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두수(尹斗壽)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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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윤두수 |
한글표제 | 윤두수 |
한자표제 | 尹斗壽 |
분야 | 인물 |
유형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중종~선조 |
집필자 | 이현숙 |
자 | 자앙(子昻), 자앙(子仰) |
호 | 오음(梧陰) |
봉작 | 해원부원군(海原府院君) |
시호 | 문정(文靖)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533년(중종 28) 9월 |
사망 | 1601년(선조 34) 4월 |
본관 | 해평(海平) |
주거지 | 서울 청파역(靑坡驛) |
묘소소재지 | 황해도 장단부(長湍府) 동도(東道) 오음리(梧陰里) 선영(先塋) |
증조부 | 윤계정(尹繼丁) |
조부 | 윤희림(尹希琳) |
부 | 윤변(尹忭) |
모_외조 | 성주 현씨(星州玄氏) : 현윤명(玄允明)의 딸 |
형제 | (동생)윤근수(尹根壽) |
처_장인 | 창원 황씨(昌原黃氏) : 황대용(黃大用)의 딸 →(자녀)4남 2녀 |
자녀 | (1자)윤방(尹昉) (2자)윤양(尹暘) (3자)윤휘(尹暉) (4자)윤훤(尹暄) (1녀)이수(李峀)의 처 (2녀)신함(申涵)의 처 (서1자)윤간(尹旰) |
저술문집 | 『오음유고(梧陰遺稿)』, 『오음잡설(梧陰雜說)』, 『연안지(延安志)』, 『평양지(平壤志)』, 『기자지(箕子志)』, 『성인록(成仁錄)』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윤두수(尹斗壽) |
총론
[1533년(중종 28)∼1601년(선조 34) = 69세]. 조선 중기 명종(明宗)~선조(宣祖) 때의 문신. 좌의정과 영의정(領議政) 등을 지냈다. 봉작(封爵)은 해원부원군(海原府院君)이고, 시호(諡號)는 문정(文靖)이다. 자는 자앙(子昻)이며, 호는 오음(梧陰)이다. 본관은 해평(海平)이고, 거주지는 서울 청파역(靑坡驛)이다. 아버지는 군자감(軍資監)정(正)을 지낸 윤변(尹忭)이고, 어머니 성주 현씨(星州玄氏)는 부사직(副司直)을 지낸 현윤명(玄允明)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된 윤희림(尹希琳)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이조 판서(判書)에 추증된 윤계정(尹繼丁)이다. 의정부 좌찬성(左贊成)윤근수(尹根壽)의 형이며, 영의정윤방(尹昉)의 아버지이고, 이조 정랑(正郞)윤현(尹晛)의 삼촌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성혼(成渾)의 아버지인 청송(聽松)성수침(成守琛)과 이소재(履素齋)이중호(李仲虎)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나중에는 동생 윤근수와 함께 퇴계(退溪)이황(李滉)과 남명(南冥)조식(曹植)을 찾아가서 성리학의 정통 이론을 배웠다. 서인(西人) 손암(巽庵)심의겸(沈義謙) 및 우계(牛溪)성혼과 절친한 사이였다. 동생 윤근수와 맏조카 윤현(尹晛)과 함께 이른바 서인의 실세인 ‘3윤(尹)’을 형성하여, 동인(東人) 유성룡(柳成龍) 및 북인(北人)정인홍(鄭仁弘)과 크게 대립하였다.
명종 시대 활동
1555년(명종 10) 사마시(司馬試)의 생원과(生員科)에 1등 장원으로 합격하고, 1558년(명종 13) 식년(式年) 문과(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26세였다. 1559년(명종 14)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에 보임되었다가,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을 거쳐 홍문관(弘文館) 정자로 옮겼다.[『간이집(簡易集)』 권9 「의정부영의정구겸직해원부원군윤공신도비명(議政府領議政具兼職海原府院君尹公神道碑銘)」 이하 「윤두수신도비명」으로 약칭] 1560년(명종 15) 홍문관에서 차례로 승진하여 저작(著作)이 되었다가, 1561년(명종 16) 홍문관 부수찬(副修撰)으로 승진하였다.[『명종실록(明宗實錄)』명종 15년 10월 30일, 명종 16년 9월 3일] 이어 병조 좌랑(左郞)으로 옮겼다가, 홍문관 수찬(修撰)으로 승진하였으며,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으로 옮겼다가 1562년(명종 17) 이조 좌랑이 되었다.[『명종실록』명종 16년 10월 16일, 명종 16년 11월 5일, 명종 16년 11월 16일, 명종 17년 10월 20일]
당시 이량(李樑) 일파가 권력을 잡고 그 세력을 확장하고자 아들 이정빈(李廷賓)을 이조 좌랑에 추천할 것을 부탁하였으나, 이조 좌랑윤두수와 이조 정랑기대승(奇大升)이 단호하게 이를 거절하였다. 당시 젊었던 명종은 어머니 문정왕후(文定王后)와 외삼촌 윤원형(尹元衡)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그의 왕비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외삼촌 이량을 중용하였다. 이로 인하여 이량은 자기파 대간(臺諫)을 시켜서 윤두수 형제와 기대승 등을 탄핵하게 하였다. 1563년(명종 18) 8월 사헌부(司憲府)대사헌(大司憲)이감(李戡) 등이 윤두수와 박소립(朴素立), 기대승, 이문형(李文馨) 등 6명을 탄핵하여, 모두 파직하게 하였다. 사헌부 대사헌이감도 아들 이성헌(李成憲)을 한림(翰林)으로 삼으려고 했으나, 한원(翰苑)에서 기대승이 추천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기대승을 더욱 원망하고 있었다. 또 이량은 인순왕후의 동생인 조카 심의겸을 나무라기를, “너는 박소립과 기대승, 윤두수를 무엇 때문에 좋아하는가. 이문형이 너더러 ‘성인(聖人)’이라고 한다는데, 네가 과연 성인이란 말인가.” 한 적도 있었다. 외삼촌 이량으로부터 맹렬히 비난을 받은 심의겸은 이량 일파를 제거하기로 결심하였다.
