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량과(賢良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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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9년(중종 14)에 한차례 실시한 문무과 시험.

개설

현량과는 1519년(중종 14)에 단 한번 시행되었다. 조광조(趙光祖)의 건의에 따른 것으로 한(漢)나라의 현량과(賢良科)에 기원하였다. 서울과 지방에서 천거된 인재를 대상으로 1회의 제술시험으로 선발하였다. 시험 과목으로 대책(對策)을 작성하게 하였다. 문과에 28명, 무과에 46명을 선발하였다.

내용 및 특징

1518년(중종 13) 3월에 조광조는 한나라의 현량과·방정과(方正科)의 뜻을 이어 재행(才行)을 겸비한 숨은 인재를 천거로 구할 것을 건의하였다(『중종실록』 13년 3월 11일). 기존의 사장(詞章) 중심의 인재 선발 방법으로는 참다운 인재 선발이 불가능하니 천거로 재능과 학식, 성품을 갖춘 인재를 발탁하여 관리로 등용하자는 명분을 내세웠다.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은 과거를 통한 기존의 방법으로 정치적 기반을 확보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아 신진 사류들을 기용하고자 하였다.

현량과 설치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조정의 의견은 일치하지 않았다. 시행한 후에 올 폐단을 들어 기존의 과거법을 준수하는 것만 못하니 시행할 수 없다는 입장이 있었고(『중종실록』 13년 3월 12일), 천거하는 방법과 절차를 아주 정미하고 자세하게 하면 재행이 있는 사람이 합격하여 과거로 요행히 합격하는 사람과는 비교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었다(『중종실록』 13년 3월 12일).

현량과 시행을 둘러싼 찬반의 논의는 좀 더 지속되다가 실시하기로 하고 1518년 6월에 지침이 마련되었다. 현량과의 대상자에 대한 천거는 서울에서는 예문관·승문원·성균관·교서관이 주관하되, 유생과 조사(朝士)를 막론하고 천거하여 성균관에 보고하고, 성균관에서는 이를 다시 예조에 통보하였다. 중추부(中樞府)와 육조·한성부·홍문관에서도 인재를 천거하여 예조에 보고하였다. 지방에서는 유향소(留鄕所)가 수령에게 추천하면, 수령은 이를 관찰사에게 보고하고, 관찰사는 다시 심사하여 예조에 보고하였다.

예조에서는 서울과 지방에서 천거한 인재를 모두 합해서 성명과 출생 연도, 천거 내용 등을 종합해 의정부에 보고한 뒤에, 궁궐 뜰에 모아 왕이 친림한 자리에서 대책(對策)으로 시험하여 인재를 선발하도록 하였다. 잘못 천거하는 일이 없도록 추천자의 이름도 밝히도록 하였다(『중종실록』 13년 6월 5일).

이상과 같은 절차에 따라 올라온 120명을 상대로 1519년 4월 13일, 중종은 근정전에 나아가 대책(對試)을 시험하여 장령(掌令)김식(金湜) 등 28명을 뽑고, 다시 모화관(慕華館)에 나아가 무인(武人) 정린(鄭麟) 등 48명을 뽑았다(『중종실록』 14년 4월 13일). 4월 20일에 근정전에서 합격자를 발표하는 의식인 방방의(放榜儀)를 행하고 백관의 하례를 받았다(『중종실록』 14년 4월 20일).

『국조문과방목』중종 14년의 ‘현량과방(賢良科榜)’에는 현량과에 급제한 28명의 천거 사항이 기재되어 있었다. 장원급제한 김식은 “文章陰陽理數貫通(문장음양이수관통)”이라 적혀 있었다. 이들이 천거된 사항을 보면, 재능·학식·학행·명민· 효행·지조·성품 등으로 나타났다. 현량과에서는 재능과 학식, 타고난 성품과 가치관, 선비로서의 지조 등을 기준으로 인재를 발탁하였다. 급제자 28명의 급제 당시의 신분은 현직 관리 10명, 전직 관리 2명, 생원 5명, 진사 7명, 유학 4명이었다.

급제자들은 조광조의 추종자들로서, 학맥 또는 인맥으로 연결되어 강한 연대 의식을 지닌 신진사림파였다.

기묘사화로 조광조가 실각하자 1519년 12월에 대간이 나서서 현량과가 공평하게 운영되지 않았다 하여 파방을 거론하였다(『중종실록』 14년 12월 11일). 이어지는 현량과 혁파 주장에 1519년 12월 16일에 중종은 문과는 파방하고 무과는 파방하지 않도록 하였다(『중종실록』 14년 12월 16일). 현량과 설치와 파방에는 정치적인 배경이 있었기에 중종대에 단 1번 시행으로 그쳤다.

참고문헌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 김종관, 「중종대의 현량과에 관한 연구」, 충남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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