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묘사화(己卯士禍)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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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기묘사화 |
한글표제 | 기묘사화 |
한자표제 | 己卯士禍 |
상위어 | 사화(士禍) |
관련어 | 기묘명현(己卯名賢) |
분야 | 정치/정치운영/정쟁·정론 |
유형 | 사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김돈 |
발생시기 | 1519(중종 14) |
관련 인물/집단 | 조광조(趙光祖)/훈구, 사림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기묘사화(己卯士禍)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중종실록』 14년 11월 21일, 『중종실록』 14년 12월 16일, 『중종실록』 15년 1월 11일, 『중종실록』 14년 11월 15일, 『중종실록』 33년 2월 21일, 『광해군일기(중초본)』 2년 9월 5일 |
1519년(중종 14) 조광조 등의 사림이 훈구에 의해 화를 당한 사건.
개설
기묘사화(己卯士禍)는 1519년에 중종의 밀지(密旨)를 받은 홍경주(洪景舟)·남곤(南袞)·심정(沈貞) 등이 조광조(趙光祖)·김정(金淨)·김식(金湜)·김구(金絿)·윤자임(尹自任)·박세희(朴世熹)·박훈(朴薰)·기준(奇遵) 등을 체포·구금하며 발생하였다. 이들에게 적용된 죄명은 붕당(朋黨)을 결성하여 정치적 입장이 다른 인물들을 배척하였다는 것과 후배들을 이끌어 지나치게 격렬한 언사를 자행하게 했다는 것이었다. 조광조의 사사(賜死)를 필두로 신진 사림이 화를 당하면서 사림 세력은 크게 위축되었다. 이들이 추진했던 정책 대부분이 혁파된 반면, 삭훈(削勳)된 정국공신의 작위 회복(『중종실록』 14년 11월 21일), 현량과의 혁파(『중종실록』 14년 12월 16일), 향약의 폐지(『중종실록』 15년 1월 11일) 등 이들이 혁파했던 조치는 다시 복구되었다.
역사적 배경
중종대 정치사의 전개 과정에 있어 기묘사화는 분기점의 성격을 지닌다. 중종반정 이후 일련의 군신 권력관계의 변동 속에 나타난 신권(臣權) 강화와 언관권(言官權) 확대 현상이 기묘사화를 계기로 또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군신 권력관계의 어느 일방이 절대화 되어서는 안 된다는 측면에서 볼 때 기묘사화는 이미 전제된 사건이었다.
발단
1519년(중종 14) 11월 의금부에 내린 추고 전지는 기묘사화의 핵심 인물로 조광조 등 8명을 거론하였다. 그러면서 무엇보다도 이들은 붕비(朋比), 즉 붕당이라는 뚜렷한 파당을 형성하여 정치적 입장이 다른 인물들을 배척하였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궤격(詭激), 곧 지나치게 격렬한 언사를 자행하면서 후배를 이끌어 기존의 신하들은 이들 세력에 대해 두려움마저 느꼈다는 것이다(『중종실록』 14년 11월 15일). 요컨대, 붕당을 두둔한다는 교상붕비(交相朋比)와 풍조를 조장한다는 궤격한 풍조가 추고 전지의 주된 내용이었다.
추고(推考)와 형률(刑律)의 적용 과정에서 누누이 거론하였던 궤격한 풍조는 조광조 일파가 ‘교결붕당’, 즉 붕당을 맺어 대각(臺閣)을 거점으로 언로를 장악하고 정사를 주도해 간 현상을 지칭하였다. 본래 중종은 대신이 대간에 대해 시비(是非)할 수도 후퇴(進退)시킬 수도 없다는 논리로 대간의 모든 언론 활동에 대해 적극 옹호해 왔다. 그러나 점차 그 자신도 이러한 궤격한 대간의 논박으로 궁지에 몰리는 상황에 처하자 훈구 세력에게 밀지(密旨)를 내려 사림을 몰아내게 하였고, 이것이 기묘사화였다. 반정의 형태로 신료들의 추대에 의해 등극하게 된 중종은 언제라도 또 다른 형태의 반정에 직면하게 될 가능성이 있었다. 이러한 밀지에 의한 방식은 그 후 김안로(金安老)를 제거할 때나 을사사화의 경우에도 동원되었다.
즉, 조광조 일파는 교결붕당과 궤격한 풍조를 통해 향약, 천거제, 그리고 정국공신에 대한 위훈 삭제 등의 조치를 중도(中道)에서 벗어나 집요할 정도로 과격하게 시행하였다는 이유로 정계에서 퇴출되었다.
경과
기묘사화로 조광조 등을 비롯한 사림이 대거 축출된 뒤 남곤·심정·김안로 등의 권신(權臣)이 정계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기묘사화로 화를 입었던 김안국(金安國)·유인숙(柳仁淑)·이청(李淸)·김정국(金正國)·홍섬(洪暹) 등이 1538년(중종 33) 이후 다시 등용되면서 언관의 언론은 또 다른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중종실록』 33년 2월 21일). 삼사(三司)에 사림 진출의 비율이 증대되어 가면서 언관 언론이 본래의 기능을 회복하는 추세가 형성되었다. 기묘사화로 화를 입은 사림들인 ‘기묘명현(己卯名賢)’의 소통 문제를 유생층에서 공론을 통해 본격적으로 제기한 것도 이러한 분위기 형성에 일조하였다.
기묘사화에서 화를 입은 핵심 인물인 조광조는 사림이 정계의 주도권을 장악한 1568년(선조 1)에 신원되어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1610년(광해군 2)에는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과 함께 문묘에 배향되었다(『광해군일기(중초본)』 2년 9월 5일).
참고문헌
-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사 28: 조선 중기 사림 세력의 등장과 활동』, 국사편찬위원회, 1996.
-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사 30: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국사편찬위원회, 1998.
- 김돈, 『조선 전기 군신 권력 관계 연구』, 서울대학교출판부, 1997.
- 김돈, 『조선 중기 정치사 연구』, 국학자료원, 2009.
- 김범, 『사화와 반정의 시대: 성종·연산군·중종과 그 신하들』, 역사비평사, 2007.
- 이병휴, 『조선 전기 기호 사림파 연구』, 일조각, 1984.
- 이병휴, 『조선 전기 사림파의 현실 인식과 대응』, 일조각, 1999.
- 이수건, 『영남 사림파의 형성과 전개』, 일조각, 1979.
- 최이돈, 『조선 중기 사림 정치 구조 연구』, 일조각,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