윤두수 형제는 삭직(削職)된 후 파주(坡州)에 은거하여 살았는데, 얼마 뒤에 이량이 실각되었다. 이량의 세력이 너무 커지자, 인순왕후의 아버지 심강(沈鋼)이 아들 심의겸의 말을 따라 사위 명종을 설득하여 왕명으로 이량 일파를 몰아냈다. 이때 심강은 윤원형 일파와 손을 잡았는데, 1563년(명종 18) 9월 영의정윤원형과 우의정심통원(沈通源)이 아뢰기를, “삼가 성상의 교지(敎旨)를 받드니, 감격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박소립 등 6명 중에서 박소립과 기대승, 윤두수, 이문형은 전과 같이 등용하고, 윤근수와 허엽(許曄)은 아직 현직에는 제수하지 마소서.” 하였다. 그러자 명종이 대답하기를, “내 생각도 또한 그러하니,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명종실록』명종 18년 9월 15일]
1563년(명종 18) 10월 윤두수는 이조 정랑에 임명되어, 사림파(士林派) 인사들을 많이 등용하였다.[『명종실록』명종 18년 10월 19일] 그리고 이듬해인 1564년(명종 19) 7월에는 의정부 검상(檢詳)이 되었다가, 의정부 사인(舍人)으로 승진하였고, 이어 10월에는 성균관(成均館)직강(直講)을 거쳐 사헌부 장령(掌令)에 임명되었다.[『명종실록』명종 19년 7월 15일, 명종 19년 7월 20일, 명종 19년 10월 18일] 또 성균관 사성(司成)이 되었다가, 사복시(司僕寺)정(正)으로 옮겼다.[「윤두수신도비명」]
1565년(명종 20)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비로소 친정(親政)을 하게 된 명종은 외삼촌 윤원형 일파를 파직하여 조정에서 내쫓고, 사림파를 대거 등용하였다. 그해 3월 윤두수는 홍문관 부응교(副應敎)에 임명되었고, 동생 윤근수는 이조 좌랑에 임명되었다. 그때 윤두수는 빈전도감(殯殿都監)낭청(郎廳)을 맡아서 문정왕후를 태릉(泰陵)에 안장(安葬)하였는데, 상례가 끝나자,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가자(加資)되어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오위장(五衛將)을 겸임하였다. 5월에는 사간원에서 홍문관 부응교윤두수와 사복시 정심의겸을 탄핵하였다. 두 사람이 빈전도감 낭청으로 수고하였다고 하여 정3품 당상관으로 승품하였으나, 두 사람이 모두 자궁(資窮 : 당하관의 품계가 다 차는 것)이 다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566년(명종 21) 1월 친구 심의겸의 추천으로 윤두수는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에 발탁되어, 명종의 최측근이 되었다. 그리고 승정원 우부승지(右副承旨)와 승정원 좌부승지(左副承旨)를 거쳐 윤10월에는 승정원 우승지(右承旨)로 승진하였다.[「윤두수신도비명」]
1567년(명종 22) 3월 왕명(王命)을 잘못 출납하였다고 하여, 승정원 도승지(都承旨)이양원(李陽元) 이하 6승지가 모두 파직되었다.[『명종실록』명종 22년 3월 14일] 이때 윤두수는 형조 참의(參議)로 좌천되었다가, 그해 4월 심의겸에 의하여 다시 승정원 우승지로 복귀하였다.[『명종실록』명종 22년 3월 20일, 명종 22년 4월 2일] 6월에 명종의 병환이 아주 위독했는데, 승정원 우승지윤두수가 수상 이준경(李浚慶)에게 숙직하도록 권유하여, 영상이준경이 처음으로 숙직하던 날 명종이 34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그때 영의정이준경이 중추부(中樞府) 영사(領事)심통원과 함께 두 사람이 명종의 침소에 들어가서 명종에게 후사왕(後嗣王 : 뒤를 이을 임금)을 정하도록 재촉하였다. 그러나 명종은 이미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그러자 왕비 인순왕후가 3년 전인 1656년에 명종의 병환이 크게 위중하였을 때 이미 받아놓은 명종의 유명(遺命)을 공개하였다. 이에 따르면 후사왕으로 지명된 사람은 중종(中宗)의 서출 7왕자 중에서 막내 왕자 덕흥군(德興君)의 제 3남 하성군(河城君)이연(李㫟)이었다. 영의정이준경과 우승지윤두수 등이 나이 16세의 덕흥군을 맞이하여 왕위에 즉위하게 하니. 그가 바로 선조(宣祖)였다. 그때 명(明)나라 사신이 목종(穆宗)융경제(隆慶帝)가 등극한 조서(詔書)를 반포하려고 서울에 왔다. 우승지윤두수가 명나라 사신의 빈전(殯殿) 조문(弔問)과 황제의 조서 반포를 예절 및 법도에 맞도록 조절하여, 별다른 무리가 없었다.[「윤두수신도비명」]
선조 전반기 활동
1567년(선조 즉위년) 7월 윤두수를 사간원 대사간에 임명하였다.[『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선조 즉위년 7월 17일] 당시 선조는 16세의 나이로 즉위하였으므로, 명종의 왕후 인순가 수렴청정(垂簾聽政)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심의겸이 그의 친구 윤두수를 대사간에 임명하여, 어린 왕과 대비를 보필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사간원 대사간은 임금에게 정책을 간하고, 그 잘잘못을 직언(直言)할 수 있는 자리였는데, 윤두수는 성격이 과감하여 임금의 눈치를 보지 않고 서슴없이 바른 말을 잘 하였기 때문이었다. 1568년(선조 1) 이조 참의로 옮겼는데, 명나라 사신 성헌(成憲)과 왕새지(王璽之)가 오자, 임시 영위사(迎慰使)에 임명되어 사신을 영접하였다. 그해 8월 승정원 우승지에 다시 임명되어, 17세의 선조를 최측근에서 보필하였다.
1569년(선조 2) 홍문관 전한(典翰)기대승 등이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화를 당한 조광조(趙光祖)와 김식(金湜) 등을 현자(賢者)로 추대하려고 하자, 호조 판서김개(金鎧) 등의 훈구파(勳舊派)가 이를 적극 반대하였다. 김개는 기대승을 공격하면서 사림파 인사 5~6명을 함께 비난하다가 삭직되어 도성 밖으로 출송(黜送)당하였다. 그때 선조가 묻기를, “그 5~6명이란 누구,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하자, 심의겸이 아뢰기를, “이탁(李鐸)과 박순(朴淳), 기대승, 윤두수, 윤근수, 정철(鄭澈) 등이라고 합니다.” 하였다.[『선조수정실록』선조 2년 6월 1일] 당시 윤두수 형제와 기대승 및 정철 등의 젊은 사림파 인사들은 함께 뭉쳐 훈구파의 늙은 대신들과 싸웠는데, 사림파 인사들 거의 대부분이 심의겸의 추천을 통하여 정부의 요직에 등용되었다. 선조 초반기에 심의겸은 수렴청정을 하던 누이 인순대비를 움직여 조정에서 이준경과 김개 등의 훈구파 대신들을 몰아내고 젊은 사림파를 대거 등용하였던 것이다. 이에 선조가 20세가 되어 친정을 할 때 조정은 신진 사류(士類)로 넘쳐나서, 사림파가 정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을해년 동서분당(東西分黨)>이 일어날 때 박순과 정철, 윤두수와 윤근수 형제 등은 모두 심의겸을 지지하여 서인의 중심 인물이 되었던 것이다.
윤두수는 선조 초기에 승정원 좌승지(左承旨)를 거쳐서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이 되었다가, 다시 대사간이 되었다. 그 뒤에 중추부 첨지사(僉知事)를 거쳐 장례원(掌隷院) 판결사(判決事)가 되었으며, 또 병조 참의가 되었다가,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로 나가서 선정(善政)을 베풀기도 하였다.[「윤두수신도비명」] 1574년(선조 7) 문과(文科)의 시관(試官)에 임명되어, 전시(殿試)의 대독관(對讀官 : 구술시험을 담당하는 시험관)으로서 사림파의 인재를 뽑았다. 당시 사림파는 신구(新舊)로 나누어져 있었다. 신진 사류는 김효원(金孝元)을 중심으로 기성 사류에 대항하기 시작하였는데, 기성 사류는 소수에 지나지 않은 것에 비하여 신진 사류는 점점 많아지고 있었다.
