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묵스님(雷默, 1919生, 비구니)"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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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계제자 || 혜운(慧耘)·혜능(慧能)·혜향(慧香)·불퇴(不退) | |수계제자 || 혜운(慧耘)·혜능(慧能)·혜향(慧香)·불퇴(不退) |
2022년 11월 7일 (월) 05:45 판
뇌묵(雷默)스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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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명 | 희원(喜元) |
법호 | 진주(眞住) [1], 뇌묵(雷黙) [2] |
속명 | 이종옥(李鍾玉) |
출생 | 1919.07.05. |
출가 | 1937년 |
입적 | |
사찰 | 월정사 육수암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63-8 |
특이사항 |
목차
정의
뇌묵(雷默) 희원(喜元)스님은 한암, 법희, 성철스님의 법을 이어받았으며, 죽림사, 육수암, 영감란야의 재건으로 불교중흥과 정신문화 고양에 앞장서신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생애
연도 | 내용 |
---|---|
1919 | 강원도 강릉 출생 |
1937 | 수덕사 견성암에서 봉업(奉業)스님 [3]을 은사로 출가 |
1937 | 월정사에서 한암(漢岩)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
1938 | 선학원에서 동산(東山)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
1948 | 수덕사 견성암에서 정진 |
1950 | 성철스님으로부터 법호 '뇌묵(雷默)'을 받음 |
1954 | 정화운동 시절 오대산 사고사 중창 불사 후 정진(현재의 영감사) |
1970 | 오죽헌 옆 강릉 죽림사 창건 |
1979 | 월정사 육수암 중창 |
1982 | 육수암 칠보선원 개원 |
1999 | 육수암 칠보선원 한주 |
2020 | 육수암에서 입적 |
문중 | 삼현문중(三賢) |
수계제자 | 혜운(慧耘)·혜능(慧能)·혜향(慧香)·불퇴(不退) |
활동 및 공헌
출가의 계기
뇌묵(雷默) 희원(喜元)스님은 1919년 강원도 강릉군 구정면 어단리에서 아버지 이정룡과 어머니 송봉희 사이의 5남매 중 셋째 딸로 태어났다. 본관은 양성이며, 이름은 이종옥이다. 스님은 일제시대 때 학교를 조금 다니다가 그만두었다. 어렸을 때 할머니를 많이 따랐던 스님은 평소 아이답지 않게 말이 없었고, 어딘지 모르게 쓸쓸하면서도 외로움이 묻어났다. 당시 스님은 '스님'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아버지와 오빠가 겨울이면 아래 윗방에서 구성지게 책 읽는 소리에 '대사'와 '중' 이라는 소리는 들었지만, 정작 스님이라는 단어는 절에 와서 배웠다고 한다. 스님은 1937년 견성암 지장암에서 봉업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1937년 5월 월정사에서 한 암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한 스님은 1938년 9월 선학원에서 동산스님을 모시고 구족계를 수지했다. 스님이 출가할 당시 은사 봉업스님은 본사 견성암을 떠나 지장암에서 결제를 나던 중이었다. 스님은 지장암으로 출가하여 위로는 한암 선사를 모시고 해제와 결제가 없이 피나는 정진을 거듭 했다.
