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초스님(一超, 1943生, 비구니)"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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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1월 5일 (토) 09:32 판
일초(一超)스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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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명 | 일초(一超) |
법호 | 경월(鏡月) |
속명 | 정선택(鄭善澤) |
출생 | 1943.11.11. |
출가 | 1962년 |
입적 | |
사찰 | 동학사 승가대학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 789 |
특이사항 |
목차
정의
일초스님은 20세 때 출가해 동학사 강원을 졸업한 후 동학사 강원 중강 강사, 승가대학 학장, 동학사 주지 소임에 이어 2002년부터 현재까지 승가대학장을 맡고 있는 대한민국 비구니스님이다.
생애
연도 | 내용 |
---|---|
1943 | 전남 담양 출생 |
1962 | 광주 신광사에서 경인(敬仁)스님을 은사로 출가 |
1963 | 고암(古庵)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
1965~1971 | 동학사 강원 졸업 |
1967 | 해인사에서 자운(慈雲)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
1971~1977 | 동학사 강원 중강 역임 |
1977 | 동학사 호경스님으로부터 전강 받음 |
1977~1981 | 동학사 승가대학 강사 |
1982 | 내원사 안거 성만 |
1984 | 동학사 강원 학장 취임 |
1984~1994 | 동학사 강주 |
1986 | 동학사 주지 취임
가람 수호 및 중창 불사(실상선원, 화경원, 화엄원, 강설전 등 10동) |
1994~2000 | 대전 보현불교대학 학장 및 금화사 주지 |
1998~2001 | 불교방송 라디오 경전공부 『능엄경』, 『금강경』, 『열반경』, 『초발심자경문』, 『선가귀감』 등 방송 |
2002 | 동학사승가대학 학장 재취임 |
2002 | 동학사화엄승가대학원 학장 |
2017 | 일초 스님 서한집 '우리가 사랑할 날이 얼마나…' 출간 |
2022 | 현재 동학사 화엄승가대학원장 |
문중 | 삼현(三賢)문중 |
수행지침 | 꿈이 꿈인 줄 알면 꿈이 아니요, 꿈이 꿈인 줄 모르면 영원히 꿈이다. |
생활신조 | 인욕과 자비를 실천하라 |
저서 및 작품 | 『유식 30송 해석서』, 『대총상법문(大總想法門)(해석, 주해)』외 다수 |
상훈 | 총무원 감사패 수상(1990) |
취미 | 사군자 |
수계제자 | 선주(善主) ·현우(玄宇)· 현오· 현욱· 선광· 현정· 현명(賢明)· 선재(善財) |
활동 및 공헌
출생
경월(鏡月) 일초(一超)스님은 1943년 11월 11일 전남 담양군 남면 지곡리 116번지에서 송강 정철 선생의 13대 손으로 유복한 가정의 장녀로 태어났다. 본관은 연일이며, 이름은 정선택이다.
스님의 13대 할아버지인 송강 정철 선생은 박인로, 윤선도와 함께 한국 고전문학사의 3대 시인이자 가사 문학의 일인자로 평가받고 있다. 당쟁의 소용돌이가 가장 극심했던 16~17세기를 살면서 정치적인 부침을 거듭하는 파란만장한 일생 속에서도 찬란한 문학의 꽃을 피우신 분이다. 스님이 태어났을 때 어머니가 고기를 넣은 미역국을 먹고 어린 아기에게 젖을 먹였다. 그런데 전생부터 닦아온 불연이 지중해서인지 스님의 온몸에 알레르기 반응이 나타나자 깜짝 놀란 어머니는 그 후 10여 년간 고기가 들어간 국을 일절 드시지 않았다.
출가동기
어려서부터 사색을 비롯하여 책을 읽고 글쓰기를 즐겨하는 등 문학에 관심이 많았던 스님은 대학 1학년 때 우연히 길을 걸어가는 한 스님의 뒷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러고는 솟아오르는 환희심에 가득 차 자신도 모르는 사이 스님의 뒤를 따라가 산사의 담박한 모습에 취해 발심을 하게 되었다. 그 뒤 스님은 부모님의 허락을 얻어 해인사 삼선암에서 경인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그때가 1962년 7월 26일 스님의 나이 스무 살이었다.