1575년(선조 8) 을해년 동서분당이 발생하였다. 신진 사류의 김효원이 이조 정랑에 추천되자, 기성 사류의 심의겸은 김효원이 명종 때 윤원형의 문객(門客)이었다고 반대하였다. 그런데 나중에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沈忠謙)이 이조 정랑에 추천되자, 김효원은 심충겸이 척신(戚臣)이라며 반대하고, 이발(李潑)을 대신 추천하였다. 이때 서울의 동대문 낙산 밑에 살던 신진 사류의 김효원을 지지하던 사람을 동인이라고 부르고, 서울의 서대문 정동에 살던 심의겸을 지지하던 사람을 서인(西人)이라고 불렀다. 이것이 조선 후기 4색 당파의 기원이었다.[『선조실록』선조 11년 5월 1일] 윤두수와 윤근수 형제는 심의겸 및 심충겸 형제와 가까운 사이였으므로, 서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또 김효원은 이황의 문인이었으므로 이황의 문인 유성룡과 김성일 등은 동인이 되었다. 선조 초기에 서인과 동인은 정권을 잡기 위하여 사사건건 서로 다투었는데, 서인의 강경파는 정철 및 윤두수와 윤근수 형제 등이었고, 동인의 강경파는 이발과 정여립(鄭汝立), 정인홍 등이었다. 서인의 온건파 이이(李珥)와 성혼은 서인과 동인의 갈등을 해결하여 화해시키려고 노력하였다. 또 동인의 온건파 유성룡은 강경파 이발 일파를 억제하려 하였으나, 결국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한편 윤두수는 공조 참의와 형조 참의, 그리고 호조 참의를 거쳐, 1576년(선조 9) 다시 사간원 대사간을 거쳐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다.[「윤두수신도비명」] 이듬해인 1577년(선조 10)에는 중추부 첨지사가 되었는데, 사은사(謝恩使)에 임명되어 서장관(書狀官)김성일(金誠一)과 함께 중국 명나라 북경(北京)에 가서 황제가 보내준 칙유(勅諭)에 사은(謝恩)하고, 겸하여 <종계변무(宗系辨誣)>를 주청(奏請)하였다.[『선조수정실록』선조 10년 4월 1일, 선조 10년 9월 1일] 이때 중국 명나라에서는 『속대명회전(續大明回典)』을 편찬하는 중이었다. 명나라 초기에 편찬한 『대명회전(大明回典)』에서 조선 태조(太祖)이성계(李成桂)가 고려 권신 이인임(李仁任)의 자손이라고 잘못 기록한 종계(宗系)를 변무(辨誣)하는 일과 이성계가 고려왕을 시역(弑逆)하였다는 기록을 속편 『대명회전』에서 정정해 줄 것을 황제에게 주청하였다.[『선조수정실록』선조 10년 9월 1일] 그해 9월 중국 북경에서 돌아온 윤두수는 승정원 도승지로 영전되었다.[「윤두수신도비명」]
1578년(선조 11) 윤두수는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하여, 이른바 대신(大臣)이 되었다. 윤두수는 조카 윤현을 추천하여 이조 정랑으로 삼았는데, 동인들은 윤두수 형제와 윤현 세 사람을 ‘3윤’이라고 부르고, ‘3윤’이 나라의 권력을 전횡한다고 비난하기 시작하였다. 그때 이조 정랑윤현과 이조 좌랑김성일이 도목정사(都目政事) 때마다 서로 자기 당파의 사람을 등용하려고 다투다가 결국 서인과 동인의 갈등이 더욱 깊어졌다. 이조 정랑윤현의 뒤에는 승정원 도승지윤두수와 사헌부 대사헌윤근수가 조정의 요직을 차지하여 서인의 진출을 장려하고 동인의 진출을 억제하였기 때문에 동인들은 이조 정랑윤현의 인사 행정을 특별히 더 비판하였다. 승정원 도승지윤두수는 성품이 대범하고 솔직하였으며, 자신을 절제하지 않고 소탈하였기 때문에 깨끗하지 못하다는 평판을 들었다. 동인의 언관 중에서 사헌부 장령이발은 그 점을 노려서 윤두수와 윤근수, 그리고 윤현의 ‘3윤’을 함께 뇌물죄로 얽어서 한꺼번에 타도하려고 별렀다.[『선조수정실록』선조 11년 10월 1일]
그때 동인과 서인의 싸움이 격화되자, 홍문관 수찬강서(姜緖)가 경연(經筵)에서 선조에게 아뢰기를, “사류들이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졌는데, 양쪽 모두 쓸 만한 인재들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한 쪽 사람들을 버리고 어느 한 쪽 사람들만을 써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나이 27세의 선조는 그때까지 3년 동안 조정의 인사들이 동인과 서인으로 분당하여 서로 권력을 다투는 사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다가, 이때 비로소 동인과 서인으로 당파를 나누어 싸우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 신진 사류들은 양사(兩司 : 대간)에 자리를 잡고 기성 사류들의 결점을 공격하였다. 조정에 몸담은 지가 오래 되는 기성 사류들은 누구나 결점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후배들에게 쉽게 공격을 받았다. 그러므로 과거에 급제하여 청현직(凊顯職)에 진출하려는 자들은 모두 동인 편에 붙었다. 동인 중에서 서인을 공격하는 것으로써 출세의 기회를 삼고자 하는 자들은 윤현과 윤두수, 윤근수의 ‘3윤’을 ‘사악한 괴수’라고 맹렬히 공격하였다. 이발 등의 동인 강경파가 이를 주도하였으나, 유성룡 등의 온건파는 이 주장에 동조하지 않았다. 처음에 서인과 동인이 당파를 나누어 서로 싸우자, 정철과 이발이 앞장서서 당론(黨論)을 주도하였는데, 두 사람은 모두 깨끗하다는 평판을 받고 있었으므로 당시 서인과 동인의 사람들이 두 사람을 각각 지도자로 추대하였던 것이다. 그때 이이는 당파 싸움으로 인하여 훌륭한 인재가 수난을 당할 것이라고 매우 걱정하여 정철과 이발 두 사람에게 각각 충고하기를, “그대들이 나랏일을 서로 화평하게 의논하고 함께 협조하는 마음을 갖는다면, 사림의 인사들이 앞으로 무사할 것이다.” 하였다. 이이의 말이 너무나 간절하였으므로, 정철은 그 말을 듣고 수긍하여 자기 뜻을 굽히고 이발과 화해하려고 노력하였으나, 젊은 이발은 이에 냉담하였다.
이런 가운데 동인 김성일이 경연에서 진도군수(珍島郡守)이수(李銖)가 배로 쌀을 실어서 윤현과 윤두수, 윤근수 세 사람에게 뇌물로 보냈다고 왕에게 아뢰었다. 그러자 대간에서 진도군수이수와 ‘3윤’을 함께 탄핵하여, 윤두수와 윤근수, 윤현의 ‘3윤’은 모두 구속되어 심문을 받고 파면되었다. 이것이 이른바 <이수의 뇌물 사건>이다.
1579년(선조 12) 9월 사간원 대사간김계휘(金繼輝)의 추천으로 윤두수는 다시 기용되어 황해도 연안부사(延安府使)가 되었다. 당시 윤두수는 동인이 주도하는 조정에서 내직에 있는 것을 불편하게 여겨, 황해도 연안부사로 나갔던 것이다.[「윤두수신도비명」] 그는 장단(長湍)에 계신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하여 굳이 외직을 자청하였는데, 동생 윤근수도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겠다고 자청하여 개성유수(開城留守)로 나갔다.[『선조수정실록』선조 12년 9월 1일] 윤두수는 심의겸의 집안과 가장 친했으므로, 을해년 동서분당 이후에 김효원의 동인을 지나치게 배척하였다. 그러다가 이수의 뇌물 사건으로 뇌물을 받았다는 탄핵을 받아 쫓겨났고, 사람들은 윤두수 형제를 버린 사람으로 취급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선조는 그를 왕으로 옹립한 윤두수 형제를 구신(舊臣)으로 대우하여 끝내 버리지 않고 지방관으로 임명한 것이다.[『선조수정실록』선조 11년 10월 1일]
1580년(선조 13)과 1581년(선조 14)에 나라에 큰 흉년이 들었는데, 연안부사윤두수는 극진하게 기민(饑民)을 진휼(賑恤)해서 원근(遠近)의 유민(流民)들을 1천여 명이나 살려냈으므로 암행어사가 이 사실을 왕에게 보고하였다.[「윤두수신도비명」] 1581년(선조 14) 3월 황해도관찰사가 서계(書啓)하기를, “재령군수(載寧郡守)최립(崔岦), 안악군수(安岳郡守)윤현, 연안부사윤두수 등이 구황(救荒)을 잘 하였습니다.”고 하니, 왕이 각각 표리(表裏) 한 벌씩을 하사하였다.[『선조실록』선조 14년 3월 28일] 최립은 선조 시대 8대 문장가의 하나로서, 윤두수와 친하였으므로 나중에 윤두수의 신도비문을 지었다. 연안부사윤두수는 호수가에 ‘평원당(平遠堂)’이라는 정자를 지어 놓고, 동생 개성유수윤근수와 친구 재령군수최립 등을 불러서 잔치를 베풀고, 늙은 어머니에게 헌수(獻壽)를 한 후, 함께 시를 지어 창화(唱和)하면서 자연의 풍광을 즐겼다.[「윤두수신도비명」]
