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무구스님(無垢, 1959生, 비구니)"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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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활동 및 공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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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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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147-01.jpg|섬네일|[무구스님] </br>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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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147-02.jpg|섬네일|[무구스님]</br>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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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147-03.jpg|섬네일|[무구스님] </br>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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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 수효사 효림원.jpg|섬네일|[수효사 효림원]</br> 사진출처: 현대불교 http://www.hyunbu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81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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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화(蓮花) 무구(無垢)스님은 1959년 12월 5일 전남 해남군 해남읍 해리에서 아버지 김광재와 어머니 천병엽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이며, 이름은 김동금이다. 스님은 태어나면서부터 여느 아기와는 달랐다. 누구나가 다 터뜨리는 울음이 없었다고 한다. 신생아가 모태에서 태어나면서 우는 것은 통증 때문이다. 엄마 뱃속에 있는 동안에는 편안하고 안전했지만 모태 밖으로 나오면서, 또 첫 호흡을 하면서 느끼는 통증이 아기의 울음을 유발한다는 것이다. </br>
 
연화(蓮花) 무구(無垢)스님은 1959년 12월 5일 전남 해남군 해남읍 해리에서 아버지 김광재와 어머니 천병엽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이며, 이름은 김동금이다. 스님은 태어나면서부터 여느 아기와는 달랐다. 누구나가 다 터뜨리는 울음이 없었다고 한다. 신생아가 모태에서 태어나면서 우는 것은 통증 때문이다. 엄마 뱃속에 있는 동안에는 편안하고 안전했지만 모태 밖으로 나오면서, 또 첫 호흡을 하면서 느끼는 통증이 아기의 울음을 유발한다는 것이다. </br>
 
그러한 통증을 느끼지 못했던지 스님은 태어날 때 울음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태어난 지 백일이 지나도록 울지 않았다. 그러니 아이가 혹시 벙어리는 아닐까 싶어 집안 어른들은 노심초사하였다. 다행이라면 너무도 유순하여 한번 젖을 주고 나면 온종일 혼자서도 잘 놀고 울며 보채는 일이 없었다.
 
그러한 통증을 느끼지 못했던지 스님은 태어날 때 울음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태어난 지 백일이 지나도록 울지 않았다. 그러니 아이가 혹시 벙어리는 아닐까 싶어 집안 어른들은 노심초사하였다. 다행이라면 너무도 유순하여 한번 젖을 주고 나면 온종일 혼자서도 잘 놀고 울며 보채는 일이 없었다.
  
 
===출가===
 
===출가===
[[파일:147-02.jpg|섬네일|무구스님]]
 
 
스님이 불가와 인연을 맺은 것은 불교학생회 활동을 하던 중에 대흥사 진불암에서 고성훈(高聖焄)스님을 만난 뒤부터였다. 그렇지만 그 인연은 무수히 많은 길을 돌고 난 뒤에야 매듭이 지어지는 인연이었다. 젊은 시절 삶의 회의에 곧잘 빠져들었던 스님은 서울에서 생활하면서도 성훈스님을 뵙기 위해 자주 해남의 진불암을 찾곤 했다. 성훈스님은 3년간의 묵언 수행을 비롯한 13년여에 걸친 진불암에서의 정진을 끝내고 대중 포교를 위해 전국을 순회하고 있었다. 그때 성훈스님의 한 말씀이 스님에게는 평생의 숙제가 되었다. </br>
 
스님이 불가와 인연을 맺은 것은 불교학생회 활동을 하던 중에 대흥사 진불암에서 고성훈(高聖焄)스님을 만난 뒤부터였다. 그렇지만 그 인연은 무수히 많은 길을 돌고 난 뒤에야 매듭이 지어지는 인연이었다. 젊은 시절 삶의 회의에 곧잘 빠져들었던 스님은 서울에서 생활하면서도 성훈스님을 뵙기 위해 자주 해남의 진불암을 찾곤 했다. 성훈스님은 3년간의 묵언 수행을 비롯한 13년여에 걸친 진불암에서의 정진을 끝내고 대중 포교를 위해 전국을 순회하고 있었다. 그때 성훈스님의 한 말씀이 스님에게는 평생의 숙제가 되었다. </br>
 
“우리 불교계는 책이 턱없이 부족한 형편이야. 특히 어린이들에게 포교를 할 수 있는 불교 동화나 설화집 같은 것을 보급하는 문제가 시급해.” </br>
 
“우리 불교계는 책이 턱없이 부족한 형편이야. 특히 어린이들에게 포교를 할 수 있는 불교 동화나 설화집 같은 것을 보급하는 문제가 시급해.” </br>
 
성훈스님의 말씀은 곧 불교 출판을 시작해 보라는 권유였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보다 널리 알리기 위해서는 불교 출판의 활성화가 너무도 시급하다는 성훈스님의 지적을 모른 채 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평소에 포교의 중요성을 늘 인식하고 있던 중인지라 수행과 포교를 함께할 수만 있다면 크게 얽매일 것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던 스님은 화운사 현진(賢眞)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고, 무구(無垢)라는 법명을 받으며 사미니계와 비구니계를 받았다.
 