행자시절
스님은 행자 시절 삼선암에 있으면서 한글 대장경을 처음 접하고 불교의 이치는 물론 거룩한 부처님의 법을 이 세상에서 제일 잘 아는 것 같은 생각이 들면서 마치 천하를 얻은 듯한 큰 감동을 받았다. 그런 영특한 제자를 가상히 여기신 은사스님이 강사를 모시고 와서 『초발심자경문』을 배우게 했고, 이듬해인 1963년 4월 5일 동학사 강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스님은 치문반 재학 시절, 도반을 사고로 잃고 생의 무상함을 크게 깨닫게 되었다.이후 참선에 일념을 쏟아 끊임없는 학구욕이 일어났으나 주변 상황이 여의치 않자 부처님 전에‘앞으로 저는 부처님 말씀을 세계에 전하는 전법자가 되겠으니 저에게 힘을 주십시오.’라는 발원을 올리게 되었다. 스님의 발원은 훗날 부처님의 가피로 되살아나 실현되었다. 어느 날 정태경 스님이 화운사에서 사교반 학인들을 많이 데려와 법문을 시킨 일이 있었다. 그때 태경스님은 동학사 치문반 학인들을 둘러보며 “화운사 학인들이 법문하는 것을 잘 보고 너희들 중에서 해볼 사람이 있으면 한번 해봐라.” 하시는 것이었다.
이 말씀을 듣고 스님은 동학사 학인들에게 선의의 경쟁심을 느끼는 듯한 묘한 분심이 나서 치문반인 자신의 위상도 헤아릴 겨를 없이 법상에 올라가서 용기 있게 법문을 하였다. 그러나 훗날 그때의 배짱은 다 어디로 갔는지 스님은 대교를 마치고 학인들을 가르치는 입장이 되어 강단에 올라서자 눈앞이 깜깜하여 하나도 모르겠더라며 그 시절을 회상하였다.
동학사 중강
이렇듯 수행 정진의 생활을 충실히 하며 지내던 중 1967년 해인사에서 자운화상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계하였다. 그 후 스님은 동학사에서 8년간 조사스님들의 어록부터 『화엄경』까지 모두 보고 1971년 3월 15일 졸업을 하였다. 그리고 곧바로 호경 강사스님의 추천으로 8년간 중강을 역임하고, 1977년 정호경 강백으로부터 전강을 받아 강사로 취임하였다.
내원사 선방 화두참구
스님은 동학사에서 1977년부터 1981년까지 5년 동안 학인들을 가르치던 중 암초와도 같은 벽에 부딪치게 되었다. 이때 스님은 『기신론』의 ‘진속일여(眞俗一如)’의 실체를 마음 가운데 타파하지 않고는 안 되겠다는 일념을 세워 강사를 그만두고 내원사 선방에 가서 화두를 참구하면서 구도의 열정을 드높였다. 화두참구 이전에는 누가 법문을 청하거나 질문을 해오면 두려움이 앞섰다고 한다. 그리하여 마음이 답답할 때마다 큰스님을 찾아 뵙고 “태평양 한 가운데 빠진 것같이 이리 보아도 언덕이 보이지 않고, 저리 보아도 깜깜하기만 한데 무엇을 하겠습니까?” 하고 여쭙곤 하였다. 그러면 큰스님은 “그대로 밀어봐라.” 하시며 그때그때 힘을 얹어주셨다. 큰스님의 격려를 바탕으로 정진에 정진을 거듭하여 15년이 훌쩍 지나자 스님은 그제야 비로소 언덕이 보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자신에게 매서우리만치 엄격하며 잠시도 눈 돌릴 틈 없이 불야투구의 자세로 애써서 공부한 결과 스님은 나름대로 의문을 풀게 되었다.
1984년 다시 동학사 학장 취임
1984년 다시 동학사 학장으로 취임하여 학인들을 가르치다 보니 예전과는 다른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학인이든 누구든 그 무엇에 대해 질문하여도 걸림 없이 두세 시간은 설할 수 있는 힘이 생겼고, 경을 보아도 안목과 지견이 생겼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과 같이 모든 것의 근원은 마음이니 마음을 타파한 후 걸림이 없는 길을 스님은 마침내 찾아냈던 것이다. 스님이 동학사 학장으로 취임할 당시 동학사는 공부할 수 있는 마땅한 공간이 별로 없었고, 그 나마 있는 공간도 협소하여 불편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동학사 주지 취임 및 불사
늘 학인들의 불편함을 유념하며 안타까워하던 스님은 주지 소임을 겸하면서 4년에 걸쳐 실상선원을 비롯하여 강설당, 화경원, 화엄원, 조사전, 식당, 목욕탕, 화장실 등 11동의 불사를 중창하여 도량을 가꾸어냄과 동시에 가람을 수호하는 열성을 보였다. 불사를 하고 나서야 학인들이 생활하고 수행하는 데 불편함이 없겠다 싶어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1990년에 주지 소임을 사임한 후, 강사로서 학인을 가르치며 공부를 하다 보니 이전보다 학인들에 대한 애정이 약해져서 경책이나 공사를 하지 않는 큰 실책을 범한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고 하며 늘 학인들을 우선시하며 걱정하는 마음을 잃지 않았다. 소신과 책임감과 최선의 노력 을 다하는 삶을 일관해온 스님은 1994년 4월 15일 동학사 강원 학장을 사임하였다. 그 후 스님은 사재동 박사를 비롯한 실천불교의 도효근 교수, 강관현 거사, 종범스님, 도문스님의 도움을 얻어 일반인을 위한 최초의 불교대학인 대전불교대학을 설립하였다. 처음엔 300여 명 정도가 졸업을 하였으나 18기에 이르는 동안 무려 1,400여 명에 이르는 광대한 불자를 탄생시켰다. 스님은 1995년부터 1998년까지 보현불교대학 학장으로 재직하며 대중포교에 전념하였다.
