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가 전부터 선조의 계비인 인목대비를 남다른 인연을 이어나갔다. 인목대비가 정사로 고통받던 순간에도 스님은 그 곁을 유일하게 지켰다. 선조 39년 인목대비가 영창대군을 낳자, 소북파는 영창대군을 세자로 책봉하고, 대북파는 서자인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려 하였다. 선조가 급사하고 광해군이 즉위하고, 인목대비의 아들인 영창대군을 폐서인시킨 뒤 살해하였고, 인목대비를 폐비시키고 서궁(西宮)에 유폐시켰다. 이러한 과정에서 예순스님은 목숨을 걸고 인목대비를 만나며 바깥 소식을 전하며 비통한 마음을 위로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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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순스님은 출가 전부터 선조의 계비인 인목대비와 남다른 인연을 이어나갔다. 인목대비가 정사로 고통받던 순간에도 스님은 그 곁을 유일하게 지켰다. 선조 39년 인목대비가 영창대군을 낳자, 소북파는 영창대군을 세자로 책봉하고, 대북파는 서자인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려 하였다. 선조가 급사하고 광해군이 즉위하고, 인목대비의 아들인 영창대군을 폐서인시킨 뒤 살해되었으며, 인목대비를 폐비되어 서궁(西宮)에 유폐당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예순스님은 목숨을 걸고 인목대비를 만나 그녀에게 바깥 소식을 전해주며 비통한 마음을 위로해주었다.
예순스님은 1587년(선조 20년) 인조반정 1등 정사공신인 이귀(李貴, 1557~1633)의 딸로 태어났다. 15세에 김자겸(金自兼)과 혼인하였으나 결혼 후 4년만에 남편이 사망하였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책을 가까이 했던 예순은 결혼 후 불교를 좋아하는 남편 김자겸과 함께 불서를 탐독하고 수행했다. 이들이 부부라기보다는 도반으로 불교 수행을 할 때 오겸의 서자 오언관이라는 자도 이들과 함께 수행에 동참했다. 김자겸은 일찍이 말하기를 “나는 그대와 같은 아내과 있고 오언관과 같은 도우(道友)가 있으니 일생의 행복이다.”라고 말했다. 김자겸은 병사하기 전날 자기가 다음날 죽을 것을 미리 일러주었으며 오언관에게 “내 아내가 (수행에 있어) 나보다 나으니 내강 있는 것과 다름이 없다. 자내는 의심하지 말고 내가 있을 때처럼 서로 찾아 불도를 논하라.”고 당부하였다.
인목대비와의 인연
예순스님은 출가 전부터 선조의 계비인 인목대비와 남다른 인연을 이어나갔다. 인목대비가 정사로 고통받던 순간에도 스님은 그 곁을 유일하게 지켰다. 선조 39년 인목대비가 영창대군을 낳자, 소북파는 영창대군을 세자로 책봉하고, 대북파는 서자인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려 하였다. 선조가 급사하고 광해군이 즉위하고, 인목대비의 아들인 영창대군을 폐서인시킨 뒤 살해되었으며, 인목대비를 폐비되어 서궁(西宮)에 유폐당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예순스님은 목숨을 걸고 인목대비를 만나 그녀에게 바깥 소식을 전해주며 비통한 마음을 위로해주었다.
청룡사 불사
광해군의 폭정은 정변의 구실을 주었고, 1623년 인조반정으로 인조가 왕위에 오른 후 인목대비도 복호되어 서궁에서 창덕궁으로 환궁하였다. 이후 인목대비는 예순스님에게 청룡사 불사를 명하였다. 1624년(인조 2년) 청룡사 불사를 완성하였고, 강화도 교동도에서 죽은 영창대군의 위패를 청룡사로 모셔와 천도재를 지내주었다. 그러나 19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으로 청룡사는 퇴락하고 난이 끝난 후 다시 중수되었다.