성훈스님의 말씀은 곧 불교 출판을 시작해 보라는 권유였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보다 널리 알리기 위해서는 불교 출판의 활성화가 너무도 시급하다는 성훈스님의 지적을 모른 채 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평소에 포교의 중요성을 늘 인식하고 있던 중인지라 수행과 포교를 함께할 수만 있다면 크게 얽매일 것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던 스님은 화운사 현진(賢眞)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고, 무구(無垢)라는 법명을 받으며 사미니계와 비구니계를 받았다.
* 사진출처(무구스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612
 
  
 
===‘우리 출판사’ 설립과 문서포교===
 
===‘우리 출판사’ 설립과 문서포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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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포교당인 수효사 창건===
 
===도심 포교당인 수효사 창건===
[[파일: 수효사 효림원.jpg|섬네일|수효사 효림원]]
 
 
이러한 의지는 수효사 창건과 백천사 중창 불사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스님은 출판사가 겨우 자리를 잡아가던 1985년 개인 주택 1, 2층을 임대하여 1층에는 출판사를 입주시키고, 2층에는 법당을 마련하여 도심 포교당인 수효사의 현판을 걸었다. 하지만 법당을 마련했다는 기쁨도 잠시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건물주가 부도를 내는 바람에 수효사는 물론 출판사의 존립마저 위태롭게 되었다. </br>
 
이러한 의지는 수효사 창건과 백천사 중창 불사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스님은 출판사가 겨우 자리를 잡아가던 1985년 개인 주택 1, 2층을 임대하여 1층에는 출판사를 입주시키고, 2층에는 법당을 마련하여 도심 포교당인 수효사의 현판을 걸었다. 하지만 법당을 마련했다는 기쁨도 잠시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건물주가 부도를 내는 바람에 수효사는 물론 출판사의 존립마저 위태롭게 되었다. </br>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부처님께 의지하는 기도가 전부였던 그때, 스님은 무모하다 싶을 정도로 큰 빚을 안고 건물을 인수했다. 그런 뒤로는 5~6년을 서울 땅 한 번 벗어나지 못한 채 일에만 매달렸다. 그때의 어려움은 일일이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런 가운데 출간한 『화엄경』 영인본이 지속적으로 판매 호조를 보였다. 그야말로 가뭄에 내린 단비 같은 경전의 영험함과 부처님의 가피력이 아닐 수 없었다. </br>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부처님께 의지하는 기도가 전부였던 그때, 스님은 무모하다 싶을 정도로 큰 빚을 안고 건물을 인수했다. 그런 뒤로는 5~6년을 서울 땅 한 번 벗어나지 못한 채 일에만 매달렸다. 그때의 어려움은 일일이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런 가운데 출간한 『화엄경』 영인본이 지속적으로 판매 호조를 보였다. 그야말로 가뭄에 내린 단비 같은 경전의 영험함과 부처님의 가피력이 아닐 수 없었다. </br>
 
수효사와 출판사의 기반이 안정되자 스님은 1989년 동방불교대학과 삼선승가대학 그리고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을 수료하고, 원광대학교 동양철학과에 입학하는 등 한동안 미뤄두었던 공부에 열정을 쏟았다.
 
수효사와 출판사의 기반이 안정되자 스님은 1989년 동방불교대학과 삼선승가대학 그리고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을 수료하고, 원광대학교 동양철학과에 입학하는 등 한동안 미뤄두었던 공부에 열정을 쏟았다.
* 사진출처(수효사 효림원): 현대불교 http://www.hyunbu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81366
 
  
 
===‘한국전통성훈따주기’의 계승자===
 
===‘한국전통성훈따주기’의 계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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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효 사회복지 불교대학’ 설립===
 
===‘수효 사회복지 불교대학’ 설립===
 
수효사의 대중 포교 활동 역시 끊임없이 확장일로를 걷고 있다. 스님이 개설한 ‘수효 사회복지 불교대학’에서 배출한 많은 불교 복지사들이 곳곳의 간병 시설에서 활동하며 불교의 가르침을 전하고 있다. 특히 일상생활 속에서 불교의 이상을 구현하고자 하는 스님의 의지는 2004년 ‘사회복지법인 수효사 효림원’의 설립으로 점차적으로 가시화되고 있다. 지장보살의 서원을 효사상의 실천으로 회향하고자 하는 것이 스님의 뜻이기에 ‘사회복지법인 수효사 효림원’의 장래 활동은 주변의 기대를 한껏 모으고 있다. </br>
 
