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훈(朴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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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84년(성종 15)~1540년(중종 35) = 57세]. 조선 중기 중종 때에 활동한 문신·학자. 행직(行職)은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이다, 자는 형지(馨之)이고, 호는 강수(江叟)이다. 본관은 밀양(密陽)인데, 증조부는 밀산군(密山君)박중손(朴仲孫)이고, 조부는 예조 참의(參議)박미(朴楣)이며 아버지는 홍문관(弘文館)교리(校理)박증영(朴增榮)이다. 어머니 죽산박씨(竹山朴氏)는 현감(縣監)박영달(朴英達)의 딸이다. 그는 박광영(朴光榮)의 조카이고,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이다.

중종 시대 활동

1504년(연산군 10)에 사마시(司馬試)에 생원(生員)으로 합격하였다. 1515년(중종 10) 성균관(成均館)의 천거로 의영고(義盈庫)주부(主簿)가 되었고, 이어 외직인 보은현감(報恩縣監)에 임명되었다. 미처 관직에 부임하지 않았을 때, 논하는 이들이 말하기를, “군(君)을 보궐 습유(補闕拾遺)로 임명하여 곁에 두면 좋을 터인데 이제 외직의 읍재(邑宰)로 내보낸다면, 이는 어진 이를 마땅한 자리에 쓰는 도리가 아니니, 이조(吏曹)의 실정(失政)이 아니겠는가?” 하자, 듣는 자들이 그렇게 여겼다. 이 일로 즉시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로 임명되었다. 그 뒤 공조 좌랑(佐郞)을 거쳐 사헌부 지평(持平)이 되었다. 1519년(중종 14)에 현량과(賢良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었고, 다시 사간원(司諫院)사간(司諫)을 거쳐, 동부승지가 되었는데, ‘국기(國器)’라는 명성을 들었다.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그는 조광조(趙光祖) 일파의 핵심 인물로 지목되어 벼슬에서 쫓겨나 성주(星州)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더 먼 의주(義州)로 옮겨졌다. 13년이 지난 뒤인 1531년(중종 26) 11월에 안악(安岳)으로 양이(量移)되었다가 그 후 3년이 지난 1533년(중종 28) 3월에 방면되어 향리인 청주(淸州)에 은거하였다. 어머니 상을 당하여 상주노릇을 너무 슬프게 하다가 몸을 상하여 병(病)을 얻었는데, 1540년(중종 35) 3월 12일 5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저서로는 『강수유고(江叟遺稿)』 2권 2책이 전한다.

조광조의 친분과 기묘사화의 피화

박훈은 더불어 교유하던 사람들이 모두 당대의 석유(碩儒)와 명현(名賢)이었다. 그 중 특히 대사헌(大司憲)조광조(趙光祖)와는 가장 친하여 더불어 흉금을 터놓을 정도였고, 조광조 역시 그를 공경하고 존중하여 나라의 대정(大政)이 있으면 반드시 그를 좇아 더불어 의논하여, 그가 가하다고 하는 바는 베풀고 그가 불가하다고 하는 바는 그만두었다.

중종이 혁신정치를 하려고 새로운 인재를 등용하자, 많은 사림파(士林派)가 조정에 진출하여, 요직에 자리 잡았다. <기묘사화>가 일어날 무렵 젊은 유학자들이 성리학(性理學)의 ‘도학정치(道學政治)’를 구현하려는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었다. 그 중심에는 대사헌조광조와 좌부승지(左副承旨)박세희(朴世熹), 동부승지박훈을 비롯하여, 우참찬(右參贊)이자(李耔), 형조 판서(判書)김정(金淨), 도승지(都承旨)유인숙(柳仁淑), 우부승지(右副承旨)홍언필(洪彦弼), 부제학(副提學)김구(金絿), 대사성(大司成)김식(金湜), 윤자임(尹自任), 기준(奇遵) 등이 있었다. 그들은 경연(經筵)에서 중종에게 주자(朱子)의 『성리대전(性理大典)』을 강론하였다. 1518년(중종 13)에 승정원에서 『성리대전』을 강론할 수 있는 사람으로서 26인의 유학자를 선정하여 아뢰었는데, 여기에 박훈이 포함되었다.