뇌묵스님을 길러 주신 세 스승
지금까지 스님의 공부에 도움을 준 세 스승이 계시는데, 그 첫 번째가 오대산에 주석하고 계셨던 한암 큰스님이다. 한암 큰스님은 일생을 오후 불식 하시며 “세상도 어렵고 수도하기도 어렵다. 이 어려운 때에 수도하기는 더욱 어려우며, 수도인은 이럴 때 정진을 해야 하니 먹고 죽지 않는 것은 다 먹어라.” 하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두 번째 스승은 스님이 지리산 화엄사 구층암에서 법희 노스님을 모시고 삼동 결제 때 뵈었던 벽초스님이다. 결제 도중 여수·순천사건이 일어나 대중이 다시 견성암으로 돌아왔으나 결제 중 이라 들어갈 수 없어 당시 수덕사 주지이신 벽초스님 방에서 13명 대중이 정진했다. 이때 스님의 나이 30세였다. 큰절에서 1주일 장좌불와(長座不臥) 정진 후에 정혜사에서 다시 3일 장좌기도를 회향하고, 사시에 조실스님이 법상에 앉으시니 벽초스님이 법상 앞에 나아가 조실스님께 여쭈었다. “고불 고조사는 석가모니의 종입니다. 그리고 석가모니는 일체중생의 종입니다. 그러면 법상 위의 화상은 누구의 종입니까?" 이에 조실 스님이 주장자를 드시자 벽초스님이 다시 말했다. “주장자에 눈이 어두웠군.” 그 법문에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이에 스님은 이 말을 타파해야 할 화두로 삼고 수행했다고 한다. 스님이 세 번째 만난 선지식은 성철 큰스님이다. 6·25전쟁이 일어난 바로 그해, 스님이 창원 성주사로 피난 갔을 때 통영에 계신 성철 큰스님을 뵙고 '뇌묵(雷默)'이라는 호를 받았다. 그 전에 한암 큰스님께 받은 호는 '진주(眞住)'였다. 성주사의 법당에서 삼천 배를 하고 나니 성철 큰스님께서 “성격이 침착하고 반죽이 잘 됐다.”하시며 “무심할 때는 허공과 같이 무심하고, 정진에 세밀할 때는 좁쌀로 뒤웅박을 파듯이 정진에 최선을 다하라.”고 하셨다. 다음은 희원스님에게 진주(眞住_)라는 호를 내린 한암대종사법어집 한암일발록(漢岩一鉢錄) 게송이다.
비구니 희원에게 주다
比丘尼 喜元 求偈於余어늘
余以眞住號로 贈之하고
仍示以古偈하노라.
莫逐有緣하고
勿住空忍하라
一種平懷하면
泯然自盡하리라
應化 二九七五年 戊子 六月十七日
漢岩 書于 五臺山 上院寺
비구니 희원(喜元)수좌가
나에게 게송을 청하거늘
내가 진주(眞住)라는 호를 주고,
옛 게송 한 구를 보이노라.
인연을 쫓아 가지도 말고,
공무(空無)에도 빠지지 말라.
한결같이 마음이 평온해지면
모든 번뇌는 저절로 녹아 다하리.
응화(불기) 2975(1948)년 무자 6월 17일
오대산 상원사에서 한암은 쓰다
강릉 죽림사 창건
뇌묵스님은 계속되는 결제와 해제, 끝없이 이어지는 수행의 순간들 속에 새로운 인연이 끊임없이 생겼는데, 그것은 전란으로 인한 사찰의 중수와 불사였다. 강릉 사천 용연사 불사를 시작으로 정화 때에는 오대산 사고사(일명 영감사)에 가서 불타버린 법당을 다시 짓고 3년을 살았다. 당시 어려웠던 경제상황을 감안해 볼 때 불보살의 가피가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스님이 문경 김룡사에 계실 때 대수술을 받고 오대산에 다시 돌아왔으나, 1968년 '이승복 사건'이 발생하여 하는 수 없이 강릉으로 갔다. 이때 스님은 낙가사에 잠시 머물면서 오죽헌 옆에 새로이 사찰을 창건하니 그곳이 바로 오늘날의 죽림사이다.