수효사의 대중 포교 활동 역시 끊임없이 확장일로를 걷고 있다. 스님이 개설한 ‘수효 사회복지 불교대학’에서 배출한 많은 불교 복지사들이 곳곳의 간병 시설에서 활동하며 불교의 가르침을 전하고 있다. 특히 일상생활 속에서 불교의 이상을 구현하고자 하는 스님의 의지는 2004년 ‘사회복지법인 수효사 효림원’의 설립으로 점차적으로 가시화되고 있다. 지장보살의 서원을 효사상의 실천으로 회향하고자 하는 것이 스님의 뜻이기에 ‘사회복지법인 수효사 효림원’의 장래 활동은 주변의 기대를 한껏 모으고 있다. </br>
’수행자는 수행이 본분인 만큼 이제는 자신의 본분사인 공부를 제대로 하고 싶다.‘는 생각을 근래에 자주 하게 된다는 무구스님은, 2004년 수효사 및 백천사 주지이자 ’한국전통성훈따주기‘ 명예회장으로 재임하고 있으며,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 사회복지학과 석사과정을 이수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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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자는 수행이 본분인 만큼 이제는 자신의 본분사인 공부를 제대로 하고 싶다.‘는 생각을 근래에 자주 하게 된다는 무구스님은, 2004년 수효사 및 백천사 주지이자 ’한국전통성훈따주기‘ 명예회장으로 재임했으며,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 사회복지학과 석사과정을 이수했다.
  
 
===수계제자===
 
===수계제자===

2022년 12월 8일 (목) 16:22 판



정의

연화(蓮花) 무구(無垢)스님은 사회복지법인 수효사 효림원을 설립하여 사회복지 활동에 헌신한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959 전남 해남 출생
1983 부암사에서 현진(賢眞)스님을 은사로 출가
불서출판 우리출판사 건립
1985 서울 서대문구 수효사 건립
1992 서울출판(주) 설립, 동방불교대학 졸업
1995 『지장보살본원경』 33만 권 전국에 법보시
중앙승가대학교 보육교사 ‘따주기’ 강의
1996 KBS ‘전국은 지금’에서 건강 강의
1997 SBS 민간요법, ‘한국전통성훈따주기’ 강의, 백천사 중창 불사
1999 삼선승가대학 수료,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 수료
대구 불교복지법인 불교사회교육원 따주기’ 강의
대구 보현사 불교대학 강의
원광대학교 동양철학대학원 졸업
2000 농협중앙회지부 광명시, 의정부 강의
2002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 사회복지학과 석사과정
2004 지장왕보살 김교각 기념관 관장, 한국전통성훈따주기 명예회장
남양주가정폭력상담소 소장
수효사회복지불교대학 학장, 한국기공학회 이사
대한불교 조계종 백천사 및 수효사 주지
사회복지법인 수효사 효림원 이사장
2005 효림노인복지센터를 개관
2006 민주평통자문회의 대통령 표창 받음
2014 사회복지법인 수효사 효림원 구립북가좌데이케어센터 개원
문중 수덕사
수행지침 일체유심조(一切有心造)
생활신조 일하지 않으면 먹지 않는다.
저서 및 작품 『사람들아 길 가기 어렵다 마오』, 『고승열전』, 『진똥개똥』(우리출판사, 2007)
수계제자 정담(定潭)·구담(具潭)·지일(智一)

활동 및 공헌

출생

[무구스님]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611
[무구스님]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612

*

[무구스님]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613
[수효사 효림원]
사진출처: 현대불교 http://www.hyunbu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81366

연화(蓮花) 무구(無垢)스님은 1959년 12월 5일 전남 해남군 해남읍 해리에서 아버지 김광재와 어머니 천병엽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이며, 이름은 김동금이다. 스님은 태어나면서부터 여느 아기와는 달랐다. 누구나가 다 터뜨리는 울음이 없었다고 한다. 신생아가 모태에서 태어나면서 우는 것은 통증 때문이다. 엄마 뱃속에 있는 동안에는 편안하고 안전했지만 모태 밖으로 나오면서, 또 첫 호흡을 하면서 느끼는 통증이 아기의 울음을 유발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통증을 느끼지 못했던지 스님은 태어날 때 울음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태어난 지 백일이 지나도록 울지 않았다. 그러니 아이가 혹시 벙어리는 아닐까 싶어 집안 어른들은 노심초사하였다. 다행이라면 너무도 유순하여 한번 젖을 주고 나면 온종일 혼자서도 잘 놀고 울며 보채는 일이 없었다.