연안부사의 임기가 차서 조정으로 돌아온 윤두수는 중추부 동지사(同知事)를 거쳐서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에 임명되었고, 또 오위도총부 부총관(副摠管)을 거쳐 형조 참판(參判)에 임명되었다.[「윤두수신도비명」] 1584년(선조 17) 4월 병조 참판에 임명되었는데, 모친상을 당하여 청파역 부근에 있는 선친의 묘원에서 3년 동안 여막살이를 하였으나, 청파동에 있는 자기 집에는 한 번도 들른 적이 없었다.[『계갑일록(癸甲日錄)』, 「윤두수신도비명」] 1587년(선조 20) 탈상 후 다시 중추부 동지사에 임명되어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겸임하였다. 그때 왜적이 전라도를 침범하여 지방 관리를 죽이는 사건이 발생하자, 장차 왜적이 침입할 것이라며 전라도 인심이 흉흉하였다. 그해 2월 윤두수가 전라도순찰사(全羅道巡察使)로 나가서 전라도 민심을 안정시키자, 6월에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에 임명되었다. 또 만주에서 건주(建州) 여진의 누르하치가 여진족을 통일하고 조선을 침범할 것이라는 소식이 들려오자, 1588년(선조 21)에는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에 임명되었다. 이에 윤두수는 책략을 써서 누르하치의 침입에 대응하였다. 방위하는 군사를 4번(番)으로 나누어 교대하면서 변경을 철저하게 방어하였던 것이다. 또 압록강(鴨綠江) 연안의 백성들이 목면(木綿)을 심을 줄 몰랐으므로, 윤두수는 그 씨앗을 관에서 준비한 후 재배하는 법을 가르쳐서 평안도 백성들이 솜으로써 군복을 만들어 겨울 추위를 막도록 하였다.[「윤두수신도비명」]
1589년(선조 22) 좌의정정철의 추천으로 사헌부 대사헌에 임명되었는데, 그때 마침 <정여립(鄭汝立)모반(謀反) 사건>이 발생하였다. 정여립은 ‘역성혁명론’을 부르짖고, 대동계(大東契)를 조직하여 전라도와 충청도, 황해도로 확대시켰다. 황해도관찰사한준(韓準)과 신천군수(信川郡守)한응인(韓應寅) 등이 황해도에서 대동계를 발각하여 고발하자, 관련자들이 차례로 체포되었다. 정여립은 충청도 진안(鎭安) 죽도(竹島)로 도피하였다가 자살하였다. 좌의정정철이 위관(委官)에 임명되어, 사헌부 대사헌윤두수와 함께 옥사를 다스리면서 정여립의 배후 세력으로서 이발과 최영경(崔永慶) 등 동인 1천여 명을 숙청하였다, 이때 전라도 출신 성균관 유생(儒生) 정암수(丁巖壽)가 상소하여 정여립 모반의 배후 인물로서 동인의 유력 인사들을 모조리 거론하는 바람에 옥사가 크게 확대되었다. 이것을 <기축옥사(己丑獄死)>라고 한다. 그때 정철의 뒤에는 동인 때문에 노비 신분으로 추락한 송익필(宋翼弼)이 동인에 복수하기 위하여 친구 정철에게 동인들을 무자비하게 무고하였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1590년(선조 23) 8월 윤두수는 종계변무에 공을 세웠다고 하여 광국공신(光國功臣) 2등에 책훈되었고, 동생 윤근수는 1등에 책훈되었다. 이어 1591년(선조 24) 2월 도목정사에서 윤두수는 호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이때 우의정유성룡은 진도군수(珍島郡守)이순신(李舜臣)을 추천하여 초자(超資) 후 전라도좌수사(全羅道左水使)에 임명하였는데, 일본의 정세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해 4월 선조가 조강(朝講)에서 윤두수에게 이르기를, “의정부 대신과 비변사(備邊司) 여러 재신(宰臣)들과 함께 왜국의 정세에 대해 은밀히 의논하고 싶다.” 하며, 일본의 정세를 중국 명나라 조정에 알려야 할지의 여부를 가지고 의논하였다. 이때 대신들은 모두 명나라에 알리는 것을 반대하였으나, 윤두수가 혼자 “일이 중국에 관계되므로 매우 중요합니다. 신의 소견으로는 곧바로 중국 조정에 알려야 한다고 여깁니다.”라고 주장하였다. 그러자 영의정이산해(李山海)가 “우리가 알리면, 중국 조정에서 도리어 우리나라가 왜국과 통래한다고 죄책할까봐 염려됩니다.”라며 반대하였다. 병조 판서황정욱(黃廷彧)만이 윤두수의 의견에 찬성하였고 나머지는 이산해의 의견과 같았다. 선조가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으나, 결국 윤두수의 의견에 따라서 명나라에 일본의 정세를 알리기로 하였다.[『선조수정실록』선조 24년 4월 1일]
같은 해에 세자를 세우는 <건저(建儲) 문제>로 좌의정정철이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실각하였는데, 윤두수도 화를 면하지 못하고 유배당하였다. 이때 정권을 잡은 동인들은 처음에 윤두수를 파면시키려고 논하다가 나중에 함경도 회령(會寧)으로 귀양 보낼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선조가 특별히 윤두수를 중도(中道)에 부처(付處)하라고 명하였으므로 함경도 홍원(洪原)으로 유배되었다.[『선조수정실록』선조 24년 7월 1일] 얼마 안 되어 명나라 북경에 사신으로 갔던 진주사(陳奏使)가 돌아왔는데, 명나라 황제가 칙서를 보내 조선에서 일본의 정세를 알려준 것을 칭찬하였다. 그러자 선조는 일본의 정세를 명나라에 알릴 것을 홀로 주장하였던 윤두수를 당장 조정으로 불러들이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동인들이 적극 반대하였으므로 가까운 황해도 해주(海州)로 이배(移配)하였다가, 유배를 풀어서 고향 장단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이때 절강(浙江) 사람이 왜구(倭寇)에게 사로잡혀 일본에 끌려갔다가 본국으로 송환되었는데, 그가 은밀히 명나라 조정에 고하기를, “왜인이 조선과 공모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윤두수의 주장에 따라 조선에서 명나라에 일본 정세를 사실대로 알렸기 때문에 명나라의 오해를 불식시킬 수가 있었다. 이때 선조와 조정의 대신들이 모두 윤두수의 선견지명에 감탄하였다.[『선조실록』선조 35년 4월 1일, 「윤두수신도비명」]
선조 후반기 활동
1592년(선조 25) 4월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발생하였다. 일본의 관백(關白)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정명가도(征明假道 : 명나라를 치는 데 길을 빌려 달라)를 내걸고 왜군을 이끌고 부산포(釜山浦)에 상륙하였던 것이다. 이후 왜군은 길을 3로(路)로 나누어 북상(北上)하였다. 4월 28일 체찰사(體察使)이원익(李元翼) 등을 인견하는 자리에서 선조는 광해군(光海君)을 세자로 정하고, 장단의 윤두수 형제를 불렀다. 윤두수 형제가 도착하자 선조는 몹시 반가워하면서, “경의 형제는 내 옆을 떠나지 말라.”고 하고, 허리춤에 찼던 칼을 풀어서 하사하였다.[『선조실록』선조 25년 4월 14일] 그해 5월 일행이 개성에 도착하자, 선조가 윤두수를 어영대장(御營大將)에 임명하여 일행을 통솔하게 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 선조는 윤두수를 의정부 우의정에 임명하고, 해원부원군에 책봉하였다.
윤두수의 부인 창원 황씨(昌原黃氏)가 경기도 장단에 있다가 남편을 따라가고자 한다는 소식을 듣고, 우의정윤두수는 “내가 이런 때에 대신으로서 어찌 가족을 데리고 가겠는가.” 하고, 맏아들 윤방(尹昉)을 보내어 어머니를 설득하여 따라오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부인 창원 황씨는 병중에 있다가 그 다음 달에 남편을 다시 만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좌의정윤두수는 정무가 바빴지만, 부인의 부고(訃告)를 받고 몹시 슬퍼하여 사가(私家)에 머물면서 조정에 출근하지 않았다. 그해 6월 일행이 평양에 도착하자, 양사에서 영의정유성룡이 왜란을 미리 막지 못하였다며 탄핵하였으므로, 끝내 유성룡이 파직되었다. 이에 최흥원(崔興源)을 영의정으로, 윤두수를 좌의정으로 승진하였고, 유홍(兪泓)이 우의정에 새로 임명되었다.[『선조수정실록』선조 25년 6월 1일] 그러나 영의정최흥원과 우의정유홍이 경험이 적어서 정무에 서툴렀으므로, 좌의정윤두수가 군국(軍國)의 모든 정무를 도맡아서 처리하여야 하였다.