청룡사(靑龍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조계사의 말사로, 종로구 숭인동에 위치한다. 922년(고려 태조 5)에 도선(道詵) 국사의 유언에 따라 태조 왕건이 어명을 내려 창건했다. 풍수지리적으로 한양의 외청룡(外靑龍)에 해당하는 산등에 지었다고 하여 사호를 청룡사라 하였다.1036년(정종 2년)에 만선 비구니스님이 퇴락한 절을 창건 이후 처음으로 중창하였고 이후에도 여러 차례 중창하여 10차의 중창 역사를 갖고 있다. 1923년 다시 옛이름인 청룡사로 불리게 되었고 1950년대에 대대적인 중창이 있었으며 1973년에 다시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창건배경과 역사
청룡사(靑龍寺)는 922년(태조 5) 도선(道詵, 827~898) 국사의 유언에 따라 왕명으로 창건되었다. 풍수지리적으로 한양의 외청룡(外靑龍)에 해당되는 산등성이에 지었다고 하여 절 이름을 청룡사라 하였다고 한다. 제1대 주지로 비구니 혜원(慧圓) 스님이 주석한 이래 줄곧 비구니 스님만이 주석한 것이 특색이다. 고려에 와서는 1036년(정종 2)에 만선(萬善) 스님이 처음으로 중창하였고 1158년(의종 12) 회정(懷正) 스님이 두 번째로 중창하였는데, 이때 이 부근에서는 청룡사 동북쪽 고개 너머에 있는 보문사(普門寺) 창건 이후로 43녀 만에 처음 세워진 절이라 하여 "새절 승방"이라고도 불렀다. 1299년(충렬왕 25) 중국 원나라의 침입으로 절이 황폐화되자 지환(知幻)스님이 중창하였다. 고려 말에는 공민왕비 혜비(惠妃)가 머물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태조의 딸 경순 공주가 머물렀으며, 1405년(태종 5) 무학(無學) 대사를 위하여 왕명으로 중창했다. 창건 당시 도선 국사를 위하여 창건한 이래 두 번째로 왕명에 의한 중창인 것이다. 이어서 1512년(중종 7)과 1624년(인조 2)에도 법공(法空)스님과 예순(禮順) 스님이 각각 중창하였다. 1771년(영조 47)에는 단종의 왕비 정순왕후(定順王后, 1440~1521)가 이곳에 있었다 하여 영조가 직접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라는 글을 내려 비석과 비각을 세우게 했는데, 이때 절 이름을 잠시 정업원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이 비석과 비각은 현재도 절에 남아 있다. 1813년(순조 13)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이듬해 묘담(妙潭)·수인(守仁) 두 스님에 의해 중창되었고 1823년(순조 23) 왕명으로 다시 옛 이름인 청룡사로 고쳐 부르게 하였다.
1902년(고종 6) 정기(正基)·창수(昌洙) 스님이 중창하였고, 1918년과 1932년에 상근(詳根) 스님이 중창하였다. 근대에 와서는 1954년~1960년 사이에 윤호(輪浩) 스님이 전체적으로 대대적인 중창을 하였고 대웅전은 다시 1973년에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청룡사는 왕실의 여인과 관계가 많은 곳이다. 앞서도 말했듯이, 고려 말의 명신 익재 이제현(李齋賢)의 딸이자 공민왕비인 혜비(惠妃)가 이곳에 거주하였으며, 또 조선 초 태조의 딸 경순 공주가 이곳으로 와 머무는 등 왕실과의 관계가 많았던 것이다. 특히 세조에 의해 폐위되고 강원도 영월까지 유배가 결국 그곳에서 죽게 된 단종(端宗, 1441~1457)은 유배 갈 때 왕비 정순 왕후와 이곳 우화루(雨花樓)와 영리교(永離橋)에서 마지막 이별을 하고, 이어 왕비는 영월이 있는 동쪽이 가장 잘 보이는 이곳 청룡사에서 스님이 된 비극이 서려있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