출가

스님이 불가와 인연을 맺은 것은 불교학생회 활동을 하던 중에 대흥사 진불암에서 고성훈(高聖焄)스님을 만난 뒤부터였다. 그렇지만 그 인연은 무수히 많은 길을 돌고 난 뒤에야 매듭이 지어지는 인연이었다. 젊은 시절 삶의 회의에 곧잘 빠져들었던 스님은 서울에서 생활하면서도 성훈스님을 뵙기 위해 자주 해남의 진불암을 찾곤 했다. 성훈스님은 3년간의 묵언 수행을 비롯한 13년여에 걸친 진불암에서의 정진을 끝내고 대중 포교를 위해 전국을 순회하고 있었다. 그때 성훈스님의 한 말씀이 스님에게는 평생의 숙제가 되었다.
“우리 불교계는 책이 턱없이 부족한 형편이야. 특히 어린이들에게 포교를 할 수 있는 불교 동화나 설화집 같은 것을 보급하는 문제가 시급해.”
성훈스님의 말씀은 곧 불교 출판을 시작해 보라는 권유였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보다 널리 알리기 위해서는 불교 출판의 활성화가 너무도 시급하다는 성훈스님의 지적을 모른 채 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평소에 포교의 중요성을 늘 인식하고 있던 중인지라 수행과 포교를 함께할 수만 있다면 크게 얽매일 것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던 스님은 화운사 현진(賢眞)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고, 무구(無垢)라는 법명을 받으며 사미니계와 비구니계를 받았다.

‘우리 출판사’ 설립과 문서포교

불교 출판이 매우 빈약하기만 했던 1983년에 스님은 ‘우리 출판사’를 설립하며 본격적인 문서 포교의 길로 나섰다. 맨주먹으로 시작한, 참으로 무모한 도전이었다. 하지만 출가 전부터 글쓰기를 좋아하여 시, 수필은 물론 소설까지 습작해본 경험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는지 갖가지 힘겨운 일들을 이겨내고 출판사는 오래지 않아 정상 궤도에 올랐다.
불교 출판에 원을 세우면서 무구스님은 다짐한 바가 있었다. 불자들의 신행 생활에 도움이 되게끔 쉽고도 편안하게 읽을 수 있는 책, 아이들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을 발간하자는 것이었다. 특히 위인전을 통해 꿈과 희망을 키워나가는 어린아이들이 큰스님들 이야기를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불교 사상을 접할 수 있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 야 하는가는 언제나 화두였다. 그런 고민 끝에 태어난 책이 『고승의 발자취』였다.
이처럼 오로지 부처님의 가르침을 올바르게 전해 주리라는 마음 하나로 그동안 내놓은 책이 벌써 2백 여 종에 이른다. 뿐만 아니라 1995년에는 『지장보살본원경』 33만 권을 전국 불자들에게 법보시하는 등 문서 포교에 대한 스님의 의지는 꺾일 줄 몰랐다.

도심 포교당인 수효사 창건

이러한 의지는 수효사 창건과 백천사 중창 불사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스님은 출판사가 겨우 자리를 잡아가던 1985년 개인 주택 1, 2층을 임대하여 1층에는 출판사를 입주시키고, 2층에는 법당을 마련하여 도심 포교당인 수효사의 현판을 걸었다. 하지만 법당을 마련했다는 기쁨도 잠시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건물주가 부도를 내는 바람에 수효사는 물론 출판사의 존립마저 위태롭게 되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부처님께 의지하는 기도가 전부였던 그때, 스님은 무모하다 싶을 정도로 큰 빚을 안고 건물을 인수했다. 그런 뒤로는 5~6년을 서울 땅 한 번 벗어나지 못한 채 일에만 매달렸다. 그때의 어려움은 일일이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런 가운데 출간한 『화엄경』 영인본이 지속적으로 판매 호조를 보였다. 그야말로 가뭄에 내린 단비 같은 경전의 영험함과 부처님의 가피력이 아닐 수 없었다.
수효사와 출판사의 기반이 안정되자 스님은 1989년 동방불교대학과 삼선승가대학 그리고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을 수료하고, 원광대학교 동양철학과에 입학하는 등 한동안 미뤄두었던 공부에 열정을 쏟았다.

‘한국전통성훈따주기’의 계승자

‘한국전통성훈따주기’의 계승자이기도 한 스님은 1995년 중앙승가대학교 보육교사 ‘따주기’ 강의를 시작으로 1996년 KBS ‘전국은 지금’ 프로그램에 이어서 1997년 SBS 생방송에도 출연하는 등 불교계는 물론 사회 각 영역에서 활발하게 건강 강의를 하고 있다.

백천사(경기도 남양주시 소재) 중창 불사

그러나 무엇보다도 스님이 심혈을 기울이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의 대중화와 삶 속에서의 불교 윤리 실천을 도모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스님은 1997년 백천사(경기도 남양주시 소재)를 중창 불사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여름, 중국의 4대 불교 성지 중 하나로 이름 높은 구화산을 지장 성지로 개창하신 분이자 신라 왕자로 전해지는 김교각 스님의 존재를 널리 알리기 위해 국내 최초로 전국 전시회 ‘지장왕보살 김교각전’을 개최하기도 하였다. 또한 1998년 백천사에 ‘지장왕보살 김교각기념관’을 설립하여 지속적으로 김교각 스님의 보살사상 전파에 힘쓰고 있다.