불교방송 강의
또한 스님은 1997년부터 불교방송에서 『초발심자경문』, 『금강경 오가해』, 『능엄경』, 『열반경』 등을 강의하였고, 1999년 KBS 라디오에서 외국동포에게 보내는 방송을 진행하였다. 스님이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경은 『초발심자경문』으로 그 중에서도 ‘난행(難行)을 능행(能行)하면 존중여불(尊重如佛)’, 즉 ‘남이 하기 어려운 것을 자기가 대신할 수 있다면, 그렇기에 부처님처럼 존중하는 것이다.’라는 구절을 가장 좋아한다. 이는 항시 자신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며 어려운 일을 몸소 실천하는 부처님의 전법자로 생활하는 스님의 삶을 대변하는 것과 다름없다. 불교방송을 진행하면서 많은 호응을 얻고 다수의 청취자로부터 감사의 말씀과 함께 격려와 찬사를 받은 스님은, 꼭 명예로운 자리가 아니라 하더라도 사람은 어디서 어떻게 살든 신념을 가지고 자기 몫을 제대로 하고 살면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고 생각한다.
다람살라에서 달라이라마 친견
다람살라에서 달라이라마를 친견할 때, 달라이라마가 질문을 하라고 하시기에 스님이 여쭈었다. “사과(四果) 성위(聖位)가 있는데 어느 정도 마음을 조복 받고, 어느 정도 수행을 하여야 그런 경계가 되겠습니까?" 그러자 달라이라마가 오히려 스님에게 물었다.
“승의 근본이 무엇입니까?”
“수행은 인욕이고, 이타는 자비입니다.”
달라이라마는 스님의 그 대답이 마음에 들었던지 6분 예정이었던 만남이 1시간의 대화로 이어졌다. 스님에게‘무엇을 하느냐’고 묻자 학인들을 교육하고 있다고 하니 달라이라마가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선약이 있어 달라이라마와 스님은 그쯤에서 아쉽게 작별을 고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역시 한 민족을 이끄는 지도자는 다르다는 것을 몸소 느꼈으며, 자비와 여유를 동시에 느끼게 해주는 분이셨다고 회고한다.
인욕과 자비를 강조하는 동학사 대강백
‘내가 지금 이 순간 죽는다면 다음 생에 인간이 될 수 있겠는가? 인간 중에서도 하천하지 않고 미련하지 않은 괜찮은 사람이 될 수 있겠는가? 하천하지 않으려면 복이 있어야 하고, 미련하지 않으려면 지혜가 있어야 하는데, 나에게 그러한 복덕과 지혜가 이루어져 있는가?’스님은 이 질문에 자신이 없었다고 한다. 지금까지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왔지만 그래도 부족하게만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한편 검박하고 검소한 지금의 생활에 감사함을 느낀다.‘수행자로서 우리는 이미 모든 것을 버렸는데 여기서 무엇 하나 얻지 못한다면 한 생을 헛되이 산 것과 마찬가지이니 해태심을 경계하여 안일에 빠지지 말고, 부지런히 공부하며 수행 정진을 거듭해야 함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스님은 말한다. ‘도(道)가 무엇입니까?’라는 누군가의 질문에 스님은 ‘도는 얼마나 더 자비로워지는가, 또 얼마나 잘 참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라고 일러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학인들이 속상하게 할 때마다 ‘내가 한 일도 내 맘에 들지 않을 때가 있는데, 자기 자신도 잘 모르는 것을 어떻게 남이 맞출 수 있겠는가? 맞추어 달라는 그 자체가 망상이다.’ 하며 스스로를 먼저 경책하였다. 스님은 사람이 길을 가다 넘어질 때 바위에 걸려 넘어지는 경우는 절대로 없고 대개 조그만 돌 뿌리에 걸려 넘어진다며, 아주 작은 것을 소홀히 했을 때 거기서 오는 재앙이 얼마나 큰가를 잊지 말고 항상 염두에 둘 것을 당부하였다. 세상살이는 그 어떤 것을 이루어도 꿈이요 못 이루어도 꿈인데, 단지 그 차이는 꿈이 꿈인 줄 아는 것과 꿈이 꿈인 줄 모른 채 사는 것에 있다며 자기 자신을 잘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또한 스님은 ‘세상 사람들이 우리 스님들에게 불교에 관한 것을 묻지 세상의 일반적인 것을 묻지는 않는다. 우리 것을 돈독히 하지 않으면 다른 이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이 없다.’고 강조하였다. 