 심을 때 스님은 땅을 적어도 몇 해 이상 묵혀서 살아 있는 토양이 된 다음에야 비로소 차씨를 심었다. 그리고 풀 한 포기 한 포기를 일일이 호미질하고 낫질을 하여 가꿔나가되 제초제나 화학비료를 사용하는 손쉬운 농사법은 차의 순수성을 잃게 하기에 일절 허용하지 않았다. 차의 순수하고 담백한 맛은 우리의 물들지 않은 청정한 자성과도 닮은 만큼 본래의 맛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기에 그 농사법 또한 그래야 한다고 스님은 말한다.

차에는 다섯 가지 맛이 있는데 단맛, 짠맛, 신맛, 쓴맛, 떫은맛 등이다. 그 다섯 가지 맛이 어우러져서 한 맛이 나는데, 그 맛을 낼 줄 아는 사람만이 차를 만들 줄 아는 이라고 하고, 그 맛을 맛볼 줄 아는 자를 차 마실 줄 아는 사람이라고 한다. 차를 마시는 사람이 질 좋은 차를 선호할 때 차를 만드는 사람 또한 질 좋은 차를 만들게 된다. 그러한 가운데 바른 차문화가 뿌리를 내리게 될 테고, 무분별한 수입 개방 속에서도 우리의 차가 살아남을 것이라고 스님은 확신한다.

서각을 배워 인간문화재 이수자로 활동하다

원표스님은 대금과 붓글씨를 비롯하여 많은 재능을 가지고 있다. 인간문화재 각자장 오옥진 선생에게 서각을 배운 후 인간문화재 이수자로 활동중이다. 해인사 일주문 현판, 위봉사 일주문 현판, 석남사 금당 현판, 미국 보스턴 서광사 후불탱화, 운문사 문수선원 후불탱화 등 원표스님의 작품이 여러 사찰에 걸려 있다.

원표스님은 한국철제각연회 전시회와 일본문화원 주최 전시회에 작품을 출품하는 등 꾸준한 활동을 했고, 1988년부터 ‘무견(無見)서각연구실’을 개원하여 후배를 양성하였다.

원표스님이 가장 큰 기쁨으로 여기는 것은 어느 분야에서든지 최고의 선생들을 만나 공부하는 것이다. 또한 대중 속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자신이 망가진다고 생각하고, 끊임없이 정진하며 대중 속에 자신이 있기를 바란다. 홀로 정진할 때도 마치 대중과 함께 어울려 정진하듯이 하고 움직임 가운데 고요하게 수행하는 것이 자신에게 맞는 수행 방법이라고 여기며 그러한 길을 즐기며 걷고 있는 것이다.

스님은 희로애락이 있는 사바세계를 좋아할 뿐만 아니라 인생에서 기쁨, 슬픔, 자연 등 존재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복이라고 생각하며 조화롭게 살아가는 것에 대해 행복을 느낀다고 한다.

스님은 80세까지 미리 삶의 계획을 잡아 놓고 있다. 하지만 오늘 생을 마감한다 하더라도 80세를 산 것이나 다름없으며, 혹시나 90세를 넘어 100세까지 산다 하더라도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닌 이치를 알기에, 삼라만상 우주만물이 나와 더불어 둘이 아닌 세계에 들어갔을 때 비로소 만물과 더불어 존재하는 진정한 자유인이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원표스님은 2004년 다선암 주지로 수행 정진 중이며, 수계제자로는 석호(石虎)스님이 있다.

참고자료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원표(圓表)스님 본항목 원표스님(圓表, 1951~) 圓表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원표스님(圓表,_1951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속성
원표(圓表)스님 육화문중(六和) ~의 일원이다
원표(圓表)스님 법천(法泉)스님 ~에서 출가하다
원표(圓表)스님 법천(法泉)스님 ~의 수계제자이다
원표(圓表)스님 지관(智冠)스님 ~(으)로부터 계를 받다 사미니계
원표(圓表)스님 고암(古庵)스님 ~(으)로부터 계를 받다 비구니계
원표(圓表)스님 서각예술가 ~이다 각자장(중요무형문화재 제106호) 이수자
원표(圓表)스님 응송스님 ~(으)로부터 전수받다 초의(草衣)선사 다법
원표(圓表)스님 사천 다선암 ~을(를) 설립(건립)하다 영봉다원
원표(圓表)스님 사천 다선암 ~을(를) 설립(건립)하다 무견(無見)서각연구실
원표(圓表)스님 일본 동경 한국문화원 서각전시회 ~에 출품하다