‘수효 사회복지 불교대학’ 설립

수효사의 대중 포교 활동 역시 끊임없이 확장일로를 걷고 있다. 스님이 개설한 ‘수효 사회복지 불교대학’에서 배출한 많은 불교 복지사들이 곳곳의 간병 시설에서 활동하며 불교의 가르침을 전하고 있다. 특히 일상생활 속에서 불교의 이상을 구현하고자 하는 스님의 의지는 2004년 ‘사회복지법인 수효사 효림원’의 설립으로 점차적으로 가시화되고 있다. 지장보살의 서원을 효사상의 실천으로 회향하고자 하는 것이 스님의 뜻이기에 ‘사회복지법인 수효사 효림원’의 장래 활동은 주변의 기대를 한껏 모으고 있다.
’수행자는 수행이 본분인 만큼 이제는 자신의 본분사인 공부를 제대로 하고 싶다.‘는 생각을 근래에 자주 하게 된다는 무구스님은, 2004년 수효사 및 백천사 주지이자 ’한국전통성훈따주기‘ 명예회장으로 재임했으며,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 사회복지학과 석사과정을 이수했다.

수계제자

수계제자로는 정담(定潭)·구담(具潭)·지일(智一)스님 등이 있다.

남양주 백천사

백천사 전경

백천사를 품에 안고 있는 백봉산(柏峯山)은 예로부터 연잎을 펼쳐놓은 듯한 너그러운 산세와 안온한 기운을 담고 있고 인근 주민들에게는 안식처가 되었으며, 도(道)를 구하는 이들에게는 수행처로서 널리 알려져 있었다.
백천사를 창건한 백천(柏泉) 도인 또한 이러한 산세를 흠모하여 백봉산 중턱에 위치한 석간수(石間水) 옆에 토굴을 짓고 수행 정진에 들어갔다. 그렇게 수년 동안 토굴을 떠나지 않고 정진을 거듭하던 어느 날이었다. 홀연히 백천 도인의 눈앞에 미곡(米穀) 산신이 나타나 그의 손을 이끌고 산을 내려오더니, 마치 어미 닭의 날개 품에 안긴 듯한 한 터를 가리키곤 사라져버렸다. 백천 도인은 미곡 산신의 계시대로 곧 이 곳에 백천사를 창건했으니, 석간수(石間水)의 커다란 바위틈에서 두 줄기로 갈라져 양쪽 골짜기로 흘러내린 계곡물이 하나로 합쳐지는 지점 바로 위의 아늑한 길지였다.
뒷날 이러한 백천사의 산세에 감탄한 인덕(仁德) 큰스님(김교각 스님께서 일궈놓으신 지장성지인 중국 구화산 기원사 방장)은, 마치 구화산의 금사천(金沙泉)과 화성사를 보는 듯하다며 ‘小九華山 柏泉寺’라 산문(山門)의 이름을 명명하였다. 창건 이후로도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은 채 숨겨진 기도처로 스님들의 주목을 받아왔던 백천사가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90년 무구(無垢) 스님이 주지로 취임하면서부터이다.
주지 취임과 함께 ‘지장보살본원경 33만 권 유포’라는 원을 세운 무구 스님은 경전불사를 시작한 지 불과 5년 만에 회향하는 성과를 보였다. 이는 하루 평균 1,700여 권의 경전을 불자들에게 보낸 것으로 그 전법(傳法)의 열정을 가늠할 수 있다. 또한 ‘1천일 지장기도’를 회향할 즈음에는 불상에 땀이 비 오듯 쏟아지는 가피를 입기도 하면서 백천사는 지장도량으로 우뚝 서기 시작했다.
특히 1996년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중국인들로부터 ‘지장보살’로 추앙받으며 중국의 4대 불교성지 가운데 한 곳인 구화산 지장성지를 개창한 신라왕자 김교각 스님을 우리나라에 알렸으며, ‘김교각 스님 유물 귀향전’ 개최, ‘지장왕보살 김교각 스님 기념관’을 건립하면서 중국과의 불교문화 교류의 선두주자가 되었다. 이후 백천사는 국내는 물론 중국 불교계에 ‘지장보살 김교각 스님 상주도량’으로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김교각기념관은 남양주시 와부읍 율석리의 대한불교 조계종 백천사에 있다. 통일신라 성덕왕의 아들로 태어나 모든 부귀영화를 버리고 홀홀 단신 중국으로 건너가 구도의 삶을 살다 입적한 지장왕보살 김교각스님을 기념하기 위한 곳인데 지난 1998년 9월20일 문을 열었다.
김교각은 왕자의 신분을 버리고 당나라로 건너가 지장(地藏)이란 법명을 받고 출가승이 되어 중국 대륙을 두루 돌며 구도행을 계속하다 내란의 와중에서 날로 참혹해져 가는 민중의 삶을 지켜보면서 지장보살에 귀의하였다.
그는 양자강 남쪽 구화산의 한 동굴에서 수행을 계속하였는데 수행력이 증진되면서 그를 찾아 모여든 제자들과 함께 화성사를 창건하고 구화산을 지장도량으로 만들어 지장신앙을 전파하였다. 그는 당시까지 중국사람들에게 아직 낯설었던 지장신앙을 널리 전파해 구화산을 중국 4대 불교성지의 하나로 자리잡게 하였다.
특히 김교각 스님은 입적한 지 3년후 생전의 예언에 따라 육신불로 다시 세상에 화현함으로써 지장보살의 화신으로 오늘날까지도 중국인들에게 절대적 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가 처음 수도한 중국 무호시 인근 자산에는 그를 기리는 원찰인 광제사가 들어서 있는데 광제사 지장전의 구화행궁에는 신라대각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어 김교각의 자취를 느끼게 하고 있다.
김교각 기념관에는 현재 그가 입적하기 전에 사용했던 신발과 모자, 그의 발자국을 담고있는 돌 등이 전시되고 있다. 또한 등신불이 되기까지의 전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영상물이 상영되고 있다.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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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무구(無垢)스님 본항목 무구스님(無垢, 1959~ ) 無垢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무구스님(無垢,_1959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속성
무구(無垢)스님 수덕사문중 ~의 일원이다
무구(無垢)스님 현진(賢眞)스님 ~의 수계제자이다
무구(無垢)스님 서울 부암사(부암동) ~에서 출가하다
무구(無垢)스님 서울 수효사(충정로3가) ~을(를) 창건하다
무구(無垢)스님 남양주 백천사 ~을(를) 중창하다
무구(無垢)스님 서울 수효사(효림원) ~을(를) 설립(건립)하다 우리출판사