1519년(중종 14) 11월 <기묘사화>가 일어나던 날 박훈은 하옥(下獄)되어 국문(鞫問)을 받았다. 그는 “신은 나이 36세입니다. 성질이 본디 미열(迷劣)하나, 옛사람의 글을 읽었으므로 입심(立心)·행기(行己)를 옛사람과 같이 하기로 스스로 기약하여 임금에게 충성하고 어버이에게 효도하려고 밤낮으로 생각해 왔습니다. 또 사우(師友)가 없으면 성인(成人)이 될 수 없으므로 조광조·김정·김식·김구 등과 서로 교유하였을 뿐이고 그 논의가 궤격한지는 모르겠으며, 사사로이 서로 부화하였다는 것은 신이 한 일이 아닙니다.”라고 공초하였다. 그는 처음에 경상도 성주로 유배갔으나, 다시 극변(極邊)인 평안도 의주에 안치(安置)되었다. 의주로 가게 되니, 사람들이 모두 그가 위태롭다고 여겼고, 어떤 이는 화(禍)가 여기에서 그치지 않을까 두려워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마음이 화평하고 지기(志氣)가 안정되어, 모습을 보면 호방한 듯 하였으니, 그는 이처럼 사생(死生)에 흔들리지 않았다. 그 후 황해도 안악으로 양이되었다가 16년이 지난 1533년(중종 28) 3월에 겨우 향리로 돌아왔다.

성품과 일화

박훈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어려서부터 장중(莊重)하여 말 수가 적었던 그는 타고난 자질이 순수하고 덕행(德行)과 기량(器量)이 일찍 이루어졌다. 몸가짐은 곧고 발랐으며 행동은 법도에 맞았다. 마음씀씀이가 너그럽고 인자하여 남과 더불어 거스름이 없었다. 집에 대해서는 효제(孝悌)로써 근본을 세우고 늙은이와 어린이에 대해서는 온화하면서 은혜로써 사랑하였고, 예법(禮法)으로써 건사하였으므로, 상하가 반듯하게 조리가 있어 문란하지 않았다. 자신의 생활에 있어서는 검소하여 의복은 몸을 가릴 정도만을 취하였고 화미(華靡)한 것을 배척하여 물리쳤다.

그는 소장(少長)의 나이에 이르러 하루는 스스로 깨달아서 마음속으로 말하기를, “불쌍한 나는 태어난 지 아홉 해 만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으므로 가정(家庭)의 교훈을 귀로 들을 수 없었다. 이제 내가 스스로 힘써 학문을 하지 않는다면 내 몸을 세워 선덕(先德)을 이을 수 없게 될 것이다.” 하였다. 이에 발분(發憤)하고 뜻을 격발시켜 오경(五經)과 사서(四書) 및 주자(周子)·정자(程子)·장자(張子)·주자의 성리학의 유편(遺編)을 취해다가 독송(讀誦)하면서 밤낮을 이어 의리(義理)를 연구하고 몸을 돌이켜 실천하였다. 또 여러 사책(史冊)과 백가(百家)의 설(說)에 두루 통달하여 그 근원을 궁구하고 그 지류(支流)를 섭렵하였으므로, 관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오로지 강학(講學)에 힘썼을 뿐, 과거(科擧)를 보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아 일찍이 힘써 과문(科文)을 배운 적이 없었다. 어머니가 생존(生存)해 있었던 까닭에 때때로 직책에 나아가 재주를 바치긴 하였으나, 그 자신의 뜻은 아니었다.

묘소와 제향

묘소는 충청도 청주 천내산(川內山)의 선묘(先墓) 곁에 있다. 영조 때 조정에서 이조 판서로 추증하였고, 1746년(영조 22) 10월에 문도(文度)의 시호를 내렸다. 성운(成運)이 묘갈명(墓碣銘)을 지었다. 청주(淸州)의 신항서원(莘巷書院)과 국계서원(菊溪書院), 금산(錦山)의 덕산사(德山祠)에 제향되었다. 부인 밀양변씨(密陽卞氏)는 변순지(卞純之)의 딸인데 2남 2녀의 자녀를 두었다. 1자는 박희원(朴熙元)이고, 2자는 박선원(朴善元)이다. 1녀는 이언명(李彦明)의 처가 되었고, 2녀는 오식(吳軾)의 처가 되었다.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영조실록(英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사마방목(司馬榜目)』
  • 『기묘록보유(己卯錄補遺)』
  • 『기묘록속집(己卯錄續集)』
  • 『송자대전(宋子大全)』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