월정사 육수암 창건
오대산 월정사 지장암은 매우 좁고 협소했는데 수행 중인 대중이 많았다. 이에 스님이 원력을 세워 선원을 새롭게 지었으니, 그곳이 현재의 육수암(六手庵)이다. 탄허스님께서 새로 잡아주신 터가 현재 육수암이 있는 곳이지만, 원래의 터는 육수암 안쪽에 있었다. 전쟁으로 보궁에 향화가 끊어진 것을 못내 애석하게 여긴 당시 월정사 주지스님은 원로회의를 개최하여 전국의 불자들에게 1년에 닷 되씩 시주해줄 것을 부탁했다. 그리하여 어느 지방을 막론하고 신도회장의 책임 하에 시주를 해주기로 하여 불사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에 스님은 수원에서 통영까지 그 먼 거리를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않고 두 달 반이나 되는 기간 동안 걸어서 탁발을 하며 전국을 누볐으니 스님의 걸음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스님의 높은 원력과 부처님을 향한 마음 덕분에 그 어떤 것도 고생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뇌묵스님은 힘이 들 때마다 '아마도 전생에 이곳에 빚이 많아서 그렇겠지.' 하고 생각하며, 오직 불사를 위한 원력으로 살아왔다. 그때 함께 했던 어른스님들은 돌아가시고 없지만 5만 보살님들과 신장님들의 원력과 가피가 함께한 덕이라고 스님은 애써 자신의 노고를 감추려 한다. 그러나 스님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육수암은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스님은 1962년 여섯 살 먹은 아이를 한 명 키운 적이 있는데, 아주 예쁘고 재주 있고 성품이 착했다. 당시 종이나 연필이 없어 모래에 글씨를 써서 가르쳤으며, 먹을 것이 없어 도토리를 주워 된 장을 넣고 지져서 함께 먹고는 했다. 스님이 육수암을 짓게 된 데는 다음과 같은 내력이 있다. 당시 월정사 주지 스님과 시자와 스님 이렇게 셋이서 육수골로 올라갔다. 마침 그곳은 여러 사람이 공부를 하고 나와 토방 집만 휑하니 비어 있었는데, 공간이 너무나도 협소했다. 이에 스님은 그 터에다 53평 규모의 선방을 짓기로 주지스님과 약속을 했다. 그런데 큰스님이 서울에서 내려오시더니 거기에다 다리를 놓아야 건너다닐 게 아니냐.'고 하셨다. 그러면서 “거기에다가 선방만 덜렁 지어놓으면 그곳에 거주하는 비구니들 뒤치다꺼리를 해야 되고, 겨울이면 또 조계골에서 내려오는 모진 바람을 어떻게 견디어내려느냐?" 하시면서 “그러지 말고 조용히 거기서 공부나 열심히 하라.”고 했지만 스님은 이에 굴하지 않고 불사를 시작했고 육수암을 완공했다. 본래 그 안에 옛날부터 터가 있었고 그곳에 계신 부처님이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었는데, 스님이 선방을 크게 지으려고 54평으로 설계하여 현재의 위치로 옮겨지었다. 오래 전부터 스님은 그곳에 절을 지으려고 나무를 준비해두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호우가 쏟아져 다음날 아침 나무가 모두 다 떠내려가고 말았다. 깜짝 놀란 스님들이 나무를 찾아서 하류로 내려가 보니 한 곳에 다 모여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단 한 개도 떠내려가지 않았다고 한다.
스님은 절을 한번 시작하면 무조건 천배가 기본이었다. 스님은 또한 부처님 가피로 불사를 시작하면 항상 끝까지 마무리를 잘하게 되어 너무나도 감사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스님은 이렇게 오대산에서만 50년 넘게 살다 보니 볼 일이 있어 밖에 나가면 두 집 밖에 들르지 못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개인적으로 친하게 지내는 집이 두 집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만큼 스님은 평생을 부처님 일에만 매달려서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월정사로 들어오다가 사천왕문에 못 미쳐서 오른쪽으로 들어가는 길을 따라 오 분쯤 걸어가면 산사 분위기와는 조금 다른 현대적인 건물이 보이는데, 이곳이 바로 뇌묵스님이 재건한 육수암이다. 지금은 비구니스님의 참선도량으로 쓰이고 있는데, 만월산 끝자락 양지바른 곳에 자리 잡았고 주변에는 봄, 가을에 걸쳐 많은 자생화가 피는 아름다운 도량이다. '육수암' 의 편액은 큰스님께서 손수 써주신 글씨이다.