지도

  • 다선암 : 경상남도 사천시 곤명면 용산리 287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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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주스님(觀柱, 1922년생) 법공스님(法空, 1937년생) 성연스님(聖蓮, 1928년생) 재근스님(在根, 1940년생) 태구스님(泰具, 1920년생)
광옥스님(光玉, 1943년생) 법농스님(法農, 1962년생) 성우스님(惺牛, 1918년생) 재문스님(載文, 1943년생) 하경스님(荷景, 1937년생)
광우스님(光雨, 1926년생) 법능스님(法能, 1932년생) 성원스님(性源, 1918년생) 재현스님(在玄, 1946년생) 해성스님(海成, 1958년생)
광호스님(光毫, 1915년생) 법륜스님(法倫, 1948년생) 성월스님(性月, 1947년생) 재호스님(宰毫, 1938년생) 해운스님(海雲, 1920년생)
금룡스님(金龍, 1892년생) 법성스님(法性, 1914년생) 성일스님(性一, 1944년생) 재홍스님(在洪, 1931년생) 해주스님(海住, 1951년생)
긍탄스님(亘坦, 1885년생) 법성스님(法惺, 1938년생) 성주스님(性主, 1825년생) 적조스님(寂照, 1942년생) 행원스님(行願, 1927년생)
뇌묵스님(雷默, 1919년생) 법성스님(法性, 1940년생) 성주스님(性住, 1938년생) 정관스님(靜觀, 1945년생) 허경스님(虛鏡, 1440년생)
능인스님(能忍, 1944년생) 법용스님(法涌, 1936년생) 성주스님(性珠, 1946년생) 정덕스님(正德, 1933년생) 현각스님(玄覺, 1935년생)
능인스님(能仁, 1946년생) 법운스님(法雲, 1927년생) 성지스님(聖智, 1926년생) 정률스님(廷律, 1963년생) 현묵스님(炫默, 1932년생)
대각스님(大覺, 1914년생) 법운스님(法雲, 1937년생) 성진스님(性眞, 1896년생) 정명스님(淨明, 1940년생) 현성스님(賢星, 1945년생)
대영스님(大英, 1903년생) 법인스님(法印, 1930년생) 성총스님(聖叢, 1944년생) 정명스님(正明, 1954년생) 현수스님(賢秀, 1943년생)
대우스님(大愚, 1949년생) 법일스님(法一, 1904년생) 성타스님(性陀, 1934년생) 정목스님(正牧, 1960년생) 현정스님(玄定, 1948년생)
대은스님(大恩, 1852년생) 법전스님(法田, 1927년생) 성탄스님(性坦, 1911년생) 정묘스님(靜妙, 1941년생) 현진스님(玄眞, 1934년생)
대행스님(大行, 1927년생) 법전스님(法典, 1945년생) 성현스님(聖賢, 1927년생) 정성스님(定星, 1940년생) 현진스님(玄眞, 1937년생)
대현스님(大玄, 1916년생) 법종스님(法宗, 1945년생) 세등스님(世燈, 1926년생) 정수스님(貞守, 1939년생) 현찬스님(賢讚, 1934년생)
대현스님(大玄, 1957년생) 법진스님(法眞, 1942년생) 소림스님(昭林, 1937년생) 정수스님(淨洙, 1941년생) 현행스님(賢行, 1928년생)
덕수스님(德修, 1922년생) 법천스님(法泉, 1944년생) 수옥스님(守玉, 1902년생) 정심스님(定心, 1918년생) 혜경스님(慧鏡, 1924년생)
덕운스님(德雲, 1942년생) 법형스님(法衡, 1921년생) 수인스님(守仁, 1779년생) 정심스님(正心, 1925년생) 혜광스님(慧光, 1940년생)
도광스님(度光, 1952년생) 법홍스님(法弘, 1943년생) 수인스님(守仁, 1899년생) 정안스님(正眼, 1950년생) 혜근스님(慧根, 1935년생)
도문스님(道門, 1942년생) 법희스님(法喜, 1887년생) 수진스님(守珍, 1916년생) 정안스님(淨岸, 1951년생) 혜돈스님(慧頓, 1949년생)
도상스님(道常, 1937년생) 법희스님(法希, 1930년생) 수진스님(修眞, 1950년생) 정운스님(淨雲, 1954년생) 혜등스님(慧燈, 1946년생)
도성스님(道成, 1922년생) 법희스님(法熺, 1952년생) 수현스님(修賢, 1940년생) 정원스님(正圓, 1939년생) 혜명스님(慧明, 1917년생)
도연스님(道鍊, 1911년생) 보각스님(普覺, 1904년생) 수현스님(修賢, 1941년생) 정인스님(正忍, 1946년생) 혜문스님(慧門, 1930년생)
