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에서 국민학교를 졸업한 스님은 1963년 3월 37세의 결코 적지 않은 나이에 스님이 되어 생사윤회를 벗어나야 한다.’는 말을 듣고 발심을 하였다. 수행자가 되어 성불하기 위해 스님은 내원사에서 지선(智禪)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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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에서 국민학교를 졸업한 스님은 1963년 3월, 37세의 결코 적지 않은 나이에 스님이 되어 생사윤회를 벗어나야 한다.’는 말을 듣고 발심을 하였다. 수행자가 되어 성불하기 위해 스님은 내원사에서 지선(智禪)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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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가 당시 내원사는 [[수옥스님(守玉, 1902生, 비구니)|수옥스님]]께서 주지로 계시고, 현재 불탑사에 계신 사형 법형(法衡)스님이 재무 소임을 맡고 계셨다. 선방에서는 보살들도 받고 있었는데, 대중이 30여 명 정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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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가 당시 내원사는 [[수옥스님(守玉, 1902生, 비구니)|수옥스님]]께서 주지로 계시고, 현재 불탑사에 계신 사형 [[법형스님(法衡, 1921生, 비구니)|법형(法衡)스님]]이 재무 소임을 맡고 계셨다. 선방에서는 보살들도 받고 있었는데, 대중이 30여 명 정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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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은 행자 시절 지객과 사무실 소임을 보았으며, 사미니계를 받고 나서는 불영사, 화운사, 진주 대원사에서 각각 한 철씩 안거를 하고 그 뒤로는 내원사에서만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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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은 행자 시절 지객<ref> 손님을 보살피는 소임 </ref>과 사무실 소임을 보았으며, 사미니계를 받고 나서는 불영사, 화운사, 진주 대원사에서 각각 한 철씩 안거를 하고 그 뒤로는 내원사에서만 지냈다.
[[혜운스님(慧雲, 1911生, 비구니)|안혜운 스님]]께서 내원사 주지를 사실 때에 법전스님은 재무 소임을 보았는데, 가사 불사를 해서 모은 돈으로 선원 축대공사를 하였다. 그런데 기술이 모자란 탓인지 그렇게 힘들게 공사한 선원 축대가 한겨울이 지나고 나자 시멘트가 떨어져 재공사를 해야만 했다.
[[혜운스님(慧雲, 1911生, 비구니)|안혜운 스님]]께서 내원사 주지를 사실 때에 법전스님은 재무 소임을 보았는데, 가사 불사를 해서 모은 돈으로 선원 축대공사를 하였다. 그런데 기술이 모자란 탓인지 그렇게 힘들게 공사한 선원 축대가 한겨울이 지나고 나자 시멘트가 떨어져 재공사를 해야만 했다.
법전(法田)스님은 1927년 4월 9일 경남 김해군 대저면 출두리에서 아버지 김양근(金陽根)과 어머니 민덕년 사이에서 1남 1녀로 태어났다. 본관은 김녕이며, 이름은 김희자이다.
출가 동기
김해에서 국민학교를 졸업한 스님은 1963년 3월, 37세의 결코 적지 않은 나이에 스님이 되어 생사윤회를 벗어나야 한다.’는 말을 듣고 발심을 하였다. 수행자가 되어 성불하기 위해 스님은 내원사에서 지선(智禪)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출가 당시 내원사는 수옥스님께서 주지로 계시고, 현재 불탑사에 계신 사형 법형(法衡)스님이 재무 소임을 맡고 계셨다. 선방에서는 보살들도 받고 있었는데, 대중이 30여 명 정도 있었다.
스님은 행자 시절 지객[1]과 사무실 소임을 보았으며, 사미니계를 받고 나서는 불영사, 화운사, 진주 대원사에서 각각 한 철씩 안거를 하고 그 뒤로는 내원사에서만 지냈다.
안혜운 스님께서 내원사 주지를 사실 때에 법전스님은 재무 소임을 보았는데, 가사 불사를 해서 모은 돈으로 선원 축대공사를 하였다. 그런데 기술이 모자란 탓인지 그렇게 힘들게 공사한 선원 축대가 한겨울이 지나고 나자 시멘트가 떨어져 재공사를 해야만 했다.
그때마다 경주 바닷가에서 돌을 싣고 와 축대를 다시 쌓곤 하였는데, 기둥 1개에 모래와 자갈, 그리고 시멘트가 각각 2트럭씩 소요되는 대공사였다.
또 내원사에서 부산으로 시장을 보러 갈 때는 온천장에서 장을 본 뒤에 장보따리를 버스에 싣고 터덜거리며 용현 (중방리)까지 1시간가량을 가서 다시 그곳에서 장보따리를 소가 끄는 달구지에 옮겨 싣고 내원사까지 10리 (1시간) 길을 걸어서 올라갔다. 당시 내원사는 제사가 많지 않았지만 축대 불사와 가사 불사 등 불사가 계속되어서 장을 많이 봐야 했다.
생사윤회를 벗어나고자
스님은 소임을 맡고도 중간 중간 안거를 다녔는데, 공부하려고 애쓰다가 그만 병을 얻는 바람에 속가에서 잠시 치료를 하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만공어록』을 읽었다. 당시 『만공어록』이 처음으로 세상에 나오자 스님은 반야사에서 책을 구입하여 타다 남은 초 토막을 겨우 얻어 책장이 닳도록 읽고 또 읽다가 잠깐 졸면서 꿈을 꾸게 되었다. 꿈속에 웬 군인들이 총을 들고 들락날락하면서 ‘지금 하늘에서 폭격이 떨어져서 우리가 경비를 서는 중이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 순간 잠이 깼는데, 스님이 깜빡 잠이 든 사이 집 뒷산이 폭우로 무너져 스님 집 바로 옆을 흙더미가 덮쳤다.
당시 마을 사람들이 3일 동안 학교로 대피해 숙식을 해야 할 정도로 큰 산사태였지만 스님이 화를 면하자 다들 ‘스님 계신 곳은 역시 다르다’며 탄복을 했다. 스님은 신장님이 도우신 덕분이라 여겼고, 그 일로 생각지도 않은 포교를 하게 되었다고 회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