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재우(郭再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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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52년(명종7)~1617년(광해군9) = 66세]. 조선 중기 선조(宣祖)~광해군(光海君) 때 활동한 문신(文臣).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홍의장군(紅衣將軍)’으로 불린 경상도 의병장(義兵長). 자는 계수(季綬), 계유(季綏)이고, 호는 망우당(忘憂堂)이다. 본관은 현풍(玄風)인데, 황해도관찰사곽월(郭越)의 3남이고, 남명(南冥)조식(曺植)의 외손서(外孫婿)로서, 조식의 제자 김우옹(金宇顒: 곽재우의 동서)·정인홍(鄭仁弘) 등과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

선조 중기 은둔 생활

1585년(선조18) 나이 34세에 별시(別試)정시(庭試) 문과에 갑과(甲科) 제 2등으로 뽑혔으나, 글귀가 선조의 뜻에 거슬렸다고 하여 급제자를 전부 파방(罷榜)하여 버렸는데, 이때부터 선조와 악연이 시작되었다. 다음해 아버지 곽월이 돌아가자, 부친상을 마친 뒤에는 과거를 보려는 생각을 버리고 고향 현풍에서 은둔하였다. 『실록』의 사평(史評)에서는 “곽재우(郭再祐)는 조식의 사위인데, 성리학(性理學)을 제대로 알지 못하여,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였다.”라고 하였으나, 실은 그는 남명조식처럼 과거를 위한 학문을 버리고 별서(別墅: 별장)로 가서 다양한 학문을 깊이 연구하였다. 한편, 힘써 농토를 개척하여 농사를 지어서 재산을 늘리니, 재산이 몇 만 금이나 되었다. 1592년 4월 왜변(倭變)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즉시 별장을 불태우고 집으로 돌아와 재산을 모두 군자금으로 활용하여, 재능이 있는 젊은 무사(武士)들을 휘하에 결집시키고, 가장 먼저 의병(義兵)을 모집하였다. 곽재우는 유생이었지만, 평소 아버지로부터 활쏘기와 말 타기 등의 무술을 익혔으므로, 곽재우가 거느린 의병은 다른 의병과 달리 훨씬 전투력이 강하여, 왜적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임진왜란 때 의병 활동

1952년(선조25) 6월 영남(嶺南) 지방의 곽재우와 정인홍·김면(金沔) 등이 전국에서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켰다. 왜적이 바다를 건넜다는 소식을 들은 곽재우는 재산을 모두 털어 무술에 뛰어난 무사(武士)들을 휘하에 결집하고, 의령(宜寧)에서 의병을 모집하니, 수하에 장사(壯士)들과 의병들이 2천여 명이나 모였다. 7월 곽재우가 현풍·창녕(昌寧)·영산(靈山) 사이에서 왜적을 잇달아 격파하니, 왜적이 주둔지에서 철수하여 도망쳤으므로, 낙동강 우변 지역을 무사히 지킬 수 있었다. 처음에 의병을 일으킬 때에 곽재우는 붉은색의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서 왜적의 군사들을 유인하여, 산 위에서 갑자기 나타났다가 산 아래에서 사라지는 등 왜적들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소문을 퍼뜨리기를, “하늘에서 붉은 옷을 입은 장군을 내려 주셨다.”고 하였다. 당황한 왜적들은 그를 ‘홍의장군(紅衣將軍)’, 또는 ‘비장군(飛將軍)’이라 부르고 무서워하여 감히 가까이 공격해 오지 못하였다. 또 싸울 때마다 곽재우는 스스로 사졸에 앞장서서 붉은 옷을 휘날리면서 싸웠기 때문에 모두 그에게 호응하여 힘을 다하여 싸워서 연전연승하였다.

초토사(招討使)김성일(金誠一)이 경상도(慶尙道) 의병과 관군이 협력하도록 조정하고, 곽재우의 전승 사실을 선조에게 빠짐없이 장계(狀啓)하였다. 이해 8월에 비변사(備邊司)에서 곽재우에게 5품직을 제수하도록 청하니, 선조가 형조정랑에 임명하였다. 10월 초토사김성일이 의병장 곽재우에게 진주성(晉州城)을 구원하도록 요청하였는데, 당시 진주성에는 목사김시민(金時敏)이 7일 동안 왜적 하세가와 토고로(長谷川藤五郞)의 3만 대군과 처절하게 싸우고 있었다. 곽재우가 거느린 의병이 진주성에 도착하여, 관군과 힘을 합쳐서 적병을 크게 격파하였다. 이것이 제 1차 진주성(晉州城) 싸움인데, 임진왜란 3대첩(大捷) 중의 하나이다. 그 공으로 조정에서 곽재우에게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를 가자(加資)하고, 조방장(助防將)을 겸임하게 하였다. 1593년 성주목사(星州牧使)에 임명되어 악견산성(岳堅山城)을 수축하던 도중에, 1594년 진주목사(晉州牧使)로 전임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 현풍으로 돌아가 버렸다. 1597년(선조30) 명(明)나라와 일본 사이에서 화의가 진행되다가 결렬되자, 일본이 다시 침입할 것을 짐작한 곽재우는 다시 벼슬길에 나아가 경상좌도방어사(慶尙左道防禦使)가 되었다. 현풍의 석문산성(石門山城)을 수축하던 중에,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자, 그는 영산(靈山)의 화왕산성(火旺山城)으로 진을 옮겨서 왜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그러나 1598년(선조31) 일본의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죽자, 울산성(蔚山城)에 주둔하던 왜적들이 철수하여 일본으로 돌아갔다.