지도



주석


다른 비구니 스님

각림스님(覺棽, 1927년생) 묘관스님(妙觀, 1936년생) 선경스님(禪敬, 1904년생) 일광스님(一光, 1899년생) 지형스님(志炯, 1947년생)
각심스님(覺心, 1936년생) 묘관스님(妙觀, 1948년생) 선광스님(善光, 1949년생) 일선스님(一禪, 1952년생) 지호스님(智毫, 1956년생)
경도스님(敬道, 1941년생) 묘광스님(妙硄, 1946년생) 선재스님(善財, 1956년생) 일연스님(一衍, 1947년생) 지환스님(知幻, 1261년생)
경륜스님(暻輪, 1953년생) 묘길스님(妙吉, 1900년생) 선주스님(禪周, 1938년생) 일엽스님(一葉, 1896년생) 지환스님(智環, 1936년생)
경문스님(京門, 1963년생) 묘담스님(妙湛, 1776년생) 선진스님(善眞, 1961년생) 일조스님(日照, 1910년생) 지훈스님(志訓, 1947년생)
경법스님(敬法, 1922년생) 묘순스님(妙洵, 1946년생) 선행스님(善行, 1934년생) 일지스님(逸智, 1944년생) 진관스님(眞觀, 1928년생)
경순스님(景順, 1925년생) 묘엄스님(妙嚴, 1931년생) 선혜스님(善慧, 1911년생) 일초스님(一超, 1943년생) 진오스님(眞悟, 1904년생)
경신스님(敬信, 1947년생) 묘운스님(妙雲, 1921년생) 설오스님(說吾, 1958년생) 일현스님(一玄, 1952년생) 진우스님(眞愚, 1934년생)
경원스님(庚圓, 1960년생) 묘전스님(妙全, 1938년생) 설호스님(雪皓, 1933년생) 일홍스님(一弘, 1939년생) 진우스님(眞愚, 1949년생)
경주스님(敬柱, 1935년생) 묘정스님(妙精, 1943년생) 성경스님(晟鏡, 1941년생) 일효스님(一曉, 1934년생) 창법스님(昌法, 1918년생)
경준스님(敬俊, 1933년생) 묘정스님(妙靜, 1949년생) 성관스님(性觀, 1940년생) 자광스님(慈光, 1936년생) 창수스님(昌守, 1842년생)
경훤스님(敬昍, 1946년생) 묘찬스님(妙璨, 1926년생) 성관스님(成觀, 1951년생) 자득스님(慈得, 1945년생) 창호스님(彰浩, 1889년생)
경희스님(慶喜, 1931년생) 묘희스님(妙喜, 1937년생) 성덕스님(盛德, 1942년생) 자민스님(慈珉, 1939년생) 천일스님(天日, 1912년생)
계수스님(桂修, 1946년생) 무구스님(無垢, 1959년생) 성륜스님(性輪, 1918년생) 자산스님(慈山, 1933년생) 청룡스님(靑龍, 1925년생)
계전스님(戒田, 1889년생) 무진스님(無盡, 1954년생) 성림스님(成林, 1916년생) 자원스님(慈元, 1937년생) 쾌민스님(快敏, 1916년생)
계주스님(季珠, 1914년생) 문수스님(紋秀, 1939년생) 성문스님(性文, 1893년생) 자윤스님(慈允, 1928년생) 쾌유스님(快愈, 1907년생)
계환스님(戒環, 1953년생) 백졸스님(百拙, 1936년생) 성법스님(性法, 1929년생) 자은스님(慈恩, 1943년생) 탁연스님(卓然, 1949년생)
관월스님(觀月, 1904년생) 범조스님(梵早, 1941년생) 성수스님(性樹, 1948년생) 자현스님(慈賢, 1896년생) 탄형스님(呑炯, 1948년생)
관정스님(觀晶, 1937년생) 법공스님(法空, 1471년생) 성연스님(性蓮, 1920년생) 장일스님(長一, 1916년생) 태경스님(泰鏡, 1930년생)
관주스님(觀柱, 1922년생) 법공스님(法空, 1937년생) 성연스님(聖蓮, 1928년생) 재근스님(在根, 1940년생) 태구스님(泰具, 1920년생)
광옥스님(光玉, 1943년생) 법농스님(法農, 1962년생) 성우스님(惺牛, 1918년생) 재문스님(載文, 1943년생) 하경스님(荷景, 1937년생)
광우스님(光雨, 1926년생) 법능스님(法能, 1932년생) 성원스님(性源, 1918년생) 재현스님(在玄, 1946년생) 해성스님(海成, 1958년생)