오대산 사고사 영감란야(靈鑑蘭若) 중창
영감난야는 사명대사(四溟大師) 유정(惟政)스님께서 주석하였던 사찰로 알려져 있다. 1961년 비구니 뇌묵(雷默)스님이 소실된 사찰을 새롭게 건립했다. 일제 강점기에 오대산사고(五臺山史庫)는 일본인들에 의해서 유린되어 『실록』과 『의궤』는 일본으로 반출되기에 이르고, 속살을 빼앗기고 껍질만 남은 사고는 역시 1.4후퇴 때 아군들에 의해서 전소되는 비운을 겪게 된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이를 안타깝게 여긴 뇌묵스님이, 폐허 뒤쪽에 건립한 사찰이 바로 옛 이름을 다시 사용한 영감암이다. 오대산사고가 현대와 같은 모습으로 재건된 것은 1989년의 일이다. 즉 영감암은 사고가 들어설 때 절터를 내주고, 사고가 사라진 후에는 먼저 건축되어 근 30년 가까이나 사고지를 지켜낸 것이다. 영감암의 영감(靈鑑)은 신령한 거울이라는 의미로, 이는 우리 마음에 갖추어져 있는 본성을 상징하는 표현이다. 또 영감난야라고 할 때의 난야(蘭若)는, 인도어 아란야(araya)의 줄임말로 청정한 수행처라는 의미이다. 즉 인간의 본성을 찾는 선수행의 청정한 수행처가 바로 영감난야인 것이다. 영감암은 사고사라고도 하는데, 이는 사고지에 함께 위치하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다. [출처] 여행은 행복이다(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ohmark/221219653338)
불퇴전의 정진력
뇌묵스님의 은사스님은 봉업(奉業)스님인데, 김일현 스님과 송왕호 스님의 손주 상좌라고 한다. 스님이 아끼던 상좌 혜송스님은 선방에 입방할 날을 보름 앞두고 급성 간염으로 1주일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일로 스님이 얼마나 상심이 컸던지 지병을 얻게 되었는데, 은사스님께서 유물로 남겨준 『법화경』을 가지고 60세 되던 해부터 사경을 했다. 출가 때의 일이다. 인홍스님께서 은사스님에게 “우리 지장암에 가서 3년만 입승을 봐주시면 상좌를 드리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런데 은사스님이 지장암에 오자마자 뇌묵스님이 입산을 하게 되었다. 그 뒤 스님은 23세에 수덕사에 트럭을 타고 가다가 사고를 당해 척추를 다쳤고, 일생을 불편한 몸으로 불사를 하고 선방에 다니며 용맹정진을 거듭했다. 그 후 스님은 40년을 오로지 수행과 불사에 전념하며 지냈고, 그러다보니 수술하기도 힘들 만 큼 심한 골다공증에 걸려 척추에 보형물을 넣어 간신히 엮어놓았다고 한다. 거동이 불편한 몸이지만 수행 정진에 소홀하지 않는 스님은 특별히 후학들에게 강조하는 말씀이 있다. '생각 그 자체가 망상(妄想)이니 있는 그대로 살아라.' 낮게 내리는 어둠 속에서 저녁예불을 모시러 법당으로 가는 스님의 모습에 후학들의 고개는 저절로 숙여진다. 어둠이 내리는 시간이면 큰절의 범종 소리가 이 법계에 항상 울려 퍼지듯 늘 건강한 모습으로, 맑고 푸르른 오대산 자락만큼 그윽하고 깊은 향기로 오래 오래 환한 등불이 되어주길 후학들은 간절히 바라고 있다. 수계제자로 혜운(慧耘)·혜능(慧能)·혜향(慧香)·불퇴(不退)스님 등이 있다.
