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持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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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政事)를 논하고 백관을 규찰하는 사헌부의 정5품 관직.

개설

사헌부에 소속된 정5품의 관직으로 정원은 2명이다. 집의·장령 등과 함께 대장(臺長)으로 불렸다. 고려시대 충렬왕 때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를 지평(持平)으로 고치면서 등장하여 여러 차례 개칭되다가 조선 개국 후 1401년(태종 1)에 지평으로 정리된 뒤 조선말까지 유지되었다. 사헌부 내에서는 대사헌·집의·장령 다음의 직급으로서 시정(時政)을 논하고 비리 인사를 탄핵하는 일 등에 참여했다. 성상소(城上所)에 머물며 사헌부 소관 업무를 왕에게 전달하는 일 등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담당 직무

사헌부의 기본적인 업무인 시정을 논하고 백관을 규찰하여 논핵(論劾)할 안건을 정리할 때에 지평은 대사헌·집의 등과 함께 사헌부의 입장을 결정하는 데 참여하였다. 또한 성상소에 머물며 사헌부 업무와 관련된 사안들을 출납하는 일을 맡아보았다(『명종실록』 9년 8월 11일). 성종대부터는 경연의 조강(朝講)에 입시(入侍)하였고, 강의가 끝난 뒤에는 시정과 관련한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다(『성종실록』 7년 5월 8일).

대관(臺官)은 승문원(承文院)·성균관(成均館)·홍문관(弘文館) 등을 거친 사람들 가운데 성품이 강직하여 시류에 영합하지 않는다는 명망이 있는 인재가 임명되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남대(南臺)라 하여 과거에 합격하지 않은 사람 가운데 청망(淸望)이 높은 사람이 장령이나 지평에 임명되기도 했다.

사헌부는 각 직위 간에 지켜야 할 예의가 엄격하여 상하 관계에 따른 기강이 매우 강했다. 일을 논의하기 위해 제좌청(齊坐廳)에 모일 때면 대사헌 이하 서리(書吏)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격식에 맞추어 자리에 앉거나 퇴청(退廳)하는 등 대례(臺例)라 불리는 절차를 엄격하게 시행하였다. 지평은 사헌부의 대장 가운데 말단에 위치하고 있지만, 대례에서 정6품인 감찰과는 차별되는 대우를 받고 있었다.

변천

조선의 직제가 고려의 제도를 많이 참고하였기 때문에 사헌부 직제도 고려의 연속선상에 놓여있다. 조선의 사헌부에 해당하는 고려의 관서는 어사대라고 할 수 있는데, 어사대는 사헌대·감찰사·사헌부 등으로 여러 번에 걸쳐 명칭과 직제가 변경되었다. 그 과정에서 지평이라는 관직명이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1308년(고려 충렬왕 34)에 전중시어사를 지평으로 고치면서였다. 1356년(고려 공민왕 5) 지평에서 전중시어사로 다시 변경되었다가, 1362년과 1369년, 1372년에는 각각 지평·잡단(雜端)·지평으로 변경을 거듭하였다. 이후 고려왕조가 존속되는 동안 다시는 변경되지 않았다.

조선왕조에 들어와서 1392년(태조 1)에 잡단으로 변경되었지만(『태조실록』 1년 7월 28일), 1401년 지평으로 고쳐진 뒤 그대로 유지되었다(『태종실록』 1년 7월 13일). 1505년(연산군 11) 연산군의 황음과 관련되어 혁거되었다가(『연산군일기』 11년 1월 13일) 중종반정 직후에 다시 복구되었다.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 사헌부가 도찰원으로 개칭되고 장관인 대사헌 이하가 칙임관인 장(長) 이하로 개칭될 때 소멸하였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필원잡기(筆苑雜記)』
  • 『용재총화(慵齋叢話)』
  • 박용운, 『고려시대 대간 제도 연구』, 일지사, 1980.
  • 최승희, 『조선 초기 언관·언론 연구』, 서울대학교 출판부, 1984.
  • 김재명, 「조선 초기의 사헌부 감찰」, 『한국사연구』 65, 1989.
  • 남지대, 「조선 성종대의 대간 언론」, 『한국사론』 12, 1985.
  • 송춘영, 「고려 어사대에 관한 일연구」, 『대구사학』 3, 1971.
  • 이재호, 「이조 대간의 기능의 변천」, 『(부산대학교)논문집』 4, 1963.
  • 이홍렬, 「대간 제도의 법제사적 고찰: 근조(近朝) 초기를 중심으로」, 『사총』 5, 1960.
  • 최승희, 「조선 초기의 언관에 관한 연구」, 『한국학논집』 1,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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