불교를 제대로 잘 알아야 타인을 가르칠 수 있는 지도자가 될 수 있음을 명심하며 생활하라는 스님은 세상을 떳떳하게 살고 계행을 잘 지켜 인욕하며, 모든 것을 볼 때 자비로워지기를 당부한다. 무릇 모든 수행자는 자비롭고 여유가 있어야 한다. 누가 욕을 해도 빙긋이 한번 웃어주고, ‘그래, 맞다.’ 하며 응수하고 자기 마음을 관찰하며 다스리는 것이 중요하다. 항상 자신을 점검하고 살펴 지혜와 복덕을 쌓고 업장의 소멸을 위해 젊었을 때 열심히 정진하여야 한다. 이 모두가 스님의 평소 지론이다. 스님의 바람은 강원에서 제대로 경을 보지 못한 사람이나 강원에 가지 못해 때를 놓친 스님, 참선하다가 경을 다시 보아야겠다는 뜻을 가진 스님들 또는 학인들과 함께 학림을 이루고 싶은 것이다.
2002년 동학사 승가대학 학장 재취임
2002년 7월 15일부터 다시 동학사승가대학 학장으로 재취임한 일초스님은 2022년 현재 동학사 화엄대학원장으로 재직 중이다. 수계제자로는 선주(善主)·현우(玄宇)·현오·현욱·선광·현정·현명(賢明)·선재(善財)스님 등이 있다.
저서
'우리가 사랑할 날이 얼마나 남았을까'는 동학사 승가대학원장이자 화엄학림 학장인 일초(一超·75) 스님이 학인 스님을 비롯한 지인들과 주고받은 편지를 모은 책으로 비구니 스님들의 삶과 수행 이야기가 잔잔한 감동을 선사한다. 또 이 책에는 일초 스님이 직접 쓰신 시(詩)도 수록됐다.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p. 148-154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377
- 법보신문 ‘동학사 승가대학원장 일초 스님’ 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80435
- 연합뉴스 https://www.yna.co.kr/view/AKR20170327156500005 “수채화처럼 맑은 편지…비구니 스님들 진솔한 삶 만나다”
- BTN 방송 “나는 영원한 행자다 [일초스님의 출가 1부]”
- BTN 방송 http://www.btn.co.kr/pro/Program_contents.asp?ls_StSbCode=CATPR_15&PID=P647‘일초스님의 대승기신론‘
- BBS 불교방송’일초스님 출가인연 이야기 [선림산책 11]‘
- 불교신문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216077 ’동학사승가대학 59회 . 화엄승가대학원 11회 졸업식 개최‘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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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초(一超)스님 | 본항목 | 일초스님(一超, 1943~ ) | 一超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일초스님(一超,_1943生,_비구니) |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 항목2 | 관계 | 속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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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초(一超)스님 | 삼현문중(三賢) | ~의 일원이다 | |
일초(一超)스님 | 경인(敬仁)스님 | ~의 수계제자이다 | |
일초(一超)스님 | 광주 신광사(두암동) [1] | ~에서 출가하다 | |
일초(一超)스님 | 고암(古庵)스님 | ~(으)로부터 계를 받다 | 사미니계 |
일초(一超)스님 | 자운(慈雲)스님 | ~(으)로부터 계를 받다 | 비구니계 |
일초(一超)스님 | 명사(明師)품계 | ~의 스님이다 | 20211021 품서 |
일초(一超)스님 | 공주 동학사 |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 동학사승가대학학장, 화엄승가대학원원장 |
일초(一超)스님 | 공주 동학사 |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 주지 |
일초(一超)스님 | 안거 | ~을(를) 성만하다 | 양산 내원사 |
지도
- 동학사 승가대학 :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 789
주석
- ↑ 1991년에 지산동에서 두암동으로 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