육수암
육수암(六手庵)은 월정사 산내암자로 월정사의 월정교를 건너 오른쪽 가파른 길을 약 100여 미터 올라가면 얼굴을 내민다. 육수암은 본래 육수관음암이었고, 그 터는 월정사에서 육수골로 불리는 곳으로 현재의 위치보다 위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절 이름을 육수암이라 지은 것은 도량에 육수관음상(六手觀音像)을 주불로 모시고 있기 때문이다. 1960년대에 여섯 비구니스님들이 토굴을 짓고 공부하다가 1979년 탄허스님이 새로 잡아준 지금의 절터에 법당을 세우고 육수암이라 이름 지었다. 육수암 현판 글씨도 탄허스님이 쓴 것이다. 1982년부터 법당에서 선원을 열었으며, 1990년 요사채 건립 불사를 하여 건평 120평의 2층 요사채를 세웠다. 1997년 단청과 요사채 불사를 다시 시작하여 1998년에 마쳤다. 육수관음상은 자장율사가 월정사를 창건할 때 모신 불상이라고 한다. 월정사는 한국전쟁 때 크나큰 전화를 입었다. 당시 한암 큰스님이 지킨 상원사를 제외하고 모든 당우와 불상이 소실되었 는데, 오직 이 육수관음상만 한 스님이 업고 피난을 가서 무사했다. 전쟁이 끝나고 월정사에 모셨다가 육수암이 재건되면서 모시게 되었다.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 뜨란출판사, 2007, pp. 398~406.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56.
- ‘여행은 행복이다’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ohmark/221219653338)
- 영월 금몽암(다음카페), 65년 부터 2002년까지의 강릉 사기막 용연사 시절 인연사진들 모음 https://cafe.daum.net/ganglerngbohyunsa/Igk9/74
- [사진출처] 상구보리 하화중생(다음 카페, https://cafe.daum.net/jungmanroom/Bzfu/203?q=%EC%9C%A1%EC%88%98%EC%95%94&re=1)
- [사진출처] 불국정토를 가꾸는 사람들(다음 카페, https://cafe.daum.net/buddhaworld/Jney/1386?q=%EC%98%81%EA%B0%90%EC%82%AC&re=1)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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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묵(雷默)스님 | 본항목 | 뇌묵스님(雷默, 1919~2020) | 雷默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뇌묵스님(雷默,_1919生,_비구니) |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 항목2 | 관계 | 속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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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묵(雷默)스님 | 삼현문중(三賢) | ~의 일원이다 | |
뇌묵(雷默)스님 | 봉업(奉業)스님 | ~의 수계제자이다 | |
뇌묵(雷默)스님 | 장성 백양사 천진암 | ~에서 출가하다 | |
뇌묵(雷默)스님 | 한암(漢岩)스님 | ~(으)로부터 계를 받다 | 사미니계 |
뇌묵(雷默)스님 | 동산(東山)스님 | ~(으)로부터 계를 받다 | 비구니계 |
뇌묵(雷默)스님 | 강릉 죽림사 | ~을(를) 창건하다 | |
뇌묵(雷默)스님 | 영감난야(현 영감암) | ~을(를) 중창하다 | |
뇌묵(雷默)스님 | 평창 월정사 육수암 | ~을(를) 중창하다 | |
뇌묵(雷默)스님 | 평창 월정사 육수암 | ~을(를) 설립(건립)하다 | 칠보선원 |
뇌묵(雷默)스님 | 안거 | ~을(를) 성만하다 | 예산 수덕사 견성암 |
지도
- 육수암 :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63-8
주석
- ↑ 한암스님 하사
- ↑ 성철스님 하사
- ↑ 일현(一玄, 1920~1991)스님의 어머니. 1927년 봉업스님과 일현스님이 덕숭산 수덕사로 입산출가 (출처 : 불교신문 http://www.ibulgy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