그해 6월부터 각지에서 의병(義兵)이 일어났는데, 충청도의 조헌(趙憲), 경상도의 곽재우(郭再祐), 전라도의 고경명(高敬命)이 의병을 거느리고 왜적을 격파하였다. 임진왜란 때 의병의 활동은 왜적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국가가 제대로 국토 방어를 제대로 못하는 상황에서 민중이 자발적으로 나서 민족과 국가를 구원하였던 것이다. 고니시 유키나카[小西行長]의 왜군이 파죽지세로 평안도로 침입해 오자, 비변사의 대신들은 모두 평양을 버리고 빨리 의주(義州)로 가려고 하였다. 이때 좌의정윤두수는 “평양성의 지형이나 물력(物力)은 충분히 왜적을 지켜낼 만하므로, 이곳에서 한 걸음만 떠나더라도 큰일이 납니다.”라며 반대하였다. 그러나 북상하는 왜군의 침입을 도저히 막을 수 없었으므로, 그해 6월 선조는 좌의정윤두수와 도원수이원익 등에게 평양성을 지키도록 명하고, 평양을 떠나서 의주로 향하였다.[『선조실록』선조 25년 6월 11일]
이때 평양의 아전과 백성들이 몽둥이와 칼을 들고 길을 가로막은 채 난동을 부렸으므로, 좌의정윤두수와 도체찰사유성룡이 나서서 그들을 진정시켜야 했다. 좌승지윤두수는 도원수이원익과 함께 평양성을 보수하고 무기를 손질한 후 관군과 의병을 훈련하여 평양성을 지키려고 하였으나, 왜군의 대규모 공격을 도저히 막을 수 없었다. 결국 평양성이 함락되자, 윤두수와 이원익도 어가(御駕)를 뒤따라갔다.[『선조실록』선조 25년 6월 11일] 그해 7월 좌의정윤두수와 도원수이원익이 선천(宣川)을 거쳐서 의주의 행재소(行在所)에 도착하였다. 윤두수가 선조에게 아뢰기를, “신이 평양을 사수하지 못하였으니, 군율(軍律)대로 처벌을 받겠습니다.” 하니, 왕이 위로하기를, “나라의 형세가 이미 기울어졌는데, 경은 어찌 그런 말을 하는가.” 하였다.[『선조실록』선조 25년 6월 19일]
당시 조정에서는 도승지이항복(李恒福)이 중국 요동(遼東)으로 들어가서 명나라에 복속하고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자는 ‘내부론(內附論)’과 도체찰사유성룡이 중국에 들어가지 말고 명나라에 구원병을 청하여 우리 땅을 끝까지 지키자는 ‘고수론(固守論)’이 대립하고 있었다. 좌의정윤두수는 도체찰사유성룡의 ‘고수론’을 적극 지지하고, 힘을 다하여 『내부론』을 막았다. 이때 좌의정윤두수는 동생 예조 판서윤근수를 명나라에 보내어 여러 차례 구원병을 간청하였다. 그해 7월 명나라 장수 조승훈(祖承訓)이 명나라의 요동(遼東) 군사 5천여 명을 거느리고 먼저 조선으로 들어왔고, 뒤이어 그해 12월 명나라 제독(提督)이여송(李如松)이 요동 군사 4만 2천여 명을 이끌고 조선으로 들어왔다. 1593(선조 26) 1월 조선의 관군과 명나라 군대가 연합하여 왜군과 싸워서 평양성을 회복하고 북상하는 왜군을 격퇴하였다. 비로소 전세를 역전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한 셈이었다.
그러나 그해 2월 이여송의 명나라 군사가 서울을 탈환하려고 남하하다가, 벽제관(碧蹄館)에서 왜군에게 크게 패배하였다. 이때부터 명나라 군사와 일본의 군사는 강화회담을 추진하였다. 3월에 명나라 대표 심유경(沈惟敬)과 일본의 고니시 유키나카는 강화회담을 일단 성사시켰고, 4월에는 왜군이 서울에서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7월에는 ‘강화조약’에 의하여 회령 토호들에게 사로잡혀 가토 키요마사의 진영에 넘겨졌던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 두 왕자가 석방되어 돌아왔다. 이에 그해 8월 좌의정윤두수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선조에게 축하를 드렸다.[『선조실록』선조 26년 8월 15일] 그리고 그해 11월 세자 광해군이 전주(全州)에 분조(分朝)를 세우자, 윤두수는 삼도체찰사(三道體察使)에 임명되어 남쪽으로 내려가서 군사를 위무하는 무군사(撫軍司)를 설치하였다.[『선조수정실록』선조 26년 12월 1일]
1594년(선조 27) 4월 왜군이 남해안에 주둔하고 철수하지 않자, 그해 9월 체찰사윤두수가 장수들을 차출하여 3도의 병력을 동원한 후 수륙 양면으로 거제도에 주둔한 왜군을 공격했다. 그러나 장수들이 자발적으로 움직이지 않았으므로 싸움에 이기지 못했다. 이에 양사에서 체찰사윤두수를 탄핵하였고, 윤두수는 결국 마침내 파직되었다.[『선조수정실록』선조 27년 9월 1일] 그해 11월 선조는 윤두수를 중추부 판사(判事)에 기용하였다.[『선조실록』선조 27년 11월 1일]1595년(선조 28) 1월 중추부 판사윤두수는 중추부 지사구사맹(具思孟)과 함께 해주(海州)로 가서 선조의 정비인 의인왕후(懿仁王后)를 호위하였다.[「윤두수신도비명」]그때 윤두수와 구사맹은 해주에 보관하고 있는『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이 전란에 위험하다고 생각하여, 왕의 허락을 받아 배를 통해 실록을 강화도로 옮겨서 보관하였다.
1598년(선조 31) 3월 윤두수는 다시 좌의정에 임명되었는데, 대간에서 윤두수를 음험하고 탐욕스럽다고 탄핵하였으나, 선조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동인 대관들의 논박이 그치지 않았으므로 선조는 형세상 윤두수가 출사하기가 어렵겠다고 여겨서 체차하였다. 당시 서인들은 “윤두수는 사람됨이 침착하고 정중하여 재상의 지위에 있으면서 건의한 바가 많았는데, 그를 ‘음험하다.’고 지목하고 ‘탐욕스럽다.’고 욕을 하니, 양사에서 그를 무함하는 것이 너무 심하다.”라고 생각하였다. 그해 8월 일본의 관백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으면서 왜군의 철수를 유언하였으므로, 일본의 왜군은 본국으로 철수하였다.[『선조수정실록』선조 31년 3월 1일]
1599년(선조 32) 7월 선조는 윤두수를 영의정에 임명하였는데,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연달아 윤두수를 논박하고 체차하기를 청하였다. 선조가 탄식하기를, “근래에 대간에서 자기편은 무조건 찬성하고 반대편은 무조건 배격하므로, 누구의 주장이 옳은지 모르겠다. 시대의 습속이 이러하니, 어떻게 나라를 다스리겠는가.” 하고, 끝내 그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러나 윤두수가 스스로 병을 핑계되고 사임하였다.[『선조수정실록』선조 31년 7월 1일] 그때 마침 청파역 부근에 짓던 집이 낙성되었으므로, 윤두수는 이곳에 거주하면서 마포(麻浦)의 초당(草堂)에 나가서 친구 최립 등과 술을 마시고 시를 지어면서 여생을 마칠 생각이었다.[「윤두수신도비명」]
그런데 윤두수는 그 전부터 구토 증세가 있었다. 1601년(선조 34) 4월 대궐에 들어갈 일이 있어서 며칠 바람을 쐬었다가, 그 증세가 다시 악화되어 불과 며칠만에 병세가 위독해져 1601년 4월 7일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이 69세였다. 임종할 때 아들들이 울면서 아버지에게 유언하기를 청하였으나, 집안일에 대해서는 한마디 말도 없었다. 다시 간곡히 청하자 마치 꿈속의 말처럼 오직 나랏일에 대해서만 겨우 몇 마디 말을 남겼다. 부음이 알려지자, 선조가 대단히 슬퍼하여 정무를 3일간 정지하고, 예관을 보내어 관에서 장사지내게 하였다.[「윤두수신도비명」]
1604년(선조 37) 6월 나라에서 임진왜란 때 공훈을 세운 사람들을 공신으로 책훈하였다. 윤두수는 서울에서 의주까지 왕의 거가(車駕)를 호종(扈從)한 공을 인정 받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해원부원군에 책봉되었다.