임진왜란 이후의 활동

전쟁이 끝난 뒤에 1599년(선조32)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경상좌병사(慶尙左兵使)를 거쳐, 찰리사(察理使)에 임명되어 남쪽 지방을 안찰(按察)하였고, 이어서 절도사(節度使)가 되었다. 그는 장계를 올려 도산성(島山城)을 수리하여 왜적의 침입에 대응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조정에서 이것을 들어주지 않자, 시국 문제를 가지고 상소하여 조정을 비방하고 곧바로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다. 사헌부(司憲府)에서 탄핵하여 전라도(全羅道) 영암(靈巖)에 부처(付處)되었다가, 1년 만에 풀려났다.

1603년(선조36) 공신도감(功臣都監)에서 임진왜란 때 공훈을 세운 곽재우 등 26인에 대해 논공행상을 하였다. 1604년(선조37) 비변사에서 곽재우를 찰리사라고 일컫고, 원수(元帥) 아문(衙門)에 예속시켜 그대로 본도(本道)에 머물러 있게 할 것을 건의하자, 선조가 허락하였다. 곽재우는 선산부사(善山府使)·안동부사(安東府使)·인동현감(仁同縣監)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또 다시 찰리사에서 중추부(中樞府)동지사(同知事)로 바꾸어 임명되고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으로 전임하였으나, 모두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광해군(光海君)이 즉위하여, 곽재우에게 의복과 말을 하사하고, 속히 서울로 올라오도록 명하였으나, 이에 응하지 않았다. 그 뒤 수군통제사(水軍統制使)·경상우수사(慶尙右水使)·함경도관찰사(咸鏡道觀察使)·전라도절도사(全羅道節度使) 등에 잇달아 임명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1612년(광해군4) 정인홍이 곽재우의 중용(重用)을 강력히 건의하였으나, 1613년(광해군5) 광해군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살해하려고 하자, 그는 이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1617년(광해군9) 4월 10일 갑자기 비바람이 불고 번개가 그의 방을 내려쳤는데, 그가 방안에서 죽으니, 나이가 66세였다.

성품과 일화

곽재우는 평생에 신의가 아니면 실천하지 않았으며, 의리가 아니면 행동하지 않았다. 큰 전란을 당하자 솔선하여 의병을 일으키고 적을 토벌할 것을 마음 속 깊이 맹세하였으므로, 그의 충의가 사방에 널리 알려졌다. 전란이 평정되자 공명을 자처하지 않고 세상을 버리고 고향 현풍으로 물러가서 살았으므로, 이름난 명성에도 불구하고 당쟁의 화를 입지 않았다.

전라도 영암(靈巖)에 부처(付處)되었다가, 풀려난 다음에 고향 현풍의 비슬산(琵瑟山)에 들어가서 곡기(穀氣)를 끊고 솔잎만을 먹고 살면서 토납(吐納)· 도인(導引)의 신선술(神仙術)을 연마하였다. 또 영산(靈山)의 창암진(滄巖津)에 ‘망우정(忘憂亭)’을 짓고 세상의 물욕(物慾)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므로 사헌부에서 그를 도가(道家)의 아류(亞流)라고 탄핵하였다.

묘소와 제향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묘소는 경상도 현풍현(玄風縣) 남쪽 구지산(仇知山) 곽씨(郭氏) 족장(族葬) 산록에 있는데, 허목(許穆)이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있다. 경상도 현풍 예연서원(禮淵書院)에 제향되었다. 그가 살던 곳은 현풍의 취산(鷲山) 창암(倉碞)인데, 그 곳에 망우정(忘憂亭)이 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숙종실록(肅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보감(國朝寶鑑)』
  • 『난중잡록(亂中雜錄)』
  • 『기옹만필(畸翁漫筆)』
  • 『기재사초(寄齋史草)』
  • 『금계일기(錦溪日記)』
  • 『난중잡록(亂中雜錄)』
  • 『계곡집(谿谷集)』
  • 『서애집(西厓集)』
  • 『순암집(順菴集)』
  • 『여헌집(旅軒集)』