광호스님(光毫, 1915년생) 법륜스님(法倫, 1948년생) 성월스님(性月, 1947년생) 재호스님(宰毫, 1938년생) 해운스님(海雲, 1920년생)
금룡스님(金龍, 1892년생) 법성스님(法性, 1914년생) 성일스님(性一, 1944년생) 재홍스님(在洪, 1931년생) 해주스님(海住, 1951년생)
긍탄스님(亘坦, 1885년생) 법성스님(法惺, 1938년생) 성주스님(性主, 1825년생) 적조스님(寂照, 1942년생) 행원스님(行願, 1927년생)
뇌묵스님(雷默, 1919년생) 법성스님(法性, 1940년생) 성주스님(性住, 1938년생) 정관스님(靜觀, 1945년생) 허경스님(虛鏡, 1440년생)
능인스님(能忍, 1944년생) 법용스님(法涌, 1936년생) 성주스님(性珠, 1946년생) 정덕스님(正德, 1933년생) 현각스님(玄覺, 1935년생)
능인스님(能仁, 1946년생) 법운스님(法雲, 1927년생) 성지스님(聖智, 1926년생) 정률스님(廷律, 1963년생) 현묵스님(炫默, 1932년생)
대각스님(大覺, 1914년생) 법운스님(法雲, 1937년생) 성진스님(性眞, 1896년생) 정명스님(淨明, 1940년생) 현성스님(賢星, 1945년생)
대영스님(大英, 1903년생) 법인스님(法印, 1930년생) 성총스님(聖叢, 1944년생) 정명스님(正明, 1954년생) 현수스님(賢秀, 1943년생)
대우스님(大愚, 1949년생) 법일스님(法一, 1904년생) 성타스님(性陀, 1934년생) 정목스님(正牧, 1960년생) 현정스님(玄定, 1948년생)
대은스님(大恩, 1852년생) 법전스님(法田, 1927년생) 성탄스님(性坦, 1911년생) 정묘스님(靜妙, 1941년생) 현진스님(玄眞, 1934년생)
대행스님(大行, 1926년생) 법전스님(法典, 1945년생) 성현스님(聖賢, 1927년생) 정성스님(定星, 1940년생) 현진스님(玄眞, 1937년생)
대현스님(大玄, 1916년생) 법종스님(法宗, 1945년생) 세등스님(世燈, 1926년생) 정수스님(貞守, 1939년생) 현찬스님(賢讚, 1934년생)
대현스님(大玄, 1957년생) 법진스님(法眞, 1942년생) 소림스님(昭林, 1937년생) 정수스님(淨洙, 1941년생) 현행스님(賢行, 1928년생)
덕수스님(德修, 1922년생) 법천스님(法泉, 1944년생) 수옥스님(守玉, 1902년생) 정심스님(定心, 1918년생) 혜경스님(慧鏡, 1924년생)
덕운스님(德雲, 1942년생) 법형스님(法衡, 1921년생) 수인스님(守仁, 1779년생) 정심스님(正心, 1925년생) 혜광스님(慧光, 1940년생)
도광스님(度光, 1952년생) 법홍스님(法弘, 1943년생) 수인스님(守仁, 1899년생) 정안스님(正眼, 1950년생) 혜근스님(慧根, 1935년생)
도문스님(道門, 1942년생) 법희스님(法喜, 1887년생) 수진스님(守珍, 1916년생) 정안스님(淨岸, 1951년생) 혜돈스님(慧頓, 1949년생)
도상스님(道常, 1937년생) 법희스님(法希, 1930년생) 수진스님(修眞, 1950년생) 정운스님(淨雲, 1954년생) 혜등스님(慧燈, 1946년생)
도성스님(道成, 1922년생) 법희스님(法熺, 1952년생) 수현스님(修賢, 1940년생) 정원스님(正圓, 1939년생) 혜명스님(慧明, 1917년생)
도연스님(道鍊, 1911년생) 보각스님(普覺, 1904년생) 수현스님(修賢, 1941년생) 정인스님(正忍, 1946년생) 혜문스님(慧門, 1930년생)
도원스님(道圓, 1904년생) 보각스님(寶覺, 1938년생) 수환스님(修還, 1950년생) 정일스님(淨日, 1934년생) 혜소스님(慧沼, 1931년생)
도준스님(道準, 1900년생) 보명스님(寶明, 1946년생) 순희스님(順姬, 1917년생) 정행스님(淨行, 1902년생) 혜안스님(慧眼, 1912년생)