선조의 옹립
명종은 외아들 순회세자(順懷世子)가 어린 나이로 죽자 후사가 없었으므로, 나라 사람들은 병약한 왕이 후사왕을 정하지 않는 것을 크게 걱정하였다. 1567년(명종 22) 3월 명종의 심열병이 다시 위독해졌을 때 대신들이 한 사람도 밤에 궁중에서 숙직하지 않았다. 그러자 승정원 우승지윤두수가 영의정이준경에게 편지를 손수 써서 보냈는데, ‘송(宋)나라의 문언박(文彦博)이 황제가 위독할 때 궁중에 들어와서 항상 잠을 잤다’는 고사를 인용하여 대신들이 숙직할 것을 권유하였다. 영의정이준경이 그의 의견을 받아들여 6월 28일 밤에 궁중에 들어가서 처음으로 숙직하였고, 이날 이미 정신을 잃은 명종은 후사왕에 대한 아무런 말도 못한 채 34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이때 명종의 정비 인순왕후가 1565년(명종 20)에 명종이 크게 아팠을 때, 받아놓은 명종의 유교(遺敎)를 공개하였다. 이 유교에서는 후사왕으로 중종의 서출 7왕자 중 막내 왕자 덕흥군의 제 3남 하성군이연을 지목하고 있었다. 그가 바로 선조인데, 사람들의 예측과는 완전히 달랐기 때문에 모두 크게 놀랐다고 한다. 당시 인순왕후가 가까운 친척이던 중추부 영사심통원을 자주 내전으로 불러들이곤 하였다. 만일 영의정이준경이 그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다면, 청송 심씨(靑松沈氏) 일가가 왕위 계승을 조작한 것이라는 비난을 면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하성군이연이 후사왕에 지명된 것은 하성군이 똑똑하고 영특한 것도 있었지만, 하성군은 나이가 16세 밖에 안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아버지 덕흥군이 죽고 없었으므로, 인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일각에서는 심씨 일가가 하성군을 후사왕으로 옹립하였던 것이 아닌가 의심하였던 것이다.
명종이 위독할 때 왕위를 계승할 후사왕이 결정되지 않았으므로 자칫하면 왕위 계승에 큰 혼란이 일어나서 나라가 장차 위태롭게 될 뻔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승정원 우승지윤두수의 슬기로운 판단에 따라 영의정이준경이 숙직하던 첫날 밤 잠깐 동안에 나라의 큰일이 결정되었다. 승정원 우승지윤두수는 영의정이준경과 함께 즉시 침실 밖으로 나와서 경회루(慶會樓) 연못 위의 석교(石橋)에서 좌의정이명(李蓂)과 예조 판서이탁(李鐸), 사헌부 대사헌강사상(姜士尙) 등의 여러 사람들과 둘러앉아, 새 임금의 왕위 계승에 필요한 절차를 상의하였다. 국상을 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16세의 하성군이 왕위에 즉위하는 과정은 별다른 말썽 없이 이루어졌다. 즉위 당시 아버지 덕흥군이 이미 죽고 없던 하성군이연은 매우 외로운 처지였다. 그런데 그보다 19세 연상의 승정원 우승지윤두수가 16세의 선조가 왕위에 즉위하는 절차를 일일이 옆에서 도와주었으므로, 선조는 항상 윤두수를 어버이처럼 고맙게 여겼다. 윤두수가 과거에 합격하였을 당시 이준경은 시관(試官)이었는데, 대개 사람들은 시관을 거주(擧主)라고 일컫고 평생 스승처럼 섬겼다. 그러나 늙은 이준경과 젊은 윤두수는 서로 반대파에 속하였으므로, 이준경은 항상 윤두수를 제거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영의정이준경을 중추부 영사심통원과 함께 명종의 임종에 참석하도록 만든 것은 윤두수의 슬기와 용기였다. 윤두수는 위기에 대처하는 능력이 항상 뛰어났던 사람이었던 것이다.
정여립 모반 사건과 <최영경 옥사>
1578년(선조 11) 승정원 도승지윤두수가 맏조카 윤현을 이조 정랑으로 삼았다. 그런데 이조 정랑윤현과 이조 좌랑김성일이 도목정사에서 서로 자기 당파의 사람을 쓰려고 다투다가 마침내 두 사람의 갈등이 깊어졌다. 그때마침 동인 김성일은 진도군수이수가 공납)을 대납(代納)하는 장세량(張世良)을 통하여 윤현과 윤두수, 그리고 윤근수 세 사람에게 뇌물을 보냈다는 소문을 들었다. 김성일은 매우 격분하여 경연에서 왕에게 고하기를, “이수가 ‘3윤’에게 뇌물을 주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사실 이수는 윤두수의 이종 4촌이었으므로 예물을 보낸 것이었는데, 뇌물을 주었다고 동인들이 헛소문을 만들어 퍼뜨린 것이다. 대간에서 진도군수이수와 ‘3윤’을 아울러 탄핵하였고, 이에 윤두수와 윤근수, 윤현의 ‘3윤’이 모두 구속당하여 심문을 받았다. 이것이 이수의 뇌물 사건이다. [『사계전서(沙溪全書)』 권8]
처음에 대간에서 이것을 발의(發議)할 때 이에 참여하지 못했던 대사간김계휘는 화를 내기를, “젊은 사람들이 마음 쓰는 것이 공정하지 못하니, 이들과 함께 일을 하지 못하겠다. 내가 차라리 물러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그리고 곧장 선조에게 고하기를, “윤현과 윤두수, 윤근수 세 사람은 모두 어진 선비들이므로, 별다른 대단한 과오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 그들이 뇌물을 받았다는 일도 사실인지 아닌지를 알 수 없습니다. 그들을 몰래 죄에 빠뜨리려는 자들이 만들어 낸 말이 아닌지를 어떻게 알겠습니까.” 하였다. 그러자 대간의 신진 사류들이 들고 일어나서 대사간김계휘를 공격하였고, 윤현과 윤두수, 윤근수 ‘3윤’의 죄를 들춰내어 맹렬히 탄핵하였다. 마침내 선조가 세 사람을 하옥하여 심문하라고 명하였다. 이리하여 1578년 10월 윤두수와 윤근수, 윤현은 양사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어 조정에서 쫓겨났다.
당시 사헌부 장령이발이 대간의 발의를 주도하였는데, 그는 떠도는 소문을 모두 수집하여 직접 상소문을 써서 ‘3윤을 앞장서서 공격하였다. 이에 서인과 동인이 서로 격론을 벌여서 결국 조정이 대단히 시끄러워졌다. 이것이 선조 초기에 동인과 서인이 ‘3윤’의 뇌물 사건을 둘러싸고 처음으로 서로 맞붙었던 당파 싸움이었다. 정철과 이발은 이 사건을 계기로 다시 크게 대립하였으므로, 동인과 서인은 도저히 서로 화합할 수 없는 형세가 되어버렸다. 1579년(선조 12) 3월 윤두수 등이 파직되어 쫓겨나고, 동인 유성룡과 이발 등이 다시 등용되었다. 이때부터 1589년(선조 22) 정여립 모반 사건 때까지 10년 동안 동인들이 정권을 잡았고, 서인들은 쫓겨나서 겨우 명맥을 유지하였다.