도원스님(道圓, 1904년생) 보각스님(寶覺, 1938년생) 수환스님(修還, 1950년생) 정일스님(淨日, 1934년생) 혜소스님(慧沼, 1931년생)
도준스님(道準, 1900년생) 보명스님(寶明, 1946년생) 순희스님(順姬, 1917년생) 정행스님(淨行, 1902년생) 혜안스님(慧眼, 1912년생)
도헌스님(度憲, 1939년생) 보명스님(寶明, 1954년생) 신전스님(信典, 1934년생) 정화스님(淨華, 1922년생) 혜안스님(慧眼, 1923년생)
도훈스님(道勳, 1933년생) 보문스님(普門, 1938년생) 연호스님(蓮湖, 1930년생) 정화스님(貞和, 1923년생) 혜옥스님(慧玉, 1901년생)
동근스님(東根, 1951년생) 보선스님(普善, 1946년생) 영수스님(暎修, 1941년생) 종수스님(宗秀, 1922년생) 혜운스님(慧雲, 1911년생)
동성스님(東城, 1913년생) 보영스님(普暎, 1937년생) 영운스님(靈雲, 1946년생) 종수스님(鍾修, 1922년생) 혜원스님(慧圓, 851년생)
동현스님(東玄, 1945년생) 보원스님(普願, 1944년생) 영원스님(盈圓, 1949년생) 종식스님(宗植, 1944년생) 혜은스님(慧隱, 1937년생)
동희스님(東熙, 1945년생) 보인스님(寶仁, 1924년생) 영춘스님(永春, 1894년생) 종실스님(宗實, 1951년생) 혜일스님(慧日, 1919년생)
만선스님(萬善, 1883년생) 보현스님(普賢, 1934년생) 예순스님(禮順, 1587년생) 지광스님(志光, 1934년생) 혜일스님(慧日, 1947년생)
만선스님(萬善, 1906년생) 보화스님(普和, 1933년생) 운달스님(雲達, 1942년생) 지명스님(智明, 1921년생) 혜전스님(慧田, 1929년생)
만선스님(萬善, 996년생) 본각스님(本覺, 1952년생) 원오스님(圓悟, 1933년생) 지문스님(志門, 1958년생) 혜종스님(慧宗, 1930년생)
만성스님(萬性, 1897년생) 본공스님(本空, 1907년생) 원표스님(圓表, 1951년생) 지성스님(志性, 1939년생) 혜주스님(慧珠, 1925년생)
명길스님(明吉, 1931년생) 봉려관스님(蓬廬觀, 1865년생) 월혜스님(月慧, 1895년생) 지순스님(芝順, 1913년생) 혜준스님(慧俊, 1935년생)
명륜스님(明倫, 1937년생) 불필스님(不必, 1937년생) 육년스님(六年, 1906년생) 지연스님(知衍, 1947년생) 혜춘스님(慧春, 1919년생)
명성스님(眀星, 1931년생) 상근스님(祥根, 1872년생) 육문스님(六文, 1946년생) 지오스님(智悟, 1955년생) 혜해스님(慧海, 1921년생)
명수스님(明洙, 1925년생) 상덕스님(常德, 1951년생) 윤호스님(輪浩, 1907년생) 지우스님(至牛, 1935년생) 회선스님(會善, 1926년생)
명심스님(明心, 1947년생) 상덕스님(常德, 1952년생) 은영스님(恩榮, 1910년생) 지원스님(知元, 1931년생) 효성스님(曉星, 1898년생)
명안스님(明岸, 1941년생) 상덕스님(尙悳, 1925년생) 응민스님(應旼, 1923년생) 지원스님(智圓, 1938년생) 효성스님(曉惺, 1927년생)
명오스님(明悟, 1916년생) 상락스님(常樂, 1928년생) 인성스님(仁成, 1901년생) 지원스님(智願, 1942년생) 효성스님(曉星, 1948년생)
명완스님(明完, 1937년생) 상륜스님(相侖, 1929년생) 인완스님(仁完, 1930년생) 지인스님(智因, 1937년생) 효천스님(曉天, 1941년생)
명주스님(明珠, 1904년생) 상원스님(相源, 1939년생) 인정스님(仁貞, 1899년생) 지행스님(智行, 1941년생) 효탄스님(曉呑, 1955년생)
명철스님(明哲, 1939년생) 상조스님(常照, 1951년생) 인허스님(印虛, 1911년생) 지향스님(智向, 1941년생) 희선스님(喜善, 1929년생)
묘각스님(妙覺, 1928년생) 상훈스님(常熏, 1944년생) 인홍스님(仁弘, 1908년생) 지현스님(智玄, 1916년생) 희원스님(喜圓, 1951년생)
묘각스님(妙覺, 1942년생) 서용스님(瑞庸, 1948년생) 인화스님(忍和, 1912년생) 지현스님(智賢, 1933년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