도헌스님(度憲, 1939년생) 보명스님(寶明, 1954년생) 신전스님(信典, 1934년생) 정화스님(淨華, 1922년생) 혜안스님(慧眼, 1923년생)
도훈스님(道勳, 1933년생) 보문스님(普門, 1938년생) 연호스님(蓮湖, 1930년생) 정화스님(貞和, 1923년생) 혜옥스님(慧玉, 1901년생)
동근스님(東根, 1951년생) 보선스님(普善, 1946년생) 영수스님(暎修, 1941년생) 종수스님(宗秀, 1922년생) 혜운스님(慧雲, 1911년생)
동성스님(東城, 1913년생) 보영스님(普暎, 1937년생) 영운스님(靈雲, 1946년생) 종수스님(鍾修, 1922년생) 혜원스님(慧圓, 851년생)
동현스님(東玄, 1945년생) 보원스님(普願, 1944년생) 영원스님(盈圓, 1949년생) 종식스님(宗植, 1944년생) 혜은스님(慧隱, 1937년생)
동희스님(東熙, 1945년생) 보인스님(寶仁, 1924년생) 영춘스님(永春, 1894년생) 종실스님(宗實, 1951년생) 혜일스님(慧日, 1919년생)
만선스님(萬善, 1883년생) 보현스님(普賢, 1934년생) 예순스님(禮順, 1587년생) 지광스님(志光, 1934년생) 혜일스님(慧日, 1947년생)
만선스님(萬善, 1906년생) 보화스님(普和, 1933년생) 운달스님(雲達, 1942년생) 지명스님(智明, 1921년생) 혜전스님(慧田, 1929년생)
만선스님(萬善, 996년생) 본각스님(本覺, 1952년생) 원오스님(圓悟, 1933년생) 지문스님(志門, 1958년생) 혜종스님(慧宗, 1930년생)
만성스님(萬性, 1897년생) 본공스님(本空, 1907년생) 원표스님(圓表, 1951년생) 지성스님(志性, 1939년생) 혜주스님(慧珠, 1925년생)
명길스님(明吉, 1931년생) 봉려관스님(蓬廬觀, 1865년생) 월혜스님(月慧, 1895년생) 지순스님(芝順, 1913년생) 혜준스님(慧俊, 1935년생)
명륜스님(明倫, 1937년생) 불필스님(不必, 1937년생) 육년스님(六年, 1906년생) 지연스님(知衍, 1947년생) 혜춘스님(慧春, 1919년생)
명성스님(眀星, 1931년생) 상근스님(祥根, 1872년생) 육문스님(六文, 1946년생) 지오스님(智悟, 1955년생) 혜해스님(慧海, 1921년생)
명수스님(明洙, 1925년생) 상덕스님(常德, 1951년생) 윤호스님(輪浩, 1907년생) 지우스님(至牛, 1935년생) 회선스님(會善, 1926년생)
명심스님(明心, 1947년생) 상덕스님(常德, 1952년생) 은영스님(恩榮, 1910년생) 지원스님(知元, 1931년생) 효성스님(曉星, 1898년생)
명안스님(明岸, 1941년생) 상덕스님(尙悳, 1925년생) 응민스님(應旼, 1923년생) 지원스님(智圓, 1938년생) 효성스님(曉惺, 1927년생)
명오스님(明悟, 1916년생) 상락스님(常樂, 1928년생) 인성스님(仁成, 1901년생) 지원스님(智願, 1942년생) 효성스님(曉星, 1948년생)
명완스님(明完, 1937년생) 상륜스님(相侖, 1929년생) 인완스님(仁完, 1930년생) 지인스님(智因, 1937년생) 효천스님(曉天, 1941년생)
명주스님(明珠, 1904년생) 상원스님(相源, 1939년생) 인정스님(仁貞, 1899년생) 지행스님(智行, 1941년생) 효탄스님(曉呑, 1955년생)
명철스님(明哲, 1939년생) 상조스님(常照, 1951년생) 인허스님(印虛, 1911년생) 지향스님(智向, 1941년생) 희선스님(喜善, 1929년생)
묘각스님(妙覺, 1928년생) 상훈스님(常熏, 1944년생) 인홍스님(仁弘, 1908년생) 지현스님(智玄, 1916년생) 희원스님(喜圓, 1951년생)
묘각스님(妙覺, 1942년생) 서용스님(瑞庸, 1948년생) 인화스님(忍和, 1912년생) 지현스님(智賢, 1933년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