이 시기 동안 동인 정권 중에서도 강경파 이발이 정국을 주도하면서 온건파 유성룡과 크게 사이가 벌어졌다. 동인의 온건파는 유성룡을 영수로 하여 김성일과 이성중(李誠中), 이덕형(李德馨) 등이 우익이 되었고, 강경파는 이발을 수령으로 하여 정여립과 최영경, 정인홍 등이 우익이 되었다. 동인이 정권을 잡고 있는 동안 강경파와 온건파는 사사건건 충돌하고 있었으나 표면으로 그 기류가 뚜렷하게 나타나지는 않았다. 1589년(선조 22) 정여립 모반 사건이 기축옥사로 확대되어 이발과 최영경 등 동인의 강경파가 모조리 체포되어 억울하게 죽게 되었다. 그러자 강경파 정인홍은 온건파 유성룡과 서로 원수가 되었고, 이에 동인은 남인(南人)과 북인으로 나뉘었다. 왜냐하면 서인 정철과 윤두수가 정여립 모반 사건을 기축옥사로 확대시켜서 동인의 강경파 1천여 명을 타도할 때 동인의 정승 유성룡은 이를 지켜만 보고 그들을 구원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1589년(선조 22) 좌의정정철의 추천으로 윤두수는 사헌부 대사헌에 임명되었는데, 그때마침 정여립 모반 사건이 황해도에서 발각되었다. 정여립은 이이와 성혼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과거에 급제하여 예조 정랑과 홍문관 수찬을 역임하였다. 이어 이조 정랑에 의망(擬望)되었을 때 이조 판서이이는 그가 너무 과격하고 직설적이라며 반대하였고, 이에 정여립은 이조 정랑이 되지 못하였다. 이때부터 정여립은 동인의 과격파 이발과 손을 잡고 서인의 영수 박순 및 이이 등을 지나치게 공격하다가, 선조의 눈 밖에 나게 되었다. 정여립은 출세 길이 막히자, 고향으로 내려가서 역성혁명을 꿈꾸게 되었다. 그는 선조가 왕으로서 자질이 없다고 비판하고, 『정감록(鄭鑑錄)』의 참위설(讖緯說)에 근거하여, “이씨 왕조를 멸망시키고 정씨가 일어나야 한다[亡李興鄭說].”는 ‘혁성 혁명론’을 부르짖었다. 그리고 대동계를 조직하여 전라도와 충청도, 황해도로 확대시켰다. 이런 가운데 황해도관찰사한준과 신천군수한응인 등이 황해도에서 대동계를 발각하여 고발하였고, 관련자들이 차례로 체포되었다. 정여립은 충청도 진안 죽도의 서실로 도피하였다가, 관군이 추격하자 자살하였다.
이후 좌의정정철이 위관에 임명되어, 사헌부 대사헌윤두수와 함께 정여립 모반 사건을 다스리면서 정여립의 배후 세력으로 이발 및 최영경 등 동인의 과격파를 연루시켜 숙청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조정의 당파 싸움은 단순한 정책 논쟁에서 생사(生死)를 걸고 서로 싸우는 당파 싸움으로 변질되었다. 훈구파와 사림파가 싸울 때에는 사림파가 화를 입었다고 하여 사화(士禍)라고 하였다. 조선 전기 4대 사화에서는 희생자가 한 번에 불과 수십 명에 지나지 않았으나, 조선 후기 사림파가 집권하여 4색 당파 싸움을 벌이면서 정변(政變)이 일어날 때마다 수백 명이 한꺼번에 희생되었다. 당시 38세의 선조는 왕의 자질을 논한 정여립에 대하여 대단히 분노하여 서인의 강경파 정철을 위관으로 임명하고, 또 윤두수를 대사헌으로 내세워 동인의 강경파를 일망타진하였던 것이다.
처음에 정철과 윤두수는 정여립과 그 대동계에 관련된 인물들만 심문하여 옥사를 마무리하려고 하였다. 이때 호남 지방의 선비들이 소란을 피우고 선동하여, 호남 출신 성균관 유생 정암수가 정여립 모반 사건의 배후 인물로서 동인의 유력 인사들을 모조리 거론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면서 옥사는 크게 확대되었다. 이것을 기축옥사라고 한다. 그때 위관 정철이 선조를 독대(獨對)할 때마다 동인들이 수십 명씩 희생되었으므로, 당시 사람들은 위관 정철을 ‘독철(毒徹)’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실제로 동인을 죽인 장본인은 바로 선조였다.
동인의 강경파 최영경을 정여립 역모의 주모자 길삼봉(吉三峯)이라고 지목하여 심문할 적에 진주에서 잡혀온 최영경은 극구 부인하였다. 그러나 선조는 “얼굴이 마르고 수염이 길며 말을 헐떡이면서 한다.”며 동일인이라고 간주하였다.[『기묘속록(己卯續錄)』] 그때 선조는 위관 정철을 불러서, “최영경의 상자 속에 이 시가 있었는데, 무슨 말인지 물어서 아뢰라.” 하였다. 그 시의 끝에, “우계(牛溪) 하룻밤에 바람이 호랑이를 낳고[牛溪一夜風生虎], 선리(仙李)의 뿌리가 머리 기른 중을 뒤흔드네[仙李根撓有髮僧].”라는 구절이 있었다. 선조는 시의 구절이 대동계의 비밀 지령이라고 의심하였다. 최영경이 공초하기를, “신은 본래부터 시를 지을 줄 모릅니다. 남들이 전하는 시를 써서 우연히 상자 속에 넣어두었을 뿐입니다.” 하였다. 정철이 이를 변호하기를, “이 시는 신도 일찍이 들은 것인데, 그가 시를 짓지 못한다는 사실은 사람들이 다 알고 있습니다.” 하니, 선조는 마지못하여 최영경을 석방하라고 명하였다. 그때 선조가 말하기를, “하늘의 그물[天網]은 넓고 넓은데, 그가 정말 도망할 수 있을까.” 하였는데, 천망(天網)은 바로 왕의 법망(法網)을 말한다.
그날 대간에서 석방된 최영경을 다시 국문하기를 청하자, 선조가 즉시 허락하여 최영경은 다시 체포되어 하옥되었다. 그때 사헌부 대사헌윤두수가 “최영경이 역적들과 친하게 지낸 상황은 그들의 서찰에 보이는데도 바른 대로 대답하지 않았으니, 멀리 귀양을 보내소서.” 하였으나, 선조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사간원의 다시 국문하자는 주장을 따랐던 것이다. 선조가 윤허를 내려 최영경을 도로 잡아서 옥에 가두자, 위관 정철은 크게 놀라서 심희수(沈喜壽)에게 말하기를, “한 차례 최영경을 체포한 것도 이미 확실한 증거가 없었는데, 다시 국문하기를 청하다니, 그대는 어찌하여 이것을 힘껏 말리지 않았는가.”하였다. 정철은 선조가 갑자기 형추(刑推)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므로, 최영경을 살리지 못할 것이라고 짐작하고, 문사낭청(問事郞廳)이항복(李恒福)과 상의하여 선조에게 올릴 계사(啓辭)의 초를 잡아 놓고, 동인 유성룡과 연명하여 같이 최영경을 구원하자고 제안했다. 이항복이 유성룡의 집에 찾아가서 최영경의 억울함을 극력 논하고, 이어서 대신들이 나서서 그를 구원해 주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니, 유성룡이 거절하기를,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감히 그를 구원할 수 있겠소. 일이 파급되면 누군들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 천금 같은 몸을 아끼시오.” 하였다.[『혼정편록(混定編錄)』 5권]
최영경은 끝까지 자기가 길삼봉이 아니라고 부인하다가 형장(刑杖)을 맞고 폐병이 심해져서 옥에서 죽었다. 나중에 건저 문제로 정철이 쫓겨나고 동인이 집권하자, 북인 정인홍은 서인 정철과 윤두수가 함께 최영경을 억울하게 죽였다고 맹렬히 공격하였다. 또 정인홍은 남인 유성룡도 아울러 공격하였는데, 우의정유성룡이 기축옥사 때 좌의정정철과 대사헌윤두수의 동인 숙청을 방관하였기 때문이었다.
임진왜란 때 나라를 구한 윤두수와 유성룡
1592년(선조 25) 4월 14일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보낸 왜군이 부산포(釜山浦)에 상륙하여, 동래성(東萊城)을 함락하였다. 그리고 왜군은 3로로 나누어 서울로 향하여 진격하였다. 당시 왜군의 규모는 9부대 16만여 명이었다. 선발 부대로서 고니시 유키나카의 제 1군은 중로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제2군은 좌로로, 쿠로다 나카마사[黑田長政]의 제 3군은 우로로 각각 진군하여 파죽지세로 북상하였다. 조선은 아무런 대비 없이 갑자기 일본의 침략을 당하였는데, 선조는 여진족의 침입을 막는 데 공을 세운 명장 이일(李鎰)과 신립(申砬)을 파견하여 왜군의 북상을 막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일은 상주(尙州)에서, 신립은 충주의 탄금대(彈琴臺)에서 왜적에게 크게 패배하였다. 대규모의 왜군이 서울 근교로 육박하자, 겁에 질린 선조는 서울을 방어할 생각은 하지 않고 서북쪽으로 피난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조정의 문무백관들과 서울의 백성들이 이에 반대하였고, 양사에서는 서울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상소하였다. 이때 노비들은 장례원의 노비 문서를 약탈하여 모두 불태워버렸다.
이에 몹시 불안해진 선조는 윤두수를 빨리 조정으로 불러들이라고 명하였다. 선조는 평소 윤두수의 믿음직한 언행과 위기 돌파 능력을 높이 평가하였으므로, 이러한 난국에 윤두수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선조는 하루에도 두세 번씩 윤두수가 왔는가를 물어보았다고 한다. 4월 28일 선조는 여러 신하들의 건의에 따라서 광해군을 세자로 정하고, 여러 왕자들을 각 도에 나누어 보내어 근왕병(勤王兵)을 일으키게 하였다. 이때 제 1왕자 임해군은 강원도로 가고, 제 4왕자 순화군은 함경도로 갔다가, 나중에 가토 기요마사의 왜군에게 쫓겨서 두 왕자는 함경도 회령(會寧)으로 들어갔다. 윤두수 형제가 광주(廣州)의 촌사(村舍)에 우거하다가 왕명을 받고 급히 서울에 달려왔는데, 다음날 4월 29일 한밤중에 선조는 비빈(妃嬪)과 백관들을 거느리고 서울 도성을 빠져나가 서북쪽으로 피난을 떠났다. 서울 도성의 사람들이 아우성을 치고 난장판을 벌렸으나, 그 전 날 복직한 윤두수 형제는 백관들과 함께 궂은비를 맞으면서 묵묵히 왕의 대가(大駕)만을 따라갔다. 이튿날 왕의 대가가 동파관(東坡館)에 이르렀을 때 선조가 윤두수 형제를 앞으로 불러내어, “경의 형제는 나를 떠나지 말라. 죽든지 살든지 나를 저버리면 안 된다.”고 하고, 허리춤에 찼던 칼을 풀어서 하사하였다.[『선조실록』선조 25년 4월 14일]
1592년 5월 일행이 개성(開城)에 도착하자, 선조가 윤두수를 어영대장에 임명하여 일행을 통솔하게 하니, 그제서야 일행의 질서를 되찾았다. 얼마 안 되어 선조는 윤두수를 정1품상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로 승품하여 의정부 우의정에 임명하고, 해원부원군에 책봉하였다. 영의정유성룡은 유임되고, 좌의정최흥원과 우의정윤두수는 새로 임명되었다. 왕이 신임 좌의정과 우의정을 인견하니, 우의정윤두수가 아뢰기를, “역관(譯官)을 정해서 요동도사(遼東都事)에 자문(咨文)을 보내어 우리나라의 위급한 변란을 알려야 합니다. 그리고 조신(朝臣) 가운데 행재소에 오지 않은 사람들은 벌을 주어야 합니다.” 하니, 선조가 그대로 시행하도록 허락했다.[『선조수정실록』선조 25년 5월 3일]
개성의 민심이 흉흉하였으므로, 우의정윤두수는 선조에게 건의하기를, “개성의 남대문에 나아가서 부로(父老)들을 위무(慰撫)하고, 8도(道)에 사신을 보내어 의병을 소집하게 하며, 옛 도성인 개성의 인재를 등용하소서.” 하였다. 선조가 개성의 남문루(南門樓)에 올라가서 백성들을 모아서 타이르고 위로하였다. 그때 개성의 한 부로가 앞으로 나와서 정 정승(鄭政丞)을 유배에서 풀어달라고 청하였는데, 정 정승은 정철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왕이 “알았다.” 하고 즉석에서 정철을 방면하도록 명하였다. 이에 선조가 정철에게 전지(傳旨)하기를, “경의 충효를 알고 있으니, 빨리 행재소로 오라.”로 하였다. 정철은 건저 문제로 처음에는 함경도 명천(明川)으로 유배되었다가 이후 평안도 강계(江界)에 이배되어 있었는데, 강계에서 곧바로 개성의 행재소로 달려왔다.
당시 윤두수의 부인이 경기도 장단에 있다가 남편을 따라가고자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우의정윤두수가 말하기를, “내가 이런 때에 대신으로서 어찌 가족을 데리고 가겠는가.” 하고, 사람을 시켜서 아내로 하여금 따라오지 못하게 하였다. 사실 어가를 따르던 관원들 가운데 가족을 데리고 피난하려고 서울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일행이 황해도 보산참(寶山站)에 도착하였을 때 우의정윤두수가 묻기를, “종묘의 신주(神主)가 따라왔는가.”고 하니, 예조의 담당 관원이 대답하기를, “창황 중에 개성의 목청전(穆淸殿)에 묻고 왔습니다.”라고 하였다. 윤두수가 깜짝 놀라서 예관(禮官) 등을 다시 개성에 보내어 신주를 찾아내어 수레에 싣고 뒤따라오게 하였다. 그해 5월 5일 서울을 점령한 왜군들이 개성에 쳐들어와서 신주를 찾으려고 땅을 파서 발굴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윤두수신도비명」]
그해 6월 일행이 평양에 도착하자, 양사에서 영의정유성룡이 왜란을 미리 막지 못하였으므로 그 책임을 져야 한다며 탄핵하였고, 이에 유성룡이 파직되었다. 그러면서 최흥원이 영의정으로, 윤두수가 좌의정으로 각각 승진하였고, 유홍이 새로 우의정에 임명되었다.[『선조수정실록』선조 25년 6월 1일] 그러나 영의정최흥원과 우의정유홍은 경험이 적어서 정무에 서툴렀으므로, 좌의정윤두수가 군국의 모든 정무를 도맡아서 처리하여야 하였다. 윤두수는 철저히 계획하고 신중히 집행하였으므로, 정사가 모두 시기와 형편에 맞았다. 비변사에서 체찰사를 보내서 대동강(大同江) 이남 지방을 관리하는 문제를 논의하였다. 당시 모두 윤두수를 그 적임자로 추천하였는데, 판서김응남(金應南)이 참판이항복의 귀에 대고 말하기를, “윤 정승이 여기를 떠나면 나라의 대사(大事)가 모두 와해될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 두 사람이 왕에게 다른 정승을 보낼 것을 건의하였다.[「윤두수신도비명」] 이에 유성룡이 3도 도체찰사에 임명되어 3남 지방으로 내려갔다. 당시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서 왜군의 후방을 공격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으므로 체찰사를 파견할 필요가 있었다. 충청도에서는 조헌이, 경상도에서는 곽재우가, 전라도에서는 고경명 등이 의병을 거느리고 왜군에게 큰 타격을 주고 있었다.
이때 좌의정윤두수가 장단에 있던 부인의 부고를 받고 몹시 슬퍼하여 개성 거리의 사가에 머물면서 조정에 출근하지 않았다. 이제 조정의 긴급한 정무가 처리되지 못하여 서류가 함(函)에 가득 쌓였다. 여러 정승들이 있었음에도 정무를 의논하여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자, 영의정최흥원이 낭관(郎官)을 보내어 윤두수에게 빨리 나오도록 독촉하였다. 윤두수가 해가 저물 무렵에 조정에 나와서 재량을 발휘하여 밀린 정무를 처리하니, 서류가 쌓였던 함이 텅 비워졌다. 이를 보고 판서이성중(李誠中)이 탄식하기를, “사람의 재주와 지혜가 이처럼 서로 차이가 난다는 말인가.” 하였다.[「윤두수신도비명」]
고니시 유키나카의 왜군이 파죽지세로 평안도로 침입해 오자, 비변사의 대신들은 모두 당황하여 빨리 평양을 버리고 다른 안전한 곳으로 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좌의정윤두수가 역설하기를, “평양성의 지형이나 물력은 충분히 왜적을 지켜낼 만한 조건을 갖추고 있으므로, 이곳에서 한 걸음만 떠나더라도 큰일이 납니다.”고 하였다. 당시 왜군의 침입을 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